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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고대사의 중국날조 스크랩 하늘바다 바이칼
앱솔 추천 0 조회 83 13.10.01 19: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우리의 순례성지, 바이칼  - 정재승(봉우사상연구소장)
 

바이칼 송가(頌歌)
라스뿌찐(1991년 지음)

지구에는 조물주가 아끼는 것이 있다네
태초에 그의 권능으로 구별지어 놓은 것이 있다네
그것은 추호도 의심없이 바이칼
영광에 둘러싸인, 거룩하기 그지없는 바이칼
기적을 이루는 그의 창조의 힘
지난 세월동안이건, 지금이건 변함없이
태고적부터 있어온 그대의 장엄한 영이여
바이칼은 이제 감탄할 일만 남아있구나
수많은 노래에 실려 흐르는 그의 모습
수백분의 일도 그려내지 못하네
그를 허락하신 하늘에 대한 찬양으로
그의 자태를 다 드러낼 수 있을까?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은 바이칼 호수에 경배하네
어떤 이는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어떤 이는 실제적인 도움에 감사하여
바이칼을 보면 사람들은 멍해지네
그들의 어떤 상상으로도 능히 다 담을 수 없는 자태여
바이칼은 누워있네
그와 견줄 그 어떤 것을 도무지 찾아내기 어려운 곳에 바이칼은 누워있네
그 어떤 다른 것이 될 수 없는 그곳에
우리 영혼의 심연에 바이칼은 성스러운 자태로 깃들이네

 

현대 러시아 시인의 바이칼 예찬이다.
   나 역시 작년 여름 바이칼 호수를 다녀온 뒤 전적으로 바이칼 예찬론자가 되었다.

앞으로는 좀더 나아가 숭배자가 될런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든다.
지난 3월 6일에서 15일까지 바이칼 호수, 정확히 얘기하면 이르쿠츠크와 리스트비양카 부근의 바이칼 호수지역을 다녀왔다.
겨울 바이칼호를 보자는 친구 몇몇이서 작년 가을부터 벼르다가 나선 길이었다. 3월달은 바이칼호에겐 아직 겨울이다.

하지만 추위는 한결 누그러져 있고 겨울에 내린 눈은 그대로 쌓여있으며,

호수 역시 꽁꽁 얼어 있으므로 남녘의 여행자들에게는 겨울풍광을 살펴보기에 딱 알맞은 시기라 생각되었다.
막상 현자에 가보니 80년만의 이상난동 기후로 작년같으면 영하 10-20도를 오르내리던 기온이

영하 10도에서 영상까지 올라가는 아주 포근한(?) 날씨였다. 산속에 들어가면 무릎까지 눈이 쌓여 있었으나,

도시에는 눈이 다 녹아 길이 질퍽질퍽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작년에 일정이 바빠서 들러보지 못했던 이르쿠츠크 시내의 시베리아 향토역사박물관과 근교에 있는

 민속박물관  <딸치>, 부리야트족 자치구 <우스제르드>마을의 민속박물관 등을 폭넓게 살펴보았다.

이곳들을 방문해보면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풍속과 전통문화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고

우리와 같은 몽골리안으로서의 문화적 동질성 등을 많이 체감할 수 있어 좋은 경험이 되었다.

 

   특히 이르쿠츠크 역사박물관내의 에벤키족 샤만의 복장과 유물들,

야외민속박물관 <딸치>에 재현해 놓은 역시 에벤키족의 산속 풍장형태나,

음식물을 보관하는 창고 - 고구려의 부경과 똑같다 - 및 야외 주거지 형태들,

또한 이르쿠츠크 시에서 서북쪽으로 한시간반정도 자동차로 달리면 나타나는 바이칼호 주변의 전통원주민

부리야트족 자치구 <우스제르드>마을안에 있는 민족박물관에서 맞부닥친 말들의 그림은

경주 신라고분의 <천마도>와 똑같이 하늘로 비상하고 있었다.

 

   겨울 바이칼 곳곳에서 보이는 자작나무숲과 부리야트 원주민의 전통적인 말 숭배관념,

그리고 신라고분에서 발견된 자작나무위에 그려진 하늘로 솟구치는 말그림등 이런 것은

시베리아 바이칼 문화와 우리 전통문화와의 어떤 동질성내지 연관성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드는 하나의 연결고리라 할 것이다.

또한 부리야트인들의 전통풍속을 보면 사람이 태어나면 어릴 때 이름을 개똥이, 소똥이 등으로 비천하게 부른다는데,

이는 오래살라고 하는 기원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옛적에는 똑같았다.

 

   좀 특이한 얘기는 전통 부리야트 마을의 제일 웃어른은 샤만(무당, 영적 지도자)이었고,

그 다음은 대장장이였다 한다. 바로 얼마전 타계한 전통 샤만은 정말로 도력이 뛰어났는데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술이 매우 높았고,

한번 사람을 보면 무슨 병이 있는지, 무엇하는 사람인지를 단숨에 알아냈다고 한다.

이러한 샤만은 좌우 양손에 소뼈와 말뼈로 된 지팡이를 지닐 수 있었다.

   그리고 일반 여자들이 시집갈 때에는 화살통과 화살들을 가지고 갔다는데, 이는 새로운 것들을 가지고 간다는 뜻이라고.

아무튼 참 신기하고 재미있는 풍속담들이 아주 많았고 너무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박물관을 나와 부리야트자치구 마을안을 어슬렁거리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가는 철수와 영희들을 발견한

나는 무심코 철수야! 하고 불렀다. 정말 똑 철수같이 생긴 부리야트 아이가 지나가는데,

우리 예전에 부잣집 애들이 등에 메고 다니던 가죽가방을 메고 한손에 손가방을 들고가는 폼이

내 관념으로는 철수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아이도 나의 단말마적인 부름에 멈칫하며 뒤를 돌아다 본다.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말이 러시아어다.

그순간 나는 환상에서 벗어났지만 하여간 외양은 순전히 철수였던 것이었다.
어쨌든 우리 문화의 정체성과 근원을 밝히는 차원에서 시베리아 지역 특히 바이칼호 지역문화와의 연관성을

앞으로 폭넓고 다양하게 연구해나갈 필요가 있다.

