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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 뒤에 서 계신 분이 바버자매님입니다.
M. E. 바버자매님은 마치 이 땅위에 조용히 왔다가 간 외로운 여행자 같았습니다. 그녀는 1866년에 영국의 피젠홀, 써폴크 카운티에서 루이와 마르다 바버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주님은 M. E. 바버가 63세 되었을 때 데려 가셨습니다. 그녀의 짧은 생애 동안 그녀는 주님에 의해 두 번 중국에 가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집을 포기하고 수천마일 떨어진 낙후된 나라로 외롭게 여행했습니다. 그녀는 1930년 3월 1일 그녀가 죽기까지 그녀가 신실하게 계속했던, 주님을 위해 바친 그녀의 최고의 해들을 후조우에서 가까운 작은 마을에서 조용히 보냈습니다. 한 형제님은 그녀의 장례식에서 "마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막14:8)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던 워치만 니 형제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그의 유명한 책인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그녀에 대한 그의 감사함을 후에 썼습니다. 마지막 장 '복음의 목표'에서 니 형제님은 그녀의 "주여, 주님의 마음을 만족시켜 드리기 위해 제 마음은 부숴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를 인용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위해 일하기 위한 자격은 무엇입니까?" 라고 그녀에게 물었는데, 그녀는 "주님을 위해 일하기 위한 자격은 일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녀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많은 중국인 젊은이들 중 일부는 그녀로 인해 걱정했습니다. 그들은 "왜 더 큰 도시로 가서 집회를 세우고 일하지 않습니까?"라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작은 마을에 살았습니다. 마치 그것은 그녀가 그곳에서 사는 것이 허비인 듯 했습니다. 한 형제는 그녀에게 "아무도 당신이 아는 것처럼 주님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성경을 가장 산 방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방에 필요가 있음을 모르시겠습니까? 왜 나가서 무엇을 하려 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여기서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시간, 힘, 돈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허비하고 있습니다"라고 소리치다시피 말했습니다. 허비였을까요?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모든 것이 분명합니다. 그녀는 중국에 하나님에 의해 심겨진 바 된 생명의 씨앗이었습니다. 이 씨앗은 정녕 외로움, 수치 당함, 은둔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감사함은 그분은 그녀로 활짝 피어 열매 맺게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서 직접, 간접적으로 영적인 도움을 받았는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놀라운 일은 바로 이것인데: 하나님께서 그녀로 풍성히 열매 맺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살아 있던 동안에는 하나님께서는 그녀로 이 사실을 알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33-34) -M. E. 바버자매님 전기 중에서-
M. E. 바버 자매의 이야기 "무명한 자요"("As Unknown) (고후 6:9) M. E. 바버는 일반적인 세상 뿐 아니라 믿는 이들 가운데서도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막 안의 흐름들"이라는 책 안에 그녀의 이름이 등장함을 알지도 모르는데 그것이 아마 알려진 전부일 것입니다. 그녀는 영국인이었으나 영국 인물 사전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선교사 였지만 데이비드 리빙스턴이나 허드슨 테일러 같이 위대한 일들을 한 사람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한 일의 범위는 넓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일의 대부분은 중국의 작은 구석진 알려지지 않은 마을로 제한되었습니다. "전세계가 나의 교구"라고 말할 수 있었던 요한 웨슬레 같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찬송가들을 썼지만 찰스 웨슬레나 대부분의 크리스챤 찬송가 책들에서 발견 할 수 있는 아이삭 왓츠의 찬송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사랑했으며 영적인 삶에 있어 성숙했었지만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많은 글들을 남긴 앤드류 머레이나 마담 귀용 같은 이들과도 달랐습니다.
그녀는 마치 이 땅위에 조용히 왔다가 간 외로운 여행자 같았습니다. 그녀는 1866년에 영국의 피젠홀, 써폴크 카운티에서 루이와 마르다 바버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주님은 M. E. 바버가 63세 되었을 때 데려 가셨습니다. 그녀의 짧은 생애 동안 그녀는 주님에 의해 두 번 중국에 가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집을 포기하고 수천마일 떨어진 낙후된 나라로 외롭게 여행했습니다. 그녀는 1930년 3월 1일 그녀가 죽기까지 그녀가 신실하게 계속했던, 주님을 위해 바친 그녀의 최고의 해들을 후조우에서 가까운 작은 마을에서 조용히 보냈습니다. 한 형제님은 그녀의 장례식에서 "마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막14:8)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던 워치만 니 형제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그의 유명한 책인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그녀에 대한 그의 감사함을 후에 썼습니다. 마지막 장 \'복음의 목표\'에서 ("왜 이 허비를?" 이라는 제목으로 별도 인쇄됨) 니 형제님은 그녀의 "주여, 주님의 마음을 만족시켜 드리기 위해 제 마음은 부숴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를 인용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을 위해 일하기 위한 자격은 무엇입니까?" 라고 그녀에게 물었는데, 그녀는 "주님을 위해 일하기 위한 자격은 일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녀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많은 중국인 젊은이들 중 일부는 그녀로 인해 걱정했습니다. 그들은 "왜 더 큰 도시로 가서 집회를 세우고 일하지 않습니까?"라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작은 마을에 살았습니다. 마치 그것은 그녀가 그곳에서 사는 것이 허비인 듯 했습니다. 한 형제는 그녀에게 "아무도 당신이 아는 것처럼 주님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성경을 가장 산 방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방에 필요가 있음을 모르시겠습니까? 왜 나가서 무엇을 하려 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여기서 가만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시간, 힘, 돈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허비하고 있습니다"라고 소리치다시피 말했습니다.
