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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 (El Salvador) 6월23일 토요일에 엘살바도르를 갔습니다. 엘살바도르 한인교회가 목회자(목사)가 안계셔서 주일 예배를 못드린다고 해서 선교사님들과 같이 가서 예배 인도를 하고 왔습니다. |
과테말라시티에서 약 3시간 산악길로 가는데 곳곳이 비로 말미암아 도로가 침체되어서 약 1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이곳은 Frontera Las Chinamas(라스 치나마스 국경)입니다.
국경에서 입국신고를 하는데 국경을 넘는 버스가 와서 입국신고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에 도착하니 교인이 한국식당으로 가서 묵은지로 끓인 김치찌게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주일(일요일)에 교회를 가서 예배와 치료사역을 하였습니다. 교회건물이 아담하고 깨끗하게 잘 지었습니다.
교인과 함께 초꼬추장을 만들어서 약 30분거리의 태평양 바닷가 La Libertad로 가서 Perla del Mar 식당으로 갔습니다.Perla(뻬를라)는 진주를 말하고 Mar(마르)는 바다 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바다의 진주"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피조개랑 굴로 유명해서 엘살바도르의 한인들과 인근나라의 한인들이 이곳에 와서 피조개랑 굴을 실컷 먹고 갑니다.
식당에서 보니 바다에서는 해수욕을 즐기고 있습니다. 날씨는 더운데 바닷가는 조금 시원합니다. 과테말라는 바닷가에 가면 더 덥습니다. 과테말라시티가 시원합니다. 왜냐하면 해발 1,500미터에 과테말라시가 있기때문입니다.
서핑을 즐기는 젊은이
청년들은 축구도 합니다. 중남미 어느곳이나 축구는 인기의 게임입니다.
굴입니다. 초꼬추장으로 먹으니...너무 맛있고...6접시를 시켜서 먹었습니다. 먹고나면 또 굴을 가지고 왔습니다.
피조개는 2접시를 먹는데 싱싱해서인지 쫀득쫀득한것이 맛있습니다.
먹는데 마리아치(길거리 음악사)가 와서 베사메 무쵸를 불릅니다. 동양인들은 베사메무쵸를 무조건 안다고 생각하는가 봅니다.
Besame mucho는 베사(키스) 메(나에게) 무쵸(많이)라는 뜻입니다. 나에게 많이 키스해줘...라는 멕시칸 노래입니다.
가족이 마리아치인가봅니다. 나이먹은 사람과 그아들뻘 되는 사람과 옆에는 손자뻘되는 아이가 같이 음악을 합니다.
뒤에 서서 꼬마가 음악을 만듭니다. ㅎㅎㅎ
이 레스토랑 주인 할머니랑 같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국경 을 해안가를 따라 가는데 View Point(전망대)가 있어 차에서 내려 보니 옆의 관광객들이 반가워 인사합니다.
내려보이는곳이 태평양입니다. 태평양만 건너면 조국인 한국이 나오는데....
전망대옆에 간의 매점입니다. 엘살바도르에 갔다오니 정원에는 꽃이 만발하게 피었습니다. |
전에 빠빠야를 먹고 씨앗을 정원에 버렸는데 그것이 싹이 나고 나무로 크면서
엘살바도르에서 오니 꽃이 피었습니다.
빠빠야는 암놈 숫놈이 있는데 숫놈은 빠빠야 열매를 못 맺는다고 합니다.
빠빠야 나무입니다. 그앞에는 대만 임업시험장에 가서 캐온 나무슬 심었는데 벌써 이렇게 컷네요.
이꽃도 예쁘게 피었습니다. ...색깔은 빨간색과 푸른색이 마치 한복의 칼라와 비슷합니다.
극락초도 꽃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요즘은 날마다 화초크는 재미로
늘 정원에서 커피를 마십니다.
이꽃은 Mala Madre(말라 마드레)라는 화초인데 "말라 마드레"는 "나쁜 엄마"라는 뜻입니다.
너무 번식이 잘되어서 새끼들을 멀리 보내는 엄마이기에 나쁜엄마라는 이름의 화초입니다.
이것은 안티과에서 구입한 난인데 요즘 꽃을 피려고 푸른잎이 나옵니다.
이것은 과테말라에서 약 4-5시간 거리의 끼체라는 산악지대에서 캐온 난입니다.
이 나무는 길거리에 버려진것을 줏어왔는데 밑이 없는데도 잎이 마구 자라서
잎을 짧게 단정하게 잘랐습니다.
여기가 내 시크릿가든(Secret Garden)입니다. 여기서 카페(Cafe:커피)를 즐기기도 하고
식사도 합니다. 뒷뜰 정원입니다.
내가 이곳에 처음 살때는 그냥 잡초만 있었는데 꽃과 화초와 돌맹이로 만든 ...
나만의 공간입니다.
이꽃은 앞 정원에 예쁘게 피어 ...났는데...너무 선명한 색깔이 뇌혹적입니다.