 

   누가 시베리아를 황량하다 했는가?
물론 겨울이 길어서 추우니까 그랬는지도 모르나, 이번 여행길에서 느낀 것은 적어도 바이칼 지역만은 풍요하고 넉넉한 느낌이었다.
아무리 러시아 지방경제가 파탄이 나고 인민들의 생활은 어렵다 했어도

실제 거리에서 부딪히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윤기나는 모피외투와 담비털모자를 뒤집어쓴 외모들은 그리 어둡거나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시장이나 백화점은 활기에 차있었고 특히 식품매장에는 각종 먹을 것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우리는 이르쿠츠크 생약연구소도 방문했는데, 거기에는 바이칼호 주변에서 나는 야생약초들을 그대로 팔거나,

가공해서 각종 영양제나 약품, 샴푸나 비누등의 생활용품으로 만들어 팔고 있었다.

그런데 그 종류가 생각보다 엄청 다양해서 바이칼호 주변의 약초생태가 매우 풍부한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5월부터 9월까지 다섯달만 농사가 가능한데,

워낙 땅이 기름진 흑토(黑土)라서 비료나 농약이 전혀 없이도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다고 한다.

대부분 주민들이 교외에 <다차>라는 개인 사택이 딸린 농토들을 갖고 감자, 각종 채소들을 가꿔 먹기 때문에 식량문제는 없다.

어느날은 환바이칼 철도를 따라 바이칼 해안선을 5시간에 걸쳐 기차로 여행했다.

여기 사람들은 바이칼을 호수로 생각치 않고 바다로 여긴다. 실제로도 해안선으로 느껴진다.

작년 여름에 본 바이칼 해안도 아름다웠지만 - 그 코발트색 물빛과 거대한 뭉게구름 저편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산맥들 ......

   겨울동안 꽁꽁 얼어붙은 해안선과 그 얼음장위로 덮인 눈위에 반사되는 햇빛들로 하이얀 안개가 피어나

바이칼을 더욱 환상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야말로 백색의 향연이다.

이르쿠츠크 역에서 전철로 3시간 가면 슬루잔까 역인데, 이곳은 운모가 많이 생산된다.

여기서 환바이칼 관광철도가 시작되어 5시간을 계속 바이칼 해안선을 따라 기차가 달린다.

여름에 오면 더욱 색다른 풍광으로 우리를 유혹할 것이 틀림없다.

아마 이러한 기차밖 경치는 바이칼호만의 특유한 볼거리일 것이다. 장엄하고 신비함 그 자체이다.

 

   이 기차는 리스트비양까 맞은 편의 바이칼항(Port Baikal) 역에서 끝나고 여기서 내려 배를 타고 리스트비양까로 건너간다.

이 리스트비양까에 아까 얘기한 야외 민속박물관 <딸치>가 있고 자작나무숲이 있다.
이번 겨울여행에서는 자작나무숲을 많이 보았다. 바이칼 주변의 숲은 주로 붉은 소나무와 자작나무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는데,

특히 눈덮힌 겨울숲에 하이얀 자작나무는 그야말로 숲의 귀족이라 불리울 정도로 기품이 있었고 아름다웠다.

붉은 소나무들이 위풍당당하고 정정한 기상이라면 하얀 자작나무는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세련된 감각의 아름다움으로 그 신비함을 드러내었다.
이런 느낌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곳에 사는 원주민, 러시아인,

외부의 방문객 모두 공통으로 느끼는 정서랄 수 있다. 다들 자작나무에 반한 나머지 숭배하기까지도 한다.

   이밖에 다양한 문화적 체험들을 하였는데, 우선 호숫가의 자작나무숲에 있는 통나무집에서 사우나를 하고

달구어진 알몸상태로 바로 앞의 호숫가 얼음구멍으로 퐁당 들어가 식히고 나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두세번 하면 추위는 사라지고 몸에서 열이 난다. 기분이 정말 상쾌하고 몸이 개운하였다.

   하루는 이르쿠츠크 시내에 있는 국립연극극장에서 현대무용을 감상하였는데, 대학생들의 수준치고는 꽤 볼만하였다.

객석은 만원이었고 관람 열기가 가득했다. 극장내부나 외관이 1894년 지어진 건물로서 매우 화려하였다.

시베리아의 빠리로 불리운 도시답게 거의 매일 문화예술 행사가 열린다. 대신 영화예술쪽은 별로 활발하지 않다고 한다.

   현지 러시아 예술가들과의 접촉도 이루어졌는데,

리스트비양까 야외목조박물관 가는 길에 사는 한 조각가 노인을 방문했고 이르쿠츠크 시에서 유명한 화가의 갤러리도 가 보았다.
이 조각가는 목조각을 주로 했는데, 작품을 자기 집앞에 진열해 놓았다.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체제비판 죄목으로 이미 10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온 사람이었는데,

공산주의 통치를 비판한 목조각품과 인류문명비평가의 입장에서 세상을 풍자한 작품들이 많았다.

작가의 스케일이 매우 크고 넓다. 집안에 들어가 서재를 구경했는데, 온갖 책들이 서가를 가득 메우고 있어 그의 독서편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러시아는 슬픈 운명의 역사를 지닌 나라이며 한번도 인민을 위해 존재한 정부를 못 가졌다." 고 한탄했다.

자기 스스로 무신론자이며 인간의 속성을 악하고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면서 좀 비관적 견해를 보인다.

   이밖에 이르쿠츠크 시내의 데까브리스뜨 즉 12월 혁명가 발콘스키의 집을 방문했는데,

이 또한 근대 러시아 혁명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자료이다.
그리고 시베리아 곰사냥을 한다고 이르쿠츠크 사냥전문 아카데미(5년제) 출신의 프로 사냥꾼들과 산속을 헤매기도 하는 등

짧은 여정에 많은 체험을 축적하였다.
시베리아 바이칼은 생각보다 볼 것이 많고 깊고 푸른 역사와 문화적 전통이 자리하고 있어서

한두번의 답사로는 그저 감만 잡힐 뿐 확연한 모습은 그 정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들이 쉽게 잊고사는 꼭 필요한 정신적 유산들이 풍부한 자양분들을 지닌 채 자연속에 묻혀 우리를 부른다.

올 여름에도 우리는 그 부름에 응답하듯 또 길을 떠날 것이다.