허비였을까요?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모든 것이 분명합니다. 그녀는 중국에 하나님에 의해 심겨진 바 된 생명의 씨앗이었습니다. 이 씨앗은 정녕 외로움, 수치 당함, 은둔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감사함은 그분은 그녀로 활짝 피어 열매 맺게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서 직접, 간접적으로 영적인 도움을 받았는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놀라운 일은 바로 이것인데: 하나님께서 그녀로 풍성히 열매 맺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살아 있던 동안에는 하나님께서는 그녀로 이 사실을 알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33-34)
바버 자매님은 50년 이상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 가운데 그녀에게서 직접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한 손으로 다 셀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세월은 그녀가 우리에게 준 깊은 인상을 희석시키지 못합니다. 나이 많은 자매님 한 분은 젊은 시절 바버 자매님을 본 것을 기억했는데, 그녀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동그란 얼굴을 가졌는데, 그 얼굴은 친절하고, 무게 있고, 경건하며 깨어 있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빛으로 충만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그녀 곁에 있을 때 항상 사람들로 편안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녀가 말할 때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기쁨으로 넘쳤습니다. 그녀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는데 이것은 사람들로 인생의 고통을 잊게 해 주곤 했습니다. 그녀는 후조우 말을 유창하게 했습니다.
바버 자매님이 주위 사람들에게 준 영적인 공급에 관해 위의 자매님은 "그녀가 해방하는 말씀은 빛과 생명이 가득했으며 사람으로 모든 것을 떠나 일생동안 주님을 따르도록 만들었습니다." 라고 회상했습니다. 또 다른 나이 드신 형제님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학생이었는데 후에 그녀의 영적인 아들이 되었고 또한 바버 자매님의 동역자이기도 했는데 다음과 같이 기억했습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워치만 니는 그에게 깊은 영향을 준 나이 든 자매님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그 자매님이 바버 자매였습니다. 그녀가 주님께로 갔을 때, 니 형제님은 그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의견으로는 그녀는 주님 안에서 매우 깊었으며 그녀가 주님과 나눈 교통과 그녀가 주님께 드린 신실함은 이 땅에서 거의 찾기 힘든 것들입니다." 니 형제님은 사역할 때 그리고 개인적인 교통 안에서 자주 그녀를 말하곤 했습니다. 니 형제님은 "내 일생동안, 그녀가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이었습니다."라고 말했으며 "내 인생의 가장 큰 얻음은 바로 바버 자매님을 알게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니 형제님은 1933년 영국과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디 엠 펜튼, 죠지 커팅, 제임즈 테일러, 티 오스틴-스팍스 등의 유명한 크리스챤 인도자들을 만난 후 니 형제님은 " 바버 자매님과 비교 할 만한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1933년에 니 형제님이 동역자들과 섬김에 관해 말했을 때 "만일 바버 자매님이 여기 계셨다면 우리의 상황은 달랐을 것"이라고 그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니 형제님은 그녀를 빛나는 크리스챤으로 여겼습니다. 니 형제님이 그녀가 사는 곳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니 형제님이 주님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상황이 어떠하든 그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로 그의 마음에 결심했었는데 따라서 그는 자신을 이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버 자매를 만나 주님에 관해 말하거나 성경을 읽을 때면 그는 항상 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에 있어 부족함을 깨달았습니다.
바버 자매님이 파고다 앵커리지에 사실 때, 그녀는 항상 주님을 위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말함을 통해 그분의 뜻을 나타냈을 뿐 아니라, 그분은 또한 그녀의 인격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니 형제님이 이렇게 간증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많은 형제, 자매님들이 성결하게 됨에 관해 말함을 듣고 성결의 교리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결과 관련된 200여 구절들을 찾았습니다. 그 구절들을 외우고 순서대로 배열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성결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 나이 드신 자매님을 만난 날까지 안으로부터 공허했습니다. 그녀는 신성했습니다. 그날 내 눈이 열렸습니다. 성결케 됨이 어떤 것인지 본 것입니다. 내가 만난 그 인격은 신성했습니다. 내게 이것이 강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이 빛이 나로 더 앞으로 나가도록 해 주었습니다. 나는 피할 수 없었는데 이 빛이 성결을 보도록 해 주었습니다."
