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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어머니와 살기는 결국은 나를 제대로 돌보는 일
- 자연치유의 놀라운 힘 -
전희식 (농부. 전국귀농운동본부 이사)
내리사랑이란 말이 있다. 대개 내리사랑의 정당성을 종족보존에서 찾는다. 어느 목사님이 효도에 대해 설교를 하시면서 가정에서 제일 우선이 되는 관계가 부부관계고 그 다음이 자식관계요, 마지막이 부모관계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부모 모시는 일로 부부관계가 깨지거나 자식 키우는 일에 지장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말로 해석이 되는데 음미 해 볼 말이라 하겠다.
늙으신 부모 모시는 일이 한 집안의 과제가 된 것은 효심의 문제나 노인복지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가족의 구성과 개념이 예전과 많이 바뀐 것도 한 원인이 되겠고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주된 방식이 노인의 위치와 역할을 달리 규정하기 때문이다.
경제능력도 잃고 몸이라도 불편한 늙은이는 벌어 놓은 돈이 있다 해도 삶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살기에 쉽지 않은 세상이 된 것이다. 옛날의 촌락공동체에서는 배운 거 없고 몸이 불구거나 좀 모자란 사람도 다 고만고만한 몫을 할 수 있었다. 짐승을 돌본다거나 못줄을 잡는 일은 초등학생도 할 수 있고 그것 하나로도 거뜬한 한 사람 몫이 된다.
정신이 약간 나간 사람마저도 촌락공동체에서는 감싸 안고 살 수 있었다. 산에 가서 땔감을 해 오거나 겨울에 눈이라도 치울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다. 격리의 대상, 치료의 대상이 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자리를 돈이 차지 한 세상이 된 것이다.
부모라고 예외가 아니다.
수많은 노인병원과 노인요양원들이 그것을 말해 준다. 이곳들은 대개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곳이라기보다 죽기만을 기다리는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특별한 중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노동능력이 떨어지고 활동보조가 필요해지자 집 밖으로 내 쫒았다고 보면 된다. 대신 가족들은 돈 벌러 나간다.
치매 - 종잡을 수 없는 ‘과도한 확신’
며칠 전이었다. 집에 손님들이 세 명 왔다. 내가 산골 마을로 들어가 어머니랑 칩거하다시피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어릴 적 친구들인데 겨울 땔감도 같이 하고 어머님 살아생전에 인사도 드릴 겸 오는 이들은 삼십 여년 만에 만나는 친구도 있었다.
그날 밤이었다.
아들 친구들이 와 있는데서 옷에 오줌 누면 안 된다고 부득부득 기저귀를 차시겠다고 하여 기저귀를 차고 주무셨는데 한 밤에 깨어나셔서 오줌이 마렵다고 일으켜 달라고 했다. 기저귀 했으니까 그냥 누시라고 했는데 평소 기저귀를 안 하시던 어머니가 기저귀를 했다는 사실을 잊으셨나보다. 기저귀를 옷으로 오인하고 그냥 벗으려고만 하니 벗겨지지가 않아 한참을 혼자서 용을 쓰고 계셨던 것이다.
오줌이 막 나온다면서 이불이랑 수근이랑 젖을 만한 것은 다 걷어내셨다. 그냥 누시면 된다고 이불을 다시 덮어 드리면 이불에 오줌 젖는다고 거칠게 내 손을 뿌리쳤다.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옷이나 이불에 오줌을 안 묻히기 위해 나랑 실랑이를 했다. 이미 성능 좋은 기저귀가 한 방울도 새지 않게 오줌을 다 흡수한 마당에 어머니의 노력은 멈추질 않으셨다.
이번에는 오줌 누러 나가겠다고 하셨다. 전등불을 키고 기저귀를 빼서 오줌 잘 누셨으니 주무시라고 보여드렸다. 안타깝게도 이미 오줌을 누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어머님은 당신의 판단에 대한 확신이 너무도 견고해서 달리 해 볼 도리가 없다. 변기에 앉아야 어머니의 뇨기가 사라질 모양이다. 문 밖의 어머니 전용변기에 앉혀 드렸다. 당연히 오줌은 한 줄기도 나오지 않았다.
얇은 토벽 하나 사이의 옆방에서 자던 친구들이 다 깬 것은 물론이고 무슨 일이 있나 건너오려고 했다한다.
친구들이 오기로 한 날 아침에 일찍이 어머니께 친구들이 온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어머니는 돈지갑부터 감췄다. 베개 속을 거쳐 장판 밑에도 감췄다가 옷 서랍에도 넣었다가 맨 마지막에는 털모자 속에 넣고는 모자를 쓰셨다.