    바이칼은 인류문화적, 생태환경적 등등 여러모로 우리에게 또 하나의 순례성지가 되었고 우리는 기꺼이 순례자가 될 것이다


■ 바이칼이 어디인가 알혼은 또 어디던가   소설가 김종록의 한민족 원류 탐험기- ① 바이칼에 서다
 
­1만3천년前, 한민족의 발자국을 찾아서…
336개의 강이 사방으로부터 흘러들어 만든 위대한 호수 바이칼.

알혼은 이 바이칼에 떠 있는 섬으로 샤머니즘의 고향이자 몽골리안의 시원지이다. 우리네 本鄕인 것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한민족은 약 1만3,000년전 후빙하기인 충적세에 따뜻한 기후를 찾아 바이칼 호수를 떠나

한반도에 들어와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소설 ‘풍수’의 작가 김종록이 심령의 울림을 따라 겨레의 얼을 찾아 떠났다.

몽골 초원과 시베리아 대초원을 건너고 이르쿠츠크를 지나 바이칼에 이르는 수차례의 歷程. 그 시원문화 답사의 감회와 여행 경험을 묶어 3회에 걸쳐 소개한다.<편집자> 

 

"바이칼 알혼 섬에 가자!”
웅혼한 고구려 사나이임을 자칭하는 문명탐험가이자 대학에서 역사를 강의하는 윤명철 박사의 전화를 받고

나는 한동안 감전된 사람처럼 숨을 죽였다. 바이칼이 어디인가. 알혼(Olkhon)은 또 어디던가.

샤머니즘의 고향이자 몽골리안의 시원지이기도 한 그 꿈의 섬에 간다는 말인가.
“어떻게…그곳을….”

   나는 차마 믿기지 않아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이미 속으로는 ‘물론 간다!’고 외치고 있었다.

윤박사와 함께 만주에 있는 고구려 백암성과 오녀산성 일대를 답사하고 온 지 채 두 달이 안된 즈음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인사동에서 만나 자초지종을 듣기로 했다. 흥분은 컸지만 요지는 간단했다.

1만년 겨레의 얼을 찾아 제1차 한민족시원문화답사단을 이끌고 학술기행을 떠날 참이라는 것이었다.

주최측은 봉우사상연구소라고 했다. 봉우(鳳宇)는 선도 수련 붐을 일으킨 바 있는 국학자 권태훈 선생의 자호였다.

 

   며칠 뒤 봉우사상연구소의 정재승 소장과 윤박사를 고구려연대 사무실에서 다시 만났다.

모두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여행 일정을 꼬치꼬치 따지고 들었다.

이미 두차례나 바이칼을 찾았지만 아쉽게도 두차례 모두 알혼 섬은 밟지 못한 터수였다.

그래서 알혼은 발로 디딜 수 없는, 꿈에서도 사무치는 섬이 돼 있었다.
“반드시 알혼 섬에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이번 여행에서 빠지렵니다.”

   두사람은 분명히 간다고 거듭 말했지만 아직 북방에 관계된 일에서 확실한 것은 없다.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북방의 서비스산업은 지금도 영 기대에 못미친다. 분명한 것은 가봐야 알 수 있었고,

가서도 밟아봐야 아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말의 불안을 종래 떨칠 수 없었다.

   다시 북방으로 향한다. 벌써 몇번째인가. 여행은 으레 마음을 달뜨게 하지만

나의 북방여행은 하도 엄숙해 은현(隱玄)한 계시를 받으러 가는 구도의 길과 같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북녘으로의 여행은 ‘순례’로 말바꿈된 터다. 이쯤 되고 보면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며 수련이다.

   무엇이 나의 북방여행을 이토록 무겁게 만드는가.

 

바로 역사 때문이다. 말발굽 소리 흩날리며 대평원을 내달렸을 우리네 조상들의 본향(本鄕)이 그곳 북방이란다.

비파형 청동검과 사슴뿔 혹은 자작나무형 금관과 빗살무늬토기 그리고 샤먼 등으로 대강 간추려지는 북방문화가 우리의 뿌리란다.
아직 고고학적 발굴작업이나 인류학적 연구가 미미하여 숱한 비밀을 묻고 있는 그곳 검은 땅이 우리 민족의 중요한 기원지란다.

   여전히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너무도 많은 터라 단정은 금물이지만 이제껏 밝혀진 사료나 유물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문화적 동질감을 만끽할 수 있다.

더욱이 만주벌판은 부여와 고구려의 역사현장이었으니 어찌 가슴속 피를 뜨겁게 만들지 않겠는가.

그래서 일찍이 단재 신채호는 ‘고구려의 수도 지안(集安)을 한번 가보는 것이 역사서를 1만번 읽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무거운 짐을 지는 자는 현명한 나그네가 못된다. 더욱이 마음의 짐을 지니고 떠나는 나그네는 여행이 뭔지도 모르는 얼치기다.

학술탐사나 취재여행은 그 성격상 얼마간의 부담을 떨칠 수 없다지만 처음 몇차례의 여행은 지나치게 긴장했고 그만큼 무거웠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여행도 인생의 한 부분인데 즐거우면서도 유익한 쪽이 낫겠다고 생각을 고쳤다.

그랬더니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이 보였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여행지에서는 이방인이고 그래서 처음부터 한계를 지닌다.

더구나 언어장벽까지 가로막고 있으니 욕심낸들 쉽게 붙잡힐 리 없다.

 

   만주와 몽골, 시베리아는 나라는 제각각이어도 우리에게는 하나로 여겨진다.

만주 벌판을 찾다 보면 몽골 초원이 보이고 그 초원의 연장선에 시베리아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나의 10여년 북녘 여행은 한·중수교 직전부터 만주벌판을 시작으로 몽골과 시베리아까지 발빠르게 쏘다녔다.

나중에는 알타이 산과 서역 티베트 고원까지 영역이 넓어졌다. 그러다 마침내 내 몸을 구성하는 피와 뼈,

영혼의 모태에 대한 목마름을 달래기 위한 주술적 행위로 자리잡아 버렸다.

   고즈넉하게 북녘 하늘을 우러러본다. 그곳에는 기러기나 청둥오리 등 우리와 너무 친숙한 겨울철새가

뭔가 구구절절한 소식을 전하려고 편대를 지어 나는가 하면,

밤하늘에는 성스러운 북두칠성이 빛난다. 뿐인가.

