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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권 교회내의 적들: 박해
사도들과 제자들은 전세계로 흩어졌다. 전승에 의하면 토마스는 파르티아의 주교로, 안드레아는 스키티아의 주교로, 요한은 아시아의 주교로 임명되었고, 요한은 에페소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베드로는 폰투스와 갈라디아, 비티니아, 카파도치아 그리고 아시아에 있는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에게 설교를 한 듯하다. 마지막으로 그는 로마에 왔는데 거기서 자신의 원대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되었다. [3,1]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만하여(로마 15,19) 예루살렘에서 일리리꿈에 이르기까지 설교하다가 나중에는 네로 통치 시기에 로마에서 순교한 바오로에 대해 더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이 사실은 오리게네스가 『창세기 주석』 제 3권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3,1]
베드로의 첫 서간으로 알려지는 한 통의 서간은 베드로의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초기 교부들은 자신들의 저작에서 이 작품을 의심할 바 없는 베드로의 친저(親著)로 자유로이 인용했다. 베드로의 둘째 서간에 대해서 우리는 정전(正典)이 아닌 것으로 배워 왔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그 서간을 가치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다른 성경들과 같은 위치에 놓고 있다. [3,3]
베드로」의 작품으로 알려지는 이 작품들에서 나는 단 한 편의 서간만을 진정성있고 초기 교부들에 의해 인정되는 것임을 확인하였다. 반면 바오로는 열 네 편의 서간의 저자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몇몇 권위있는 자들은 로마 교회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바오로의 작품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바오로의 친저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3,3]
☕ 히브리서는 초기 교회부터 바오로의 저작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 것같다.
그 사도는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의 말미 인사말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목자』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헤르마스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 역시 몇몇 권위있는 자들이 부인하고 있고, 따라서 인정된 작품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 작품이 특히 기본적인 교육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필수적인 책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발견한 이 작품은 공적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사용되었고 초기의 몇몇 작가들에 의해서도 인용되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3,3]
☕ 헤르마스의 목자에 대한 내용이다.
안티오키아」태생으로서 의사인 루카는 오랜 기간 동안 바오로의 동료로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영감을 받아 기록한 복음서와 사도행전이라는 두 권의 책에 사도들로부터 배운 영혼의 치료에 대한 사례들을 남겨 두었다. 루카는 말씀을 처음부터 목격하고 관리한 자들로부터 받은 정보에 따라서 그 복음서를 썼다고 선언하면서 아울러 그 정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랐다고 덧붙이고 있다.(루카 1,2-3) 사도행전의 경우에 있어서는 루카가 들은 바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직접 목격한 바를 기록한 것이다. [3,3]
구세주 숭천 후 유대인들은 그분의 제자들을 없애기 위한 흉계를 꾸미면서 더욱더 구세주를 배척하였다. 우선 그들은 스테파노를 돌로 쳐 죽였고, 다음에는 제베데오의 아들이며 요한의 동생인 야고보를 참수시켰다. 마지막으로 구세주 숭천 후 예루살렘의 첫 주교로 임명된 야고보까지 같은 방법으로 처형시켰다. 그러는 동안 남은 제자들도 끊임없는 위험 속에서 유대 지방 밖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가서 내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그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해 여러 지방을 여행하였다. 더욱이 예루살렘 교회의 구성원들은 계시에 의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그 도시를 떠나 펠라라고 불리는 페레아의 한 고을에 정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펠라로 이주했다. 그러자 마치 성도들이 유대인들의 수도(首都)와 전 유대인 땅을 버린 것처럼,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온들을 거스려 저지른 그들의 가공할 죄악에 대한 벌로써 하느님의 심판이 그들을 덮쳐 그 사악한 세대를 완전히 전멸시켜 버렸다. [3,5]
유월절 축제 기간에 전 유대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 요셉푸스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에 갇혀 있었는데 그들의 수효는 거의 삼백 만 명이나 되었다는 요셉푸스의 진술에 나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인류의 구원자이시며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신 분이 수난당한 바로 그 주간에 그들이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예루살렘에 갇혀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그 파멸을 당한 것은 참으로 마땅한 일이었다. [3,5]
☕ 유다인들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적대적인 감정이 드러난다.
요셉푸스 『사기』 제 5권을 이용하여 당시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들을 기술해 보기로 한다:
”부유한 자들에게 있어서는 도시를 떠나는 것 만큼이나 그 도시에 머물러 있는 것도 위험했다. 왜냐하면 변절자라는 명목으로, 그러나 실상은 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기근이 극심해지자 당원들의 횡포도 더욱더 심해졌다. 식량이 없자 사람들은 집을 부수고 들어가 샅샅이 뒤 졌다. 조금이라도 먹을 것을 발견하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 그 집 사람들을 흑독하게 대하였다. 먹을 것을 찾지 못했을 때는 다른 곳에 숨겨 놓았다고 의심하면서 그들을 괴롭혔다. 음식을 가지고 있다거나 혹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 집에 살고 있는 자들의 외양에 의해 좌우되었다. 조금이라도 살이 붙어 있으면 풍부한 재산 및 양식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앙상한 뼈만 남아 있으면, 조만간 굶어죽을 것이 확실했기에 무사했다. 많은 사람들은 양식을 얻기 위해 소유물들올 비밀리에 교환했다. 부유한 사람들은 밀과 교환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보리와 바꾸었다. 그리고는 집안의 비밀스런 곳에 숨어서 어떤 사람들은 극도의 굶주림으로 인해 낟알 그대로를 먹어 치웠고, 다른 사람들은 빵을 만들었는데 궁핍함과 두려움만이 생존의 유일한 길잡이였다. 어디를 가나 식탁이 놓여 있는 곳은 없었다. 채 익지도 않은 음식을 마치 굶주린 늑대처럼 입에다 쑤셔 넣었던 것이다. [3,5]
그러한 비참한 광경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힘센 자들은 점점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고 약자들은 더욱더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모든 인간적인 감정은 굶주림에 굴복되고 말았는데 그러한 인간적인 감정을 지닌 자들은 언제나 첫 회생자가 되었다. 왜냐하면 극도의 굶주림에 허덕일 때는 자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아내는 남편의 음식을, 아이들은 아버지의 음식을,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끔찍스러운 것은 어머니가 아이들의 음식까지도 자기 입에 쑤셔 넣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이가 그들의 품에서 죽어갈 때에도 죽어가는 이들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한 모금의 양식을 빼앗아 자기들의 주린 배를 채우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식으로 주리는 배를 채우는 것이 아주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당원들은 도처에서 그러한 짓을 서슴치 않고 저질렀다. 문이 잠겨진 집을 보기만 하면 그들은 그 안에 먹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는 부수고 들어가, 겨우 한 입 풀칠하려는 음식을 강탈하였다. 빵 부스러기를 들고 있는 노인을 쳐서 빼앗고 손에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는 여인들의 머리채를 무자비하게 흔들었다. 노인이나 무기력한 갓난 아기에게도 연민과 자비의 정은 하나도 없었고 남은 빵 조각들을 손에 넣는 즉시 그곳을 떠났다. 누가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을 삼켜 버리면 그들은 횡령당하였다고 생각하고는 가혹하게 보복을 하였다. [3,5]
☕ 배고픔의 고통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든다.