내 친구들을 경계하거나 미워하지 않도록 오랜 시간 친구들 이야기를 해 줬다. 그렇게 노력 한 덕에 내 친구들은 오는 손님 중 드물게 어머니로부터 절값을 받았다.
큰 절을 한 이들에게 어머니는 손에 꼬깃꼬깃 말아 쥐고 있던 천 원짜리 세 장을 꺼내 한 장씩 쥐어 주었다. 그리고는 내게 귓속말로 “돈이 까장 이것 밖에 없어. 더 줄끼 없어.”라고 하셔서 다들 크게 웃었다. 이틀 동안 어머님은 내 친구들과 마늘도 같이 까고 팥도 가리고 부침개도 구워 먹으며 잘 노셨다.
이들이 갈 때는 절값이라도 주고 보내자고 나한테 돈 좀 달라고 하셨다. 내가 어머니에게 건넨 만 원짜리 세 장은 친구들 손을 거쳐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돈은 원래대로 내 지갑에 그대로 담기게 되었지만 어머니 보람과 자부심은 물론 친구들의 웃음도 커졌다.
이런 류의 경우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되풀이된다. 오랜 시간 계속되지는 않지만 어머니의 배타성과 의심, 외고집은 종잡기가 힘들다. 감정기복이 심하여 작은 일에도 마음을 상하신다. 배뇨와 관련된 기초적인 판단에서 독특한 또는, 엉뚱한 견해를 강변하는 때도 있다.
옷을 완전히 홀랑 벗어 놓고 뒷간으로 가시느라 그 사이에 그만 옷에다 실수하는 경우나, 오줌이 흥건한 바지를 젖은 걸레를 깔고 앉아서 그런 거라고 끝내 벗지 않으시려는 경우, 이불은 젖으면 씻기 힘들다고 안 덮으려고 하고 대신 옷을 몇 겹으로 껴입고 주무시다가 그 덕에 이불보다 더 많은 빨래 감을 만드는 경우 등이다.
기저귀를 벗기까지
지금의 이런 어머니 상태를 두고 기적에 가깝다는 사람이 있다. 후배이자 전문노인병원 원장이 하는 얘기다. 처음 어머니를 모시고 왔을 때와 지금의 모습을 두루 지켜 본 어느 노인 전문 간호사 출신 이웃도 그런 말을 한다.
똥오줌을 이 정도나 가리게 된 것을 두고 하는 말일 수도 있고 방문자들과의 친화력이 크게 높아진 것을 두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시는 말씀의 온당성이나 마당에 나와 그 많은 잡초들을 다 뽑으시고 삭다리 나뭇가지들을 손도끼로 잘라서 땔감을 만드시는 것은 물론 손수 수제비도 끓이시게 되었다는 점을 두고 그렇게 평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로서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어머니 모시는 주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결과와는 무관한.
어머니가 오실 때 서울 큰집에서 온 짐들 중에 옷 보따리 만큼 큰 기저귀 뭉치가 있었다. 알 수 없는 알약이 가득 든 봉지도 제법 되었다. 첫 날부터 기저귀를 빼 버렸다. 그 대신 하루 너 댓 번 씩 빨래하는 것을 택했다. 세탁기도 안 쓰기로 했기 때문에 모두 손빨래를 했다.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어머니 모시기로 작정하고 준비 했던 일 중에 하나가 기저귀 없이 생활하는 것이었다. 기저귀는 내가 어머니를 모시기로 3년 전에 작정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기도 하다. 내 자신감은 호주의 어느 노인돌봄센터의 사례를 사전에 연구 해 둔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례처럼 나는 어머니가 국을 드셨을 때와 안 드셨을 때, 물을 한 잔 마셨을 때와 안 마셨을 때를 구분 해 가면서 옷에 오줌 누시는 시간을 꼬박꼬박 적기 시작했다. 움직임이 거의 없는 노인네라 흡수한 수분은 거의 소변으로 배출되기 때문에 배뇨 시간이 매우 일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의 공책을 보면 국을 드셨을 때는 두 시간 십 분에서 삼십분 사이에 한 번씩 소변을 보셨고 그냥 계실 때는 세 시간 전후로 오줌을 누셨다.