1922년, 바버 자매님은 56세였습니다. 니 형제님이 아직 젊을 때 였는데 구원 받은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가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만질 수 있는 많은 청사진들, 기발한 생각들, 훌륭한 계획들로 가득 했습니다. 그는 그의 이러한 것들이 실행에 옮겨만 지면 놀라울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아주 흥분되어 이 모든 것을 행하기 위해 바버 자매님을 설득키 위해 갔습니다. 후에 그는 "내 계획들에 관해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몇 마디 무게 있는 말을 했습니다. 그 때 빛이 임했고 나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내 일은 아주 천연적인 것이어서 인간의 요소들만으로 가득찬 것이었습니다. 빛이 옴으로써 나는 주님께 단지 주님! 내 생각은 단지 육체의 활동에만 주의 할 뿐입니다. 여기 그러한 것들은 생각조차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의 유일한 동기와 소망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상태까지 이끌려졌습니다.
그녀의 글들 가운데, "나는 내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원합니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향한 그녀의 기도였습니다. 여기의 단어들은 어느 유명한 한 나라의 지도자의 전기에서 인용한 것인지도 모르는데, 그가 말하길, "내 자신을 위해서는 나는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내 조국을 위한 모든 것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후에 워치만 니는 이 인상적인 기도문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그녀의 존재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온 이 기도가 바버 자매님의 일생을 정확히 나타내고 설명해 줍니다.
바버 자매님은 1899년에 처음 중국으로 갔습니다. 그녀는 후조우, 푸킨 이라는 도시에 보내졌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태수여자고등학교(이 학교는 영국 교회에 의해서 시작되고 운영되었음)에서 7년 동안 가르쳤습니다. 그녀는 충만한 그리스도의 넘치는 생명으로 탁월한 삶을 살았습니다.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좋아하고 그녀의 가르침을 원했습니다. 이것이 교장의 질투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교장은 그녀에게 불법적인 일들로 공격했습니다. 그녀가 자세하게 조사 받고 있는 동안에 그녀는 주님 앞에서 "만약에 엄지손가락이 작은 손가락과 다툼을 하면 그것은 머리만 아프게 하기 때문에 내가 학교를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느꼈습니다. 그녀는 주님에게 완전히 순종하고 조용하게 태수여자고등학교를 떠났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죄목"들이 영국 선교회 본사로 전달되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십자가의 그림자 안에서 침묵을 배웠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오히려 오해받아 고통 당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녀는 영국으로 돌아갔고 그리고 계속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것을 그 사역의 책임 형제가 이런 말을 할 때까지 피했습니다. " 나의 권위로 내가 당신에게 요구하기를 중국에서 있었던 사실을 말하고, 아무 것도 숨기지 마십시오." 그랬을 때 비로소 그녀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했습니다.
그녀가 영국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그리스도인 매거진, 새벽(The Dawn)의 편집자인 디 엠 팬튼(D.M. Panton)형제님과 만났습니다. 그녀는 그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교파에 관해서 뚜렷했습니다. 그는 또한 성경의 예언과 이기는 자의 진리를 알았습니다. 그는 그녀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살도록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영국에 2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 동안에 그녀는 믿음을 사용함으로 주님께서 그녀로 중국으로 돌아가서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디 엠 팬튼(D.M. Panton) 형제님과 노르윅에 있던 써레이 채플(Surrey Chapl, Norwich - 그가 사역했던 곳)과 교통하던 그녀는 마침내 1909년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번에는 그녀를 도울 만한 큰 선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녀보다 20살이 아래인 그녀의 조카, 미스 벌로드(Ballord)가 함께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미스 벌로드(Ballord)는 적은 적금이 있었지만 미스 바버는 시편 23편에 있는 주님만이 그녀의 공급이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그녀는 주님께서 그녀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그녀가 갈 곳을 인도하심을 믿었습니다. 배가 중국 민 강을 건널 때, 그녀의 필요와 그녀의 장래를 위해 그녀는 단지 조용히 주님을 앙망 했습니다. 아름다운 파고다 앵커리지(Pagoda Anchorage)에 왔을 때 이곳이 그녀가 일할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임을 느꼈습니다. 나중에 그녀는 파고다 앵커리지(Pagoda Anchorage)에 있는 집을 빌리고 그곳에서 주님에게 돌아갈 때까지 살았습니다. 집주인은 시야라는 자매로 고아원의 원장이었습니다.