유대인들은 이제 그 도시를 떠나지도 못한 채 삶의 의욕을 모조리 상실하였다. 기근은 더욱더 극심해져서 모든 것을 휩쓸어갔다. 집에는 너무 약해서 일어서지도 못하는 여인들과 어린 아이들로 가득 찼고 거리에는 이미 죽은 노인들의 시체가 가득찼다. 젊은이들과 소년들은 굶주림에 허덕이면서 유령처럼 거리를 방황하다가는 실신하여 쓰러졌다. 환자들은 친척들의 시신을 묻어 줄 힘도 없었고 기력이 좀 있는 자들은 자기 자신도 언제 그러한 변을 당할지 알 수가 없어 그들을 묻어 주기를 회피하였다. 시신을 묻어 주다가 죽은 사람도 많았고 채 죽기도 전에 무덤에 매장된 사람도 많았다. 그러한 비참 속에서도 비탄의 흐느낌 소리조차 없었다. 굶주림이 정서를 메말라 버리게 했던 것이다. 서서히 숨져 가는 사람들은 눈물조차 메마른 눈으로 이미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더더욱 심한 것은 강도들이었다. 그들은 묘지 도둑처럼 죽은 자들의 집에 침입하여 시신의 몸에 걸친 옷가지를 벗겨 가지고 나와서 미친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예리한 칼로 시신을 찌르기도 하고 심지어는 칼날을 시험하기 위해 기진한 채 누워 있는 산 사람을 찔러 죽이기조차했다. 그러나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은 냉소를 터뜨리며 그냥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모두들 죽을 때는 당원들은 뒤로 한 채, 예루살렘 성전을 응시하면서 죽어 갔다. 산 사람들은 처음에는 악취를 참을 수 없어 죽은 사람들을 공동 비용으로 매장시켰으나 이 일이 불가능하게 되자 나중에는 시체들을 계곡으로 던져 버렸다. 이런 일이 수없이 되풀이 되자 티투스는 계곡이 시체들로 가득차 부패되어 가는 시체들로부터 썩은 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는 신음하면서 두 팔을 쳐들어 하느님께 맹세하였다. “이것은 내가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 ” [3,5]
☕ 이런 처참한 실상도 요셉푸스가 글로 남겼기에 오늘날 알수 있는 것이다.
제6권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도시에 기근이 날로 더 심해지자 그로 인해 죽은 희생자들은 헤아릴 수도 없었고, 그 공포는 말로 형언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어느 집에서나 먹을 만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을 듯 싶으면 음식을 차지하기 위해서 아무리 절친한 친구 사이라 할 지라도 가장 비열한 방법을 써서 쟁탈전을 벌였다. 굶주림으로 인해 죽기도 했지만 마지막 숨을 헐떡거리다가도 강도들의 침입을 받으면 옷 속에 음식물을 감추어 놓고 죽은 척하는 사람도 있었다. 약탈자들은 굶주림으로 인해 미친 개처럼 입을 벌리고는 비틀거리며 가다가 술취한 사람처럼 문을 두드리는데 그토록 무기력한 상태에서도 한 시간에 같은 집을 두세 번씩 침입하였다. 굶주림으로 그들은 닥치는 대로 씹어 삼켰다. 가장 불결한 짐승일지라도 보이기만 하면 먹기 위해 집어 왔다. 마지막에는 벨트 끈과 신발은 물론이고 선반에서 가죽을 벗겨 내어 씹기까지 하였다. [3,6]
만약, 내 세대의 수많은 목격자들이 내 말을 입증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이 재난을 침묵 중에 그냥 덮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조국에 그토록 현실적으로 존재했던 재난을 덮어 버린다면 내 조국 또한 내게 별반 감사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르단 동쪽의 바테조르라는 마을에 엘레아자르의 딸인 마리아가 살고 있었는데 훌륭한 가문 출신으로 부자였다. 그녀는 주민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도망쳐 왔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그 공포를 맛보게 되었다. 그녀가 꾸려 가지고 온 대부분의 재산은 페레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도중에 도둑들에게 약탈당했다. 나머지 재물들과 약간의 식량도 도둑들이 침입하여 매일같이 강탈해 갔다.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던 그 가련한 여인이 욕설을 퍼붓자 약탈자들은 얼마 후 화가 나서 그녀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녀를 죽일 어떠한 분노나 유감도 없었다. 그녀 역시 식량을 찾는데 지쳐 버리게 되었고 ― 그것을 참을 수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 또한 극도의 굶주림에 시달리고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자 그녀는 그 분노와 굶주림에 굴복하고는 인간으로서의 모든 본성적인 감정들과는 상관없이 가슴에 안고 있는 어린애에게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불쌍한 아가!“ 하고 외쳤다. ”전쟁과 기근, 시민 투쟁 속에서 어떻게 널 키울 수가 있을까?로마인들이 올 때까지 살아 있다 해도 그들의 노예가 되고 말겠지, 그러나 굶주림은 노예 생활보다 더욱 비참하고, 당원들은 노예 생활이나 기근보다 더욱더 잔인하구나. 그러니 내 음식이 되는 수밖에 없구나, 당원들은 복수심에만 불타고 있고, 세상은 한낱 이야기에 불과하고, 다만 한 가지, 유대인들의 불행만이 남았구나.“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아들을 죽여서는 불에 구워서 먹고 나머지는 숨겨 놓았다. … 사람들은 자기 눈으로 이런 비극을 보았고, 그 죄악이 자신의 죄악인 것마냥 몸서리쳤다. 굶주리는 사람의 단 하나의 소망은 죽음뿐이었다. 그들은 이 가공할 장면을 듣지도 보지도 않고 죽은 자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3,6]
☕ 끔찍하다.
그리스도에게 행한 유대인들의 간악한 행위에 대한 하느님의 처벌은 이런 것이었다. 구세주의 참된 예언은 이런 것과 나란히 둘 가치가 있다. 그분은 다음의 예언에서 그 일들을 계시하신 것이다 :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너희가 달아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그때에 큰 환난이 닥칠 터인데, 그러한 환난은 세상 시초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마태 24,19-21)
목숨은 잃는 사람들의 수를 계산하면서 역사가들은 기근과 칼에 의해 죽은 사람이 1,100,000명인데 이들은 폭동과 테러를 일삼다가 도시가 점령당한 후 서로 밀고하여 죽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건장하고 잘생긴 젊은이들은 개선 행진에 이용되었고, 나머지들 중의 17세 이상의 사람들은 쇠사슬에 묶여이집트에서 중노동을 하도록 처해졌고, 더많은 사람들은 지방으로 흩어졌는데, 칼이나 야생 짐승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17세 미만의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 팔렸는데 이들의 숫자만 해도 거의 90,000명에 달한다고 한다.(유대인 전쟁사 p337) 이러한 일들이 베스파시아누스의 재위 2년에 발생했는데 이는 주님이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분은 신적인 권능으로써 이러한 일들을 현재에 발생한 것처럼 미리 보시고는 슬피 우셨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기록한 복음사가들을 통해서 알고 있는데 그분은 어떤 경우에는 마치 예루살렘에게 하시듯이 말씀하셨다 :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루카 19,42-4)
다른 경우에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루카 21,23-4) [3,7]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루카 21,20)
구세주의 말씀과 다른 역사가들의 그 전쟁에 대한 설명을 비교해 보면 누구나 놀라지 않을 수 없고, 구세주께서 예언하신 신적이며 경이로운 예지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구세주의 수난과, 살인 강도를 놓아 달라고 고함치면서 생명의 주재자이신 그분을 처형하라고 간청한” 유대인 군중들의 외침이 있은 후, 전 국가에 재난이 닥쳤던 것이다. 역사적인 기록에 다른 것을 더 덧붙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거스려 범한 죄악의 댓가가 40년이나 유보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충만한 은총의 ‘섭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예루살렘의 첫 주교이며 주님의 형제로 알려진 야고보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살아서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할 수 있는 그 도시에 머물러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그릇된 행업을 뉘우치고 용서와 구원을 얻도록 바라는 마음에서 계속 참으셨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경고하시는 기적들을 행하셨던 것이다. 그 시대들은 지금껏 인용해 온 그 역사가가 언급한 대로의 것이므로 나는 이 책의 독자들이 그것을 참고하라는 것 외에 더 나은 방법을 제시할 수가 없다. [3,7]
☕ 에우세비우스는 로마에 의한 유다인의 멸망이 그들이 그리스도를 죽인 댓가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기』의 제 8권으로 돌아가서 저자가 말하는 바를 읽어 보도록 하자.
