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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꼬마 여신 꾸마리님이 살고 계십니다. 절대로 이대로 무너지게 내 줄수는 없어서 이렇게 애쓰고 있어요
잘 생겼죠? 세상에 번호판 달고 나온지 두 달 되었어요
전 자존감이 있어서 아라비아 숫자같은 것은 안써요. 오로지 네팔리 숫자만 쓴답니다
오늘 저를 타 주신 한국분이 카트만두까지 오면서 제 번호판 읽는 것을 배웠다네요
제 고유번호는 "루 1 짜 6403" 이랍니다. (잘난척 쩔죠? ㅎㅎ)
저 이래봬도 비싼 몸이랍니다.
빈 천막 교실에 모여 수다떠는 네팔 젊은이들
아마도 네팔 미래를 위해 걱정하는 토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지대를 의존해 안간힘을 쓰고 있네요
더바르 광장 천막촌 모습
위험구역이라 해도 사람들은 말을 안 들어요
정확한 역사는 모르지만 족히 천년은 넘게 살아온 삶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있지만 조만간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 갈 수 있기를 기도 중입니다.
정확히 이 건물을 모르겠어요.(가이드북이 없습니다 죄송)
멀리서 읽히기로는 수상관저쯤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상태로는 아마도 새로 건물을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비교적 현대건물 처럼 보이는데 왜 무너졌는지 모르겠어요.
다행히 무너지진 않았어요....사는게 죽음처럼 두렵습니다
왜 하필 나만 이래야 하나요? 건물 틈 사이로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업이라면 삶은 너무 가혹합니다
건물이 무너졌다고 꿈이 무너지진 않아요. 친구들도 만나서 미래를 얘기합니다.
여긴 안전하다네요. 저녁에 뭐 먹을까 이야기 중일까요?
아무리 역경이 와도 우리의 삶은 여전히 부딕입니다. 갈 곳도 많고 살 것도 많지요.
카트만두 일기
찜통 같은 룸비니 한국 절에서 떠나 벽화 불사를 하고 있는 23세 학빠스님과 중국인이지만 이곳 네팔에서 전통 티베트 비구니 스님이 된 어린(이름모름) 중국스님 이렇게 셋이서 행복하게도 택시를 빌어 카트만두로 오게 되었다. 택시비가 약간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두 분 스님을 모신다는 마음으로 기꺼이 거금을 쓰기로 했다.
굳이 에어컨은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non-a/c로 했지만 오다 보니 카트만두 아래까지는 꽤 더워 경비를 아낀 것이 이내 미안했다.
각설하고,
룸비니에서 무굴링까지의(강을 깃점으로 다리 왼쪽은 포카라행) 길은 중간 몇 군데를 빼놓고는 완전 좋았다. 가이드북을 들고 다니지 않아서 애써 강 이름을 알 수는 없으나 룸비니를 벗어나 한 시간 정도 지나니 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바람도 좀 시원했고, 계곡인지 강인지가 큰 줄기를 이루고 길을 내고 있었다.
내가 탄 택시는 어제저녁 발 품을 판 덕???으로 천루피를 미안하게도 깍아서 NRs.10,000 로 결정을 했는데 두 달 전에 구입을 했다는 완전 새 차였다. 오는 도중 얼마주고 샀냐고 물었더니 NRs.22렉 이라고 한다. 계산기로 두들겨 보니 소형 자가용 그것도 기어변용이 우리돈으로 이천사백만원이 넘는다. 거의 모든 공산품들이 인도를 통해 수입이 되는데 자가용은 특히 관세가 높은 물품이라고 기사 Dipu는 투덜거린다.
길이 제법 잘 포장된 도로 위로는 이제 한국에서는 스포츠나 레저용으로 쓰이는 자전거와 릭샤와 거금짜리 자가용과 고물상으로나 가야 될 년식을 알 수 없는 와이퍼도 옆 문도 없는 고철로 된 짚차와 운전은 세계에서 최고라고 자랑이라도 하듯 추월을 마치 요술처럼 해대는 빵소리 요란한 로컬버스와 행복한 팩키지 여행을 하시고 계신 분들이 안에 계실 밖에서 보아도 에어컨 빵빵 나올 듯한 투어리스트 버스들이 엉켜 달리는 길 양 옆으로는 내 어릴적 추억을 건드리는 모(모내기 직전의 작은 벼싹) 찌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자전거는 내 어릴 적 6km 왕복 12km를 통학해야 했던 소중한 학교 추억이다. 초등학교 4학년쯤부터 중3까지 자전거 통학을 했는데 지금은 자전거 통학을 하는 아이들을 보기가 힘든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인도 오기 2틀전 초등학교 마을 친구들에게 연락이 와서 정말 수십년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고 주로 자전거 타고 통학하던 이야기 과일 서리하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지금 저들도 우리들처럼 그렇게 훗날 이야기 거리가 될 만한 삶을 살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굳이 싸~~한 마음이 들 이유는 없었다.