파고다 앵커리지(Pagoda Anchorage)는 바다 근처에 있는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미스 바버는 단촐한 집에서 살았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좋은 집에 살던 것에 비하면 매우 대조적이었습니다. 후조우에서 그녀의 집으로 가려면 증기선을 타고 메이위에 가서 그리고 작은 배로 근처 마을까지 간 다음, 경사진 골목길을 따라 어떤 오래된 나무 집들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 중 한 집에 그녀의 침실이 있었고 거기서 그녀는 주님과 교통했습니다. 다른 집들은 손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파고다 앵커리지(Pagoda Anchorage)는 미스 바버에게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의 가나안 같았습니다. 이곳이 그녀의 "약속의 땅" 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 땅을 가져가 버리시지는 않을는지? 미스 바버가 그곳에 어느 정도 살고 난 다음, 집주인이 고아원으로 사용키 위해 미스 바버가 쓰던 집들이 필요하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녀는(집주인) 미스 바버가 이사하길 원했고 그녀는 집을 고치려고 일꾼을 보냈습니다. 언뜻 보기엔 이것이 미스 바버의 그곳에서의 마지막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하나님이 그분이 약속하신 것을 저버리지 않음을 믿었습니다. 확신으로 그녀가 기도하기를 "오 하나님 아버지여 내가 비오니 당신이 당신의 약속을 견고하게 하옵소서." 결국 집주인은 어떤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고친 집들은 그녀가 살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1930년 주님에게 돌아갈 때까지 살았습니다. 미스 벌로드(Ballord)는 지속적으로 1950년 즉, 그녀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 갈 때까지 파고다 앵커리지(Pagoda Anchorage)에서 사역했습니다.
파고다 앵커리지(Pagoda Anchorage)는 주님으로부터 준비되었지만, 자주 " 하나님은 항상 푸른 하늘을 약속하지 않으심 "(Hymns #720)을 알게 됩니다. 어느 날 사방으로부터의 압력 때문에 그녀는 완전히 낙심하였고 소망이 없게 되었지만, 주님은 그녀와 함께 서 계심으로 그녀에게 능력을 주었습니다. 이 경험으로 인하여 그녀는 아래의 시를 썼습니다. (Hymn #662)
푯대 향해 가라 외로울지라도 주 널 부르고 있으니 곧 전진하여라
번창하는 산의 도시, 휴이첸으로부터 그녀는 낮선 파고다 앵커리지(Pagoda Anchorage)로 이사했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조용하고 외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아무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녀에게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금전적인 공급이 없었고 그녀는 단순히 주님이 모든 필요를 공급해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 당시에 후조우에 사는 서양 선교사들이 이 소문을 들었습니다 - "파고다 앵커리지에 미스 바버가 살고 있고. 어렵고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또한 많은 때에 그녀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모자란다." 한 선교사 자매가 어떤 상황인지 알기 위하여 그녀를 방문했습니다. 그녀가 그 곳에 도착했을 때에 미스 바버는 떡과 우유로 강아지를 먹이고 있었습니다. 이 자매가 말하기를 "당신에 관한 소문들은 거짓말들이군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아주 놀라운 은혜를 주고 계시는군요." 미스 바버가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주여 감사합니다 ! 주님을 찬양합니다!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금전적인 어려움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그녀가 돈을 내야할 때에 그녀의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한 현대주의자가 그녀에게 와서 금전적인 도움을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에 대하여 "미신적이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그의 도움을 거절했습니다. 그녀가 돈이 몹시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주님이 그녀의 필요를 채울 것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신뢰했습니다. 그 다음날 그녀는 디 엠 팬튼(D.M.Panton - Norwich, England)형제님으로부터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왜 그가 많은 돈을 보냈는지 편지로 물어보았습니다. 그가 답하기를 그녀가 필요할 때에 그는 그녀의 상황을 알지 못했지만 기도하는 도중에 그는 돈을 보내야겠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미스 바버는 영적인 원칙들을 지켰습니다. 그녀는 광야에서 매일 만나를 줍는 유대인처럼 또 그릿(Cherith - 왕상 17:3)) 시냇가에서 하나님이 까마귀로 떡과 고기로 너를 먹이라고 명하심을 기다리는 엘리야처럼 살기 원했습니다. 하루는 두 형제가 바다 건너서 미스 바버와 그녀의 동역자를 방문하러 왔습니다. 이 형제들은 동역자들의 삶과 경제적인 문제에 관해서 관심을 표했고, 권하기를 동역자들이 주님을 위하여 사업을 하고, 예를 들어서 그들에게 중국 녹차와 자수를 우편으로 보내는 일을 권했습니다. 그들이 차를 팔아 이윤을 남겨서 주님의 일을 위하여 쓰자고 했지만 미스 바버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녀는 영적인 원칙을 지켰습니다.
