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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한복음 6:60-63
제목: 기독교는 영생입니다
제가 오늘은 설교를 굉장히 쉽게 하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신자들이 많이 올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인데,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한 1인1명 전도와 총동원 주일이라 추수감사주일에 대한 설교보다 새신자를 위해서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주일학생들에게 설교를 준비한다는 마음으로 섰습니다.
성경에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과 병든 자를 치유하는 일들이 많이 나타나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게 됩니다. 이 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날이 저물어 이들을 먹여야하는데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양식도 없고, 어디 가서 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고작 그 많은 사람들 가운에 어린아이를 통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예수님이 축하하시고 나누어주니 5,000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사건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동화 같은 사건이지만 창세기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을 믿게 되면 이런 오병이어의 기적 정도는 쉽게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맞이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 쉽게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먹을 것이 해결되고, 병든 곳도 낫고, 보호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예수 믿으면 잘 살고, 행복하고, 병이 낫고, 명예를 얻고, 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이 부분에 대해서 믿음이 갑니까? 만일 새로 오신 분들이 이런 생각으로 오셨다면 생각을 좀 달리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잘 믿기로 소문난 어떤 집사님은 아직도 전세에 살고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 생활했는데 좋은 대학 못나왔습니다. 좋은 곳에 취직 못했습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하시렵니까? 혹시 누가 예수 믿으면 잘 산다, 만사형통한다, 이렇게 말을 하면 그 사람은 기독교의 목적을 정확하게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 믿으면 안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행복하고, 잘 살고, 이혼율도 적고, 아이들도 착하게 잘 큽니다. 비교하면 굉장히 차이가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갤럽조사에서 나타난 수치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예수 믿는 목적은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이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영적인 것에 목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의 세계에 관한 문제가 일차적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영적인 양식을 먹이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영적인 양식이란 말씀, 즉 성경말씀을 이야기합니다. 육체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 힘을 얻기 위해서 음식을 먹듯이 영적으로 영혼이 강건하기 위해서 말씀을 읽는다는 것이 상징적 의미로 영적양식을 먹는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것이 이런 육적인 양식을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땅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죽어야할 인생입니다. 시간이 문제지 우리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존재란 말입니다. 이런 쉬 사라질 곳을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죽어도 사는 영원한 나라를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 영원한 나라를 위해서 이 땅에서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데 그 삶이 영적으로 충만해지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영적으로 무장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질적으로 기독교가 제시하는 교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떠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 분만 따라다니면 먹거리는 확실하게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위해서 쫓아가는 모습을 본문에서는 그리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육신의 편리와 잘살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하는 것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고 나자 얼마만큼 예수님에 대해서 기대를 걸고 좇았느냐하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서둘러 배를 태워 바다 건너가게 하시고 자신을 홀로 산에 올라갑니다. 피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의도가 얼마나 차이가 나느냐하는 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주무시러 갔나하고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보니까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해변에 있던 배조차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뒤를 좇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만났습니다. 만나서 “예수님 언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하고 무리들이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꾸짖으시며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6장을 통해서 길게 설명합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내가 너희를 살리기 위하여 피와 살을 주려고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양식이다” 성경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이요 여기서 생명의 떡입니다. 이 생명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지시고 우리가 받아야할 죄의 심판을 다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시며 살이 찢기시는 고통을 받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삶, 영생을 주시려 오셨다는 뜻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지금 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너희는 아직 모르는 구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지 않으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씀드리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너희들이 지금 여기 온 것은 떡 때문에 왔지 생명과 진리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죽으러 왔고 너희들은 알지 못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자기 생각과 전혀 다른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 도망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여기가 문제입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예수님을 많이 따라다녔던 사람들이 예수로부터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단 말입니까? 