백두산 천지와 만주 벌판이 있고 우리들 지친 몸과 영혼을 깨끗이 씻어줄 성스러운 정화수이자 인류의 씻김굿터인 바이칼이 있다.

 

가는 곳이 곧 길

   바이칼로 가는 길은 보통 세 코스가 있다.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비행기로 가서 거기서 다시 비행기나 열차로 이르쿠츠크로 가는 길이 있고,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까지 비행기로 가서 거기서 역시 비행기나 열차로 갈아 타는 길이다.

마지막으로 노보시비르스크까지 비행기로 가서 비행기나 열차로 이르쿠츠크로 가는 방법이다.
한때 동대문이나 남대문을 들락거리는 보따리장수들 때문에 생긴 전세기가 직접 서울에서 이르쿠츠크까지 데려다 주었던 적이 있었다.

   한번은 운 좋게 그 편을 이용한 적이 있는데 비행기가 뜨네 못뜨네 요란을 떨기 일쑤였고 탑승했다가도 늦은 저녁까지 이륙하지 못해 평창동 호텔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떠나는 해프닝도 있었다.

돌아올 때도 현지에서 너댓시간씩 기다리게 만들어 러시아의 아에로플로트 항공은

오랫동안 내 기억에 아름답지 못한 문신을 새겨놓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우리 국적의 한 항공사가 문제였다. 이번 코스는 이미 한번 밟은 적이 있는 울란바토르를 경유해 가는 노선이었다. 2001년 6월14일 새벽 5시30분에 인천공항에 집결한 우리는 점심 무렵까지 항공사 직원들과 집요한 승강이를 벌여야 했다.

처음에는 2시간 연발을, 나중에는 현지 기상악화를 이유로 다음날 오전 7시30분에 뜬다는 통보였다.

당시 그 항공사는 파업중이어서 결항이 잦았는데

그들은 일반인이 확인하기 힘든 현지 공항의 일기 악화를 핑계로 승객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다음날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몽골 대사관 영사와 통화해 현지 기상자료를 건네받기로 했다며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한 끝에야 겨우 이륙할 수 있었다. 현지 자료를 받아보니 전날 결항한 노선은 이 항공사뿐이었다. 몽골에서 바람 없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그것을 구실삼는 데야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항공사의 횡포로 인해 일행은 출발부터 지쳐 있었다.

하지만 네시간의 비행 끝에 문득 맞닥뜨린 몽골의 초원은 언제 보아도 나그네의 주럽을 싹 가시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연초록 초원은 바다였고 비행기는 그 위를 떠가는 배였다. 드넓은 초원에 구름 그림자가 얼룩진다.

눈이 새뜻해지고 의식이 환기된다. 이곳은 초원의 나라, 바람의 고향인 것이다. 귓가를 때리는 말발굽 소리도 전혀 환청이 아니다.

   언젠가 울란바토르에서 고비 사막으로 날아간 적이 있었다. 쌍발 여객기가 사막에 랜딩하는데 활주로가 따로 없었다.

착륙하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을 만큼 심하게 흔들렸지만 눈을 떠보니 세상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공항에 대기하고 있던 지프도 길이 아닌 곳으로 얼추 방향만 잡고 마구 달렸다. 섬광처럼 스치는 착상이 있었다.


‘청년아, 네가 가면 그곳이 곧 길이다!’

   오지여행이 선사한 아포리즘이었고, 드넓은 사막 혹은 초원에서나 가능한 명제지만

이후 내 뜨거운 피는 언제 어디서든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맥박을 다듬질했다.

산다는 것이 저마다의 길 찾기이니 길이 어디 공간에만 있던가.북방에서 승마는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다.

전혀 어렵지 않다. 몽골의 유명한 휴양지 테렐지나 만주벌판, 바이칼 호수 주변에서도 신나게 말을 달릴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허벅지가 헐거나 떨어지기도 하고 뒷발질에 채일 위험도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실제로 윤박사는 말에 채여 정강이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탐험가로 유명한 그는

말을 타고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한 베테랑이지만 말에서 내려 무심코 곁에 서 있다

채이는 바람에 여행 내내 고생을 하고 돌아와서도 한동안 깁스를 해야 했지만 앞으로도 결코 말 달리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단다.

그만큼 말타기는 신나는 일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초보자라도 곧잘 말을 달린다.

선뜻 나서지 못하고 부러운 듯 쳐다보기만 하는 유럽인들이나 일본인들과는 확실히 그 기질이 다르다.

우리가 진취적인 기마민족의 후예임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나는 한국인의 맥박 속에는 말발굽 소리가 들어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이 사실임이 입증된 셈이다.

집단무의식의 발현이니 어찌 놀라운 발견이 아니겠는가. 국내에서도 승마공원이 여럿 생겨 얼마든지 말을 탈 수 있다지만

역시 대초원을 달려야 제 맛이다.
“추, 추!”    박차를 가하면서 내지르는 몽골말이다. 일찍이 이처럼 속도감 넘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추, 추!’ 소리에는 바람을 가르는 비장함과 오금에 힘이 뻗치는 긴장감이 스며 있다.

이 단음절 속에 강인한 기마민족의 얼이 온축돼 있는 것이다. 세계를 정복한 공포의 기마병단을 떠올려 보라.

아직도 유럽인들은 그 시절을 악몽으로 여기고, 찬란했던 과거에 비할 수 없이 초라해진 오늘의 몽골인에게는 내심 긍지로 자리해 있다. 몸은 비록 남루해도 자부심을 새기고 사는 그들이 은근히 부러웠다. 대부분의 몽골인들은 자존심이 강하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를 제패했던 역사의 유산에 기인한다. 우리는 잘 살고 있다지만

아직도 역사적, 정신적 열패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사실 바이칼로 가는 길 가운데 가장 좋은 길은 우리 땅에서 열차를 타고 북한을 경유하여 백두산 천지에 올라보고

만주의 고구려 유적을 둘러본 뒤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바꿔 타는 코스일 것이다.

이른바 ‘철의 실크로드’를 누벼보는 것인데, 이 길은 일찍이 우리네 선각자들이 달렸던 길이고 무엇보다 경비가 적게 든다는 장점이 있다. 더구나 열차를 ‘철마’로 부르기도 하지 않던가. 말을 타고 다녀야 대륙은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아직 이 길은 기약할 수 없다.