“당시 그 불행한 백성들은 사기와 거짓 하느님의 사자(使者)에게 속아서 불길한 전조들이 틀림없이 다가오는 데도 눈이 멀고 미쳐서 무감각한 사람들처럼 하느님의 경고를 무시하면서 무관심하게 대했던 것이다. 처음에 날이 넓은 칼처럼 생긴 별이 그 도시를 덮었고, 혜성이 일 년간 머물러 있었다. 그다음 폭동과 전쟁이 아직 일어나기 전 ‘누룩없는 빵의 축제’를 지내기 위해 백성들이 모여 있을 때, 즉 4월 8일 오전 세 시에 마치 한낮인 듯이 밝게 빛나는 별이 제단과 지성소 주위를 비추었는데 이런 현상은 30분 정도 지속되었다. 이런 현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길조라고 생각했지만 곧 율법학자들이 참된 의미를 해석해 주었다. 그때까지 아무런 사건도 생기지 않았다. 축제를 지내는 동안 대사제가 희생 제물을 바치기 위해 끌고 온 암소가 성전 뜰안 가운데서 양을 낳았다. 아직 한밤중이었을 때 지성소 내의 동쪽 문이 저절로 열렸는데 청동으로 만들어진 그 문은 매우 견고해서 매일 저녁 그 문을 닫기 위해서 20명의 힘센 장정들이 있어야 하는 문이었다. 그리고 그 문의 쇠로 된 막대기는 조여진 채,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문이었다.
축제가 지난 며칠 후 5월 21일에 도저히 믿기 어려운 형태의 초자연적 현상이 나타났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만약 목격자에 의해 입증되지 않고 또 그 표징을 입증할 재앙이 뒤따라 오지 않았다면, 조작해 냈다고 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해가 지기 전, 하늘에는 전지역에 걸쳐 전차와 무장한 큰 무리들이 구름을 뚫고 진군하여 그 도시를 둘러싸는 것이 보였다. 다시 성령강림 축제 때, 사제들이 평소의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밤에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처음에는 격렬한 움직임과 커다란 굉음을 들었다고 선언하더니만 곧이어 다음에는 ”갑시다!“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선언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4년 전에는 더욱 놀랄 만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도시에 유래없는 평화와 번영이 온 것이다. 그때 아나니아스의 아들인 여호수아라는 평범한 시골 사람이 초막절 축제를 지내기 위해 왔다. 성전 안에 들어서자 갑자기 소리치기 시작했다. ”동쪽으로부터의 소리, 서쪽으로부터의 소리, 사방으로부터의 소리, 신랑과 신부를 반대하는 소리, 모든 백성을 반대하는 소리!“ 그는 거리를 지나다니면서 밤낮 그 소리를 외쳐대었다. 저명한 인사들은 이 불길한 소리에 대단히 당황하여 그자를 붙잡아 가혹하게 매질을 했다. 한 마디 변명이나 자백도 않고 그는 여전히 같은 경고의 말만 외쳤다. 유대인 당국자들은 그가 초자연적 힘에 덮어 씌워졌다고 결론을 짓고는 로마 총독에게 보냈다. 거기에서 육신이 갈기갈기 찢어지도록 매질을 당하고도 그는 애걸하거나 눈물 한 방울 홀리지 않고 목소리를 낮추어 가장 슬픈 어조로 매질을 가할 때마다 ‘예루살렘에 화 있으라’고 말했다.” (『유대인 전쟁사』 P326-28) [3,7]
한 단락 뒤에 더욱 놀랄 만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때 그들 나라 태생의 한 사람이 전 세계의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 그들의 성서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가 자신은 그 예언이 베스파니아누스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베스파시아누스는 전 세계를 통치한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만을 다스렸을 뿐이었다. 따라서 그 예언은 아버지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야 함이 더욱 올바른 것이었다. 아버지깨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시편 2,8)
그 때 아래의 말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해당되었다:
“그 소리는 온 땅으로,
그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가네”(시편 19,5) [3,8]
이 모든 것 외에도 오늘날의 역사에 많은 자료를 제공한 요셉푸스의 가문과 혈통에 대해서 알아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는 자신에 대한 이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마티아스의 아들 요셉푸스는 예루살렘에서 온 사제이다. 초기에 나는 로마인들에게 대항하여 싸웠는데 그후 본의 아니게 그 후대 사건의 중인이 되었다.” (『유대인 전쟁사』P.24)
그는 동료 동포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로마인들 사이에서도 가장 유명한 유대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로마시에서 어떤 조상(彫像)을 건립하는 자격을 부여받았는데 로마 도서관에 있는 한 장소에서 그의 필적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는 전 20권의 『고대 유대사』를 저술하였고 일곱 권으로 된 당대의 로마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저술하였다.* [3,9]
㈜ : 저자가 직접 불인 제목은 『유대인 전쟁사』다.
그의 다른 두 권의 가치 있는 책들이 현존하는데 『유대인의 고대성』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최근에 유대인들을 공격하겠다고 천명한 문법학자 아피온과 비슷한 방법으로 유대 민족의 선조들의 관습을 허위 조작하려는 자들에게 주는 답변이라고 하겠다. 이 작품의 첫 부분에서 그는 소위 구약성서를 형성하고 있는 정전의 숫자를 제시하면서 고대의 전통을 배경으로 한 것 중에서 히브리인들간에 인정된 성서가 어느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3,9]
야고보의 순교와 뒤이어 온 예루살렘 함락 이후, 각 지역에 흩어져 아직 생존해 있던 주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은 대부분 그 때까지 생존해 있었던 주님의 친척들(인간적으로 말해)과 함께 모여 있었다. 그때 그들 모두는 야고보를 계숭할 사람을 뽑기 위해 토론을 하고는, 만장일치로 성서에 언급된, 클레오파스의 아들 시메온올 예루살렘 지역 주교의 적임자로 뽑았다. 그는 구세주의 사촌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헤제시푸스는 클레오파스가 요셉의 형제였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3,11]
예루살렘 함락 후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인들 가운데 왕족 혈통이 한 사람도 없도록 하기 위해 다윗의 후손을 모조리 잡아 내라고 명령을 내렸고 그 결과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더욱 만연 되었다고 해제시푸스는 기록하고 있다. [3,12]
클레멘스는 한 통의 확인된 길고 훌륭한 서간을 남겼는데 그 편지는 로마교회의 이름으로 이미 불화가 일어난 코린토의 교회에 보낸 것이다. 나는 많은 교회에서 이 편지가 우리 시대에서처럼 초창기의 예배 집회에서 낭독되었다는 중거를 가지고 있다. 클레멘스 시대에 코린토 교회의 분열이 발생했다는 것은 해제시푸스의 증언으로 보아 명백하다. [3,16]
☕ 성 클레멘스의 ‘코린토 교회에 보내는 편지’다.
