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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께서 10월 22일 와병 중,
새벽에 일어나시어 간병을 하고 있는 김성식 형제에게 말씀하신 내용 녹취]
내가 인류 역사 상 처음으로 하는 말인데, 지금까지 하나님도 같이 죽었다, 이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게 뭐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이었다. ‘하나님도 함께 죽었다’ 하는 이 말은 진짜 죽었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을 극대화해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나도 이제 생각하니 그 말이 아니고, 니체 때문에 그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사람이 생각하던 사람, 그 사람이 죽은 것이다. 사람은 이래야 돼, 이래야 돼, 그렇게 했는데 예수같이 그렇게 딱 맞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은 것이다.
그것이 인류의 대표적 죽음이라고 한다. 그게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했는데, 예수님까지도 하나님을 대답 안할 하나님인 것을 몰랐던 것이다. 예수님까지도. 이 말을 아무나 할 수 없는 말이다. 옛날에도 내가 이 말을 했다. 이 말은 누구나 한 말이 아니고 진짜로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다 한 사람의 말인데 거기에 이어서 나온 말이다. 사람으로서는 최고의 사람이 생각했던 하나님도 끝이 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 말은.
사람이 생각하던 모든 것이 다 끝났다. 신관, 세계관 이 모든 것이 끝난 것이다. 거기서 우리가 새로 난 것이다. 그래야 옛 하늘과 옛 땅이 없어지고 새것이 오는 것이지, 일부는 살고 일부는 죽은 상태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없다. 왜 예수의 죽음만 특별하게 죽음이냐? 그런 말들을 한다. 당연한 말 아닌가? 순교자가 얼마나 많은데... 순교자의 죽음과 뭐가 다르냐는 것이다. 순교적 죽음과 구별이 안 되어서 우리나라에서 김은국씨인가, 그 사람이 쓴 ‘순교자’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것은 순교자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이 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쓴 말이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 예수의 죽음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으로 쓴 것이다. 다 읽어보지 않았는데 그런 내용이다. 오로지 무엇을 위해 죽은 사람. 그 사람을 묘사했는데 왜 그렇게 묘사했는가? 예수의 죽음과 같다는 것이다.
생각할 때 ‘예수의 죽음이 왜 우리를 구속할 수 있는가?’ 참 대답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동안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다 죽는다. 전에도 그 말을 하니까 *희가 그런다. ‘나는 이방인인데 그 말이 너무나 당연하게 들리더라. 사람은 당연하게 죽는 거 아니냐?’ 쉽긴 쉬운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이다. 우리 교회의 일부에서도 ‘그렇지 사람은 죽는 것이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왜 이 말을 자꾸 하냐? 한다. 여기에 대답이 있어야한다.
나는 *희에게 그랬다. 사람은 다 죽지만 온전한 사람이 죽은 것이다. 내가 하나님같이 된다 했던 그 하나님 같이 된 사람이 예수다. 그 사람이 죽은 것이다. 그래야 내 문제가 해결될 것 아닌가. 그래야 하나님같이 된다는 말은 거짓말이구나. 왜냐하면 예수 같은 사람이 죽으니까. 그렇게 내가 해석을 해주었다.
그런데 그것도 어째서 예수는 꼭 온전하냐 하면 알기 어려워진다. 이것을 대답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내가 생각해도 어렵다. 그런데 이번에 생각된 것이 사람이 그 밑에서 말하는 것이 의미 있다. 누구를 십자가에 매달아놓고도 ‘내려와보라’ 라는 소리를 못한다. 예수보고만 그렇게 한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는 것이다. 하나님 아들이라면 내려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예수더러만 그 말을 했는데 이것이 사람의 생각이다. 또 이 생각은 어디서 왔는가? 사탄의 생각이다. 이것은 조롱하는 말이다. ‘그래, 네가 하나님아들이야? 그러면 내려와 봐라. 네가 하나님 아들이면 안 죽어야지, 하나님 아들이 죽으면 무슨 하나님 아들이냐?‘ 이 말인 것이다.
