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 창당을 둘러싸고 민추협에서는 치열한 논란이 일었다.
일부는 전두환 체제에서 원내에 들어간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5공 정권을 인정하게 된다는 ‘순결파’와,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어쨌던 원내에 들어가야 한다는 ‘현실파’의 대립이었다. 논란 끝에 다수의 민추협 간부들이 신당에 참여하게 되었다.
미국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자파 인사들의 신당 참여 문제를 ‘자율’에 맡겼다.
정치적 진로는 자신의 신념과 판단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라는 뜻이었다. 하여 순수 재야 출신들은 총선참여를 거부하고, 정치인 출신들은 신당에 참여했다. 민추협의 산모 역할을 했던 문동환ㆍ이문영ㆍ윤혁표 등은 끝내 참여하지 않았다.
신민당은 창당 20여일 만에 신생 정당으로 총선에 참여하여 ‘신당돌풍’을 일으켰다.
총의석수 260석 중 민정당 148석, 신민당 67석, 민한당 35석, 국민당 20석을 차지하여 신민당은 제1야당으로 부상하는 한편 서울ㆍ부산ㆍ광주ㆍ인천ㆍ대전 등 5대 도시에서 전원 당선되고, 득표율도 29.26% (민정당 32.25%)를 얻었다.
그야말로 ‘선거돌풍’이었다.
서울 등 대도시와 중소도시에서 의석을 석권하여 국민의 뜻이 5공 정권을 심판하는 ‘선거혁명’임을 보여주었다. 그 중심에 김대중의 사활을 건 귀국이 침체되었던 선거분위기를 일거에 ‘민주화의 열풍’으로 몰아갔다. 여기에 그동안 5공 폭압에 짓눌렸던 민심이 가세하여 2ㆍ12선거혁명을 가져왔다. 전두환 정권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고, 새로운 민주화의 물꼬를 트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선거가 끝나자 전두환정부와 민정당은 김대중을 음해 비방하는 유인물을 제작하여 각급 공무원과 산하단체ㆍ교사들에게 배포하고, 교사들에게는 악선전 유인물을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낭독하게 하면서 독후감을 쓰도록 강요했다. 김대중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한 정권 차원의 음해공작이었다. 민추협 상임운영위원회는 2월 26일 “김대중 의장에 대한 흑색선전을 중단하라”는 특별성명을 냈다. 다음은 요지.
우리는 이러한 작태가 2ㆍ12총선 과정에서 치솟아오른 민주화 열망의 민심을 두려워한데서 연유된 것으로 보며 김대중 선생 귀국 즉시 국민과의 대면을 차단시키고 그를 자택에 연금시켜 놓고도 불안하여 이렇게 발악하지 않을 수 없는 현 정권과 민정당의 무능에 일말의 동정을 금치 못한다.
우리는 세계 어느 독재체제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이같은 만행이 앞으로도 계속될 경우, 우리들의 분노와 세계 양식의 폭발로 하여 수습할 수 없는 일대 불행이 초래될 수 있음을 경고하면서 전두환 정권을 향해 다음과 같이 우리의 요구와 주장을 밝힌다.
1. 우리의 민주지도자 김대중 선생에 대한 흑색선동을 즉각 중단하고 관련 책임자를 문책하라.
2. 국민과 민주세력에 대한 흑색선동을 즉각 중단하고 관련 책임자를 문책하라.
3. 정치활동 규제법의 철폐와 전면 해금을 지체없이 단행하라.
4. 김대중 선생에 대한 가택연금을 즉시 해제하라. (주석 5)
김대중은 3월 1일 김영삼과 함께 민추협 공동의장 이름으로 3ㆍ1절 기념담화를 발표하고, 3월 15일에는 공동의장 권한대행 김상현 자택에서 김영삼과 함께 신민당 중심의 야당통합, 민추협의 지방조직확대에 합의했으며, 공동의장 취임을 수락했다.
2.12총선은 정계에 큰 변화의 회오리바람을 몰고왔다.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건 신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하면서 민한당은 붕괴되어 자동으로 야권통합의 계기가 되고, 신민당은 민한당 의원과 무소속 의원들이 속속 입당하여 일거에 109석의 거대 야당이 되었다.
전두환은 대통령 취임 4주년을 맞아 3월 6일 제3차 정치활동규제자에 대한 해금조치를 실시했다.
김대중은 김영삼ㆍ김종필 등 16명과 함께 규제가 풀렸다. 하지만 유일하게 사면ㆍ복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마지막까지 그가 정치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채운 족쇄를 풀지 않았다. 김대중은 3월 18일 종로구 관철동 민추협사무실에서 공동의장에 취임식을 갖고, 김영삼과 함께 민추협을 이끌게 되었다. 민추협은 정당이 아니기 때문에 법적으로 참여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때까지는 그나마 연금 상태가 심하지 않아서 3월 22일에는 상도동으로 김영삼을 방문하여 경제대책 등 5개항의 합의내용을 발표하고, 28일에는 김영삼과 신민당사를 방문, 2.12총선 승리를 축하하며 격려사를 통해 기본적 자유선택권을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 공동대표는 5월 18일 광주항쟁 5주년을 맞아 광주학살의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성명에 이어, 25일에는 서울 미문화원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에게 농성중지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당시 두 김씨가 손을 잡고 민주화 투쟁을 벌이면서 민추협은 창립 이래 가장 활기 넘친 전성시기가 되었다.
김영삼계의 비서ㆍ브레인 중 상당수가 원내에 진출한 데 비해 김대중계는 거의 진출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정가에서는 “김영삼 비서는 국회에 들어가고, 김대중 비서는 감옥에 들어간다”는 말이 나돌았다.
주석
5) <민추사>, 1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