수많은 사람들이 도미치아누스의 흑독한 난폭성에 의해 희생되었다. 로마에서는 천부적으로 출중하고 박식한 많은 사람들이 공정한 재판도 없이 처형되었으며 수많은 저명 인사들이 이유도 없이 추방되었고 그들의 재산도 몰수되었다. 결국 하느님께 대한 적개심과 그분을 거스르는 사악함으로 그는 네로의 후계자임을 스스로 입중한 셈이었다. 부친인 베스파시아누스는 신자들에 대한 어떠한 음흉한 흉계도 꾸미지 않았지만 도미치아누스는 박해를 가한 두 번째 인물이었다. [3,17]
그 당시까지 사도이며 복음사가인 요한이 생존해 있었다는 중거들이 많이 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증언했다는 이유로 파트모스 섬에 수감되었었다. 소위 “요한의 묵시록이란 책에 기록 되어 있는 반그리스도인의 이름의 숫자에 관한 기록을 하면서 이레네오는 자신의 작품 『이단반박』 제 5권에서 요한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그의 이름이 공공연히 선언될 필요가 있었다면 실제로 계시를 본 사람이 그 이름을 진술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계시는 아주 오래 전에 드러난 것이 아니라 도미치아누스의 통치 거의 말년인 내 생애에 있었던 것이다.“ [3,18]
과연 그때 당시 신앙에 대한 가르침이 밝게 빛났기 때문에 신앙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던 역사가들조차 그 박해와 그로 인해 빚어진 순교를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기록했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도미치아누스 재위 15년에(서기 96년) 그해 로마의 집정관 중의 한 사람인 플라비우스 클레멘트의 조카딸이었던 플라비아 도미칠라가 그리스도를 증언했다고 해서 그 벌로 폰티
아섬에 귀양갔다는 사실을 주목하면서 정확한 날짜까지도 지적했던 것이다. [3,18]
그때까지 주님의 가문 사람들이 살아 있었는데 그들은 주님의 형제들인 유데의 손자들이었다. 이들은 다윗 가문이라서 고발당했는데 에보카투스에 의해 도미치아누스 황제 앞에 끌려왔다. 도미치아누스 황제는 헤로데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을 두려워했던 자이다. [3,20]
그들은 끊임없는 노동으로 손에 박힌 못과 몸의 꺼칠꺼칠함을 수고의 증거로 제출하기 위해 그에게 손을 보여 주었다고 저자는 계속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에 대한 질문을 받자 ― 그 나라는 어떠한 것이며, 어디어디에서 나타났는지에 대해 ― 그들은 그것은 이 세상의 왕국이거나 이 세상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상적인 것으로서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나타나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고 각 사람의 행실에 따라 응분의 보상을 내릴 세상의 끝날에 이룩될 나라라고 설명했다. 이 말을 듣자 도미치아누스는 그들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천한 것이라고 경멸하면서 그들을 놓아 주라고 하고는 교회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들은 풀려난 후에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는데 그것은 신앙을 증언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가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트라야누스 시대까지 평화스럽게 살 수 있었다. [3,20]
테르툴리아노는 다시 도미치아누스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잔혹성에 있어서 네로에 버금가는 도미치아누스는 한때 이와 유사한 시도를 했었다. 그러나 그는 ― 내 생각엔 상식있는 사람이었기에 ― 곧 그만 두었고 그가 유형에 처한 자들올 다시 소환하기까지 하였다.“
15년간의 도미치아누스의 집권이 끝난 후, 네르바가 권좌를 계승했다. 로마 상원의 투표에 의해 도미치아누스의 명예는 폐위되었고 부당하게 유배당한 자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재산을 다시 소유하게 되었다. 이는 그 시대의 연대기에 기록된 대로이다. 또한 그 당시 요한 사도는 초기 그리스도교 전숭에 의한 대로 그섬에서의 유배 생활이 끝나 에페소에서 다시 살았다. [3,20]
아시아」에서는 도미치아누스의 사후 유배지 파트모스섬에서 돌아와 그 곳 교회를 지도하고 있던, 예수의 사랑받던 제자로서 복음사가이며 사도인 요한이 아직 생존해 있었다. 그가 그토록 오래 살아 있었다는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증언을 두 사람의 증인이 하였는데 그들은 교회의 정통성에 관한 사절들로서 이레네오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다. 이레네오는 『이단반박』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아시아에서 주님의 제자인 요한과 접촉한 성직자들은 요한이 자기들에게 진리를 가르쳤다고 중언한다. 왜냐하면 요한은 트라야누스 시대까지 그들과 함깨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3,23]
그 작품의 3권에서 이레네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요한은 바오로에 의해 설립된 에페소 교회에서 트라야누스 시대까지 살아 있었다. 그래서 에페소 교회는 사도들이 가르친 것의 참된 중인이다.“[3,23]
클레멘스는 그 날짜를 지적하면서 고상하고 유익한 것을 듣기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숙한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다.
”소중히 기억되어 전해진 것으로서 단순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사도 요한에 의한 참된 가르침이기도 한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여 들어 보라. 그 폭군이 죽고 요한이 파트모스섬에서 에폐소로 옮겨 와서 살면서 요청을 받으면 가곤 했는데 주교들을 임명하기 위해, 때로는 전 교회들을 조직하기 위해, 또 때로는 성령이 지명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에게 성직을 수여하러 이웃 이방인들의 지역에 가곤 했다. 그래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도시를 방문해서 그곳 동포들의 문제를 해결해 준 다음에 이미 임명된 주교를 찾았는데요한은 눈여겨 보아 두었던,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이며 매우 멋진 젊은이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젊은이를 당신의 보호에 맡기니, 나의 증인으로서 교회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청년을 모든 열성을 다해 보살펴 주십시오,” 주교가 그의 말을 수락하고 약속하자 젊은이에게 다시 같은 호소와 탄원올 하였다.
그가 에페소에 돌아온 다음 주교는 그 젊은이를 맡아 돌보면서 세례를 주었다. 이렇게 하여 그를 많이 보살핀 후에는 완전한 보호의 표시로서 주님의 인호를 그에게 박아 주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곧 방종을 일삼아 방황하고 사악한 생활을 하는 비슷한 또래 젊은이들의 꾐에 빠져 옆길로 새고 말았다. 그들은 처음에는 그를 사치스러운 향락으로 이끌더니 다음에는 좀더 큰 범죄에 끌어 들였다. 점차 그는 그들의 생활에 탐닉했고 젊음의 무한한 욕구를 자제하지 못하여 고집센 말처럼 길을 벗어나 위험한 길로 내리달렸다. 하느님의 구원을 완전히 거부한 채, 조그만 잘못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이미 타락해 버렸기에 더욱 큰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고 마침내 다른 젊은이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되었다. 그 젊은이는 이런 식의 젊은 배교자들을 데리고 있으면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를 두목으로 하는 강도 집단으로 만들어 버렸고, 잔인성이나 폭력에 있어 그들을 능가하는 자가 되었다.
