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음목(聽音木) 둥치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자당(慈堂) 기거지를 들른김에 죽은 팽나무 둥치를 살펴본다. 이것은 변씨부인과 함께한 나무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역사적 유물이 아닐까.그 생각을 해보는 것은 그 누구도 보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그런 역사를 잊어버리고 있어서다.
이곳 웅천 자당지에는 오래된 노거수가 여러 그루 있다. 수령이 거의 4백년이 다 된 것들이다. 하지만 충무공의 자당의 흔적을 전해 주기에는 역부족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한참 후에 심어진 것들로, 그 중에서는 오직 등걸로 남은 이 팽나무만이 자당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죽어서나마 그 시대를 증언해 주고 있다. 그런지라 나는 이곳을 들를라치면 꼭 그것을 둘러본다.
남은 건물도 오래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지금의 건물은 새로 지어 보존한 것이고 그 이전의 집도 당시의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충무공 자당께서 기거한 집은 지금의 장소와 동일하지만 훨씬 이전의 집이었다.
그집은 본래 부하장수 정철의 집. 장군께서 78세된 노모를 이곳에 모셨다. 지금은 이 집이 사촌동생 정대수군관의 후손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이곳에 모신것은 생활 편의와 안전을 함께 고려하여 정했다고 한다. 예전는 이 집에 당시 쓰던 유물이 몇 점 있었다. 그 중에는 특별히 변씨 부인이 직접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구멍이 뚫린 가마솥도 남아 있었다.그런데 그것은 없어지고 말았다.
변씨부인은 이집에서 5년 여를 거주했다. 장군이 정읍 현감으로 재직할 때부터 모시고 살다가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자 함께 내려왔다. 장군은 바쁜 공무중에도 자주 안부를 전하고 틈에 내어 직접 찾아와 문안인사를 드리기도 하였다.
난중일기를 보면 방문 횟수가 무려 120 여 차례나 나온다. 그런만큼 중요유적지가 아닐 수 없다. 근자에 여수시에서는 이 자당지를 말끔하게 정비해 놓았다. 이곳에 노거수 팽나무 세그루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나무들은 우람한 기풍과 함께 거목다운 풍모를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임란 당시의 역사와 내력은 증언하지 못한다. 오직 그루터기로 남은 뿌리 하나만이 청음목(廳音木)으로서 내력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건 1592년. 지금으로부터 430년 전이다. 다른 나무들은 그 연대에는 미치지 못하는데
오직 하나, 불행 중 다행으로 죽은 나무 등걸이 남아서 당대를 증언해 주고 있다. 둥치의 둘레는 무려 장정의 팔로 두 아름이 넘는다. 그로 미루어 얼마나 오래도록 한 자리를 지켰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나무는 제 수명을 다하고 죽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도중에 태풍에 넘어졌다면 뿌리가 뽑혔을 텐데 그렇지 않고 밑동을 잘라낸 흔적만 보이기 때문이다.그 밑동은 심하게 부식되어 있다.
나는 이것을 청음목(聽音木)이라고 여긴다. 임란당시까지는 거슬러 오르지는 못한다 해도 오래된 것인 만큼 들은바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둥치를 발견하고서 특별히 주목한 것은 어떤 느낌이 와 닿아서였다. 그것을 발견한 순간 ‘이 나무야 말로 당시 장군의 모친과 장군을 지켜보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펀득 스쳤던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발걸음을 멈추고서 둥치를 한참 살펴보았다. 넓은 면에는 셀 수 없는 나이테가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조밀한 부분도 있고 성긴 부분도 있었다. 빛깔도 조금씩 달랐다. 그러한 것은 아마도 해마다 다른 기후때문에 그리 새겨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라의 변고도 오롯이 새겨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임진왜란은 장군과 뗄래야 뗄 수가 없다. 총 26년간의 군 생활 중 세 번의 파직과 두번의 백의종군을 하면서도 오직 나라를 구하는 일념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장군은 복무하며 소인배들로 부터 모함도 많이 받았다. 1580년 7월, 발포만호로 있을 때는 전라좌수사가 관아에 있던 오동나무를 베어려하자 단호히 막아섰다. 이 일로 골탕을 먹어 곤혹을 치렀다. 원균의 중상모략과 서인 대신들의 핍박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서도 장군은 중심을 잡고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자 미구에 닥칠 전쟁을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마침내 장군은 왜적을 맞아 23전 23승이란 세계 전사에서 찾아불 수 없는 빛나는 승첩을 거두었다. 이는 우연히 거둔 전승이 절대 아니고 치밀하게 준비한 결과였다. 아마도 나무 등걸의 나이테도 그 역사를 붐명이 기록해 놓았을 터이다.