역시, 그 사례에 나온 것처럼 오줌 눌 시간 조금 앞서서 나는 변기를 갖다 내고 오줌을 누이셨고 어머니는 오줌 안 마렵다고 손사래를 치셨다. 그러나 이 과정을 두 달 이상 거치면서 어머니의 배뇨감각이 회복된 것은 물론 당신 스스로 안방 뒷문을 열고나가서 내가 특별히 고안해 만든 어머니 전용 뒷간에서 똥오줌을 보실 수 있게 되었다.
대 소변을 가리게 되면서 어머니의 태도가 크게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줌에 절은 옷을 벗어서 방구석에 숨겨 두거나 똥 칠갑이 된 이불과 옷을 피해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계시기도 하던 어머님이 “인자 다 키웠재? 오줌도 혼자 다 누고.”라면서 자랑까지 하게 된 것이다.
생활에 대한 자신감이 회복되고 나와의 여러 엉뚱한 언행들이 개선되어 간 것들도 중요한 변화라 하겠다.
여기까지는 호주의 노인돌봄센터 사례와 같다. 3년 전 어머니의 기저귀 사건을 접하면서 받았던 충격을 이렇게 넘어 설 수 있었다. 내가 그때의 충격에서 넘어선 것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어머님이 기저귀를 벗어 던지면서 함께 벗어 던지게 된 것들이 훨씬 중요하다.
3년 전에 나는 늘 어머니에게 기저귀를 채워 놓는 것은 ‘똥오줌도 못 가리는 애 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사실의 공인과정이라고 느끼게 된 사건이 있다. 노출되지 않은 개인적 수치와는 달리 그것이 공개되어 공인되어버리면 심리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때에 탐독하기 시작한 노인관련 책 속에서 호주의 위 센터에서는 이유와 동기가 뭐였는지는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기저귀를 빼 내는 사례가 나와 있어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큰형님 집에 사시는 어머니를 찾아뵈었던 3년 전 어느 날. 내 손을 잡고 어머니는 하소연을 하셨다. 당신도 모르게 나오는 오줌이야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 기저귀에 눈다고 하지만 뻔히 오줌 마려운 것을 느끼고서야 어찌 옷을 다 입은 상태에서 아랫목에 앉은 채로 오줌을 누냐는 말씀이었다. 그리고는 “오줌 누는 데가 따갑다.”고 하시었다.
어머니한테 가서 하룻밤 자면서도 왠지 께름칙해서 틀니 한번 빼서 닦아 드린 적 없고, 냄새나는 방을 청소하기보다 잠시 머물다 되돌아 나오는 것을 선택하던 나는 어머니의 아랫도리를 보고 받은 충격이 오늘날 어머니를 직접 모시게 된 계기가 되었다.
새하얀 호호 백발 체모를 보는 순간 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사람의 체모가 하얗게 셀 수도 있다는 것은 상상 해 본적이 없었다. 어릴 때 잃기도 했지만 열 두 명이나 되는 자식을 낳은 어머니 음부의 새하얀 체모는 온갖 풍상을 헤치며 살아오신 어머님의 신산했던 세월의 상징으로 보였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근처 약방에 가서 아기들 바르는 분을 사다 발라 주었다. 어머니 아랫도리가 헐어서 벌겋게 되어 있어서였다. 그날이 일요일이어서 문을 연 약방을 찾느라 내 안타까움과 그동안의 불효에 대한 죄스러움은 한층 길어졌다.
그때가 북유럽 4개국 연수를 가기 위해 하루 전에 서울 큰집에 올라 간 것이었는데 귀국하기까지 내 머릿속에는 어머니의 하얀 체모가 떠나지를 않았고 남은 어머니 여생을 내가 모시겠다고 마음을 굳히는 기간이기도 했다. 그 많은 자식 키우느라 어머니가 똥오줌 묻은 옷이나 걸레를 빠신 햇수만큼 다는 못하더라도 두 세 자식 몫은 내가 하리라 마음먹었었다. 옛 사람들은 시묘살이도 했는데 내 건강한 시절 몇 년을 고스란히 어머니에게 되돌려 드리자고 마음먹었다.
자연치유의 힘
치매가 있는 부모를 모시는 사람들 이야기의 공통점은 얼토당토않은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안 모셔 본 사람은 속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말에 동의 할 수 없었다. 절친한 친구 하나도 내 결심을 전해 듣고는 “젊은 우리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까먹기도 하고 엉뚱한 망상에 젖기도 하는 거 아니냐?”고 내 판단에 힘을 실어 주었다.
치매가 있든, 노망을 했든 ‘얼토당토않은 일’이란 없다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그런 것은 노화과정에서 누구나 있을 수 있는 자연스런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 어머니를 모시기로 한 내 마음의 바탕이었고 그 바탕위에서 생활해 나갔다. 의료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자연스런 노화가 아니라 명백한 질병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것까지도 정상적인 노화에 포함 시킬 따름이다.