그 말이 마태복음 4장에 가면 네가 하나님 아들이냐? 그러면 이 돌로 떡을 만들어먹어라. 이것과 똑같은 말이다. 밥을 안 먹으면 죽는 거 아니냐? 그게 무슨 하나님 아들이냐?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하나님과 같다는 것이다. 돼지새끼는 돼지, 그런 개념이다. 그런데 그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대답했다. 그것은 구약 성경 시편엔가 있는 말씀이다.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한 말이다.
떡으로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 사람이다, 이 말이 된다. 그런데 내가 그것이 미심쩍어서 그때 그 성경 강해하면서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은 돌로 떡을 만들 수 없는 분이다. 나는 사람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대답을 그렇게 했는데 나로서는 좀 애매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은 사실은 사탄이 조롱한 그 말과 다른 말이다. 정면으로 말하면 못 만드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이야. 나는 못 만들어.’ 이 말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대답 안하고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 게 사람이냐,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그게 사람이지.” 이러니까 하나 딱 업그레이드된다.
성전 꼭대기에서 내려와 봐라. 똑같은 말이다. 이 말이 확대되어서 더 심화되어 십자가에 간 것이다. 똑같은 말이다. 이 말의 뜻을 가지고 사람들이 내려와 봐라 한 것이다. 사람들 속에는 하나님 아들이면 하나님과 같아야 된다 이 말이다. 죽으면 무슨 하나님 아들이냐? 그런데 거기서 예수님이 대답을 못하시고 죽은 것이다. 이것이 실상이다. 실상은 이것이다. 예수님 대답은 인생을 말한 것이다. 사람이란 것은 죽는게 사람이다. 내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은 예수는 확실한 사람이다. 의미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고 하지만 사람은 사람이다, 이것을 깔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의 생각, 즉 사탄의 조롱 이것이 끝난 것이다. 죽었기 때문이다. 사탄은 이겼다고 생각한다. 네가 하나님 아들이 아니잖아? 밑에 있던 사람이 다 실망하고 가버렸다. 다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고 가버린 것이다. 그러면 사탄이 승리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복음이 무엇인가 하면 그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는 것이다. 후사라는 개념이 없으면 이 해석이 안되는 것이다. 후사. 안 그런가? 만유는 다 죽는다, 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만유인데 그 만유를 상속할 사람, 자기도 죽는 사람이다. 안 그러면 상속이 안 된다. 왜냐하면 포함이 안되기 때문이다. ‘포함’ ‘상속’ 이것이 아들이다. 그 안에서 놀라운 세계가 열린다.
아, 하나님의 세계는 다 하나구나. 통합이 딱 되고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아주 심오한 것이다. 완전 근원으로 돌아간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가 한 자리로 돌아가는, 사람만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그게 하나다. 특별하면 하나가 아니다. 예수와 우리가 특별해버리면 하나가 안 된다. 포함될 수가 없다.
우리는 석가모니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석가모니가 위대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 이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도 포함될 수가 없다. 위대한 모든 사람은 다 그렇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서도 누가 존경과 숭배를 받는가 하면 하나님 같은 사람이다. 그 사람이 존경과 선망을 받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보고 빛을 남긴 사람들이라 한다. 빛을 남긴 사람들은 인류와 하나 될 수가 없다.
이것, 아이러니한 말이다. 모든 인류가 다 생각하기를 빛을 남긴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기독교인들도.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같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상하게 꼬이고 말려들어간다. 어디로 말려 들어가는가? ‘사람은 능력이 없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아무리 능력 있어도 죽는다. 그러면 왜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들어놨는가, 그렇게 물으면 뭐라 대답하겠는가.
우리가 볼 때는 인간은 불완전하다. 무엇에 비교해서인가? 하나님에 비교해서, 천사에 비교해서 불완전하다. 그런데 하나님이 볼 때는 완전하다. 왜? 자기 형상으로서 완전하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에 비해서 사람은 월등하기 때문에 사람인 것이 아니고 월등하기 때문에 보기에 심히 좋았다는 말이 아니고 완전하게 배필이 되기 때문에 완전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 연합이라는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완전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런다.