잎이 하얀색과 녹색으로 되어있는 화초는 누가 갖다주었는데..
너무나 번식이 잘되어서 요즘은 정기적으로 짤라서 버립니다.
다른 색의 꽃인데...청조한 색깔로 마음껏 멋을 냅니다.
벌새(꼴리부리)통에 날마다 벌새(humminb bird)가 날라옵니다.
뒷뜰의 시크릿가든...
넙적한 입은 토란 줄기와 잎입니다. 이것이 엄청나게 크게 자랍니다.
토란을 관상용으로 키웁니다. 토란잎이 넓적하여 멋있습니다.
시크릿 가든에 앞 지붕에 매단 화초들입니다.
시크릿 가든에 앞 지붕에 매단 화초들입니다.
오늘도 꽃중에 싸여서 까페(커피)를 즐깁니다......
우리 동문들도 이곳에 오면 내가 맛있게 커피를 타 줄텐데...ㅎㅎㅎ
(우리 동문중에 유일하게 우리집에 방문한 동문은 딱 한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서울에서 졸라 멀기에...)
엘 살바도르 (El Salvador) 가는길
8월12일에 엘살바도르 수도 산살바도르의 한인교회 설교요청이 있어서 갔습니다.
El Salvador는 영어로는 The Saviour(구세주)의 뜻이고 San Salvador는 영어로 St. Saviour(구세주)라는 뜻입니다
과테말라에서 국경을 넘어 엘살바도르 이민국입니다. 이번에는 고속버스를 타서인지 입국수속을 고속버스운전수가 여권을
다모아서 한꺼번에 수속을 합니다. 차에서 내려다 보니 국경경찰차가 보입니다. 이 차는 양국(Binational)의 경찰차입니다.
국경의 환전상들이 보입니다. 이곳 엘살바도르는 통화지폐가 미국의 달러를 씁니다.
산살바도르 수도가 보입니다. 고속버스 정류장이 유명한 호텔앞에 있습니다.
저녁은 쇼핑몰에 있는 중국식당에 가서 먹었습니다. 이곳도 Pizza Hut(피자 헛)도 있군요.
도로가 Una Via(한쪽 방향의 일반통행)길로...비교적 과테말라보다는 좋습니다.
도로를 보니 우편에는 공원이 있습니다.
공원입구에는 집 파는 광고가 있습니다.(Vendemos su casa)
길거리 옆에는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섰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비교적 과테말라보다 치안이 좋아서인지 창살이 없네요.
과테말라는 구멍가게도 창살을 하여 창살밖에서 원하는것을 달라고 하면 창살밖으로 물건을 주고 돈을 받는데...
비교적 이곳은 외국인들에게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엘살바도르의 총인구가 700만명이고
산살바도르 수도의 인구는 210만명이며 한인들은 약 200명산다고 합니다. 인구중 대다수가 메조티스 94%이고 원주민이 5%
유럽후손이 1%입니다.
길 양쪽의 나무들이 크게 옆으로 자라서 이층고속버스가 다니면 가지가 걸리기에 가지를 쳐내어서 고속버스다니기에 불편없게 만들었는데도 가끔 버스에 가지가 걸립니다.
엘살바도르의 역사는 엘살바도르 서부의 챨츄아빠(Chalchuapa) 근처에서 발견된 거대한 석조 두상인 올멕 두상은 대략 BC 2000년경부터 이 지역에 올멕의 영향이 미쳤다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또한 타수말(Tazumal)과 산안드레스(San Andres)에서 발견된 계단식 피라미드 유적을 통해 엘살바도르 서부에 천년 이상 마야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나라 동부에서 살던 부족들로는 쵸르티(Chorti),렌카(Lenca), 포코마메(Pok'omame)등이 있다.스페인인들이 16세기에 이곳에 도착했을 때 이곳은 멕시코 부족인 나후아어족 똘떽(Toltec)과 아스떽(Aztec)인들의 후손인 피필인들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피필은 마야 왕조가 무너지고 곧바로 11세기에 엘살바도르 중앙으로 이주해왔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들의 문화는 아스떽 문명과 흡사하였고 마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옥수수를 기반으로 한 농경 경제를 통해 여러 도시와 상형문자나 천문학, 수학 등을 포함한 복잡한 문명을 유지하였습니다.스페인은 1525년 이 지역에 도착한 페드로 데 알바라도(Pedro de Alvarado)를 통해 영유권을 주장했습니다. 스페인인들은 이 지역에 목화, 발삼, 인디고 농장을 발전시켰습니다.
별안간 비가 억수로 내립니다.