평생 계속 되어 온 모진 삶이 빚어내는 파열음이 지금의 어머니 치매고 다리 하나를 못 쓰는 현재 모습이라고 본 것이다. 군데군데 맺혀 있는 삶의 매듭들이 그렇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월간 잡지 ‘신동아’에 실린 논픽션 당선작을 찾아내서 읽을 때도 그랬지만 노인을 주제로 쓰여 진 단편소설집에서도 그랬다. 치매 노인을 모시는 사람들의 또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매우 수동적인 모심이라는 점과 모든 것을 치매 노인만큼이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행동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를 바꾸거나 새로 공부하지 않고 평소 생활 기준을 그냥 유지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정상이고 치매는 병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으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환자인 채매 노인이 하시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마음을 상하는 자기모순을 보인다는 것이다.
환자라면서 치매 노인의 말을 헛소리로 여겨 귓가에 흘리면서도 정작 자기한테 불리하고 귀에 거슬리면 화를 내고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꼬박 2년을 혼자 준비했다. 환경조건을 마련하는 일과 내가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살 집부터 구했다. 사람 살기 가장 좋다는 700고지에는 못 미치지만 600고지의 빈 농가를 구했다.
그 다음은 집을 어머니 신체조건에 맞게 고치는 일이었다. 아홉 평에 세 칸짜리 농가는 지은 지가 100년이 넘었고 집이 빈지는 20년이 넘어 벽은 헐었고 한쪽 기둥이 다 썩어 처마 끝이 땅바닥에 닿아 있었다. 어머니 동선을 고려하고 생활방식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집을 고쳤다.
대부분의 자재는 고물상을 뒤지거나 아파트단지를 순회하며 버려진 물건들을 가져와 되살렸다. 망가진 어머니의 몸과 마음을 고친다는 마음으로 톱질을 하고 망치질을 했다. 이 과정이 알려져 ‘고물을 보물로’라는 이름으로 방송을 타기도 했다. 케이비에스의 '여섯시 내고향'.
어머니가 이 집에 처음 오실 때는 심란하셨을 것이다. 큰 아들 집을 떠나 시답잖은 막내아들 집에 온다는 것이 그렇고 익숙한 도시의 편리함은 하나도 없고 생소한 풍경들을 보고 자식들에게서 버림받는다는 공포까지 들었을지도 모른다.
공포는 모든 노인들이 갖고 있는 공통된 심리다. 노인들의 고집도 그렇게 이해 될 수 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하나씩 사라져 이제는 밥술마저 못 드는 상태가 되면 남는 것은 공포다. 특히 치매 노인들의 근거 없는 비방과 의심, 외부인에 대한 경계와 적대감은 모두 공포에서 시작된다고 이해된다. 어머니가 그랬을 것이다. 깊은 산골마을에 어설픈 집구석하며 살풍경한 모습들이.
그러나 자연속의 새 생활에 어머니가 익숙해져 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머니 오신 다음날 우박이 쏟아졌다. 우박을 신문지에 받아 방에 가져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우박을 직접 구경한지 수 십 년은 되었을 것이다. “이기 우박 아이가?”라며 시작한 어머니 이야기는 어머니가 짱짱하시던 시절의 생생한 기억들로 이어졌다.
마루에까지 와서 지절대는 새벽 산새들. 색색가지 나비들이 마당에 날고 생선 가시를 던져주며 어머님이 반기던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어느 날 새끼를 낳아 다섯 마리나 데리고 오자 집 나갔던 자식이라도 돌아 온 듯 기뻐하셨다.
날이 풀려 휠체어를 밀고 골목 밖으로 첫 나들이를 나갔을 때 어머니는 이건 빌금다지다 저건 나시래이다 하면서 나로 하여금 집에 돌아와 인터넷을 뒤지거나 식물도감을 봐 가며 나시래이가 냉이이고 빌금다지는 정신이 좀 돈 사람에게 특효라는 것을 알게 하셨다.
손수 끓이신 수제비
주변 사람들에게 가끔 소개하는 것이 바로 어머님이 손수 만들어 주신 수제비 이야기다. 어머님은 우리 집에 오시면서부터 이런저런 집안 일들을 하시게 되었다. 일찍이 노인병원에서 도우미로 노인 모시는 실습을 하면서 나는 어머니에게 소일거리로 종이접기나 지점토 만들기, 나무토막 쌓기 등을 하게 하는 대신 생산적인 노동을 하시게 해서 당신이 집안 살림에 확실하게 기여하고 있음을 자각하게 해 주고 싶었다.
