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즐기지는 않지만 좋아한다. 내 손을 직접 거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막연한 불신이나 불안을 조용히 안고 사는 입장에서 인스턴트 라면이 반가운 음식은 아니다. 다만 간편하고, 뒤끝 텁텁하고 가벼운 감칠맛에 대한 기대감때문에 종종 찾게되는 음식이다. 장을 보러 갈 때엔 난 구입하기로 계획한 물품들 말고 손을 대지 않는 편이지만, 라면앞에서는 종종 예외가 되곤 한다. 매대에 쌓인 5개들이 라면팩들이 종류별로 쌓여있는 모습을 보면, 가끔씩 마트를 찾을때마다 종류가 달라지고 늘어나는 라면종류들을 보고 있자면, 저 라면의 맛은 어떨까, 저 라면은 지난번 먹어보니 맛있던데 하며, 저절로 뻗어가는 손을 주체하기가 힘들어진다. 사실 애써 손을 내리고 얼른 고개를 돌려 지나쳐도 라면을 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아내도 나와 마찬가지로 라면을 좋아하고, 나보다 인내심이 부족해서인지 굳이 내가 사지 않아도 집에는 두 세종류의 라면이 항상 비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면을 끓이는 일은 간편해서 부담스럽지 않다. 나는 봉지에 소개된 조리법을 주로 따른다. 여기에 간단하게는 다진마늘 반쪽 분량과 다시마를 넣고 끓인다. 대파나 청량고추를 넣던지, 계란 하나를 거의 다 끓었을 즈음에 넣어주기도 한다. 허기가 좀 깊거나 풍성하게 먹고 싶어지면 참치캔 하나를 열어 넣거나 얼린 만두나 쌀떡을 넣는다. 국물이 걸쭉해지고 텁텁해져서 별로이긴 하지만 면이 반쯤 익어갈 때, 찬밥 한 덩이를 넣고 밥알이 조금 불도록 끓여먹는 방법도 나에게는 별미이다.
인이 박히도록 먹어도 종종 생각나는 라면은 점심끼니에 잘 어울린다. 일하는 곳이 집과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던 때, 나는 종종 점심을 집에 와서 먹곤 했다. 메뉴는 당연 라면이었다. 약간은 출출해진 내 위장은 다용도실에서 집어든 라면 한 봉지에 강력한 연동운동을 시작한다. 냉장고를 뒤져서 찾아낸 부재료들에 라면 맛에 대한 기대감은 절정을 찌른다. 라면용 양은 냄비에 하나를 알뜰하게 끓이고 김치통 하나 꺼내 옆에 두고는 젓가락으로 라면을 먹기 시작한다. 첫 젓가락에 맛보는 라면은 언제나 기대했던 것보다 더욱 가벼워서, 라면을 먹는 일은 언제나 아쉬움으로 시작한다. 아쉬우면서도 라면을 끊을 수 없는 건 알 수 없는 일이다. 중독도 아닌 일이 언제나 똑같은 기대감과 아쉬움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나절 밥벌이의 중간에 라면이 선사하는 아쉬움을 느끼며 면발을 꾸역꾸역 집어먹는다는 것은, 가끔은 서글프고 쓸쓸한 기분을 만든다. 나의 노동이 이런 가벼움에 속아 아쉬움을 느껴도 좋을 만큼 가볍다 생각지는 않기 때문이다. 진수성찬까지는 아니더라도, 따끈한 흰쌀밥에 진한 국그릇 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속아서 아쉬운 그런 기분은 들지 않게 하는 밥상이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매일 반복되는 밥벌이의 노동을 그 지겨움과 고난함을, 나는 라면으로 위로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라면은, 내 일상과 노동의 틈새에서 언제나 존재감을 발휘했다. 아쉬운대로 쓸쓸한대로, 내 몸은 종종 밥벌이의 지겨움과 고난함 사이에서 속을 줄 알면서도 라면을 원했다. 라면은 가벼운대로, 인간이 만들어 낸 인간을 속이는 요물이었다.
라면은 인간의 노동과 무관하지 않다. 라면은 그냥 출출할 때도 먹지만, 노동의 틈새에서 가장 간편하면서도 생긴 모양대로 입맛과 배를 채워주기에 가장 가벼운 마음으로 찾는 음식이다. 그러기에 라면의 속임수에 고난하고 지겨운 사람은 쓸쓸해진다. 가장 저렴한 축에 속하는 분식이라는 점에서 가볍지만 서글프다. 오전의 바쁘고 거친 노동은 위로받지 못한다. 라면은 밥벌이의 지겨움과 고난함을 위로하지 못한다.