미스 바버는 신실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그녀의 필요뿐만 아니라 그 사역에 필요한 것도 공급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녀와 미스 벌로드(Ballord)는 그들이 육체 안에서 얼마나 제한되었는지 깊이 느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저 여자 둘이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선교회의 후원이 없는 약한 자매들이었지만 그들의 영적 통찰력에 있어서는 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중국이 광대하고 이상하여도 주님께 돌이키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머나 먼 꿈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젊은 사람들을 그분 자신을 위하여 세우실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것을 위하여 그들은 10년 이상 기도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그들이 사는 가까운 곳에 큰 부흥이 있었고 하나님이 주님을 사랑하는 여러 젊은 사람들을 일으켰습니다. 그들 중에는 리넨왕, 리진왕, 페이스풀 룩(Faithful Luke), 지싱첸, 신젱첸 그리고 워치만 니 등이 있었으며, 자매들은 순생지, 신징성 그리고 리윤린 들이 있습니다. 이 자매들은 미스 바버에게 깊은 감동을 받고 그녀와 함께 살고 일하기 위하여 이사했습니다. 지 자매는 그녀의 직장인 선생직을 포기하고 파고다 앵커리지(Pagoda Anchorage)로 이사했습니다. 그리고 미스 바버의 임종까지 함께 있었습니다. 나중에 주님이 미스 바버를 데리고 가셨을 때 그녀를 기리는 뜻에서 송 자매는 주님의 인도로 파고다 앵커리지(Pagoda Anchorage)로 이사하여 주께로 갈 때까지 지 자매와 같이 있었습니다.
많은 영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 미스 바버는 손님 접대를 목적으로 그녀의 집 근처에 여러 채의 집을 준비하였습니다. 그 중 한 집은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집회는 양육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지속되었습니다. 일 주 혹은 이 주 동안 그녀는 학생들과 갈망하는 젊은 사람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어떤 이들의 기억에 따르면 집회 중에 매일 세 번의 성경공부가 있었습니다. 집회 후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노트와 그들의 시를 복습하고 다른 숙제들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집회뿐만 아니라 진리 수업들이 근처 마을에 사는 복음에 굶주려하는 친구들을 위해서 있었습니다. 이 수업들로 복음 진리 즉, 하나님의 존재, 사람의 죄, 심판 그리고 주님의 구원이 체계적으로 밝혀졌습니다. 어떻게 미스 바버는 훈련을 통해 사람들을 세우는 사역을 감당 할 수 있었을까요? 그녀는 기증을 의존하지 않고 또한 광고나 탄탄한 재정적인 지원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주님이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을 신뢰했습니다.
한번은 의사 마이크(Dr Mike)형제가 파고다 앵커리지(Pagoda Anchorage)로 강을 건너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미스 바버와 연결된 많은 동역자들을 보기 위해 왔습니다. 그는 많이 기뻤고 그가 본 것에 대하여 상당히 인상을 받았습니다. 동역자들이 정해진 보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어려우리라고 느꼈습니다. 때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 당신들의 모임에 이름을 만들지 않겠습니까? 내가 나의 나라로 돌아가서 나의 선교회에 보고하겠습니다. 그들은 당신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보내줄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돈을 걱정하지 않고 사역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하지만 미스 바버는 고집스럽게 그의 제안을 거절하였습니다. 믿음의 길은 참으로 외로운 길입니다.
그녀는 젊은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 우리는 한 나이 든 자매님의 회고로부터 약간이나마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많은 나이를 인해 존경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그녀를 바버 이모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말하길 " 우리 모두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늙든지 젊든지 우리는 다 똑 같습니다. 주님 안에서는 나이로 인한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다만 나를 바버 자매로 부르세요." 그 때부터 모든 노 자매들을 " 자매 "로 불렀습니다.
자매들에 대한 그녀의 가르침은 자매들이 진지하고 조용하고 순종적이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녀는 반복적으로 데살로니가 전서와 디모데 전서를 언급하면서 이 두 책들을 자세히 연구했습니다. 이것은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습니다.
그녀는 자매들에게 진리와 권위에 순종하기를 가르쳤습니다. 그녀는 머리에 수건 쓰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녀는 자매들에게 말을 적게 할 것을 권하고, 하나님을 신뢰함을 배우고, 듣는 이들에게 해만 끼치고 아무런 가치가 없는 말의 논쟁을 피할 것을 권면 했습니다. 그녀는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존경하고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녀는 워치만 니, 캉 시위, 그리고 페이스풀 룩(Faithful Luke) - 이들을 그녀의 진정한 믿음의 자녀로 돌보았습니다. 그들 또한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평생동안 주님을 섬기도록 만져 진 바 되었습니다.
1922년쯤 매주 토요일 1년 동안 니형제님은 도움을 받기 위해 바버 자매님을 방문했습니다. 주님이 니형제님과 함께 양육한 몇몇 형제들도 도움을 얻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부분의 형제들은 가기를 두려워했는데 그 이유는 자매님의 심한 꾸지람 때문이었습니다. 자매님의 꾸지람이 그들을 괴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한 형제는 그러한 자매님의 다루심이 합당치 않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루심을 받은 후 모든 형제들은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느꼈습니다.