세심하게 준비한 일거리들이 순서대로 어머니께 주어졌는데 내가 농사 지은 콩의 검불을 가려내는 일이나 마른 빨래 접기, 방 쓸기 등에서 점점 청국장 띄우기를 거쳐 아궁이 앞에 앉아 콩 삶기까지 나아갔다. 방 안에다 6만원인가 주고 콩나물 시루를 하나 사다 놓고 어머니에게 콩나물 기르게 한 것도 그 일환이었고 전주까지 나가서 호박돌(돌확)를 5만원 주고 사다가 마루에 놓고 어머니에게 마늘도 찧고 생고추도 갈 수 있게 한 것도 그런 취지였다.
(콩나물 키우기)
그러한 과정의 정점이 수제비 만들기였다.
어머님이 오신지 석 달 쯤 되었을 때였다. 나는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수제비 타령을 며칠째 했다. 충분히 마음준비가 되었다 싶을 때 “우리 수제비 끓여 먹을까요?”라고 하면서 어머니가 만들어 달라고 했다. 수제비 솜씨 자랑을 며칠 해 오시던 어머니는 당연하다는 투로 그러마고 했고 나는 마루에 모든 도구와 재료를 갖다 놓고 어머님 심부름꾼 노릇을 했다.
근 삼십 여년 만에 자식 밥상을 손수 차리신 어머님의 자부심은 수제비를 세 그릇이나 비우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제비 그릇을 앞에 두고 우리 모자의 희열은 극에 달했었다. 우리밀 통밀을 반죽하면서부터 이런 밀가루가 고소하다고 아는 체를 하시던 어머님이 반죽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어 수제비가 좀 짰지만 문제 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어머님을 명실상부한 집안 최고의 어른으로 깍듯이 모셨다. 흔히 알아듣기 좋으라며 말을 놓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 어머니에게는 그러지 못하게 했다. 집을 드나들 때는 항상 큰 절을 올렸다. 어디 가는지, 언제 올 건지, 왜 가는지를 소상하게 알려드렸다.
무엇이든 물어서 했고 하라는 것은 왠만하면 다 하려고 했다. 집안 최고의 어른인데 그렇게 해야 마땅한 것이라고 내 마음속으로 정해버린 것이다.
감자 심을 때도 트럭에 모시고 나가서 구경하시게 하고 특히 모를 심는 날은 형님과 누나, 그리고 아내도 와서 어머니를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휠체어를 대 놓고 모든 과정을 보시게 했다. 모꾼들은 아무도 안 오고 이앙기가 와서 모를 심어버리자 “저 속에 모꾼들이 들었냐?”며 신기해하시기도 했다.
(모 내기 참관?)
물론 어머니 생전에 해 보지 않았으리라 여겨지는 것들을 생각 해 내서 시도 한 것이 여행다니기와 영화보기 등등이다. 영화는 귀를 잡수신 어머니에게 맞게 시골풍경이나 움직임이 많은 것들로 골랐다. '차마고도', '워낭소리', '동춘서커스' 등이다.
(덕유산 향적봉)
(농기구 전시장)
(간식 드시면서 '워낭소리' 감상)
냉장고에는 모든 플라스틱 용기들을 다 없애고 유리와 사기그릇으로 바꿨다. 어머니 그릇과 수저는 유기로 장만했고 내가 평소 듣던 소지로와 황병기, 김영동의 명상음악에 인도와 티벳 명상음악은 물론 머리를 맑게 한다는 바하와 모차르트 곡을 항상 틀었다.
독경 음반과 복음성가, 천도교에서 부르는 천덕송 등도 번갈아 들려드렸다. 귀를 꽉 잡수셔서 듣지도 못하는데 시끄럽다고 하시는 가족도 있었지만 듣고 못 듣고는 상관없는 것이 음의 파동이라고 설명했다.
집에서 함께 사는 벌레 한 마리도 다치게 않게 했고 한 여름 파리 떼가 극성을 부려도 때려잡지 못하게 했다. 부엌에서 쌀을 씻고도 쌀뜨물을 따로 받아 거름자리에 갖다 부는 등 무엇이든 함부로 버려지지 않게 했다. 설거지는 물을 통에 받아서 했다. 계곡에서 흘러오는 공짜 물을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며 식구들이나 손님들이 처음에는 낯설어 했지만 그게 어머니 건강과 존엄을 지키는 일과 무관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강조했다.