그가 밥벌이의 지겨움 다음으로 라면을 이야기한다. 노동의 가치가 재화나 부의 축적량으로만 재단되는 세상에서 밥벌이는 지겹다. 고난함은 그 무게를 점점 더한다. 자신의 노동행위 자체나 노동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가치에 만족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하는 지겨움은 왠지 불편하다. 글이 읽는 사람의 마음에 거리를 만든다. 누군가를 무엇을 관찰하고 느낀 것들을 써내려가는 글에서 주관적 역동은 느껴지지 않는다. 글쓴이의 움직임은 없다. 그저 한가롭고 멀다. 거기에 글이라는, 실제에 대해 문자의 나열을 통한 간접표현방식은 그의 글을 더욱 멀게 만든다. 그것이 그의 글에서 무언가 딱히 표현하기 힘든 불편함을 자아낸다. 라면을 말하고 끓이는 그의 모습 역시 거리가 느껴진다. 그것은 노동의 틈새에서 끼니를 채우기 위해 거칠게 집어드는 면발이 아닌, 한가함의 와중에 출출함을 달랠 간식같다. 게다가 그의 라면은 무겁고 질 좋은 도자기 그릇에 담긴다. 라면이 도자기 그릇에 담기는 순간 국물은 그릇과 온도를 공유한다. 급격히 식다가 어느순간 오랜 미지근함을 품은 라면은 닝닝하게 불어터져 툭툭 끊기는 면발을 남긴다. 맛 역시 닝닝해진다. 라면은 끓였던 양은냄비 그대로 내어 공기중에 온기를 날리며 차갑게 식은 것이 덜 불은 면발과 함께 짜면서도 맛의 잔상을 유지한다. 라면의 본질상 도자기 그릇보다는 양은냄비가 어울린다. 그의 글이 어딘가 멀고 거슬리는 이유는 질 좋은 도자기 그릇에 담긴 라면, 그런 것이다.
라면을 즐기지는 않지만 좋아한다. 내 손을 직접 거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막연한 불신이나 불안을 조용히 안고 사는 입장에서 인스턴트 라면이 반가운 음식은 아니다. 다만 간편하고, 뒤끝 텁텁하고 가벼운 감칠맛에 대한 기대감때문에 종종 찾게되는 음식이다. 장을 보러 갈 때엔 난 구입하기로 계획한 물품들 말고 손을 대지 않는 편이지만, 라면앞에서는 종종 예외가 되곤 한다. 매대에 쌓인 5개들이 라면팩들이 종류별로 쌓여있는 모습을 보면, 가끔씩 마트를 찾을때마다 종류가 달라지고 늘어나는 라면종류들을 보고 있자면, 저 라면의 맛은 어떨까, 저 라면은 지난번 먹어보니 맛있던데 하며, 저절로 뻗어가는 손을 주체하기가 힘들어진다. 사실 애써 손을 내리고 얼른 고개를 돌려 지나쳐도 라면을 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아내도 나와 마찬가지로 라면을 좋아하고, 나보다 인내심이 부족해서인지 굳이 내가 사지 않아도 집에는 두 세종류의 라면이 항상 비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면을 끓이는 일은 간편해서 부담스럽지 않다. 나는 봉지에 소개된 조리법을 주로 따른다. 여기에 간단하게는 다진마늘 반쪽 분량과 다시마를 넣고 끓인다. 대파나 청량고추를 넣던지, 계란 하나를 거의 다 끓었을 즈음에 넣어주기도 한다. 허기가 좀 깊거나 풍성하게 먹고 싶어지면 참치캔 하나를 열어 넣거나 얼린 만두나 쌀떡을 넣는다. 국물이 걸쭉해지고 텁텁해져서 별로이긴 하지만 면이 반쯤 익어갈 때, 찬밥 한 덩이를 넣고 밥알이 조금 불도록 끓여먹는 방법도 나에게는 별미이다.