이러면 인간이 또 천사가 되어버린다. 남자가 여자를 볼 때 완전하게 여자여야 된다. 안 그런가?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면 매력이 없다. 왜냐하면 남자는 자기와 완전히 짝이 될 사람을 찾는다. 백 프로. 그래야 아기를 낳는다. 하나님도 뭐가 완전한 것인가? 자기와 연합될 수 있는 것이 완전하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는 말, 남자가 여자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여자를 남자와 비교하면 불완전하다 할 것 아닌가. 미스, 미스(miss)라는 뜻이 ‘실수하다 모자라다’ 이런 뜻이다. 여자더러 미스라고 하는데 남편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미스다. 남편 없는 여자처럼 말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과부다. 기업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볼 때는 불완전하다. 내 입장에서, 나 같으면 안 죽고 싶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할 수 없이 죽는다. 그러니 나는 불만이다. 여자 입장에서 생각할 때, 요즘에는 그렇지도 않지만 옛날 같은 경우 ‘왜 나는 여자로 태어났나, 남자로 못 태어나고...’ 이것이다.
우리나라 개화기의 여성소설이 전부 여성해방운동이다. 신여성, 자유부인 이런 것이 다 여성의 해방을 말하고 있다. 사람들을 끊임없이 그것을 원한다. 해방, 자유를 원하고 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다 자기 자유의지를 방해하면 결사적으로 대든다. 사람도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좋아하신다, 이런 사람들도 있다. 그 자유의지는 종속된 자유의지인 것이다. 그러니까 배필로서의 자유의지이지, 신으로서의 자유의지가 아니다. 이것 때문에 무지 헷갈려한다.
신*길 같은 사람도 윤리학을 했으니까 그 자유의지밖에 모른다. 윤리를 행사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도 맞기 맞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신에게 종속된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윤리가 안 되는 것이다. 왜인가? 죽게 되면 그렇다. 모든 문제가 하나님은 하나님 되고 사람은 사람이 되어야 되는, 이것이 정상적인,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그런데 선악과 때문에 하나님도 오해가 되어버렸고 사람도 오해가 되어버렸다. 혼돈이 온 것이다. 혼돈, 공허와 흑암이 와버린 것이다. 도로. 이것은 누구의 장난인가? 사탄의 계획이다. 창조를 방해한 것이다.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큰 강이 하나 있다.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무슨 이유인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었다. 하늘은 그대로인데 땅이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 말은 인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인생이. 왜? 자기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온 것이다. 이것을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 맨 마지막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하고 나오는데, 그것이 완전한 해결이라는 말이다.
창세기 1장 1절 2절은 땅이 혼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사람은 타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가면 다시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을 수 없게 되었고 사람은 다시는 천사에게 속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야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로부터 다시 태어난 사람은 어디로 가는가? 요한계시록 마지막, 그 어린양으로 가는 것이다. “다시는 밤이 없고 눈물이나 애통함이 없이”그렇게 나온다. 창세기 1장 2절의 세계가 끝났다는 것이다. 알고 보면 창조가 완성된 것이다. 역사관이 확 달라진다.
도저히, 어떻게 어린양이 승리하겠는가?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하다. 창조의 목적과 계획으로 그렇게 되어야 되는 것이다. 반드시. 안 그렇겠는가? 이 창조는 계속 사탄과 하나님과의 싸움밖에 안 된다. 역사해결이 안 된다. 사람은 그 사이에 끼어있다. 인류문제는 해결 안 된다. 그러니 어찌되었든 그것은 해결되어야하는데,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진 것이 예수이고 예수 안에서는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 안으로 사람들을 모은 것이다. 예수가 위대한 자가 되어서 된 것이 아니고 지극히 사람이 됨으로써 완성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인 경험 안으로 들어오면 우리가 온전한 사람의 자리로 오면 사람이 완전히 안식이 되는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높아져서 안식이 되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밑바닥 같은데 안식이다.
