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대정 삼의사비 나무
탐라국이던 제주도가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등 3읍체계가 된 것은 조선 태종 16년인 1416년이다. 대정현은 지금의 서귀포시 서쪽 지역으로 대정현성은 대정현 설치 2년 뒤인 1418년에 현감 유신이 1개월 만에 완성했다. 관아와 창고, 봉수대가 있었던 이 대정현성은 왜구의 잦은 침입에 대비한 방어성이자 평저성이다. 이제 건물은 무너지고 성벽은 일부 복원되고 있는데, 이 성벽 앞에 기념비 한기가 우뚝 서 있다.
왜구와의 전투 기록비가 아니다. 제주의 굴곡진 역사를 안고 있는 비극의 신축민란비이다. 비의 앞면에는 ‘제주대정삼의사비’, 왼쪽 면에는 ‘서기 1997년 4월 20일 대정고을 연합청년회 건립’, 뒷면에는 신축민란의 다른 이름인 ‘이재수 난’의 원인과 경과, 결과, 처음 비석을 세우게 된 경위와 다시 고쳐 세우게 된 경위가 새겨져 있다.
이재수의 난은 1901년에 제주도민들과 천주교도들 사이에 일어난 충돌 사건이다. 정부에서 파견된 제주도 세금 징수관 ‘강봉헌’이 프랑스 선교사, 천주교도들과 결탁하여 대규모 잡세를 부과, 강제 징수에 나섰다. 덩달아 천주교도들이 마을 수호신인 성황당 등을 파괴하며 종교인이라 할 수 없는 파렴치한 행패를 부렸다. 이에 대정고을 주민들의 평화적 시위가 천주교도들과 충돌로 이어져 총기를 사용하면서 제주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5월 16일, 이재수의 지휘 아래 수천 명의 도민이 제주성을 포위하고 공격, 5월 28일 제주성 함락, 수백 명의 천주교도가 죽임을 당했다. 조선 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봉기군을 진압한 뒤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등 주동자를 교수형에 처했다.
그리고 60년이 흐른 1961년 신축년에 주민들이 대정읍 보성리 홍살문 거리에 시멘트로 만든 삼의사 비를 세웠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에 철거되어 농협 뒤쪽 드랫물이라는 구석진 곳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1997년 대정읍 청년회는 옛 비를 땅에 묻고 새 비를 세웠다.
그때이다. 제막식을 앞두고 천주교도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여기 세우는 이 비는 무릇 종교가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석이 될 것이다.’와 ‘대정은 본시 의기남아의 고장으로 조선 후기 이곳은 민중봉기의 진원지가 되어왔는데 1801년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그의 아내 정난주가 유배되어온 후 딱 100년 만에 일어난 이재수난은 후세에 암시하는 바가 자못 크다.’라는 비문 때문이었다.
황사영 백서사건은 천주교 신자 황사영이 천주교를 조선에 강제키 위해, 기독교 국가의 군대를 끌어들여 조선을 멸망시키려 한 역적모의 사건이다. 또 정난주는 정약용의 조카딸이다.
그렇게 4개월여 낮에 천주교도들이 비문을 덮는 종이를 붙이면 밤에 마을 사람들이 찢어버리는 일이 이어지다가 천주교 측이 물러섰고 1997년 8월 비문 수정 없이 제막식을 가졌다.
상황이 이러하니 천주교 측에서는 96년 전 옛일까지 들먹이는 것에 감정이 상할 수밖에 없었고, 정권과 결탁한 종교의 피해 당사자인 주민들도 물러설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비가 세워지도록 양보하고 이해한 천주교는 민초들의 신뢰와 신임을 받는 종교라는 증거임이 틀림없다. 아무튼, 비문이야 어떻든 이제 다시는 그와 같은 비극과 갈등이 없었으면 한다.
하지만 오늘에도 권력 남용과 정·종·경 유착으로 권세를 이어가는 위정자들에게 반가울 리 없는 이 대정삼의사비가 땡볕과 비바람에 비각도 없이 당당히 서 있다. 비록 벚나무 두 그루와 녹나무 한 그루가 호위병으로 서 있지만, 불의한 권력과 그에 빌붙어 부정한 권세를 누리는 자들과 당당히 맞서는 민초들이 그 곁에 함께 서 있기에 나무를 우러르니 힘이 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