9월 말에는 ‘어머니의 건강과 존엄을 생각하는 기도잔치’라는 것을 열어 이틀간 40여 분이 와서 정성을 모아 오직 우리 어머니 중심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마당 텃밭에는 일부러 어머니 용도로 심어 놓은 야채들이 많았다. 상추나 쪽파, 고추와 토마토 등이다. 마당에 농사용 가빠를 좍 깔아 놓고 어머니를 내려놓으면 어머니는 몸을 끌고 다니면서 고추도 따고 상추도 솎았다. 가빠 밖으로 나가시기 일쑤라 옷은 엉덩이가 닳고 흙 투성이가 되지만 어머니 따신 것으로 밥상을 차리면 어머니는 맛있게 드시고 소화도 잘 하셨다.
세 가지 나만의 비법
눈이 펄펄 오는 요즘도 어머니는 불쑥 두릅 꺾으러 가자고 하신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새벽에는 세 시에 일어나셔서 고향마을에 있는 ‘가짐태꼴’이라는 뒷산 골짜기 밭에 강냉이 꺾어 오라고 했다고 가자셨다. 누가 그러더냐고 했더니 작은 형님이 앞뜰 논에 물 보러 가면서 어머니 밭에 가는 길에 강냉이 꺾어 와 삶아 먹자고 했다는 것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비가 쏟아지는 여름 어느 날이었다. 밥 먹을 때 하는 기도시간이나 신세 한탄을 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어머니 소원이 “이 병신이 인자 옷에 오줌 안 싸고 벌떡 일어나 걸어 댕기고 싶다.”는 것인데 신통한 침쟁이가 서울 작은 딸 뒷집으로 이사를 와서는 어머니 장백이(정수리)에 침 한방만 놓으면 다 낫는다고 전화가 왔다면서 옷 보따리를 들고 막무가내로 집을 나서셨다.
이미 의사가 집 밖에까지 와서 차를 대 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꾸무럭거리는 바람에 가버렸다고 베개를 내게 던지며 저주를 퍼 붇는 일을 겪은 적이 있는지라 나는 모든 일정을 포기하고 어머니를 태우고는 비속으로 차를 몰고 나갔다.
대진고속도로를 달리고 남원으로 해서 전주까지 가면서 국밥도 사 먹고 생두부도 사서 트럭 안에서 간장을 흘려가며 어머니랑 같이 먹었다.
물론 처음에는 아니라고 설득을 시도하다 도저히 감당 할 수가 없는 어머니 외고집에 꺾여 평소 힘들 때마다 자문을 구하는 몇몇 선생님들의 조언을 참고했던 것이기는 하다.
이날 치매 어머니를 모시는 나만의 ‘의사 체험하기’ 비법이 만들어졌다. 아울러 어머니의 부당한 요구를 시정하려고 다시는 시도하지 않게 되는 시발점이 된 날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고속도로를 5분도 달리지 않아서 “아직도 서울 아니냐?”고 물으셨다. 그 순간 나는 어머니의 서울은 지도상의 서울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그때부터 나는 여유 있게 유람을 즐겼다.
비속에 옷을 흠뻑 적셔가며 전주 어느 큰 빌딩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그 침쟁이가 사는 곳이라며 모시러간다고 내가 차에서 내리려 하자 어머니는 먼저 그만 집으로 가자고 하셨다.
물론 나는 침쟁이가 마실 가고 없더라고 허위 보고를 하였고 이미 침쟁이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포기하고 있는 어머니는 내 젖은 옷을 안타까워하며 어서 집으로 가자고 졸랐다. 나는 침쟁이가 갔을 만한 노인정을 찾자고 고집(?)을 부리다가 슬그머니 져 주었다.
이날 이후 어머니는 이런 고집을 부리는 횟수가 줄어들더니 지금은 용한 의사에 관한 고집은 완전히 사라지셨다. 이처럼 하고싶어 하시는 것을 하게 하면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는 '의사 체험하기'. 이것은 아이들이나 건강한 어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두 번째 비법이 있다. ‘꿈길 따라잡기’다.