 

북방종족의 성소, 하늘연못

   그러니 현재로서는 몽골 코스가 최상인 듯싶다. 테렐지나 고비 사막,

혹은 몽골인들의 정기가 나온다는 흡수골(000) 호수를 거쳐 바이칼로 가는 것이다.

특히 흡수골은 몽골인들이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제사지내는 성스러운 호수다. 바이칼 바로 남서쪽에 자리하는데

그 또한 달라이 에치, 곧 어머니의 바다라고 불릴 만큼 거대한 호수다.

수정처럼 맑은 이 호수를 몽골인들은 바이칼에 전혀 손색없다고 자랑한다.

나라마다 성스러운 호수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것이 북방종족들의 특징이다.

티베트인들에게는 마팜융초가 있고 만주족에게는 징보후(鏡泊湖)가 있으며 우리에게는 백두산 천지가 있다.

하늘을 모시고 살며 제사하는 풍습이 있는 북방종족들에게 높은 지대의 호수는 천신이 강림하는 성소다.

   2001년 6월16일 오전 8시45분, 막 이륙한 울란바토르발 이르쿠츠크행 소형 미아트 여객기 안에서 5년 전의 바이칼 여행을 회상했다. 1996년 8월7일 오후 9시. 나는 그때 막 미끄러지기 시작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자리잡고 있었다.

일행이라고는 전직교수 이동한 형과 나, 이렇게 달랑 둘이었는데 둘 다 초행이었고 확보된 정보도 거의 없었다.

예정대로라면 다음날 오후 10시 울란우데에, 그 다음날 오전 9시에는 이르쿠츠크 역에 닿을 것이었다.

몽골쪽 여행사와 러시아쪽 여행사의 업무 연결은 매끄럽지 못해 예약 확인조차 안되는 상태에서 떠나 몹시 불안했다.

일면식도 없는 한인 체류자들의 연락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한가닥 위안이었다.

   차창 밖에는 비가 내렸다. 또 무모한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고생을 사서 할까.

일제때 여러 해 동안 만주와 시베리아를 유랑했던 아버지는 불량한 떼놈, 호떼놈,

붉은 이리떼들이라는 원색적인 용어를 동원해 가며 나의 거듭된 오랑캐(?) 땅 여행을 경계했다.

옛 시절의 일이라며 적이 안심시켜 드리고 떠나왔지만 강도나 비행기 추락 따위의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열차강도가 있다는 풍문도 들었겠다, 일몰 속에서 미지의 시베리아로 북행하는 침대차에 누운 심사는 고달펐다.

눅눅한 실내 공기도 우울함을 더했다.

   4인용 ‘쿠페’ 침대칸에는 몽골인 보따리장수 부부가 합석했다. 그들은 침대칸이 미어터지도록 짐을 바리바리 싸서 쟁였다.

뭔가 걸리는 것이 있었던지 불안해 하는 눈치들이었다.

러시아 뚱보 여차장의 고압적이고도 세세한 검표가 끝나자 그들은 비로소 자기네와 닮은꼴의 외국인인 우리 쪽에 관심을 보였다.

한국인이라는 말에 곧 친숙한 표정으로 접근해온 여자는

그물코에 붙이는 납덩이보다 별반 나을 게 없어 보이는 조잡한 진주 목걸이를 한 타래 꺼내 보이면서 사라고 권했다.

   자연산이라고 하는데 동그란 구슬은 하나도 없었다. 남자도 질세라 투박한 가죽잠바를 꺼내 들고 진짜 소가죽이라고 초를 쳤다.

모두 사실일 것이었다. 다만 취향이 아니었기에 기분 나쁘지 않게 사양하고 책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고비사막에서 묻어온 피로의 여파로 잠이 몰려왔다. 곧 알타이 유물인 ‘얼음공주’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고깃배가 들어오면 포구에 파시가 서듯, 시베리아의 역에서는 열차가 들어올 때마다 시장이 선다.

열차가 20∼30분씩 정차하므로 시간은 충분하고 팔 것도 살 것도 많다. 산딸기와 찐 감자, 피로조크(고로케),

맥주와 보드카…. 울란우데 등 바이칼에서 가까운 역에서는 오믈 훈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오믈은 바이칼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돼버린 청어 비슷한 생선인데 비린내도 나지 않고 맛도 좋아 보드카와 곁들이면 그만이다.

내리기 귀찮으면 창문을 통해 물건을 살 수 있고 그마저 귀찮으면 열차에서 상시 공급되는 뜨거운 물로 컵라면을 끓여 먹어도 된다.

식당칸을 찾아 러시아 음식을 체험할 수도 있다. 검은 빵과 생수, 샤실릭이라는 꼬치구이,

샬란카라는 돈가스 비슷한 요리와 닭고기 요리도 있는데 값은 생각보다 비쌌다.

   잠자는 땅, 혹한의 거친 대지를 깨우며 달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여행은 누구나 한번쯤 해보고 싶은 체험일 것이다.

객차는 2인용 ‘룩스’, 4인용 ‘쿠페’, 6인용 ‘프라취’ 이렇게 세가지가 있는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Km를 6박7일에 주파한다고 한다. 그 사이 60개의 역을 지난다.
시베리아 대평원을 달리며 맞는 일출과 일몰은 사이버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은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시베리아는 으레 동토(凍土) 혹은 검은 땅의 이미지로 다가오지만 사실은 빛의 대지이고 숲의 바다다.

겨울이라고 해서 살벌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눈 덮인 설원에 비치는 햇살은 오로라를 방불케 한다.

   비록 겨울이라 해도 숲이 있는 대지는 따뜻해 보인다. 본래 우리는 숲의 인간이었고

우주목(宇宙木)이 즐비한 시베리아 타이가(아한대 침엽수림이 주종을 이루는 삼림지대)는 제신들이 축복을 내리는 성지였다.

언덕이건 호수건 숲이건 바라보이는 그 무엇을 들추어도 요술처럼 북국의 신화가 풀어헤쳐질 것만 같다.

특히 샤먼들이 우주목으로 즐겨 쓰는 자작나무 숲은 신화 그 자체다.

