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화리에서 새봄을 꿈꾸다
최 화 웅
요즘 고희(古稀)는 흔하디흔한 일이다. 가두리양식어장이 바둑판같은 바다풍경을 그려놓은 통영 풍화리에 사는 H후배도 고희를 맞았다. 그는 젊은 날 여러 번 특종으로 이름을 날린 사진전문기자였다. 그는 42년 전 어느 날 부산과 통영을 오가는 뱃길에 처음으로 운항하는 공기부양선 엔젤호를 타고 통영으로 가고 있었다. ‘남녘의 봄’을 스케치하기 위해서였다. 새봄을 앞둔 다도해의 청정해역 물빛은 어느새 맑아지고 풍화리에는 온난화 날씨 덕에 매화가 만발했다.
지난 1974년 2월 22일 오전 11시. 바다 위를 나르는 날렵한 엔젤호가 미륵산 아래 그림 같은 미항, 통영항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한산섬을 지나자 시속 35노트의 엔젤호가 갑자기 온몸을 떨며 멈춰 섰다. 산더미 같은 파도와 물보라가 객실 창을 덮친 사이로 희미하게 뒤집힌 배 위에 사람들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사고다”하는 기자적 직감으로 메고 있던 카메라를 꺼내 샤트를 눌러댔다. 민완기자의 놀라운 조건반사였다.
날벼락 같은 해군 예인정(YTL, yard towing large) 전복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신병교육이 끝난 해군 109명과 해양경찰 50명 등 159명이 이충무공 위패가 봉안된 충렬사를 참배하고 돌아가다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 사고현장을 H가 유일하게 찍어 특종 취재한 사진기자로 기록되었다. 당시 H가 특종한 한 장의 흑백사진이 전 신문의 1면을 장식하면서 외신을 타고 지구를 돌아 퓨리처상 후보에 오르기까지 했다. 2007년 통영 이순신공원에 세운 위령탑에는 “훈련병을 태우고 모함으로 복귀하던 예인정이 갑자기 몰아닥친 돌풍으로 침몰했다.”고 기록했다.
H와는 20여 년 넘게 등산과 스쿠바 다이빙을 같이 했다. 그는 퇴직 이후 고향, 통영으로 돌아가 산양읍 풍화리에서 ‘통영허브팬션’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 유독 추위가 맹위를 떨친 절기, 대한(大寒)에 서울과 부산의 몇몇 부부가 그의 고희를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 거가대교를 지나 해마다 대구 축제가 열리는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의 왁자지껄한 효진수산횟집에서 대구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외포의 대구탕에는 갓 뜯은 해초, 몰을 얹어줘 구미를 돋운다. 갯마을 사람들이 겨울해풍을 버티며 새벽경매를 시작하는 선창에는 지난해 방류한 수억 개의 인공수정란이 부화하여 북태평양의 사할린반도를 돌아 가덕도 앞바다로 돌아왔을 때 잡아 올린 대구를 장만하고 탁송하는 일손이 흥겨웠다. 이맘때면 파시(波市)를 이룬 외포항의 강아지들이 만 원짜리를 입에 물고 골목길을 돌아다닌다.
거가대교를 지나 장목 이정표를 보고 바닷가로 내려서면 다소곳한 해안길 따라 외포중학교와 외포초등학교의 교정이 정겹게 이어지고 땅에는 동백나무 잎이 햇살을 받아 빛난다. 외포항 앞바다에는 그 빛을 받은 윤슬이 눈부신 신춘(新春)을 꿈꾼다. 외포항에 들어서자 높이 3m의 청동으로 만든 대구조형물이 우리를 반겼다. 명태와 비슷한 운명의 생선, 대구가 지천에 깔렸다. 나는 어린 날 이맘때 생선을 말리기 위해 마당 한켠에 높이 세운 장대 에 매달린 대구가 미이라가 되어가는 풍경을 보며 자랐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소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고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는 가곡 ‘명태’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대구(大口)는 입이 크다고 붙여진 바다생선 이름이다. 겨울철이면 남해안으로 돌아오는 회귀성 어종으로 진해만의 길목인 거제 외포항에는 ‘북소리 울려라, 대구가 돌아왔다'며 추위를 떨치고 매일 새벽 열리는 대구경매에 통영, 창원, 부산 등지에서 찾아든 상인들이 붐비는 것도 볼거리 중의 하나다. 대구축제가 열리는 12월이면 이 작은 어항에는 물 반 대구 반이라고 한다. 나는 고희를 맞은 H에게 몇 권의 동인지와 비발디의 <4계>, 그리고 베토벤의 <바이롤린 소나타 5번 봄>와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체르>를 선물했다.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베스트셀러작가 마크 콜린스키는 자신의 저서 <Cod>에서 대구를 둘러싼 인간들의 탐욕을 ‘대구어장을 따라 세계의 역사와 지도가 변했다’고 표현한 바 있다. 그는 대구의 서식경로가 신대륙 발견 경로이고 대구가 유럽인의 주요 식량이자 부를 쌓는 수단이 되었으며 영국의 대구무역제한이 미국 독립혁명의 불씨가 되었다고 밝혔다. 이 겨울 강력한 한파가 몰아쳐 생명의 계절, 새봄을 기다리는 마음 설레게 했다. 춥고 긴 겨울밤 우리는 젊은 날 그 불타던 열망을 밤늦도록 이야기하며 지샜다. 이튿날 아침 야외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비발디의 선율이 새봄, 신춘의 꿈자리 정원에 아름답게 흘러넘쳤다.
명 태
양 명 문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며
춤추며 밀려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집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 늦게 시를 쓰다가 소주를 마실 때 카!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짝 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
명태 명태라고 하하하 쯔쯔쯔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첫댓글 거제의 바다 물결이 국장님의 글을 읽으니 일렁입니다. 추운 날씨에 주님의 평화 안에서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충무 통영 앞바다의 푸르디 푸른 아름다운 풍경이 그리워집니다. 슬픈 역사도 간직한 곳이군요...
추운 겨울 시원한 맛의 대구탕도 그리워지는 날씨예요. 건강하세요~ 고맙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 시 '명태' 를 보여주시어 감사합니다.^^
겨울다운 날씨가 맹위를 떨치네요.
고희선물로 책과 음악을 전해준 그리움님께 박수드려요.
겨울속에 숨어 있는 봄을 알아보시니, 갑자기 봄이 그립습니다.^^
통영의 새로운 면을 느낍니다.
추운 겨울에도 거침없이 쓰신 글을 읽으니 가슴이 따뜻해져 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통영에서 지낼 때 아는 형님이 주신 반건조 대구의 맛이 불현듯 되살아납니다.
명태를 부르는 성악가의 우렁찬 목소리의 그 가사를 부르는 것도요..
추운 날씨에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멋진 시간을 보내시고 계신것 같아요.
몇일전 아는 수녀님이 대구를 주시면 맛있게 먹으라고
했는데 가져와서는 딤채에 넣어두었는데 내일은 그것을 한번 끓여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