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영국 비밀 정보국
영국 런던 한복판 시티 오브 런던의 영란은행 앞 쓰레드니들 스트리트.
평소와 다름없이 차량과 행인들이 뜸하게 지나다니고 있다.
영란은행 동쪽 100여 미터 지점에 있는 캐나다 TD은행 런던지점 빌딩 정문 앞에 정복을 입은 경찰관 두 명이 멀찍이 서서 출입하는 고객을 유심히 살펴보며 경계를 서고 있다.
새벽에 은행 지하 금고에 보관된 금괴가 털리고 하수도 폭발로 인해 소방차와 헬기까지 동원되어 아침까지 시끌벅적거렸는데, 오후인 지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간 모습이다.
비도 안 오는데 베이지색 양복에 검은색 버버리 트렌치코트를 입은 날씬한 여자 한 명이 은행 회전문을 통해 들어가고, 뒤이어 가방을 든 진회색 양복 차림의 건장한 사내가 그녀를 따라 함께 들어갔다.
“아, 예. 어서 오십시오. 연락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보안실장입니다.”
여자보다 먼저 안내 카운터로 다가간 가방 든 사내가 신분증을 제시하자 카운터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년의 보안실장이 그들을 안내해서 지하 금고로 내려갔다.
아무런 표지도 없는 방들이 즐비한 미로 같은 지하층 복도의 막다른 곳에 둔중해 보이는 커다란 원형의 철제문이 떡 버티고 있다.
전자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른 보안실장은 삐- 소리가 들리자, 들고 있던 중세 시대 감옥 열쇠처럼 크고 길쭉한 철제 열쇠를 열쇠 구멍에 쑤셔 넣고 돌렸다.
철거덕, 이중 잠금장치가 해제되자 보안실장이 철제 방화출입문을 열고 금고 안으로 들어서며 두 사람에게 들어와 살펴보라는 손짓을 했다.
금고의 좌우 벽면에 튼튼한 철제선반이 4층으로 설치되어 있고 그 위에 엄청난 양의 각종 금괴가 가지런히 쌓여서 번쩍거리고 있다.
“저곳으로 구멍을 뚫고 들어왔습니다.”
보안실장이 출입문 맞은편의 콘크리트 벽면을 가리키는데, 허리높이에 지름 1미터쯤의 터널 흔적이 보이고 그 속에는 무너져 내린 시멘트 덩어리들이 금고 내부까지 쏟아져 들어와 흩어져 있다.
“괴한들이 터널 굴착기로 벽면을 뚫고 들어와서 금괴를 들고 나간 다음에, 저쪽 빌딩 하수구에서 폭약을 터뜨린 것 같습니다.”
보안실장이 바닥에 테이프로 표시된 지점을 비켜서 터널 입구로 걸어가며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바닥에는 아직 다른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았는지 범인들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 흔적만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굴착기는 찾았습니까?”
예리한 눈초리로 사방을 훑어보던 양복 입은 사내가 먼저 질문했다.
“글쎄요. 경찰청 말로는 하수도를 아무리 뒤져도 굴착기로 보이는 물건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저쪽 하수도에는 지금도 경찰청에서 나온 수사요원들이 면밀히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들어 온 두 사람은 런던경찰청 수사요원은 아니라는 얘긴데, 혹시 MI-5라고 불리는 보안국 SS(Security Service)에서 파견된 요원들인가?
MI-5는 과거에는 주로 소련 같은 적성 국가들의 간첩 침투에 대한 방첩 활동에 주력했지만 냉전 시대가 지난 지금은 테러리즘, 마약, 불법 이민, 조직범죄 등 과거에 경찰이 담당하던 영역까지 활동의 범위를 넓혔다.
“여기서 하수도까지는 3미터가 채 안 되는군요. 폭발이 있기 전에는 각종 보안장치의 경보가 전혀 울리지 않았다는 말씀이죠?”
MI-5 요원으로 추정되는 사내가 가져온 지하층 건물설계도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희한하게도 폭발이 시작되면서 건물 전체의 보안장치가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일시 정전이 되었다가 범인들이 퇴각한 후에 다시 들어온 걸로 경찰청에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음, 흠.”
“어째서 여기엔 CCTV나 레이저 빔 같은 보안시설은 설치가 안 되어 있는 겁니까?”
아무 말없이 날카로운 눈매로 주변을 살펴보던 여자가 한마디 물었다.
“예, 여기에는 저희 보안실 당직자의 안내로 고객만 들어오니까, 출입문 앞에만 CCTV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아까 보셨다시피 잠금장치도 이 열쇠가 없으면 안 열리고요. 레이저 빔 같은 건 영화에나 나오는 거지, 저희 같은 은행 지하 금고에는 설치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누가 이렇게 콘크리트 철벽을 뚫고 들어올 줄 알았겠습니까? 헤헤.”