섬세하고 우아한 가지와 파란 이파리를 달고 하늘 높이 뻗어 올라가는 자태는 손을 뻗어 쓰다듬어 주고 싶을 만큼 순수하다.

게다가 은빛이 감도는 그 순백의 껍질에 이르러서는 찬탄이 절로 나온다.

 

   자작나무는 빛의 나무다. 만지면 백색 가루가 묻어나는 둥치에 햇살이 비치면 나무는 날개를 퍼덕이며 둥둥 떠오른다.

시베리아 샤먼의 엑스타시는 이 나무의 상승작용에 편승한 현상이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꿈길이며 시적인 길이지만 다른 얼굴도 가지고 있다.

단순히 저렴한 공간이동을 위해 열차에 탔다면 그 순간 열차는 철창으로 변해 버리고 만다.

수많은 유형수들을 시베리아 강제노역장으로 이송하는 데 쓰인 교통수단이 바로 이 철도라는 것,

그래서 지옥행처럼 지겹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역사는 1891년 3월17일, 당시 황제였던 알렉산드르 3세가 칙령을 공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당시 러시아는 농민이 급속히 늘어 1인당 경작지가 줄어만 갔고, 이에 따른 농민들의 불만을 해결할 탈출구가 필요했다.

당시의 활발했던 공업화 추세도 농촌의 유휴노동력을 흡수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인구분산 효과도 얻고

공업화에 따른 철과 석탄 그리고 목재 등의 풍부한 자원도 공급받을 수 있는 시베리아 개발은 좋은 탈출구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의 생명선이 시베리아 철도였다.

   모스크바에서 우랄산맥까지는 이미 1880년대에 건설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1916년 전 구간이 완공되었다.

첫 기차가 이르쿠츠크를 지나간 것은 1898년의 일로, 이때 이르쿠츠크의 온 시민이 꽃을 들고 나가 기차를 맞았다고 한다.

이르쿠츠크는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의 거의 중간지점으로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 쪽으로

한시간 반 거리에는 ‘팔로비나’라는 간이역이 있다. 말 그대로 정확히 시베리아 철도의 중간지점에 해당하는 곳에 세운 역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아무리 낭만의 상징이라 해도 준비는 철저히 해야 한다.

세면도구나 부식거리, 캠핑용 스테인리스 컵 등을 준비하면 약간의 불편함 속에서도 여유롭게 차창 밖 풍경을 완상할 수 있다.

그러나 역마다 반복되는 오랜 정차와 그때마다 잠기는 화장실 등을 겪다 보면 새뜻하게 다가온

자작나무나 적송 등으로 이루어진 타이가 풍광 바라기도 어느덧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울란우데 근처에서는 바이칼을 보려는 의욕으로 다시 눈이 크게 떠졌지만, 오랜 열차여행은 확실히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그래서 여유가 있다면 유서 깊은 역에서 내려 주변을 며칠씩 둘러보고 가는 것도 좋다.

 
■  바이칼 호수의 달빛    카인다 레디(본명: 구상서, 작가), 1996, 도서출판 문경
 
   (P.349) ..... 1만년전은 신석기시대가 시작하는 변혁기였습니다. 오랜 빙하시대가 끝나자,

인간들은 화살과 창에 부착하는 작은 찌르개 같은 세석기와 마제석기를 대량으로 만들고, 아울러 농경을 시작하는 등,

인간 생존에 비로소 자신감이 샘솟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바이칼 호수의 고아시아족 대이동은 이 때 이루어집니다.

당시 바이칼 호수의 여러 가지 석기와 재료의 종류와 제작방법 등을 고려해 보면,

1만년전 원시인들의 사색과 언어능력이 높은 수준이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지은이는 바이칼 호수의 고아시아족 주도세력이 바로 배달족의 뿌리임을 확신하고,

본 이야기 소설을 씁니다. 여기서 바탕으로삼는 고증의 근거는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에서의 고아시아족 종족 발생과 이동설입니다.

이것은 이미 고고학적으로 판명이 난 사실입니다.

저명한 러시아의 시로코고로프(Shirokogorov) 교수는 그의 저서, <북방퉁구스의 사회 조직>이라는 책자에서,

동방의 배달족은 바이칼호수가에서 발생한 고아시아족의 한 지파가 이동하면서 형성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중국의 능순성(凌純聲)교수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도 고아시아족의 이동설을 뒷받침합니다.

또 옛날의 중국 역사 기록자들은, 북방에서 이동해온 고아시아족들의 후손을 예맥족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철을 뜻하는 예(濊)는 빛을 의미하는 맥(貊)과 같은 종족의 뿌리에 대한 다른 이름이므로, 결국 맥족이 고아시아족일 것입니다.
   고아시아족 학설의 근거 유적으로서는 시베리아의 시르카(Shilka) 동굴이 있습니다.

시르카 동굴을 오늘도 시베리아 남부 바이칼 호수 부근에 현존하는 동굴입니다.

시르카 동굴은 1952년 소련 당시 러시아의 역사 학자인 오끄라드니코프(A.P.Okladnikov) 박사가

주민의 신고에 의해서 최초로 발굴했고,

그 중요성이 재인식되어 1954년 러시아의 극동고고학조사단에 의해서 다시 세밀하게 재조사되었습니다.
   그 때 인간 두개골과 깨어진 즐문토기 여섯 개, 118점의 세석기 등 시르카 유물이 발굴되어

시베리아 치타(Chita)시의 치타 박물관과 러시아 학술원 물질문화사연구소에 현재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그때 시르카 동굴에서 발굴된 인간무리의 두개골은

고아시아족(Paleo Asiatic)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또 여기에서 발굴된 즐문토기는 바이칼 호수, 중국, 몽고, 한반도, 일본등 선으로 연결되는

동북아시아의 지역에서만 나오는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즐문토기의 구연부문과 빗살무늬 형태는 한반도 서해안의 것과 동일 형태였습니다.