후에 니 형제님은 간증하기를 "이것이 자매님이 한 모든 말이었습니다. 난 무척 창피했습니다. 그해 난 내 생애에 가장 중요한 공과를 배웠습니다."
바버 자매님은 심각한 목소리로 "주님 손에 가지고 계셨던 모든 떡은 부서지고 주님에 의해 나누어진바 되었습니다. 부서지지 않은 떡은 다른 이들에게 먹게 할 수 없습니다. 형제여 기억하십시오. 많은 때 나는 마치 떡이 이야기하듯 주여, 난 내 자신을 당신께 드립니다."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내 마음에서는 아직도 희망을 갖고 있는데 "주님 비록 내가 내자신을 당신께 드려도 날 부수지 마십시오." "우린 항상 부서지지 않은 떡덩어리로 드려지길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 손에 쥐어진 어떠한 떡도 안 부서지고 남은 것은 없습니다."
바버 자매님은 가끔 사람들이 필요한 말씀을 만지므로 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한번은 나이 많은 자매가 주님께 복종하는 것에 관해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바버 자매님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녀는 자매에게 경고했습니다. " 만약 사탄이 공격할 때, 당신은 주님 안에서 견고히 서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사탄의 미소를 조심하세요. 항복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한번은 바버 자매님이 도라 유 자매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만약 사탄이 우리의 생각을 점령한다면 그는 이미 우리의 생명을 주관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플 땐 단지 감기일지라도 자매님은 항상 질문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한번은 한 젊은 형제와 기도하는 중에 자매님은 주님을 섬기는 또는 성전을 섬기는 것에 관한 에스겔서 44 장을 읽었습니다. "젊은 형제여 내가 20 년 전 이 장을 읽었을 때 난 즉각 성경을 덮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주님, 나로 성전이 아닌 당신을 섬기게 해 주세요."
비록 바버 자매님이 사람을 어떻게 온전케 하는 줄 아는 좋은 선생으로 알려졌지만, 자매님은 또한 복음 전하는 의무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파고다 앵커리지에서 약 10 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미스터 리 집 부엌에서 바버 자매님은 떠듬거리는 후조우 방언으로 리 가족과 다른 친구들에게 자주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버 자매님은 부지런했으며 주님의 말씀을 그 분의 밭으로 가져감에 있어 신실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그녀는 멸시 당하고 모욕당했지만 자매님은 주님과 복음 그리고 사람들의 혼들을 위해 받는 그녀의 고난을 즐거워했습니다. 자매님은 실망치 않고 낙담치 않았습니다. 수고함에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몇십 년을 마치 하루 같이 낙심치 않았습니다.
더욱이 자매님은 사교적인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고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했습니다. 자매님의 동역자들이 다른 배경을 가졌더라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가 되길 격려했습니다. 동역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것과, 세상 적인 것과 죄로부터 분별됨으로써 거룩케 되고 주님이 쓰실 수 있는 합당한 그릇이 되는 것을 배웠습니다. 자매님은 중국인 신년을 기념하지 않았고 세상 적인 풍습에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동역자들 가운데 남자와 여자 사이를 확실하고 정확하게 분별했습니다. 그들 사이에 약간의 대화가 있어도 대부분 그들이 기도할 때였습니다. 한 동역자는 15살 여학생과 함께 물을 날라 준 후 바버 자매로부터 꾸중을 들었습니다.
자매님은 일보다 기도에 더 중점을 두었고 동역자들과 매달 모여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하는 일이 지속되고 자연스럽게 발전되길 위해 기도하곤 했습니다.
자매님은 비록 동역자들에게 상당히 엄격했을지라도 사랑과 배려가 넘쳤습니다. 왕 자매님이 80살 때 주님이 부른 때를 회상했는데, 50년 전 그녀는 믿음으로 살고 주님을 섬기기 위해 교직을 떠났습니다. 그녀가 처음 파고다 앵커리지에 와서 성경 공부 모임에 참석했을 때 바버 자매님이 그녀에게 약간의 돈을 주었습니다. 액수는 적었지만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이것을 받은 기억이 가슴에 너무도 생생해서, 10년이 지난 후에도 그녀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주님은 바버 자매를 그렇게 많이 쓰셨을까요? 그녀의 사역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확실히 그녀의 사역과 삶이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니 형제님이 후에 설명했습니다. "주님의 일은 생명이 밖으로 흘러 나옴의 문제입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당신 안에서 일하시게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그녀를 변화시키고 일 할 수 있게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자매님은 주님을 향하여 살고 사랑할 맘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녀가 어려운 환경에 당면했는데, 그 환경은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댓가로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 환경 속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눈을 들고 말했습니다. " 주님! 당신의 맘을 만족하게 하기 위해, 제 맘을 기꺼이 부수시기 원합니다."