세월이 홀러 다른 일이 생겨 요한은 또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일을 처리한 후, 그는 그 주교에게 말했다. “주교님, 이제 나의 증인으로서 당신이 주재하는 교회 앞에서 그리스도와 내가 당신의 보호하에 맡긴 것을 돌려 주시오.” 그 주교는 처음에는 깜짝 놀라 “내가 결코 받아 보지도 못한 돈을 독촉하는구나”하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기가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요구에 응할 수도 없었고 요한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요한은 “내가 요청하는 것은 그 젊은이와 내 형제의 영혼이오”라고 말하자, 그 늙은 주교는 한숨을 깊이 내쉬며 눈물을 홀렸다.
“그는 죽었읍니다.”
“어떻게 해서 죽었소?”
“그는 하느님께 죽었읍니다. 그는 사악하고 방탕한 자로 변했읍니다. 강도가 되었지요. 이제 교회 대신 그는 자기와 같은 무장한 강도들을 거느리고 산에서 살고 있읍니다.”
그 사도는 옷을 찢고, 통곡하면서 머리를 쳤다. “훌륭한 보호자여!” 그는 외쳤다. “나는 내 형제의 영혼을 맡겼었소! 즉시 말 한 필과 그곳으로 길을 안내할 사람을 데려다 주시오.” 그는 즉시 말을 타고 질주하여 교회를 빠져 나갔다. 그 장소에 도착했을 때 요한은 그 강도들의 보초에게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는 도망가려 하거나 애원하지도 않고 오히려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일부러 온 것이오! 나를 당신들의 두목에게 안내하시오!” 그 젊은이는 무장한 채 기다리고 있다가「요한」이 오자 알아 보고는 몹시 부끄러워 도망을 쳤다. 그러나 요한은 열심히 그를 쫓아가 나이도 잊은 채 외쳤다. “얘야! 왜 내게서 도망가려 하느냐, 난 네 아버지이며 무기도 없는 늙은이쟎니, 내게 미안함을 가져라. 그러나 나를 두려워하지는 말거라, 너는 아직 생명의 희망을 가지고 있다. 너에 대해 그리스도께 말씀드려야겠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음을 겪으신 것처럼 필요하다면 나도 기꺼이 죽음을 겪으마. 그 짓을 그만 두어라! 믿어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셨다.”
이 소리를 듣고 그 젊은이는 멈추어서서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는 무기를 버리고 몸을 떨면서 격하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노인이 다가오자 그 젊은이는 그에게 매달려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흐느끼면서 탄원했다. 그리하여 눈물을 홀리며 두번째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오른손은 숨기고 있었다.요한은 구세주께서 그의 잘못을 용서해 주셨다고 엄숙히 맹세하였다. 그리고 기도하고는 무릎을 꿇어 회개로 깨끗해진 오른손에 입맞춤을 하였다. 그 다음 그를 교회로 데려 와서 그를 위해 많은 기도를 하고 그와 함께 끊임없는 단식을 하면서 온갖 좋은 말로써 그의 마음을 잡아 두고는 떠나지 못하게 했다. 요한은 참된 회개의 완전한 모범과 새로운 탄생의 완벽한 증거를 보여 주면서 가시적인 부활의 트로피로 그 젊은이를 그 교회에 돌려 보냈다고 한다. [3,23]
☕ 클레멘스가 전하는 사도 요한에 대한 아름다운 일화다.
영감을 받은 위대한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자기들의 삶을 완전히 정화시켰고 모든 영적인 덕을 닦았으나, 그들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 그대로였다. 구세주로부러 신성하고 놀라운 활동력을 부여받은 그들은 확신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을 문학적인 기교나 수사학적인 정교함으로 전할 능력도 바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그들과 함깨 활동하시는 성령을 중거하거나, 그들 안에서 충만히 작용하시는 그리스도의 기적의 힘에 의존할 뿐이었다.(1코린 2,4 참조) 이렇게 그들은 책을 쓰는 일은 거의 생각지도 않고 전 세계에 하늘 나라에 관한 지식을 선포했다. [3,24]
☕ 하느님이 주신 사명은 각각 다른 모양이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마태오와 요한만이 주님이 하신 행업에 대한 기억을 남겨 주고 있는데 그들은 어떤 필요에 의해 그것을 썼다는 확고한 전숭이 있다. 마태오는 히브리인들에게 설교함으로부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려고 결심하여 그는 모국어로 복음을 썼는데 그들과 함께 할 수 없을 때 자신이 쓴 작품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마르코와 루카가 복음을 쓰자 들리는 바에 의하면 계속 말에만 의존하던 요한도 결국 다음의 이유들에서 작품을 썼다고 한다. 이미 쓰여진 그 세 복음이 널리 유통되고 요한의 손에까지 그 사본이 입수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요한은 우선 복음을 듣고 정확성을 확인한 다음,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가 당신의 사명을 시작할 때 이루신 행업들 중에서 빠진 부분만 언급했다고 한다. [3,24]
☕ 복음서가 쓰여진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 전승은 의심할 바 없이 참되다. 세 복음사가들은 구세주의 행업을 세례자 요한의 투옥에서부터 1년 동안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과 이 사실을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서두에서 지적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뒤이어 40일간의 단식과 유혹을 전한 다음 마태오는 그 시대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께서는 유대아로부터 갈릴래아로 물러나셨다. (마태 4,12) 마르코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한다. “요한이 체포된 후 예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셨다.”(마르 1,14) 루카 또한 예수께서 행업을 시작하기 전에 헤로데는 요한을 투옥시킴으로써 또 하나의 죄를 더 범했다고 말하면서(루카 3,19-20) 비슷한 관찰을 하고 있다. [3,24]
이러한 이유로 사도 요한은 복음사가들이 그냥 지나쳐 버린 시간과 구세주가 활동하신 기간, 즉 요한 세례자의 투옥 이전에 발생한 모든 사건을 기록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우선 “이리하여 예수께서는 그분의 기적을 시작하였다”고 기록한 말에서 지적할 수 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활동을 설명 하는 도중에 요한 세례자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때까지 살림 근처의 애논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다. 그리고 “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요한 3,24)고 덧붙임으로써 이를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이처럼 요한은 세례자가 아직 감옥에 갇히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자신의 복음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반면 다른 세 복음사가들은 요한의 투옥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복음서들간의 불일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요한은 그리스도의 활동 초기 단계를 다루고 있는 반면, 다른 복음사가들은 마지막 기간을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세주의 인간으로서의 족보가 마태오와 루카에 의해서 이미 기술되었기 때문에 요한은 그 족보를 생략하고 그분의 신성올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성령께서는 이를 요한에게 맡기셨기 때문에 네 복음서 중 가장 위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24]
복음서 외에 요한의 작품들 중에서 첫 서간은 현 시대 및 상당히 이른 시대의 학자들에 의해 의심할 수 없이 그의 작품이라고 인정되고 있지만 다른 두 서간은 논쟁중에 있다. 묵시록에 있어서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의 견해가 상반되고 있는 실정이다. [3,24]
이러한 시점에서 이미 언급한 신약성서의 작품들을 분류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물론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우선적으로 취급해야 한다. 다음에 바오로의 서간들, 그리고는 『요한 1서』라고 불려지는 서간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베드로 1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외에 만약 합당하다고 생각되면 기회를 봐서 논증해야 할 『요한 묵시록』을 첨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성서로 인정된 것으로 간주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하면서도 논박중인 작품들이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 2서』 및 그 복음사가 자신이나 흑은 동명이인(同名異人)의 작품으로 간주될 수 있는 『요한 2서』와 『요한 3서』 등을 들 수 있다. [3,25]