우리가 여기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기독교와 타 종교와의 큰 차이가 무엇이냐 하면 타 종교는 인간이 자기로부터 어떤 도를 깨우치고 어떤 진리를 얻고 스스로 득도 하는 것으로 종교를 정의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는 인간 스스로 무엇을 깨닫는다던지 구원을 발견한다던지 그를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이 스스로 죄를 씻을 수 있습니까? 스스로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인간이 스스로 지은 죄를 어떻게 씻습니까?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죄 없으신 분이 오셔야합니다. 죄 없으신 분이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셔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는 희망이 없다, 내가 대신 죽어 주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니 사람들은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어찌 저가 하늘에서 내러왔다고 하느냐? 어찌하여 피와 살을 주어 먹게 하겠느냐?’ 그래서 다 도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를 구원하는 데는 그 방법 밖에는 없었으므로 예수님께서 친히 죽으려 오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도’를 깨닫는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기독교의 목표가 고작 오병이어의 기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냐 말입니다. 물론 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노력하고 절약하고 성실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가 고작 세상 것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에 불과하다면 다른 무속종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구원을 주는 종교입니다. 여기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승리가 있으며 영광이 있으며 감격이 있으며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시고 돌아가셨으며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승리입니다. 축복입니다. 영광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감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럴 수는 있습니다. 불치병에 걸린 자가 병원, 한의원 다 다녀보고 민간요법 할 것 다 하고 그런데도 낫지 않습니다. 우연히 친구 집사의 이야기를 듣고 ‘어차피 죽을 목숨 교회나 다녀보자’해서 교회에 갔다가 목사님께 안수를 받고 불치병이 나았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고 믿음에 굳게 설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한 영혼을 주께로 부르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6장은 우선순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꺼내 놓으신 것은 이 떡을 준 것은 너희에게 꼭 필요한 생명의 떡을 줄자가 나밖에 없다는 것을 구별하라는 뜻으로 준 것입니다. 떡 먹는 재미로 나를 좇으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늘 보세요. 추수감사절입니다. 이 앞에도 과일과 채소가 놓여 있습니다마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이것을 수확하는데 인간의 능력은 얼마나 동원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저 뿌리고 심고 가꾸고 농약을 뿌리고 그런 정성을 쏟는 것 이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씨를 인간이 만들지 못합니다. 물의 공급의 원천을 인간이 만들지 못합니다. 온도와 햇볕을 인간이 조절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감사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우리가 뿌렸지만 거두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동일하게 영적인 세계를 위해서 하나님이 꼭 필요한 말씀의 양식을 허락하셨고 우리가 그것을 먹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생명의 떡 때문입니다. 육신의 떡이 일차적이 아닙니다.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고 그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볼 수 있는 삶을 제시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물론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삶 속에서 다양한 축복의 삶이 일어납니다. 가정이 행복해 지고, 인간관계가 회복되고, 부부가 서로 존중하고, 자녀들이 인격적으로 성장하고, 남을 베려하며 사랑할 줄 알고,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출발하느냐하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말씀에서 출발합니다. 말씀대로 행하고 따르면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삶에서 자꾸 확인되어지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고, 나보다 남을 더 베려하고, 용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영의 양식을 먹지 못하고 그것을 행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구원을 우리의 능력이나 헌신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씻거나 우리 스스로 어떤 구원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 모든 죄를 사해 주셨기에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만 그러나 삶을 살아가는 문제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참고 인내하고 사랑하고 살아가야하는 문제란 말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먹으라는 것은 말씀으로 무장해라, 또는 성경말씀이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되어라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목적이 잘 사는 것, 건강해 지는 것, 출세하는 것, 명예를 얻는 것 이런 것이라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먹을 것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다 떠나가 버린 것처럼 그렇게 떠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말씀에 떡을 찾아온 사람과 제자들과의 차이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다 도망간 후에 묻습니다. 67-68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이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왔다가 도망간 자들은 떡을 찾아왔던 자들이고 남은 자들은 생명의 말씀 때문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결코 기적 때문에 남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오늘 처음 오신 분은 처음부터 정확하게 알고 믿어야 된다는 의미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 된다고, 저는 얼굴 중에 입이 제일 예쁘게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입이 삐뚤어져도 바른 말 해야 되는데 입이 이렇게 잘 생긴 저는 오죽 바른 말해야 되겠습니까? 저가 여러분들에게 예수 믿으면 잘 삽니다. 문제가 순식간에 해결됩니다, 병도 척척 낳고, 공부 못하는 아이들 교회 오면 다 1등하고, 남편 진급하는데 문제없고,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하면 다음주에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 저도 압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을 오도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설사 이번 주만 나오고 교회 안온다고 하더라도 바른 말할 수밖에 없고 진리를 진리대로 선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는 성도들이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무슨 먹고 마시는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 아니고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이 땅에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며, 용서하며, 축복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신앙을 유지해 나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오늘날도 이스라엘이 예수님에 대한 불평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메시야로 오셨으면 만 왕의 왕으로 오셨으면 우리나라가 로마의 속국에서 이렇게 허덕이고 생활하는 것을 그냥 보고 계시는 것입니까? 