다른 때 니 형제님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고 복종했던 자매님의 경험에 관해 질문했습니다. " 하나님이 그 분의 뜻을 내게 말하길 늦추실 땐 언제나 내게 아직 복종치 않는 마음과 합당치 않은 동기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녀는 이러한 것을 많고 많은 경험을 통해 배웠습니다. 자매님은 니 형제님에게 묻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십니까?" 그녀는 "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십니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바버 자매님이 어떤 문제에 관해 주님과 변론했었습니다. 그녀는 주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도 진정으로는 그것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너무도 어려웠습니다. 니 형제님은 자매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주님 난 이번 공과를 배우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발 제게 항복하지 마세요. 주님 기다려 주세요. 제가 당신께 항복할 것입니다." 그녀는 주님이 자매님께 항복되길 원치 않았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원치 않았습니다. 바버 자매님이 세상을 떠난 후 몇 개월 후 누군가 니 형제님에게 그녀가 갖고 있었던 상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글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주님, 네 마음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해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란 계명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한번은 니 형제님이 이 질문을 가지고 자매님께 왔습니다. "결과적으로 주님은 그의 제자들에게로부터 제자들이 주님께 요구하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제자들에게 요구하셨습니까?" 니 형제님은 주님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버 자매는 대답했습니다. "천만에요! 우리는 사람들의 밖의 실수를 보지만 주님은 그들의 숨은 승리를 보십니다." 이러한 이해는 주님한테서 거듭된 공과를 통해서 배웠음이 분명했습니다. 자매님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대적을 거절함에 있어 그렇게 굳건히 설 수 있었던 것을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한번은 자매님이 나흘동안 아팠습니다. 동역자도 돈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요리사도 자기 집에 갔습니다. 자매님은 왜 자매님이 아파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은 이것이 하나님께로 오지 않고 사탄으로부터의 공격임을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자매는 주님께 말했습니다. "만약 제게 잘못이 있으면 이 질병을 계속 지속시키십시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사탄의 공격이면 전 계속해서 아파하지 않겠습니다." 자매님은 이미 나흘동안 고열로 고생했었지만 즉시 일어나 이렇게 시작하는 찬송을 썼습니다. " 대적에게 내 할말은 언제나 \'아니다\' " 이 찬송을 쓰고 난 후 자매님은 일하러 갔습니다. 아픔은 사라졌습니다. 주님은 질병을 통해서만 자매님을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주님은 다른 많은 환경을 주심으로써 자매님이 항상 아버지께 "예" 하는지 안하는지를 시험하셨습니다.
바버 자매님은 주님 안에서 깊고 풍성했는데 객관적인 지식과 주관적인 체험 모두에 있어서 그랬습니다. 첸 채셍 형제님은 바버 자매님의 동역자로 파고다 앵커리지에 살았었는데 다음과 같이 바버 자매님의 진리에 관한 이해를 요약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모든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호흡하심이며 가르침, 신념, 교정과 의로움 안에 있는 교훈을 위해 유익함을 믿었습니다.
그녀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쪼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그녀는 우리로 진리를 알도록 이끌어 주었으며 선과 악을 분별하며 정직하고 성실하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녀는 교회 안으로 이단들과 사이비 종교가 들어오는 것을 막았고 현혹하는 사악한 영에 대항해 싸웠으며 성도들로 서로 서로 권면하고 기도하며 마귀의 속임수를 저항해 설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우리들로 먼저 그분의 왕국과 의를 추구하며 왕국 안으로 들어가도록 격려하며 왕국의 진리를 전파했습니다. 그녀는 십자가의 진리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 지낸바 되었으며 그분과 함께 부활했음을 --전파하며 우리 자신들을 죄에 대하여는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들로 여기도록 권면 했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그녀는 우리들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하나님의 이기는 자들이 되도록, 그리스도의 군인이 되도록 그리고 고난을 통해 영광 안으로 우리들의 대장을 따라 가도록 권면하며 이김에 관한 진리를 전파했습니다. 그녀는 우리들이 우리의 달란트를 묻어둠으로 미련한 처녀들이나 사악하고 게으른 종들이 되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파했습니다(마 25:1-2,26).
바버 자매님은 건강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젊음 또한 유지했습니다. 그녀의 신선함은 모세와도 같았고 그녀의 신체적 강건함은 갈렙과도 같았습니다. 그녀의 전 생애 동안 중병을 앓은 적이 없었으며 단지 가벼운 병들뿐이었습니다.
세 딸과 한 아들을 가진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가난해 류 여지라는 딸 하나를 라이 집안의 하녀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류양은 매우 아름다웠는데 라이 가문의 한 사람이 그녀를 첩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이 모녀가 이 소식을 들음으로 슬피 통곡했는데 그것은 이 백 사십불을 지불하지 않으면 라이 가문이 그 딸을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버 자매님이 이 문제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애정 어린 마음은 류 자매가 첩이 되게 함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이 모녀는 구원받았었습니다.) 그녀는 이 모녀가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격려했습니다. 당시 바버 자매님은 돈이 없었으므로 그녀 역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몸값을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후에 주 형제와 결혼하게 된 류 여지 자매의 몸값을 지불토록 외국으로부터 이 백 사십불을 보내 주었습니다.