위경 (僞經)에 속하는 것으로는 바오로의 『행전』, 목자, 『베드로의 묵시록』 및 『사도들의 가르침』과 소위 『바르나바의 서간』을 들 수 있다. 아울러 위경으로 취급하기에 타당하다면 『요한의 묵시록』까지 포함할 수 있겠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어떤 이들은 『요한묵시록』을 위경으로 간주하고 있고, 다른 이들은 정경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3,25]
☕ 아직 요한묵시록이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나는 교회의 전승에 의해 참되고 틀림없으며 정전으로 확인된 작품들을, 비록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잘 알려진 작품이기는 하나 정전이 아니고 논박되고 있는 범주에 속한 작품들과 구별시켜 따로따로 놓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품들을 사도들의 이름으로 이단에 의해 쓰여진 베드로, 도마, 마티아의 복음서들 및 다른 몇몇 복음서들이나 안드레아J, 요한 및 다른 사도들의 행전 둥과 혼동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의 어느 성직자도 자신의 저술에서 이러한 작품들을 언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 사람은 없었다. 또 사용되고 있는 어법은 사도들의 용법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고, 그 작품들의 내용에서 드러난 사상이나 의미 역시 정통과는 매우 불일치하기 때문에 이단들의 위조 작품으로 드러나고 있다. 위경들의 범주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 작품들은 불경스럽고 부실한 작품으로 없어져야 마땅하다. [3,25]
메난데르는 시몬 마구스의 후계자였는데 그의 행동이 보여준 바와 같이 그는 사탄의 영악스런 보조자로서 그의 선임자만큼이나 술수높은 사기꾼이 되었는데 더욱더 신기한 이야기들을 토해냈다. 자기는 비가시적인 애온들로부터* 인간음 구원하기 위해 높은 곳에서 하강한 구세주라고 주장하면서 그는 자신이 직접 전한 마술을 먼저 통하지 않고, 또한 그가 베푼 세례를 받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세상을 만든 천사들처럼 될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이 세례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영원한 불멸성을 나누어 받을 것이며 더이상 죽음에 지배되지 않고 영원히 불멸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이 모든 것은 이레네오의 작품에 명확히 진술되어 있다. [3,26]
☕ 초기 교회의 많은 이단들의 도전을 받았다.
㈜ : 그노시스파 말로서 ‘에온’은 주요한 초자연적 세력이었다. 세상은 사악하고 적의를 품은 영혼을 지닌 하등의 천사들에 의해 창조되었는데 세상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신성한 입회 의식이나 비식(秘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유스티노 역시 시몬의 후계자에 대한 설명을 함으로써 시몬에 대한 논평을 하고 있다.
“카파라테아 출신으로 메난데르라 불리우는 사마리아인이 시몬의 제자가 되었는데 시몬처럼 마귀에 의해 미쳐 버렸다. 그는 안티오키아에 도착해서 많은 사람들을 마술적인 속임수로 현혹했다고 알려진다. 그는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그들은 죽지 않으리라고 설득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의 주장에 영향을 받아 이 신념을 고수하는 몇몇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순교자 유스티노의 『호교론』) 마술에 대한 관심 때문에 심오한 종교적 신비를(1티모 3,16) 그릇되이 표현하고자 하는 결심에서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도용한 사기꾼들을 이용하고, 영혼의 불멸성과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조롱하는 것은 사탄의 영악한 속임수의 특징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기꾼들을 구세주라고 부른 사람들은 참된 희망에서 떨어져 나갔다. [3,26]
그리스도깨 대한 헌신이 확고한 자들을 사탄이 하는 방법을 통해 자신의 수하인으로 만들어 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첫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의해 그들은 에비온파로 불렸는데 그리스도에 관한 천박한 지식만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 이름은 잘 어울린다고 하겠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한 남자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정상적인 어린이로서 성장하면서 의로운 사람으로 존경받게 된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법률의 모든 조목을 지켜야만 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에 기초를 둔 생활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3,27]
㈜ : 이 초기의 이단들이 동정녀 탄생을 부인했다는 점은 동정녀 탄생이 일반적으로 용인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같은 이름을 지닌 두번째 집단은 첫 집단과 같은 터무니없는 낭설은 피하였다. 그들은 주님이 동정녀로부터 탄생하셨다는 것과 성령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과 지혜이신 하느님으로서의 주님의 선재성(先在性)은 부인하였다. 특히 율법 규정의 외적인 준수를 역시 강조하는 것과 같은 그릇된 교리는 그들의 파멸의 원인이 되었다. 그들은 사도 바오로를 율법의 변절자라고 부르면서 그 사도의 서간들을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다만 『히브리인들의 복음』만을 사용하면서 그 외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아주 소홀히 취급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안식일과 모든 유대인 제도를 지켰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날에는 구세주의 부활을 기념하여 정통 교회와 유사한 예식을 거행하였다. 그들이 에비온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러한 관습 때문이었다. 에비온이란 이름은 그들의 지성의 결핍을 시사하고 있는데 이 이름은 히브리인들이 가난한 이를 언급할 때 사용한 말이다. [3,27]
그 시기에 전숭은 체린토에 의해 창설된 이단의 분파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다. 이미 앞에서 인용한 적이 있는 가이오는 자신이 쓴 『반박』에서 체린토에 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때 체린토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어느 위대한 사도가 썼던 계시에 의해서 천사들이 그에게 보여 주었다고 하는 그릇되고 이상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말해 준다. 그는 부활 후 그리스도 왕국은 지상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육욕적인 인간들이 다시 한번 욕망과 쾌락에 사로잡힌 채 예루살렘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성서에 대한 반감 및 사람들을 타락시키려는 욕심에서 그는 천 년 동안 결혼 축제가 벌어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3,28]
내가 살던 시대에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주교였던 디오니시오는 『약속』이란 그의 저서 제 2권에서 오래된 고대의 전숭을 기초하여 『요한의 묵시록』에 대한 명확한 진술을 하고 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체린토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체린토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체린티안이라 불리는 분파를 창설하여 자신이 지어낸 것을 존경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가 가르친 교설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지상적인 것이고, 그가 탐닉했던 일들은 육체의 포로가 되어 관능적인 것을 통해 꿈꾸던 것들을 충족시키는 것으로써 연회를 베풀어 음식과 쾌락을 탐하고, 술 잔치와 결혼 피로연을 즐기거나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좀더 고상한 이름을 붙인다면) 축제와 봉헌과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이다.*“ [3,28]
㈜ : 체린토와 니콜라오의 추종자들은 소아시아 서부 지역의 악명 높은 방탕함올 그리스도교에 주입시키려고 하였다.