민족의 대이동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시르카 동굴의 편년은 문제가 있으나,

이 문제에 대해서 고고학의 원로이신, 고 김원용박사는 그의 유고 한국사의 <신석기 문화 편년>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절대연대 측정에 불가결한 방사성탄소 연대가 많지 않은 실정이기 때문에,

선사 문화의 편년이란 것은 매우 어렵고 막연한 상태에 있는 것이 실정이다.……

우리 나라와 일본이 신석기시대 초창기에 직접적인 관계를 가졌었다면 시베리아 더 나아가서는

서북러시아 지방의 토기 연대가 대폭 올려지든지, 토기가 일본에서 우리 나라로 역류했든지

또는 일본에서의 방사성탄소 연대가 모두 잘못이라고 판명되든지 해야 할 것이다.……」

 

   최근 방사성 탄소연대측정법이 크게 개량되었습니다.

또 북한 측이 개발한 공명법이라는 새로운 연대측정법도 등장하여 선사시대 연대가 대폭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한반도에는 없었다던 신·구석기시대가 역사 교과서에 새로 등장하고,

서울 암사동 즐문토기 연대가 1500년이나 더 늘어나서 관련 학계는 스스로 놀라고 있습니다.

 

   두 번째 근거는 한반도 대평원입니다. 
   옛날에 황해바다는 없었습니다. 출렁이는 바다의 모습은 석기시대 이후에 생긴 것입니다.

태고에 황해바다 자리에 광활한 대평원만이 있었다는 사실은 끈질긴 과학적 노력으로 밝혀졌고, 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한반도 대평원이라는 명칭은 본 작가가 임시로 붙인 것입니다만,

황해바다 대신에 그 자리에는 분명히 대평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본 이야기 소설에서는,

한반도 대평원의 존재 연대를 1만년전 이후에도 상당히 오랜 기간 존속했던 것을,

바닷가에서 발굴되는 즐문토기를 근거로 확인합니다.
   이러한 근거에 의해서 일만년전에 바이칼 호수에서 이곳으로 이동한 고아시아족이 상당 기간,

적어도 수천 년동안 황해바다 자리인 한반도 대평원에 정착했다고 생각합니다.

대체적으로 1만년 전에서 6천년 전까지 약 4천년간의 긴 기간으로 추정됩니다.
   이 4천년의 기간은 우리 나라의 역사 기록에서는 누락된 중석기시대말 신석기시대 초로서

우리가 오늘날 배우는 역사책에는 대체적으로 빈자리로 남아있습니다.
   이곳이 그 후 아쉽게도 유우스테틱(Eustatic)이라는 빙하의 해수면 변동작용으로 인해서 황해바다로 변했습니다.

이러한 자연의 변동으로, 고아시아족은 주변의 거대한 말발굽지역으로 흩어지면서 청동기시대를 만듭니다.
   말발굽지역이란 오늘날 중국의 일부 역사 학자들이 만들어 낸 용어로서 중국 동해안에서부터 산동반도, 요령반도

그리고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반도와 그 북쪽 지역으로 진출한 중심 세력은 배달족으로 발전하였고,

중국 동해안 지역과 동북부 지역으로 나간 무리들은 중국의 동이족으로, 일본 섬으로 진출한 무리들은 일본 종족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한·중·일이지만 옛날에는 모두 한 형제입니다. 모두들 정다운 형제자매 였습니다.

움질일 수 없는 확실한 증거 자료는 지금 황해바다 속에 있습니다.

 

   끝으로 애니미즘이라는 영혼의 세계입니다.
   애니미즘은 모든 물체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원시 문화입니다.

애니미즘은 석기시대 모든 지역의 공통의 문화이지만,

바이칼 호수 지역은 유별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조상이 유교와 불교의 강력한 영향력을 받기 훨씬 이전에는 전혀 다른 방식인 애니미즘에 근거하여

정신세계를 이루고 세상을 살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아시아족의 한반도 대평원 이동의 문화적 배경이었습니다. 애니미즘의 신념을 바탕으로 하여

그 힘으로 바이칼호수에서 한반도대평원으로 멀고먼 대이동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대권과 같은 막강한 권력이 인간의 머리 위에 존재하는 것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는 민족성의 뿌리가 됩니다.
   혹자는, 아무리 소설이지만 이러한 신석기시대 생활과 풍습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고증이 있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에 대해서 학문적 근거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고아시아족의 애니미즘 증거물로는 시르카 동굴의 동굴벽화와

그 외 수많은 바이칼 호수 주변 동굴의 동굴벽화가 있습니다.
   한반도의 암벽벽화보다는 바이칼 호수의 동굴벽화 속에 당시 생활과 풍습을 알리는 원시문자적인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동굴벽화는 신통합니다.
   태양, 조상, 짐승, 물결치는 빗살무늬, 기하무늬 그리고 생생하게 그려진 남녀 성기와 집단 성행위 묘사 같은

바이칼 호수 동굴벽화는 모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 이야기 소설은 시르카 동굴의 동굴벽화에서 세 가지 애니미즘 영혼을 찾았습니다.

  어둠을 물리치는 태양-
  수평한 바이칼 호수-
  노려보는 조상뼈의 무서운 눈-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를 찾아가 보기도 했습니다.

관련된 러시아 인사들을 만나서 의견을 교환했으며, 고고학의 문헌들을 뒤지고 관련된 논문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태양의 바른 소리, 호수의 바른 평등, 조상뼈의 바른 도리라는 삼정 영혼이

오늘날도 스스로의 가치를 지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둔한 지은이가 마지막으로 깨달은 것은 배달민족의 대이동을 증명하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보다는 바이칼호수의 동굴벽화가 아직까지도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 애니미즘 그 자체가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일만년전은 모든 것의 근원입니다.

동양과 서양의 피 갈림, 
인간의 본성인 경쟁의식, 선악, 욕심, 사랑, 반항,
그리고 삼정,
그 속에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있습니다.


■  바이칼에서 북계룡(北鷄龍)까지
    몽골·바이칼·고구려 역사문화기행 報告書중에서 (서기 2001년 6월 14일∼27일/ 정재승)
 
   ...바이칼 호수가 남한의 1/3에 달하는 광대한 넓이를 차지하고 있고, 그 중 답사지역이 올혼(olkhon) 섬이었는데,

이 섬까지 가는 길이 시베리아의 수도인 이르크추끄에서 버스로 장장 12시간 이상을 달려야 도달하는 머나먼 오지였다.

아무튼 "천신만고" 끝에 ― 이 네마디 말에는 수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 올혼섬에 도착하여 예정대로 민족의 뿌리이신 대황조 한배검님께 천제(天祭)를 봉행(奉行)하고, 우리의 염원(念願)을 빌었다.