인이 박히도록 먹어도 종종 생각나는 라면은 점심끼니에 잘 어울린다. 일하는 곳이 집과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던 때, 나는 종종 점심을 집에 와서 먹곤 했다. 메뉴는 당연 라면이었다. 약간은 출출해진 내 위장은 다용도실에서 집어든 라면 한 봉지에 강력한 연동운동을 시작한다. 냉장고를 뒤져서 찾아낸 부재료들에 라면 맛에 대한 기대감은 절정을 찌른다. 라면용 양은 냄비에 하나를 알뜰하게 끓이고 김치통 하나 꺼내 옆에 두고는 젓가락으로 라면을 먹기 시작한다. 첫 젓가락에 맛보는 라면은 언제나 기대했던 것보다 더욱 가벼워서, 라면을 먹는 일은 언제나 아쉬움으로 시작한다. 아쉬우면서도 라면을 끊을 수 없는 건 알 수 없는 일이다. 중독도 아닌 일이 언제나 똑같은 기대감과 아쉬움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나절 밥벌이의 중간에 라면이 선사하는 아쉬움을 느끼며 면발을 꾸역꾸역 집어먹는다는 것은, 가끔은 서글프고 쓸쓸한 기분을 만든다. 나의 노동이 이런 가벼움에 속아 아쉬움을 느껴도 좋을 만큼 가볍다 생각지는 않기 때문이다. 진수성찬까지는 아니더라도, 따끈한 흰쌀밥에 진한 국그릇 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속아서 아쉬운 그런 기분은 들지 않게 하는 밥상이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매일 반복되는 밥벌이의 노동을 그 지겨움과 고난함을, 나는 라면으로 위로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라면은, 내 일상과 노동의 틈새에서 언제나 존재감을 발휘했다. 아쉬운대로 쓸쓸한대로, 내 몸은 종종 밥벌이의 지겨움과 고난함 사이에서 속을 줄 알면서도 라면을 원했다. 라면은 가벼운대로, 인간이 만들어 낸 인간을 속이는 요물이었다.
라면은 인간의 노동과 무관하지 않다. 라면은 그냥 출출할 때도 먹지만, 노동의 틈새에서 가장 간편하면서도 생긴 모양대로 입맛과 배를 채워주기에 가장 가벼운 마음으로 찾는 음식이다. 그러기에 라면의 속임수에 고난하고 지겨운 사람은 쓸쓸해진다. 가장 저렴한 축에 속하는 분식이라는 점에서 가볍지만 서글프다. 오전의 바쁘고 거친 노동은 위로받지 못한다. 라면은 밥벌이의 지겨움과 고난함을 위로하지 못한다.
그가 밥벌이의 지겨움 다음으로 라면을 이야기한다. 노동의 가치가 재화나 부의 축적량으로만 재단되는 세상에서 밥벌이는 지겹다. 고난함은 그 무게를 점점 더한다. 자신의 노동행위 자체나 노동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가치에 만족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하는 지겨움은 왠지 불편하다. 글이 읽는 사람의 마음에 거리를 만든다. 누군가를 무엇을 관찰하고 느낀 것들을 써내려가는 글에서 주관적 역동은 느껴지지 않는다. 글쓴이의 움직임은 없다. 그저 한가롭고 멀다. 거기에 글이라는, 실제에 대해 문자의 나열을 통한 간접표현방식은 그의 글을 더욱 멀게 만든다. 그것이 그의 글에서 무언가 딱히 표현하기 힘든 불편함을 자아낸다. 라면을 말하고 끓이는 그의 모습 역시 거리가 느껴진다. 그것은 노동의 틈새에서 끼니를 채우기 위해 거칠게 집어드는 면발이 아닌, 한가함의 와중에 출출함을 달랠 간식같다. 게다가 그의 라면은 무겁고 질 좋은 도자기 그릇에 담긴다. 라면이 도자기 그릇에 담기는 순간 국물은 그릇과 온도를 공유한다. 급격히 식다가 어느순간 오랜 미지근함을 품은 라면은 닝닝하게 불어터져 툭툭 끊기는 면발을 남긴다. 맛 역시 닝닝해진다. 라면은 끓였던 양은냄비 그대로 내어 공기중에 온기를 날리며 차갑게 식은 것이 덜 불은 면발과 함께 짜면서도 맛의 잔상을 유지한다. 라면의 본질상 도자기 그릇보다는 양은냄비가 어울린다. 그의 글이 어딘가 멀고 거슬리는 이유는 질 좋은 도자기 그릇에 담긴 라면,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