이레네오는 『이단반박』 제1권에서 체린토의 좀더 큰 잘못들을 일부 지적하고 있고 제3권에서는 어떤 기억할 만한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그는 폴리 카르푸스를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어느 날 사도 요한은 목욕을 하기 위해 목욕탕에 갔다. 그러나 체린토가 안에 있는 것을 알고는 당장 뛰어 나왔다. 왜냐하면 그와 한 지붕 밑에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도는 동료들에게도 나오라고 재촉하면서 ‘여기를 빠져나가자. 진리의 적인 체린토가 안에 있으니 목욕탕이 더러워질까 겁난다“ [3,28]
요한의 유해가 있는 장소는 에페소의 주교인 폴리크라테스가 로마 주교인빅토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다. 그 편지에서 폴리크라테스는 요한뿐만 아니라 사도 필립보와 필립보의 딸들도 함깨 언급하고 있다.
”아시아」에는 하늘로부터 영광에 싸여 내려와 모든 성인들을 ― 한 딸은 성령 속에서 살다가 에페소에서 잠들어 있지만 결혼하지 않은 채 살다가 죽은 두 딸과 함깨 히에라폴리스에 잠들어 있는 12사도 중의 한 분인 필립보같은 분 ― 찾아 나서실 주님의 재림의 날인 그 날에 다시 부활할 위대한 지도자들이 잠들어 있다. 주님의 품에 안겼고 주교관을 쓴 헌신적인 사제였으며, 순교자이며, 교사인 요한은 에페소에 잠들어 있다. [3,31]
민중 반란의 결과 한때 어느 도시에서는 간헐적으로 박해가 발생했다는 확실한 전숭이 있다. 그 박해의 도중에 이미 진술한 바와 같이 예루살렘의 2대 주교로 뽑힌 클로파스의 아들 시메온은 순교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진술의 권위자는 내가 이미 여러 번 인용한 역사서의 저자인 헤제시푸스이다. [3,32]
“이단자들 중의 몇 명은 다윗의 후손이며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이유로 클로파스의 아들 시메온을 고발하였다. 그리하여 시메온은 120세에 순교했다.트라야누스가 황제였고 전 집정관 아티코가 총독인 때였다”
그 후 유대 왕족들이 추적당하고 있었을 때 시메온을 고발했던 자들도 왕족에 속해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고 헤제시푸스는 말하고 있다. 이미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그의 아버지인 클로파스의 아내인 마리아에 관해 이 야기 하고 있는 복음서에 비추어 보아 시메온은 주님을 직집 본 증인일 뿐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들은 자이기도 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일리가 있으리라고 본다. 헤제시푸스는 주님의 ‘형제들’중의 한 사람인 유다라고 불리는 자의 후손들은 이미 기록한 바대로 도미치아누스 면전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용감히 선언한 후에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까지 살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헤제시푸스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3,32]
“그리하여 그들은 돌아와 순교자요 또한 주님 가문의 일원으로서, 모든 교회를 주재하였고, 모든 교회에 깊은 평화가 온 이후 트라야누스 황제의 통치 시대까지 살아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주님의 삼촌의 아들로서 전술(前述)한클로파스의 아들인 시메온은 이단의 분파들에 의해 고발당하여 그 지방 총독인 아티쿠스의 면전에 서게 되었다. 며칠간 계속되는 고문 중에서도 그는 어떤 순교자의 중인임을 중거하였는데 총독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120살의 노인이 그 모진 고문을 견디어 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결국 그는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3,32]
성스러운 사도단이 여러 방법으로 생올 마치고 신적인 지혜에 귀기울여 듣는 특권을 받았던 세대가 사라지자 거짓 교사들의 속임수를 통해 무신론적인 오류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사도들이 없어지자 이제 그 거짓 교사들은 가면을 벗어 버리고 그릇된 지식을 가르침으로써 참된 진리의 가르침을 역습하려고 시도하였다 . [3,32]
당시 세계 각처에서 자행된 박해는 너무나 극렬하였기에 훌륭한 총독 중의 한 사람인 플리니우스는 순교자들의 수에 경악하여, 신앙 때문에 사형에 처해진 사람들의 수에 관한 보고서를 황제에게 제출하였다. 이 보고서에서 플리니우스 2세는 순교자들은 부당하거나 불법적인 짓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즉 그들이 한 행동들은 새벽에 일어나서 그리스도를 신으로 경배하는 찬미가를 부르고, 간통, 살인 및 좋지 못한 죄악들을 멀리하고 모든 생활에서 법을 지켰다고 보고한 것이다. 트라야누스는 답신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자들은 수색당하지 않을 것이나 발각되면 벌을 받게 된다는 법령을 선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비록 절박한 박해의 위협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박해를 가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마찬가지로 핑계를 댈 여지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들에 대한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때로는 평범한 사람들이기도 했고, 때로는 지방 당국이기도 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공개적인 박해는 아니더라도 간헐적인 공격이 이곳 저곳에서 번뜩였고, 많은 신앙인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순교의 시련을 당하였다. [3,33]
이 이야기는 위에서 언급한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판 『호교론』에서 발췌하였다. 번역을 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아직껏 우리를 잡으려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지방의 총독인 플리니우스 2세는 여러 신자들을 벌주고 그들의 지위를 박탈한 다음에 그들의 수효 때문에 당황하여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랐다. 그는 우상 숭배를 거부하는 것 외에는 그들의 행동에서 그릇된 점을 찾지 못하였다는 보고서를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새벽에 일어나 그리스도를 신으로 경배하는 찬미가를 부르고 그들의 생활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살인,간음, 사기, 절도 둥과 갖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금했다고 보고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트라야누스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신자들을 수색하지 않을 것이나 발각되면 벌을 가하겠다는 칙서를 보냈다.” [3,33]
그 때 아시아에서는 사도들의 동료인 폴리카르프가 탁월했는데 주님을 목격한 증인들과 봉사자들은 그에게 스미르나 교회의 감독직을 수여했다. 그의 시대에 유명한 사람으로는 히에라폴리스 교회 지역의 주교인 파피아스와 오늘날까지 세계적으로 기억되고 있는 자로서 베드로의 뒤를 이어 안티오키아의 2대 주교로 임명된 이냐시오였다. [3,36]
이냐시오는 그리스도를 증언했다는 이유로 시리아에서 로마로 압송되었고 맹수에게 잡혀 먹혔다는 증거가 있다. 그는 군인들의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아시아를 두루 다니면서 머무르는 도시마다 강론과 권고를 했다. 특히 그는 그 당시 처음으로 만연하기 시작한 이단들을 특히 조심하라고 경고하였으며, 사도들의 전승을 충실히 고수하라고 권고하였는데 순교하러 가는 도중에서도 신자들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저술 활동을 했다. 폴리카르프가 있는 스미르나에 도착했음 때 에페소 교회에 한 통의 편지를 써보내면서 그들의 주교 오네시모를 언급했다. 그리고 다른 한 통의 서간은 메안데르에 관해 마네시아 교회에 써보냈는데 그 편지에서는 다마소 주교를 언급하고 있다. 세 번째 편지는 트랄리아 교회에 보냈는데 이냐시오 자신이 진술하고 있는대로 그 교회는 폴리비오가 다스리고 있었다. 또 로마 교회에도 편지를 썼는데 그 서간에서 이냐시오는 그곳 신자들에게 자기가 순교당하지 않도록 기도하지 말라고 간청하면서 그토록 바라던 회망을 빼앗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3,36]
이러한 진술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 편지들에서 몇몇 짧은 귀절들을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
