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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풀생활사박물관은 1993년 문화관광부에 등록하고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서 운영하다가 2001년 현재의 종로구 명륜동으로 이전하였다. 설립자는 짚풀문화 연구에 평생을 바친 인병선 관장이며, 짚풀 특히 볏짚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설립한 박물관으로는 세계에 유일하다. 짚풀생활사박물관은 병설기관으로 (사)짚풀문화연구회가 있고, 현재 짚풀 관련 민속자료 3,500 점, 연장 200 점, 조선못 2,000 점, 제기(祭器) 1,000 점, 한옥문 200 세트, 이종석기증유물 457 점, 세계의 팽이 100 종 500 여 점 등을 소장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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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과 풀은 석기나 철기처럼 풀시대나 짚시대라는 시대 구분은 없지만 인류 기원부터 인간과 함께 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보편화된 재료입니다. 특별한 연장이 없어도 짚과 풀, 손만 있으면 집을 지을 수도 있고 옷을 지을 수도 있었고 농구(農具)를 제작할 수 있었고 물건을 묶거나 나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구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한 이후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사시대처럼 짚과 풀로 생활에 필요한 여러 용품을 만들었습니다.
짚은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곡식의 이삭을 떨어낸 줄기 부분입니다. 풀은 짚처럼 일부러 재배하지 않아도 산과 들에서 저절로 자라난 것들이지요. 짚 중에서 볏짚이 가장 많이 쓰였기 때문에 짚이라고 하면 흔히 볏짚을 떠올리지만 벼를 포함한 밀, 보리, 수수와 같은 곡식의 줄기는 전부 짚입니다. 실제로 초가지붕이나 둥구미, 짚신, 삼태기 등과 같은 전통생활용구의 대부분이 볏짚으로 만든 것으로, 볏짚이 보온성, 탄력, 인장력 등이 좋아서 각종 생활용구나 건축재로 쓰이기에 가장 적합한 재료였기 때문이지요. 풀은 볏짚보다 더 다양하게 쓰였습니다. 왕골이나 띠는 자리를 만들고 닥나무껍질은 한지를 만들고 부들은 도롱이를 만드는 등 각각의 풀 성질에 따라 적절하게 이용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짚과 풀 중에 어느 것을 더 많이 썼고 어느 것이 더 유용했는지는 도저히 판가름할 수가 없지요. 분명한 것은 현재에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짚풀이야 말로 우리 조상들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했던 자연이 준 가장 고마운 선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짚풀로 구체적으로 무엇을 만들었을까요. 맨 먼저 떠오르는 것으로 짚신이 있습니다. 짚신은 볏짚으로 만든 전통적인 우리 신발로, 사흘에서 열흘 이상 신기 어려운 단점이 있지만 겨울철에 미리 수십 켤레씩 삼아 놓으면 떨어질 때마다 얼른 바꿔 신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아가씨들은 삼ㆍ부들ㆍ왕골 등에다 화려한 물을 들여 삼은 ‘꽃신’을 신었고, 양반들은 결이 고운 ‘미투리’를 신었습니다. 또, 눈이 많이 올 때 신는 ‘둥구미신’과 상을 당했을 때 상주들이 신는 ‘엄짚신’ 등, 요즘 운동화, 슬리퍼 등의 신발만큼 종류가 다양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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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은 전통적인 우리 주택으로 과거에 짚풀이 가장 많이 쓰였던 곳입니다. 부유한 양반들은 기와지붕을 올렸지만 평범한 일반인들은 대개 볏짚으로 초가지붕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벼농사가 없는 사람들은 볏짚도 구하기 어려워서 띠ㆍ억새와 같은 풀로 초가지붕을 얹어야 했습니다. 먼저 지붕 전체에다 이엉을 덮고 맨 꼭대기에 용마름을 올려 완성했지요. 1~2년에 한 번은 햇짚으로 갈아주는데 혼자서는 할 수 없는 큰 일이라 품앗이로 서로 도와주었습니다. 때문에 초가지붕을 새로 하는 날에는 동네가 떠들썩하니 잔치하는 것 같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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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사회는 거의 모든 것들이 짚풀을 재료로 유지되었습니다. 가축의 축사나 둥우리를 비롯해서 비올 때 입던 도롱이, 멍석과 둥구미, 바구니와 키, 수세미와 두트레방석 등 짚풀이 없었다면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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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종교나 놀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거나 마을 제사를 지낼 때 대문 앞이나 동구밖에 쳤던 금줄은 볏짚으로 꼰 새끼줄입니다. 숯, 한지, 솔가지 등을 꽂아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표시를 한 것으로 꼬는 방향을 왼쪽으로 했기 때문에 왼새끼라고도 했습니다. 줄다리기 줄도 볏짚이나 칡덩굴과 같은 짚풀로 꼰 것이지요. 예전에는 마을마다 정월 대보름에 남자 대 여자 또는 아랫마을 대 윗마을로 편을 나누어서 줄다리기를 했습니다. 이기는 편이 풍년이 든다고 믿었기 때문에 죽을 힘을 다해 줄을 당겼지요. 특히 성별로 줄다리기를 할 때는 여성이 이겨야 풍년이 드는 것이라 항상 여성이 이길 수 있도록 온 마을 사람들이 암암리에 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을 탈놀이에서 탈꾼들이 썼던 바구니탈, 키탈, 볏짚으로 만든 12지 띠탈 등도 짚풀을 재료로 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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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짚풀로 만든 것들은 농민들, 즉 일반인들이 자기 손으로 만들어서 사용했던 것들입니다. 농구로, 의복으로, 의례도구로 만들어졌던 짚풀용구는 그것을 만든 사람의 정성이 가득한 작품이었습니다. 짚풀문화를 누렸던 우리 조상은 모두 짚풀공예의 대가였던 것이지요. 과거 우리 조상들은 짚신을 어떻게 삼는지, 새끼를 어떻게 꼬는지 개개의 만들기 기법을 잘 알뿐만 아니라 이왕이면 더 아름답게 완성하기 위해 염색을 하고, 재료를 혼용하는 등의 노력을 했습니다. 이는 현대의 작가들이 보다 예술성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심한 것과 같은 것이지요. 때문에 우리는 짚풀공예의 실용성과 함께 그 예술적인 가치까지도 높게 평가해야겠습니다.
과거의 우리 생활은 짚풀을 토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짚풀은 입고, 먹고, 자고 놀이하는 인간의 삶 자체와 불가분의 관계였던 것이지요. 역사상 가장 근원적이고 가장 중요한 문화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바로 우리 짚풀문화, 짚풀공예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동안 우리는 짚풀공예품은 물론 짚풀문화를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품처럼 따스하고 정감 가득한 짚풀공예품에서 냉정하고 차가운 공산품을 쓰면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자연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제 짚풀문화를 되살리고 현대적으로 재창조하고자 하는 노력이 많은 분들에 의해서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고유한 문화적 전통을 생각하고 자연과 환경을 생각하기에 우리는 더욱더 짚풀문화에 깊은 애착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고 가장 근본적인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 짚풀공예품을 보전하고 계승하면서 한국인의 정체성과 함께 녹색의 지구를 위한 세계인으로서의 동질성을 추구하는 길, 바로 우리들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짚풀생활사박물관알아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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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서현아 이런곳도 있었구나 이번 추석에 서울 할머니댁가면 우리 짚풀 생활사 박물관도 한번 들러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