아니 하나님의 축복을 전하로 온 자가 이런 누더기 옷이나 입고 다니면서 거지와 창녀와 세리들과 먹고 마시고 그런 자들과 친구를 하며 다니는데 이런 당신이 무슨 메시야며 구원자입니까? 정말 당신이 메시야라면 로마속국에서 해방시켜주시고 먹고 입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고 멸망 받아야 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문제를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영원히 사는 문제를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왜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마구간에서 나게 하시고, 33년 동안 이 땅에 살게 하시며, 온갖 고초와 오해와 격멸 속에 마침내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다 쏟으시며 마지막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는 줄 아셔야합니다. 이제 구원의 문을 열어 놓았으니 누구든지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 일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성 해 놓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끝이라면 얼마나 억울한 세월입니까? 하루하루가 억울할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헛된 세월입니까? 어릴 때 저희 동네는 산으로 둘러싸였습니다. 저 산 만 넘어가면 바다가 있고 큰 빌딩도 있고 멋지게 살 곳이 있는 줄 알고 산 세월이 벌써 10년 강산을 다섯 번 넘기고 있습니다. 성경에 세월을 날아가는 새로 비유하고 있을 만큼 금방 지나갑니다. 이 세월에서 무슨 야망이 있으면 그것이 몇 년 세월이겠습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비관하거나 낭만적으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만큼 삶이 성실과 열심과 가치 있는 삶을 요구하는 종교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 땅에 목표를 두고 무슨 영원함이 있고 귀한 것이 있고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아니란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여종으로 있던 여인이 귀신에 들려서 점을 치는데 용하게 잘 칩니다. 그 점치는 여인이 자꾸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기에 그 여인 안에 있는 귀신을 좇아내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점치는 종의 주인이 수입이 없어지자 바울과 실라는 이 성을 요란케 하는 이상한 종교를 전파한다고 고소를 해서 옥에 갇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옥에 갇힐 때 엄청나게 많이 매를 맞고 갇혔습니다. 초죽음이 되어 갇혀 있으면서 바울과 실라가 찬송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다 들을 정도로 크게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고 그 매었던 족쇄가 다 풀렸습니다. 간수가 자다가 뛰어나와 보니까 옥문이 열려있고 죄수들이 다 도망간 것으로 생각하고 자결을 하려고합니다. 그 당시에 죄수를 놓치면 그 죄수의 죄 값을 간수가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죽는 것이 명예롭게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자살을 하려고 하는데 ‘네 몸을 해하지 말라’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죄수들이 도망을 가지 않은 것입니다. 이 때 이 간수가 굉장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기 보다 더 크게 절망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죄수들이 도망갈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도 도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간수가 자결하려고 한 것은 그가 몸담고 살고 있는 그 현실과 상황, 조건 속에서 탈출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결하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해결책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 보다 더 크게 절망하고 좌절하고 족쇄가 채워져 있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이런 자들이 도망갈 수 있는 상황에서도 도망을 가지 않으니까 여기서 구원의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간수가 바울과 실라에게 ‘형제들아 네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니까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서는 자살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당신들은 더 큰 절망 속에서 도망갈 기회가 있는데도 도망가지 않은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세계 이상으로 더 큰 세계 신비한 세계가 있습니까? 하는 것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느냐는 질문이고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은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한 마디로 ‘주 예수를 믿으시오’하는 말입니다.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빠져나올 길이 있다’는 것이 ‘주예수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주 예수를 믿어보십시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경험, 환경이 전부가 아니고 그 이상의 귀하고 복된 은혜와 감격과 축복을 맛보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생각대로 행동하지도 못하고 계획한 것을 다 지키지도 못하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생각과 마음으로, 행동으로 수 없는 죄를 짓는 죄인들임을 아셔야합니다.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평강이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의 치유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서 우리가 맛보지 못한 진리의 길, 영생의 길, 거룩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이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승리가 있습니다. 삶을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넉넉함이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아는 것 보다 더 큰 삶을 알고 살아가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정경숙집사님이 소속된 아셀 크로마하프팀의 연주회가 있어서 갔었습니다. 대부분 나이가 많은 여자 분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크로마하프를 연주하며 찬양을 하는데 참 보기가 좋았습니다. 마지막 곡을 찬양과 연주로 마무리하고 나니까 ‘앵콜’ 그러면서 박수를 치고 합성을 지르는 것을 보면서 우리 한국민들은 대단한 민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앵콜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인정이 대단한 민족임을 새삼 느꼈습니다. 그런데 앵콜을 하고 나니까 또 ‘앵콜’ 그러는 것입니다. 이젠 거의 대책이 없는 앵콜 같아서 웃음만 나더군요.
오늘 인정 때문에 친구가 하도 애원을 해서 주위 분이 하도 한번 가보자고 해서 인정상 오신 분들, 한 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 보십시오. 우리가 모르는 세계 우리가 체험하지 못했고 느끼지 못한 세계를 느끼며 체험하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고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죄에서 승리할 수 있고 죄씻음으로 정결함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