내륙 쪽에는 강도 좋고 해서 얼 듯 보아도 기름진 땅들이 늘어져 있는데 아직 농사 짓는 방법은 내 어릴 적 동네 모습을 하고 있다.
강 너머로 옥수수 밭도 보이고 바나나 밭도 보이고 산간지역 사람들이라 생활력이 강한지 화전을 이룬 밭들 사이로 작은 마을도 보이고 산 중에는 멀리서 보아도 어렴풋이 짐작을 할 수 있듯이 가난이 배여 있음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이 나 보다 얼마나 더 행복할지는 모를 일이라 생각했다.
신기하게도 아래 녘에는 모내기가 한창인데 점심으로 달밧을 먹은 무굴링이란 삼각지대 마을을 지나니 누렇게 고개를 숙인 벼들이 보인다. 고지 차이가 있으니 온도차이가 있어 아마도 같은 나라이지만 농사철이 다른 모양인 것 같았다.
카트만두를 오르기 전 한 마을을 지나다 보니 텐트들이 보인다 덥기도 하겠지만 지진 후 심신의 안정을 못 찾은 사람들이 아직 집으로 들어가서 잠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스쳐 지나며 보아도 낡은 집들이 무너졌음을 알 수 있었다. 시멘트 건물들은 안전한데 대부분 무너진 건물들은 흙 벽돌로 이루어진 집이다.
카트만두시내로 들어와 스왐부나트 사원으로 간다는 중국 비구니 스님을 내려드리고 보다나트쪽으로 오다보니 큰 길 왼쪽으로 넘어진 건물들이 군데군데 보이기 시작한다.
게스트하우스 였다는 5층 건물은 앞으로 고꾸라져 있었지만 도시 전체를 놓고 보니 내가 생각했던 만큼의 피해는 아니라서 다행이다 생각하지만 저 건물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집을 잃었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 켠이 먹먹해진다.
보다나트에 도착에 티베트스님이 머문다는 세첸곰파 게스트에 들어갔는데 프런트직원이 친절하지도 싹싹하지도 웃음기도 없는 젊은이다.
하루 비수기라 10% 깍아서 NRs.900이란다. 방도 비좁고 혹시 내 비자를 도울 수 있는 여행사를 알 수 있나 해서 도움을 요청해서 브로커와 통화를 했는데 도울 수 없다고 한다. 해서 다시 짐을 들고 여행사가 많은 타멜로 택시를 타고 이전에 머물렀던 무스탕이란 호텔로 check in을 했다.
가능하면 가격을 깍지 않으려고 하지만 여행자 습성이 남아있어서 ㅠ.ㅠ
하루 NRs.700으로 결정을 하고 들어와 보니 말 그대로 호텔방이다. 깍은 괴씸죄?가 적용돼 전망이 좋은 방은 얻지 못했지만 아까 본 세첸곰파 방보다 두배 세배는 크고 물도 잘 나오고 이쪽으로 오기를 잘 했다고 스스로 칭찬을 해 본다.
짐을 풀자마자 피해지역을 찾아 나서 보았다. 군데군데 흙 벽돌 집들이 무너져 너브러져 있고 퇴근시간과 맞물려서 그런지 아니면 시장이라 그런지 도무지 빠져나갈 틈도 없이 사람들 왕래가 많다.