새벽에 일어나면 지레 내가 먼저 선수를 친다. 어젯밤 꿈속에서 뭐 그리도 재미난 일이 있었냐고 너스레를 떤다. 이는 현실과 과거와 미래의 갈래를 타서 분리하는 작업이다. 치매 어머니의 엉뚱한 소리나 고집을 분석 해 보면 옛 기억과 지금의 상태가 뒤섞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상관관계가 없는 개인적 바람까지 섞이면 그게 바로 망상이 되는 것이고 확신이 너무 견고하다 보니 외고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현실과 과거기억, 그리고 바람을 분리시켜 구분해 주는 것이 바로 ‘꿈길 따라잡기’ 비법이다. 주무시거나 혼자 골똘히 있는 시간에 늘 망상이 스며들기 때문에 새벽 잠자리에서 어머니 머릿속의 비현실적인 기억들을 수거하여 그것은 꿈이라고 분리 해 드리는 것이 이 비법의 목표다.
세 번째 내가 개발한(?) 비법은 ‘편승해서 물꼬 틀기(선회 하기)’이다.
어머니 이야기와 주장에 편승해서 맞장구를 치면서 추임새를 넣다가 상황의 흐름을 주도해버리는 것이다. 상황을 주도하기 시작했으면 슬그머니 물꼬를 딴 데로 트는 것이다. ‘가짐태꼴’로 강냉이 꺾으러 가자는 오늘 새벽일도 이 비법으로 대처했다.
강냉이 나도 먹고 싶다고 가자고 했다. 삶아도 먹고 밥에도 놔먹고 하자며 신나게 얘기를 나누다가 날이 새면 꼭 가자고 했다. 눈이 왔지만 ‘가짐태꼴’은 양지바른 곳이라서 금새 녹았을 거라고 했다. 추우니까 옷을 두툼하게 입고 가자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점점 현실로 돌아 오셨다.
강냉이를 가을에 안 따고 남았더라도 다 까치들이 내 먹고 없을 거라고 가 봤자 소용없다고 하시면서 가지 말자고 하신 것이다. 걸린 시간은 모두 10분이 채 안 된다. 어머니는 지금 모든 걸 잊고 곤히 주무신다.
놓치고 살던 내 모습 되찾기
어머니랑 이렇게 살다보니 간간이 사람들로부터 부모 모시면서 겪는 갈등 상담을 받게 된다. 함께 산지 겨우 열 달 밖에 안 되는 짧디 짧은 기간이라 상담이라는 게 내게 주제 넘는 일이지만 어머니랑 얘기 나누면서 볼도 아닌 어머니 입술에 불쑥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애정이 깊어진 어머니와의 관계를 돌아보는 일은 의미 있으리라 본다.
아마 그 순간 내 아들 놈의 ‘아유 아빠 변태’하는 소리가 안 떠올랐으면 여든 여섯의 합죽이가 다 된 어머니에게 진한 키스를 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몇 달 전만해도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 앞에서 나를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느니 ‘삼일에 겨우 한 끼 얻어먹고 사니 내가 뼈 가죽만 남았다.’고 하셨다. 지금은 나에 대한 험담이나 비방은 완전히 사라졌다. 내가 하는 말은 백 프로 다 들으시고 내게 말 할 때는 모두 의논형 말투다. 이것은 나와 관련해서 더 이상 어머님의 우려와 공포가 없어졌다는 것으로 판단하면 될 것이다.
옷에 오줌을 누더라도 벗어서 당당하게 마루에 내 놓는 것도 크게 달라진 모습이고 집안일에 대해 큰소리 땅땅 치시는 모습도 그렇다. 무엇보다 저승사자나 허깨비들에게 시달리지 않게 된 것이 제일 반갑다.
처음에는 어머니가 허연 도포를 입고 삿갓을 쓴 놈들이 몇 명씩 달라 들어 저승으로 가자면서 끌고 가는 걸 뿌리치느라 발버둥을 치고 고함을 치고 하셨다.
내가 밭이나 들에 일하러 갈 때는 항상 “누가 와서 찾으면 오짝꼬? 문 걸어 잠그고 암 말 안하고 없는 듯이 있을테니 얼렁 돌아오느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그런 일이 없어졌다. 듬직한 아들이 수호천사 처럼 곁에 있으니 무서운게 없어서인가 싶다.
어머니 모시는 준비를 하는 동안 제일 신경 많이 썼던 것이 가족관계였다.