1700년대를 통해 농업이 성행하였으나 토지 대부분은 14개의 유럽 엘리트 가문에 의해 지배되었고 토착민과 아프리카로부터 수입된 노예를 부려 경작케하였습니다.국부인 호세 마티아스 델가도(Jose Matias Delgado)는 1811년 스페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되었습니다. 이듬해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입은 개혁을 촉진시켰고 엘살바도르는 결국 1821년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그러나 독립도 토지 소유의 구조를 바꾸지는 못했으며 이 문제는 아나스타시오 아끼노(Anastasio Aquino)가 이끈 1833년 실패한 인디언 반란의 주요 쟁점이었습니다. 1841년 중앙 아메리카 연방(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 사이에 형성된 연합)이 해체되면서 엘살바도르는 주권 독립 국가가되었습니다
19세기의 후반에 합성 염료가 인디고 시장을 위협하자 커피가 경제의 핵심이 되었습니다.20세기까지 엘살바도르 수입의 95%는 커피에서 나왔지만 겨우 2%의 인구만이 이런 부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간간이 엘살바도르의 사회, 경제적 불공평을 바로 잡으려는 대다수 빈민층의 노력은 심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변화를 위한 최초의 대중적인 움직임은 1929년 주식시장의 급락과 뒤따른 커피 가격의 급락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1932년 1월 중미 사회당의 창설자인 아우구스틴 파라분도 마르티(Augustin Farabundo Marti)는 농민과 인디언의 봉기를 이끌었습니다. 군부는 계획적으로 인디언으로 보이는 사람이나 봉기를 지원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사살하였습니다. 전부 30,000명이 살해되었습니다. 마르티는 체포되어 총살되었고 그의 이름은 FMLN(Frente Marti Liberacion Nacional)에 남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과테말라 국경에 다왔습니다.
1960년대 엘살바도르의 경제실패와 심각한 인구문제는 수많은 국민이 국경을 넘어 이웃 온두라스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1969년 온두라스의 살바도르 이민자들에 대한 학대가 때마침 양국 간의 월드컵 축구 경기가 열리는 동안 문제가 되었습니다. 국가적인 경쟁심과 감정이 격앙되면서 웃기게도 엘살바도르가 온두라스 영토를 침입해 공항을 폭파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문제는 100시간도 안되어 끝났지만 양국 간의 관계는 수십 년동안 적대적인 상태로 남았습니다.1970년 동안 국민들은 부족한 토지와 가난, 실업, 인구 문제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정당들은 양극화되어 대체로 쿠데타와 부정 선거를 통해 정치판을 이끌었습니다. 1972년 군부는 당선된 대통령을 체포해 유배시키고 스스로 내세운 후보자를 취임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게릴라 활동이 증가해지자 정부는 수많은 국민들을 죽이고 고문하며 유괴하는 짓을 자행한 '암살대'를 만들었습니다
국경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커피를 판다고 써있네요
1979년 군사 정권과 국민들은 대통령을 전복시키고 개혁을 약속했습니다. 이 개혁이 실행되지 않자 야당들은 민주개혁 연합(FDR)이라는 이름으로 뭉쳤고 이 가운데 FMLN은 가장 큰 정당이었습니다. 1979년 니카라과에서 일어난 성공적인 혁명은 살바도르인들로 하여금 무장 투쟁만이 개혁을 약속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신망이 두텁던 오스카 로메로(Oscar Romero) 대주교는 1980년 미사 집전 중에 암살되었고 그의 죽음은 무장 반란으로 이어졌습니다.FMLN 게릴라는 북부와 동부에서 지배권을 차지하였고 다리를 폭파시키고 전선을 파괴하고 경제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커피 농장을 불태웠습니다.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는 니카라과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자 몹시 안달이 난 터라 엘살바도르 정부에 엄청난 돈을 지원하였고 군부는 마을을 전멸시켜 보복하였으며 이로 인해 300,000명에 이르는 국민들이 탈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1990년 4월 UN의 중재 하에 정부와 FMLN 간의 협상이 시작되었고 1992년 1월 16일 협상이 체결되어 정전이 발효되었습니다.
과테말라로 가는 길이 보입니다. 과테말라 입국을 환영한다는 표시판이 있습니다.
FMLN은 야당이 되었고 정부는 암살대의 해체와 국가 경찰로 이를 대신하는 등 여러 가지 개혁을 약속하였습니다. 토지는 국민에 분배되고 인권 침해도 조사되도록 계획되었습니다. 12년 동안의 전쟁으로 75000명으로 추산되는 국민이 죽었으며 군부에 의해 자행되는 폭압을 알면서도 미국 정부는 60억불을 엘살바도르 정부의 전쟁 지원에 쏟아 부었습니다. 1994년 3월 부정 선거의 주장 가운데서 ARENA의 칼데론 솔(Calderon Sol)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비록 몇몇 개혁들이 평화로운 가운데 실시되었지만(주로 토지 이전 계획) 많은 살바도르 국민은 현재의 상태가 내전 이전보다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업, 가난, 불만스런 전직 전투원들, 총기 확산 등은 살인율을 높였고 살바도르인의 대략 20%가 해외에서 사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997년 3월 FMLN은 14개 주 가운데 여섯 도시의 선거에서 승리했으며 현재 ARENA 보다 더 많은 인구를 통치하고 있습니다.
국경의 경찰들이 한가롭고 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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