이전 안면이 있는 핀조라는 네팔인 가게를 가 보았더니 문이 닫혀있다. 처가집이 인도 다르질링으로 알고 있는데 지진이 난 후 가족 모두가 그곳으로 갔단다. 아마도 2,3일 후에는 올거라고 내게 어디서 왔냐고 반갑고 살가운 질문과 대답들을 해 준다. 다행히도 핀조가게는 피해는 크지 않단다. 다만 놀라서 카트만두를 피해갔으리라 예상을 해 본다. 어제도 진도 5정도의 여진이 있다고 하니 이곳 사람들의 불안심리가 얼마나 클까 예상이 되는 일이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재가 모여있는 곳…그래서 외국인은 입장료를 내야 했던 바산티푸르 더바르 광장에 있는 유물들은 종이장 구겨지듯 거의 허물어지고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위험하다는 danger zone과 안전해서 지나가도 좋다는 safe zone 간판 사이로 허술하게 쳐 놓은 밧줄로 된 바리게이트와 허물어진 벽돌을 쌓아놓은 벽돌무덤과 97년 처음으로 네팔에 왔을 때 감탄하고 놀랐던 그 위대한 인류의 유물이기도 했던 네팔의 문화를 절대로 가벼이 할 수 없는 문화재, 그 건물을 바치고 있던 사이사이 조각되었던 신상들을 떠받히고 있던 신들의 상들이 한쪽으로 치워져 있다.
꾸마리 사원은 다행히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지지대를 받혀놓고 이전에는 기념품들이 늘어져 있던 더바르 광장에는 텐트가 쳐져 있어 들어가 보니 일부는 임시 학교로 쓰이고 있었다.
어린 학생들은 두 달 전의 공포를 기억하는지 모르지만 여전히 시끄럽고 수업이 끝났음에도 일부 학생들은 남아서 텐트교실에서 수다를 떨며 웃기도 하고 사진기를 들이대니 손을 흔들어 준다.
도대체 얼마나 걸었을까!
지치기도 하고 배도 고프고 해서 발길을 돌려 호텔로 돌아오다 길을 잃었다. 도대체 어디를 헤매는지 모를 곳에 이르러보니 스암부나트 사원 가는 길 언저리까지 걸어가고 있다.
다행이다 초행이 아니어서 다시 호텔쪽으로 찾아 올 수 있어서 말이다.
외국인이 많지는 않지만 드문 드문 보인다.
노심초사 걱정했던 카트만두는 허물허진 집들과 집을 잃은 사람들은 사람들 대로 살아가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처럼 살아감을 볼 수 있어서 감사하다.
지진이 또 올지는 모르지만 다시 누군가 여행을 한다고 해도 걱정할 일은 아니다 싶다고 생각한다. 네팔에 오실 분 들은 편한 마음으로 오셔도 정말 무리가 없을 듯싶다.
글을 쓰다 보니 방안에 모기가 많다.
몸에 바르는 모기약을 바르고 시작했어야 했는데 인생은 늘 급해서 탈이다.
네팔에 오실 분들에게 도움되는 글 이었으면 합니다. 7월3일 카트만두에서
첫댓글 생생한 현지 소식 고맙습니다.^^
오늘에서 답글 답니다. 그동안 에유...바빴습니다.
인도 네팔 행정에 익숙해 진 것 같다가도 막상 닥치고 나면 인내력을 필요로 합니다.
잘 따라가 보렵니다.
네팔에 관광객이 부적거리고, 빠른 회복을 기대해 봅니다.
생생 정보 감사합니다.
오늘은 Moldul 이란 마을을 다녀 왔습니다.
카트만두 외곽 마을인데 피해가 생각보다 컸습니다.
안타깝습니다.
네 정말 정말 어떻게 해야 할 지...
그런데도 네팔 군부는 구호물자에 높은 관세 붙이고...ㅠ.ㅠ.
맑은 정치인을 뽑는게 우리의 사명 같은 것 임을 다시금 새겨 봅니다.
빠른 현지 소식 감사해요...
구호금과 구호 물자들이 잘 공평하게 나누어 지고 있는 않는 생각입니다.
저는 오늘 개인적으로 개인에게 조금 도움을 주고 왔습니다. (물론 그 돈은 제 지인들이 저를 믿고 준 것이구요)
네팔이니까 그럴수도 있겠네요.
고생하셨어요.
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 ^^
고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네팔사정에 동감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상세한소식에 눈에 선 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또다른 소식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와이파이 속도가 내 인내심 만큼이나 늦지만...요. ㅎㅎ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어딜가나 가슴 찡~~~~한 모습들이 많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