“시리아에서 로마로 가는 도중에 친절하게 대하면 더욱 사나와지는 10마리의 표범 ― 군인들의 1개 분대 ― 에게 갇혀 있으면서 밤낮 바다와 육지의 야생 짐숭들과 싸움음 하고 있습니다. 군인들의 난폭한 행동은 나를 더욱더 제자답게 만들지만 그것이 나를 정당화시키지는 못합니다. 나를 위해 들짐승들이 준비된다는 것은 내게는 좋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속히 그 짐숭들을 발견하도록 기도드리고 있읍니다. 나는 그 짐숭들이 나를 즉시 잡아먹도록 구슬릴 것입니다. 그래도 만약 그들이 잡아먹기를 거부한다면 나는 강제로 나를 잡아먹도록 할 계획입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나는 내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읍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제자가 되기 시작하고 있읍니다. 가시적인 것이든 비가시적인 것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얻으려는 나를 방해하지 말기를! 만약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얻을 수만 있다면 불과 십자가, 야생 짐승들과의 만남, 뼈 마디마디의 부서짐, 수족의 잘림, 전 육체의 으스러짐, 악마의 고통이 내게 오기를!” [3,36]
그는 이 편지들을 스미르나에서 여러 교회에 써보냈다. 여행의 다음 단계에서 그는 트로아스에서 필라델피아의 그리스도인들과 스미르나 교회 그리고 그 교회의 주교인 폴리카르프와 편지로써 연락을 주고 받았다. 이냐시오는 폴리카르프가 사도적 정신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참되고 자비로운 목자처럼 그는 안티오키아의 양때를 폴리카르프에게
맡기면서 잘 보살펴 주도록 당부하였다. [3,36]
스미르나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고 있는 바를 지지하기 위해 알려지지 않은 자료에서 한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부활 이후에도 그분은 육체를 갖고 계셨다는 것을 나는 알고 또 확신하고 있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에게 오셨을 때, 그분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옷자락을 잡아 보고 내 몸을 만져 보아라. 그리고 내가 형체없는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라.“ 그리고 그들은 즉시 그분을 만지고는 믿었다. [3,36]
이냐시오의 순교는 이레네오에게 잘 알려져 있는데 이레네오는 자기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앙을 증거했다는 이유로 맹수들에게 잡아 먹히게 되었을 때, 우리들 중의 한 사람이 말하였다. “나는 순수한 빵이 되고자 맹수들의 이빨에 잘 빨아진 하느님의 밀입니다.” [3,36]
폴리카르프스는 또한 자기의 이름으로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와 같은 서간들올 언급하고 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의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있는 불굴의 인내력, 즉 복된 이냐시오나 루포, 조시모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일원이었던 사람들 및 바오로와 그 외의 사도들이 지녔던 그 인내력을 잘 발휘하여 순종하게 되기를 촉구합니다. 또한 이 모든 사람들은 허무의 길을 달린 것이 아니라 신앙과 의로움의 길을 달렸으며, 그들에게 합당한 자리, 즉 그들이 나누어 가졌던 고통을 겪으신 분인 주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다는 것을 기뻐하십시오. 그들은 현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하느님에 의해 들어올려지신 분을 사랑한 것입니다.” [3,36]
도처에서 사도들이 놓은 교회의 기초에 뿌리박은 이들 위대하고 열심한 제자들은 구원의 메시지를 더욱 널리 전파하면서 ‘하늘 나라’에 관한 구원의 씨앗을 세계 곳곳에 뿌렸다. 당시의 많은 제자들은 참된 철학에 대한 열렬한 정열에서 하느님의 말씀에 깊은 충격을 받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줌으로써 구세주의 계명을 실천하였다. 그리고는 집을 떠나 복음사가들이 기록한 바를 실행하였는데, 즉 신앙의 메시지를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용감히 설교를 하면서 저술로써 복음을 전해준 것이다. 그들은 한두 지방에 머물며 믿음의 기초를 놓으면서 목자들을 임명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신자들을 돌보도록 맡겨 주고는 하느님의 은총의 도우심으로 다른 나라와 민족들을 향해 떠나갔다. 비록 후대의 시대였지만 성령의 많은 기적적인 힘이 그 제자들을 통하여 작용하였기에 첫 말씀을 들은 모든 군중들은 일체가 되어 전심에서 나오는 열성으로 우주의 창조주께 흠숭을 드렸다. [3,36]
클레멘트는 이 서간을 로마 교회의 이름으로 코린토 교회에 써보낸 것이다. 이 편지에서 그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편지』의 많은 사상들을 반영시키고 있는데 과연 그 편지에서 많은 인용을 그대로 하고 있다. 그는 또한 그 기록이 최근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입증하면서 그 기록을 그 사도의 작품 목록에 들어 있지는 않지만 나머지 작품들에 자연스럽게 포함시키는 것처럼 하고 있다. 바오로는 그들의 모국어로 글을 씀으로써 히브리인들과 접촉해 왔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복음사가 루가가 바오로의 원본을 번역했다고 말하고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은 클레멘스가 번역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클레멘스가 번역했다고 하는 주장이 더욱 확실한 것 같은데, 그 이유는 클레멘스의 서한과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문체에 있어서의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으며 기본적인 사상에 있어서도 큰 차이점이 없기 때문이다. [3.38]
파피아스가 필립보의 딸들의 입에서 나온 놀라운 이야기들을 어떻게 해서 듣게 되었는지 말해 주고 있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파피아스는 자기 생전에 있었던 어느 죽은 사람의 소생과 바르사빠스라는 별명을 지닌 유스투스에게 일어났던 일, 즉 독약을 삼켰으나 주님의 은총으로 인해 아무 일도 없었던 놀라운 기적을 묘사하고 있다. 구세주의 숭천 후에 이 유스투스는 마티아와 함께 사도들에 의해 천거되었는데 사도들은 배반자 유다를 대신하여 사도들의 수를 채우기 위해 그들에게 기도해 주었다. 이 일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그들은 유스투스라는 별명을 지녔고 바르사빠스라고도 불리
는 요셉과 마티아를 뽑고 기도하였다 … ” (사도 1,23) [3,38]
나는 파피아스가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인 마르코에 관해 말하고 있는 단편적인 소식으로써 이미 파피아스로부터 인용한 내용들을 철저히 추적해야 하겠다‘
“이것은 또한 그 장로가 말하곤 했던 것이다. 베드로의 통역자였던 마르코는 주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해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을 순서적이지는 않지만 조심스럽게 써내려 갔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도 아니했고 그분을 따라다니지도 아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말한대로 나중에 베드로의 추종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않고 자신의 가르침을 상황에 따라 고치곤 하였다. 따라서 마르코가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를 써내려 갔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마르코는 다만 한 가지 목적, 즉 자기가 들은 바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올바로 진술하기 위한 목적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3,38]
마태오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태오는 그 말씀들을 아람어로 편찬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능력껏 그 말씀들을 번역했다.”* [3,38]
㈜ : 그 진술을 의심할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말씀(즉, 신적인 권위의 선포 말씀)이 무엇인지는 확실치가 않다. 아마 후대에 희랍어로 번역되어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완성된 복음서를 만들기 위해 그 틀을 짜맞추게 된 주님의 권위있는 말씀을 모아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첫댓글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제자들의 노고와 순교를 잘 읽고 있습니다
감동이네요...
마음지기님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