노모는 아들이 문안인사를 오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라 구하는 일이 급하니 어서 나아가 싸워라"
얼마나 담대한 말씀인가. 그래서 장군이 모친이 있는 이곳을 찾은 것은 노모의 안부를 살피는 목적도 있지만 모친의 응원을 받으려는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나는 장군을 생각하면 우선 우국충정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장군이 남긴 그런 충정이 어린 시문중에 다음의 시를 좋아한다.
水國秋光暮 한바다에 가을빛 저 물었는데
警寒雁陣高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진중 높이 떴구나
憂心輾轉夜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이루는 밤
殘月照弓刀 (새벽달이 들어와 활과 칼을 비추네
서정성이 드러나면서도 오롯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깃든 시다. 장군은 모함을 받고 심한 고신을 받으면서도 살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죽으면 죽는 것이라고 의연한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노모께서 아들이 한양으로 압송되어 갔다는 소식을 돋고 고향으로 돌아오다 죽음을 맞자 애통해하는 마음은 비록 글을 대하면서도 비통함을 금할 수가 없다. 부친이 돌아가서는 천리길을 달려갔는데, 본가에서 시신만 맞이했을 뿐 상주로서 장례도 치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한 것들을 고스란히 느껴보고 싶으면 나는 이 나무 둥치를 찾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진지하게 다가서서 귀를 기울이면 당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장군이 외친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한창이니 나 죽었다는 말을 알리지 말라." 하는 말도.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2015)
첫댓글 충무공이순신장군의 애국심과 효심을 드러내는 여수 송현마을의 천년고사목 팽나무 그루터기는
충분한 역사적 사적지로서 선양해야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국가가 남북 그리고 좌우익 분열된 작금, 훌륭한 조상들의 발자취는 보존하고 선양해야 되리라 생각이 듭니다.
청석님께서 좋은 유적지를 발굴하셨군요! 조속한 시간에 저도 답사를 해 봐야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우연히 충무공 자당 기거지 송현마을을 들렀다다가 수백년도 넘어보이는 고사목 그루터기를 보게되었습니다. 그걸 보니 그 유적지가 새롭고 새삼 뿌리에 대하여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그것을 방치하지 말고 썩지 않도록 보존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늘 고목의 나이를 누가 어떻게 정확하게 측정했다는 것인지에 관해 회의를 품어왔습니다.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면 비교적 정확하겠지만 수백년 노거수의 춘추는 아무래도 추정에 의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세상에는 9500년 된 나무도 있다하고 우리나라에는 1400년 된 주목이 있다고 합니다. 나무만큼 장수하는 생명체는 없으니 명실공히 역사의 산증인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한번 그 등걸을 보고 싶습니다.
그 고목동걸은 새로 신축한 정대수가의 뒷편, 아담한 공원 아랫둔덕에 숨은듯 자리잡고 있습니다. 한번 둘러보면 좋을 것입니다.
수필과비평
전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해전영웅인 충무공 이순신.. 그분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안타까운 건 잘 사용도 안하는 백원짜리 동전에 그것도 초기 용맹스런 모습과는 달리 초라한 모습으로 묘사되어있는 걸 보고 몹시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세종대왕과 더불어 자랑스런 위인을 그정도로밖에 기리지 못하는 건 분명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나중에 글로 써볼까 합니다.
여수에는 충무공과 ㅗ간련된 유적 유물이 많습니다. 모친 자당지도 그중 하나지요. 당시의 흔적은 거의 없고 오래전에 죽어서 그루터기로 남은 뿌리가 있는데, 이것이나마 잘 보존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