보안실장이 자기 책임은 아니라는 듯 잔뜩 변명을 늘어놓았다.
수사요원들은 여러 현장에서 체득된 듯 익숙한 몸놀림으로 자기들의 기본적인 조사를 짧은 시간에 마치고 아무런 말 없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지하 금고를 나섰다.
TD 은행을 나온 두 사람은 왼쪽으로 건물 코너를 돌아서 식당 거리인 쓰레드니들 워크로 들어섰다.
70여 미터 떨어진 골목 끝 베이커리 앞 사고 현장 입구인 맨홀 근처에는 `공사 중` 표지판 두 개만 놓여 있고 경찰관 두 명도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아마 시민들의 불필요한 동요를 막기 위해서 지하도 내의 현장 수사를 하는 런던경찰청 요원들이 맨홀 입구는 별일 아닌 듯 위장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골목 안 우측에 있는 `테일러 스트리트 바리스타` 카페에서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나온 두 사람은 카페 앞 작은 노천 간이 식탁에 마주 앉아 카페 맞은편 TD 은행 빌딩 1층의 큰 레스토랑 안쪽을 유심히 살펴본다.
점심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골목에는 행인이 두세 명밖에 보이지 않고 레스토랑 안에도 몇 명 없는 것 같다.
“저는 일본 자위대로 위장한 단순 떼강도로는 보이지 않는데, 제로 써틴 님 생각은 어떠세요?”
사내가 먼저 입을 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바바리코트 여자에게 물어본다.
제로 써틴이라니? 013이라는 뜻인가?
그러면, 저 여자 요원은 국내 담당 부서인 MI-5에서 나온 이 사내의 상관이 아니고, 혹시 해외 담당 부서인 MI-6에서 별도로 파견된, 그 유명한 제임스 본드 007보다 약간 낮은 급수의 013 여자 특수요원?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굴착기는 트럭이 실려있던 템스강 바지선에서 물속에 버렸을 거고, 행방이 묘연한 나머지 볼보 트럭으로 금괴를 실어 갔겠죠.”
“마취당했던 경관들 얘기로는 중동인 한 명과 동양인 한 명을 봤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IS 놈들이 노스-코리아 특수부대를 고용해서 자금 마련을 시도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MI-5 요원이 자기의 짐작이 맞을 거라는 표정으로 013의 동의를 구했다. 가능하다면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어야 상사(본부)로 돌아가서 보고하는데 차질이 적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본 자위대 89식 소총을 일부러 맨홀 뚜껑 밑에 흘려두고 갔다는 게 맘에 걸리네요. 굳이 일본이 개입됐다고 광고하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빨대로 라떼 톨 사이즈 커피를 쪽 빨아 마시며 013이 사내와 얘기 나누는 것이 귀찮은 듯 건성으로 대답하고 예리한 시선으로 골목길 지표면을 살핀다.
“그러게요. 폭약도 우리가 왔다 갔노라 하고 알리려는 정도의 세기로 터뜨린 걸 봐도, 뭔가 석연치 않은 점도 있습니다.”
MI-5 사내의 생각에도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IS에서 일을 저질렀다면 오히려 전 세계에다 대고 우리 짓이라고 선전해야 맞는데, 은근슬쩍 일본의 짓인 것처럼 꾸미는 것이 과격 테러단체 행동답지 않고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는 해외 쪽으로 수사를 해 볼 거니까, MI-5에서는 국내에 잠입한 테러 조직을 잘 파악해 보도록 하시죠.”
013이 서둘러 일어나며 생긋 윙크해준다. 특수요원답지 않은 늘씬한 몸매에 얼굴도 탤런트 뺨치는 미모이다.
“아, 예. 벌써 가시게요? 저희 쪽 수사 결과는 최대한 신속히 알려드리겠습니다. MI-6의 협조도 부탁드릴게요.”
사내가 미인과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표정으로 엉거주춤 따라서 일어섰다.
MI-5는 약 1,900명 정도의 요원이 풀타임으로 근무하고 있다.
총 6개의 ‘처’로 편성되어있고 기본임무를 수행하는 부서는 C처(방호 보안), F처(국내 전복), K처(방첩)이며 이 ‘처’들은 다시 과로 세분된다.
그동안에는 북아일랜드 테러활동 관련 업무가 25%를 차지했고 방첩업무, 방호보안, 중대범죄, 무기확산 순이었다.