내 첫 번째 경험이 이것이다. 하나님이 있냐 없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믿냐? 이랬던 사람인데 막판에 이르러서 나는 내일 일을 모르네, 내일 일도 모르면서 하나님이 있냐 없냐 이것이 말이 되냐? 하는데 내가 딱 가라앉고 마음이 평안해졌다. 모든 것이 긍정적이 되었다. 이 사람의 경험인 것이다. 거기서 사람은 ‘야, 인생이 허무하네, 내일 일도 모르고.’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내일 일을 모르네. 나는 피조물이네. 내 위에 누가 있네.’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게 은혜라고 생각한다. 그때 어떻게 그렇게 내 생각이 정리가 되었는지.
현실은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었다. 그런데 그 문제가 딱 정리되는데 긍정적이 되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교회를 긍정적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니까, 세례를 그때까지 미루고 안 받았는데 이제 세례를 받아야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원해서. 그 당시 세례 의미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단지 교회 안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니까 나도 동조해야겠다, 뭐든지 교회가 가는 것에 내가 동조해야겠다. 전도사님이 날더러 집사 하라고 했다. 총각인데, 그것도 옛날 같았으면 안 되는 것인데 참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교회에서 하라는 것이니까. 모든 것이. 의미가 있든지 없든지 상관이 별로 없었다. 더할 필요도 없고 하라는 대로 하고 싶고, 이때부터 보람도 있었다.
뭔지 이상하게 사람이 바뀌었다. 그때 귀신처럼 그 친구가 나에게 편지를 했다. 그때까지 몇 년 동안 편지를 안 했는데 희안하게 그때. 그 전에 만약 편지를 했더라면 내가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무슨 하나님 일을 하겠는가?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내게 하나님에게 질문한 것에 대한 대답이구나.’ 이렇게 들렸다. 길이 없어서도 갔지만 그것이 내게 길잡이였다. 이때 만일에 노 한다면 난 평생 질문을 못하겠구나하는 생각에 그때 겁 없이, 아무 것도 모르고 출발했다.
(전에 목사님 같으면 전혀 상상도 못 할 길이었죠.)
그렇지. 한 번도 그런 길,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친구가 신학교 다닐 때 밤새워 토론했다. 그 상태로 나보고 신학교 가라고 했으면 가겠는가. 가라고 해도 안 되지만. 그러니까 참 신기하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 하신 일이 아니다 라고 할 수 없다. 도저히. 신기해, 신기해.
(지금 방금 목사님 말씀을 들어보니까 인류의 문제가 밭이 실타래가 얽힌 것처럼 그렇게 되어있었는데 말씀을 들으면서 그 실타래가 확 풀리는 것 같은..)
그랬다니까, 내가. 마디가 풀리는 것 같은. 솔솔솔솔... 정말 신기한 일이다. 내가 하나님을 알았더라면 19살에 죽게 되었는데 두 달 만에 약을 못 썼는데 균이 없어졌다는 것을 놀랍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전혀 그렇게 생각 못했다. 한 번도 하나님이 나를 쓰시겠구나. 이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려서부터 교회를 열심히 다니더니 하나님이 살려주었구나. 누가 봐도 죽게 되었는데...’ 그때 결핵에 걸리면 거의 80-90프로 죽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한 결핵제가 나왔을 때는 몰라도 그 이전 세대는 100프로 다 죽었다. 그런데 한 결핵제를 병원에서 정상적으로 맞은 것도 아니고 사다가 내가 맞은 것이니까, 맞다 안맞다 한 것이다.
(그때 에스엠 파스 이런거..)
응 3가지. 그 약이 많은 사람을 살렸다. 그래도 병원에 간 사람이 드물었다. 병원비가 비싸니까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약이 다 수입품이었다. 그때부터 이태리제, 불란서제, 미제. 한 4가지가 나왔는데 우리나라는 한화제약에서 나와서 처음으로 항생제가 개발되었다. 페니실린부터 시작해서, 항생물질의 발견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오늘은 그만. 목이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