위로 큰형님과 누님들이 병원도 의사도 없는 산골마을에서 모시는 것을 불안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물론이고 큰 형수님이 오해를 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었다. 아내의 처지가 난처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신경 썼다. ‘늙은 어머니를 모시게 되자 남편이 결국 따로 집을 나가서 살게 되었다’는 식으로 주변에 해석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돈 문제는 정말 아무 대책도 없었다. ‘이렇게 순도 높은 내 정성 하나면 됐지’ 하는 터무니없는 낙관을 가지고 시작했는데 정말 그대로 다 해결되었다. 가족들의 어떤 도움도 청하지 않고 살아 올 수 있었다. 하늘이 도왔다고 말 할 수밖에 없다. 최근에야 형제들이 조금씩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어머니랑 살면서 크게 느끼는 바가 있다. 내가 그동안 놓치고 살던 인생의 중요한 대목을 조명하며 사는 재미가 크다. 정말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삶을 걸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병들고 늙은 부모랑 사는 일말이다.
내가 이렇게 어머니랑 아름답게 살아 갈 수 있는 것은 그동안 살아 온 내 삶의 총화라는 사실을 부정 할 생각은 없다. 부족하지만 청장년기 때 사회운동을 하며 체계적인 사고와 합목적적인 판단을 훈련할 수 있었고 지금은 자연생태적 삶을 살면서 생명평화운동을 해 오는 동안 입산수도까지 하면서 십 수 년을 수련과 명상으로 지낸 생활이 큰 몫을 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마음을 바꾸고 새로이 공부 해 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 역시 틀린 말이 아니다.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까지 되시고 지금도 시민사회공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시는 현직 교사분이 두 살 아래인 내게 고민을 털어놓으셨다.
“정말 잘 모시고 싶은데, 사람들은 나를 효자라고들 하지만 어머니가 말도 안 되는 걸로 고집을 부릴 때 정말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고 하셨다.
이럴 때 뭐라 함부로 말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나는 선생님의 애로를 격려 해 드렸다. 치매 어머니를 사리분별도 없고 똥인지 된장인지도 가리지 못하는 가장 어려운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 해 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노인을 위한 한국형 ‘클라인 가르텐’
얼마 전에 ‘야마토마치에서 만난 노인들(김동선지음. 궁리 출판사)’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 있다. 이 생각은 유럽과 일본의 ‘체제형 클라인 가르텐’을 가서 본 내 경험을 덧붙여 하게 된 일종의 노인문제 정책대안에 해당한다. 한국형 ‘노인을 위한 클라인 가르텐’이라고 할 만 한 구상이다.
공공시설이나 대규모 행사장에도 늙고 병든 부모를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함께 갈 수 있게 노인 돌봄 시설과 간병인을 배치하는 방안도 제안 해 놓은 상태다. 아이들 놀이방을 부대시설로 해 놓은 고속도로 휴게소도 생긴걸 보면 엉뚱한 제안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인구 고령화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프랑스가 115년이 걸리고 미국이 71년이 걸린 노령인구 7%에서 15%로의 증가가 우리나라는 18년 만에 이뤄졌다. 세계 최단기록인 일본보다도 6년이나 빠르다.
무엇보다 노인을 치료의 대상, 돌봄의 대상으로만 볼 게 아니라 함께 살아 갈 한 식구로 가정에 편입시키는 획기적인 대안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내가 구상하는 노인을 위한 한국형 클라인 가르텐이 그런 것이다.
본능은 사실 오랜 기간 학습된 결과물일 뿐이다. 본능 하나를 잘 넘어서면 피안의 세계가 열리기도 한다. 아내보다도 자식보다도 더 뒤 순위인 부모 모시기가 우리 인간들의 디엔에이 속에 새겨진 생존 본능이라면, 내리사랑은 종족본능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 본능을 박차고 나와 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최고의 노후대책은 늙으신 부모 잘 모시는데서 시작되며 자식을 최고의 효자로 키우는 길은 스스로 효자가 되는데서 시작 되는 것이기에 그렇다. 마음을 열고 귀 기울여 들어보라. 치매이신 노인들의 이야기는 옛 지혜는 물론 옛 토박이말의 보고임을 발견하게 된다.
깊은 영감이 서린 예언으로까지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덤으로 얻는 자기 수양이 될 것이다.
내 어머니가 나랑 사는 동안 삶의 매듭을 만드는 일이 없도록 하고 싶다.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린다면, 체험과 기억속의 모든 매듭마저 풀고 가셨으면 한다.
전희식 (농부. 전국귀농운동본부 이사. 14년 전에 귀농하여 자연 속에서 만물과 소통하고 순환되는 삶을 추구하며 산다. 전북 장수군에서 치매이신 노모와 같이 살며 결혼이민자여성지원과 대안교육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영성수련을 통해서만 삶의 진보가 이루어진다고 보며 최근에는 한 초등학교에서 명상수업을 맡고 있기도 하다.)
*이 글은 환경과생명 2007년 겨울호(통권 54호)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