## ##
런던 복스홀 크로스(Vaux Cross) 85번지, 레고랜드(Legoland)라고 불리는 MI-6 본부.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직원들에게 회사(The Company)로 통하듯, MI-6도 내부에서는 상사(The Firm)로 통한다.
그 안에 일하는 사람은 약 2,400여 명으로 추산되나 냉전 시대가 지난 지금은 인원과 예산이 과거에 비하면 크게 감소추세에 있다.
MI-6 국장실, `C`라고 불리는 국장과 조금 전 TD 은행 현장에 다녀온 여자 특수요원 013이 마주 보고 앉아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제 생각에는 일본 자위대의 소행은 확실히 아닙니다! 중동인과 동양인이 함께 어울린 작전이고, 빌딩을 정전시켜 보안장치를 무력화하고 굴착기를 동원할 정도로 철저하게 준비된 것으로 보아, 배후 세력은 분명히 두 나라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013이 자신 있게 단호한 음성으로 자기 의견을 보고한다.
“둘 중 하나? 사우디 아니면 러시아란 뜻인가?’
`C`가 금세 감을 잡고 되물어보며 확인했다.
“그렇습니다. 10톤이나 되는 금괴를 훔쳐서 영국 내에서는 팔지도 못합니다. 해외로 반출해도 그 많은 금괴를 현금으로 살 수 있는 곳은 중동의 왕실 석유 부호들이 많은 사우디밖에 더 있겠습니까?”
“자네 말이 맞네. 그럼 러시아는 왜?”
“털린 금괴는 잉글랜드 은행 소유이지만 보관은 캐나다 은행이 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두 은행 간에 책임소재를 놓고 왈가왈부할 것이고, 그리되면 영국과 캐나다 정부까지 껄끄러운 입장에 놓이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미국과 돈독한 우방국인 두 강대국이 서로 분열되면, 이득을 보는 나라는 당연히 미국의 주 적국인 러시아 아니겠습니까?”
“동양인이 함께했다는데, 중국은 왜 배제하나?”
“중국은 지금 유럽에서 금을 사 모으기 바쁜 나라입니다. 금괴 도난 사건이 알려지면 유럽의 금값이 오를 게 뻔하지 않습니까? 나중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런 사건을 일으켜서 중국에 이득이 돌아갈 시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금괴 10톤이면 4억 달러는 되는데, 중국이 차지하면서 일본에 뒤집어씌워서 영국과 일본이 갈등을 빚게 되면, 동북아시아에서 일본과 손잡고 중국에 대응하고 있는 미국에 대미지가 있지 않을까?”
노회한 C 국장이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넌지시 013의 판단에 도움을 준다.
“그럴 수는 있겠습니다. 국장님 말씀대로 중국도 염두에 두고 조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국내수사는 MI-5에게 맡기고 저는 일단 일본으로 가서 우리 극동지역 요원들과 합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 러시아에는 내가 다른 요원을 보내도록 하겠네. 조속한 시일 내에 좋은 소식 있기를 기다리겠네.”
`C`가 일어나서 신뢰에 찬 시선으로 손을 내밀었고, 013은 감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허리 굽혀 직속상관에게 악수했다.
MI-6는 ‘Military Intelligence, Section 6’의 약자로 영국의 정보기관인 영국 비밀정보국 SIS(Secret Intelligence Service)의 속칭이다.
조직의 우두머리인 국장 아래 일상적 활동을 감독하는 본부장이 있고, 본부장 밑에는 네 개의 처와 해외 작전을 감독하는 `통제단`이 있다.
4개 처는 인사행정처, 특수 지원처, 방첩 보안처, 그리고 정보수집 소요의 결정과 정보보고서 작성의 책임을 맡은 `소요 및 생산처`로 나뉘어 있다.
MI-6의 해외 공작은 7명의 통제관의 감독하에 있으며, 통제관은 영국에 거주하다가 자국으로 귀국하는 외국인 중 본국 귀환 시 영국을 위한 공작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 인물을 식별해서 포섭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
이렇게 포섭되어 MI-6 요원이 된 사람들이 전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고, 당연히 일본에도 여러 명이 포진해서 자기의 조국 대신에 영국을 위해 비밀리에 암약하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우리나라에도 당연히 MI-6 요원으로 활약하는 한국인이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서울 남산을 한 바퀴 도는 산복도로 길가에 눈에 띄는 조그만 2층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 건물에 위치에 어울리지 않게 `왕OO 상사`라는 간판이 걸려있었다.
그곳이 바로 미국 CIA에 포섭되어 한국의 방위산업 현황을 염탐하는 한국인 특수요원의 아지트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이상으로 영국 관련 웹 소설 12회분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