연로한 아브라함처럼, 바버 자매님은 주님의 손길로부터 온 이삭을 받기를 배웠을 뿐 아니라 그녀는 그 이삭을 주님의 손에 돌려 드리는 것을 또한 배웠습니다. 그녀는 황혼기에 추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키 위해 털 코트 갖기를 바랬습니다. 그녀는 기도했고 주님은 미국에 있던 한 믿는 이를 만지심으로 그녀에게 털 코트를 보내게 했습니다. 그 코트를 입고 있던 어느 날 이렇게 말하는 한 형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버 자매님, 당신은 동역자이십니다. 어찌 그렇게 좋은 털 코트를 입으실 수 있습니까?" 바버 자매님은 이 말을 듣자 그 코트를 포기했습니다. 그날 이후 그녀는 그 코트를 다시 입지 않으셨습니다. 그 코트가 다른 사람을 걸리게 한다면 그녀는 그것을 입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니 형제님은 그녀가 이사해야 할지를 물었습니다. 그녀는 "우리는 이사 안 할겁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니 형제님은 그녀가 기도했는지 물어 보았는데 그녀는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그녀가 기도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어떤 형제님은 그녀에게 그녀가 사탄에게 속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기다려 봅시다." 했습니다. 니 형제님은 그녀가 어찌 그리 자신이 있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은 우리와 농담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 건물을 빌리라고 하셨고 그래서 저는 행했습니다. 그분은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어찌 우리를 몰아 내시겠습니까?" 그 후 그녀는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쿨링(후에 니 형제님의 훈련센터가 된 곳)에서 여름 휴가를 평강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녀가 휴가 후 돌아 올 무렵 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그 편지는 그 학교가 파산 신고를 하게 됨으로 다시 문을 열 수 없으므로 그녀에게 그 건물을 다시 빌릴 것을 요청했습니다.
바버 자매님은 당시 매우 젊었던 니 형제님에게 많은 영적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두 분은 진리를 이해함에 있어 어떤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었는데, 일례로 자매들이 신언하는 것에 관해 두 분은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바버 자매님의 조카인 이 자매님은 후에 두 분이 이 문제로 결코 논쟁하지 않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니 형제님이 파고다 앵커리지에 가끔 왔습니다. 바버 자매님은 니 형제님이 말씀하실 수 있도록 관대하게 연단을 내어 주었습니다. 그녀 자신은 앉아서 조용히 들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얼마나 깊이 그녀 안에서 역사하셨는지 보여 줍니다. 다른 이들의 장점을 기억하며 그들의 다른 견해를 인내하는 것은 자아 없는 생명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젊은 니 형제님에게 매우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술람미 여인같이 그녀는 온 생애동안 주님에 의해 이끌려 졌습니다. 또한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아가서 1장 4절에 있는 것처럼 이끌려진 이는 술람미이지만 "우리들도"--많은 처녀들도--"당신을 따라 달려갑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딤후 4:7)
바버 자매님은 믿음으로 가득했습니다. 아플 때 그녀는 의사에게 가거나 약을 먹거나 주사 맞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1930년 2월 그녀는 장티푸스에 감염되었습니다. 그녀의 조카 이 자매님도 병에 걸려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바버 자매임은 룸메이트였던 이 무셰 자매님께 고열로 인해 마사지를 부탁했습니다. 열이 좀 내린 후 그녀는 그녀의 동역자들을 위해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습니다. 쵸우 자매님이 그녀에게 "바버 자매님, 당신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이때에 왜 우리만을 위해 기도하시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모든 동역자들이 항상 내 마음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부담이 있는데 그래서 당신들을 위해 기도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렇게 며칠 더 앓은 후에 그녀는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떠나기 직전 "생명, 생명!"이라고 외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바버 자매님은 파고다 앵커리지의 어느 산 정상에 있는 외국인들을 위한 묘지에 묻혔습니다. 왕 란주 형제를 포함한 몇 형제들이 그녀의 관을 그녀의 집에서 묘지로 날랐습니다. 그녀의 비문에는 '바버 자매님이 안식하시는 곳'이라고 적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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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웟치만 니 형제님의 신앙에 영향을 준 마가렛 바버자매님의 신앙과 사역에 대한 자료입니다
앞선 선배님 들의 신앙기 들을 다시 살펴보면서 주님께 대한 절대 순종과 그뜻의 푯대을 찾아 자신의 온마음으로
주님을 사모하는 열정이 느껴짐니다!
한세대 앞서 주님의 복음 전도사역에 충성한 신실한 지체님들의 신앙여정은 우리에게 본이되어
한단계 나아가는 저와 지체님들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