 

   시베리안 샤머니즘의 메카이자, 현지 부리야트 족속들의 정신적 성소(聖所)이며 천제단(天祭壇)인

올혼섬의 불한(Burkhan) 바위 옆에서 천제(天祭)를 올리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여행단원 모두 깊은 영감을 받은 듯 하였다.

이렇듯 올혼섬 불한 바위를 보며 우리 모두 하나되어 한배님의 불언지교(不言之敎)를 받은 것이야말로

이번 답사의 가장 큰 청량제(淸凉劑)요 축복이었다고 본다.

   또한 올혼섬에서 시베리안 샤만(부리야트족)과의 만남도 이루어졌다.

이것은 여행기획 당시 러시아 현지 여행사에 미리 주문한 미팅으로서 그때 가봐야 성사(成事) 여부를 알 수 있으리라던 것이었는데,

마침 그 샤만의 일정이 우리와 부합되어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 부리야트족 샤만은 수천년 내려온 자신들의 고유한 정신체계와 문화적 상징 코드들을 잘 보존해오고 있었다.

저녁에 만나 식사를 같이하고 밤늦게까지 많은 얘기들 ― 질문 답변 포함 ―을 나누었고, 몇가지 의식도 시연(試演)해 주었다.

 

   그의 말은 온통 시적(詩的) 표현으로 가득차 있어서 그네들 역사 문화 전승 형태를 보여주는 듯 하였다.

우리들과의 정신적 교감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빠르고 깊게 이루어졌다.

함께 참석한 러시아인 주민들과도 혼연 일체가 되어 어우러진, 국경과 종족을 초월한 화합의 장이 순식간에 이루어진 듯 하여

내심 샤만의 전통적 법력(法力) 내지 연결고리 기능을 체험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하나 이번 답사기행의 큰 특징은 시베리아 바이칼호 주변의 타이가 스텝이라는 초원(草原) 삼림지대를 통과하여 보고,

울란우데(부리야트족 자치공화국 수도)부터 로만(露滿) 국경도시 만주리(滿州里)를 지나 치치하얼까지 이어지는

흥안령 산맥 지대의 초원들을 거쳐 내려 왔다는 점이다.

물론 기마(騎馬) 상태가 아닌 철마(鐵馬:기차)를 탄 채로 내려왔지만,

어쨌든 며칠간 계속되는 기차밖 풍경의 변화는 한반도적 산악지형에 익숙해 온 우리 모두에게 참신한 풍광(風光)이요,

본지(本地)의 법열(法悅)이었다. 즉 말로만, 글로만 전해 듣고 보던 그 시베리아의 초원, 숲이 바로 이렇구나,

북만주의 흥안령 산맥, 그 지도상의 산맥이 이렇듯 언덕 언덕으로 이어지는 초원이었단 말인가?

하는 생애 최초의 깨달음이 이곳 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한반도의 북서쪽에 이만한 대지가 있었음을 왜 우리는 이제야 실감하고 망연자실 자괴감에 빠지는가?

그 자괴감(自愧感)은 분명 못난 후손이라는 우리 현대사의 굴곡진 음영(陰影)에서 비롯한 것일게다.

   시베리아, 흥안령 지역은 고구려 때만 해도 낯설은 곳이 아니었었다.

통일신라 이후로 민족이 남북조(南北朝)로 분열된 이래, 그곳 북방루트는 우리에게 잊혀지고 버려진 땅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나라가 망하고 일제에 강점되자 수많은 동포들이 북방으로 다시금 눈길을 돌려 만주 북간도 지역을 개척하고 만주리,

치치하얼, 이르끄추끄등을 오가며 독립 전선의 대열에 섰던 것이다.

   바로 백년전 아니 육칠십년전의 일이다. 이때에는 조금이라도 지각있는 인사라면 모두가

북방지역의 광대무변함에 대한 역사적 인식과 문화적 상상력을 일정부분 지니고 있었다.

일제하 혹독한 압제 밑에서 그래도 민족적 자존(自尊)을 보지(保持)하며 사선(死線)을 넘어가며

끝까지 투쟁한 선각자(先覺者)며 애국지사들은 거개가 다 위와 같은 우리 민족의 북방 고토(故土)의 영역을 넘나들며,

우리 고대문화(古代文化)의 자취들을 몸소 겪어본 사람들이었다.

 

   그네들이 말로, 글로, 마음으로, 온몸으로 이러한 북방 대륙의 민족혼을 전해주었기에

우리가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나마 오욕 투성이의 우리 현대사에 이것 빼고 그 무엇이 온전한가? 그 무엇이 신신(新新)하게 우리 뇌리를 씻어 주던가?

이것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 삶의 가치가 그야말로 금수와 그 무엇이 다를 것인가?

아니 금수만도 못한 삶일 뿐이다. 민족도, 조상도, 뿌리도, 문화도, 정신도 없는 얼빠진 삶, 그 자체일 뿐.

   이번 답사에서는 선대(先代) 우리 조상들이 말 달리던 강역의 전부는 아니나,

그 주요 루트의 하나인 시베리아 → 만주리 → 흥안령 → 치치하얼 → 송눈평원(북만주) → 장춘 → 집안 → 단동으로 이어지는

이동 코스를 주파(走破)하며 주마간산격(走馬看山格)이나마 옛 북방의 바람을 마음껏 섭취하였다는데 큰 보람을 느꼈다.

여행기간 내내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라는 감상(感傷)을 떨치지 못하였다.

   이 루트로 끝없이 펼쳐지는 색다른 형태의 초원지대들을 만나 보면서,

우리 민족의 미래도, 과거도 여기에 있다는 생각을 깊이 하였다.
단순히 팽창주의적, 국수주의적 발상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민족적 자존(自尊)과 뿌리를 회복하고

세계평화의 대열에 선도적 역할을 자임(自任)하자는 의미에서이다.

한배검님께서 일찍이 우리에게 내려주신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의 종지(宗旨)가 바로 세계 인류의 평화로운 삶인 바,

이의 실현은 곧 우리민족의 천부적 사명이며,

첫 걸음은 남북통일이요, 다음 단계는 북방 대륙 개척이자 평화적 접근 교류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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