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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인간혁명 제30권 제6장 (서원 89~100)
서원 89
야마모토 신이치는 ‘게재될 사진을 자신과 대화하는 장면으로 하고 싶다’는 로자파크스의 요청을 황송하게 여겼다.
후일 출판된 사진집이 도착했다. 여사의 말대로 신이치와 악수를 나누는 사진이 게재되어 있었다. ‘인권운동의 어머니’의 온화하고 아름다운 웃음 띤 얼굴이 빛났다.
서두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이 사진은 미래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 인생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순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문화가 달라도 인간은 함께 나아갈 수 있다며 이 만남은 ‘세계평화를 위한 새로운 한 걸음’이라고 썼다.
신이치는 이번 미국 방문에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관용의 박물관’을 찾았다.
이 박물관은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인권억압이나 인류사상 최대 잔학행위인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역사에 초점을 맞춰 전시를 열고 있었다. 관내를 견학하며 유대인들이 당한 가혹한 수난사를 듣고 신이치는 박물관 관계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귀 박물관을 견학하고 ‘감동’했습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격노’했습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이런 비극을 어떠한 국가도, 어떠한 시대도 절대 되풀이하면 안 된다’고 미래를 위해 깊이 ‘결의’했습니다.”
민족, 사상, 종교 등의 차이로 생기는 차별이나 억압 그리고 그것을 용인해버리는 인간의 마음, 거기에 생명에 잠재한 마성(魔性)이 있다. 그 마성과 싸우는 일이 바로 불법자(佛法者)의 사명이다.
초대 회장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사상을 통제하는 군부정부의 탄압에 맞서 싸우다 옥사했다. 함께 투옥된 제2대 회장 도다 조세이(戶田城聖)는 전쟁이 끝난 뒤 ‘지구민족주의’ 이념을 내걸고 일어섰다. 이 사제의 행동은 인간을 분단하는 모든 ‘비관용성’에 대한 투쟁이었다. 광선유포는 인권을 위한 연대를 구축하고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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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6일, 신이치는 미국 마이애미에서 콜롬비아공화국으로 갔다. 세사르 가리비아 트루히요 대통령과 문화부의 초청을 받아 콜롬비아를 처음 방문한 것이다. 대통령은 1990년 8월, 마흔세 살에 콜롬비아 최연소 대통령으로 취임해 테러근절과 마약조직 단속에 힘을 기울였다.
신이치 일행이 마이애미를 출발하기 전, 콜롬비아 수도인 산타페데보고타(훗날 보고타)의 번화가에서 자동차에 설치한 폭탄이 터져 시민이 다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마약조직이 잇달아 테러를 일으켰다. 콜롬비아에는 비상사태선언이 내려졌다.
신이치는 콜롬비아에서 도쿄후지미술관 소장 ‘일본미술명보(名寶)전’ 개막식 등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3년 전, 일본에서 개최한 ‘콜롬비아 대항금전’(도쿄후지미술관 주최)에 답례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대통령관저로부터 신이치에게 방문 여부를 묻는 연락이 왔다. 그는 일언지하에 답했다.
“저를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예정대로 귀국을 방문하겠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용감한 콜롬비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행동하겠습니다.”
그것은 신이치의 굳은 ‘결의’였다.
4년 전, 일본을 방문한 비르힐리오 바르코 대통령(당시)에게서 콜롬비아 공로대십자훈장을 받았을 때 신이치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콜롬비아 국민’이라는 마음으로 귀국을 위해 공헌하겠다고 염원하는 바입니다.”
신이치는 설령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신의에는 어디까지나 신의로 보답하고 싶었다. 그것이 우정의 길이고 인간의 길이기 때문이다.
콜롬비아에 도착한 이튿날인 7일, 지부를 결성한 뒤 신이치는 멤버들을 격려하고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8일에는 대통령관저인 나리뇨궁전에서 가리비아 대통령 부부를 예방했다. 이때 신이치는 대통령에게 장편시를 선사해 위대한 젊은 리더의 용기와 행동을 상찬하고 콜롬비아의 앞날에 ‘영광 있으라!’ 하고 성원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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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비아 대통령은 신이치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콜롬비아의 ‘산 카를로스 대십자훈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이날 신이치는 ‘일본미술명보전’ 개막식에 참석해 여기서도 문화장관에게서 ‘문화영광훈장’을 받았다.
9일, 신이치는 비행기를 타고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로 갔다.
리우데자네이루 국제공항에는 신이치가 도착하기 2시간 전부터 한 고령의 신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풍성한 백발에, 얼굴에는 과감한 투쟁을 보여주듯 수많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걸음걸이는 약간 불안정했지만 아흔네 살이라고 볼 수 없는 의연한 모습이 마치 사자와 같았다. 이번에 신이치를 초청한 사람 중 한 사람으로 남미 최고봉인 지성의 전당 브라질문학아카데미의 아우스트레제실로 드 아타이드 총재다.
총재는 당시 수도인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법과대학을 졸업한 뒤 신문기자가 되어 1930년대 조국의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다. 투옥되기도 하고 3년 동안 국외로 추방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제3회 유엔총회에 브라질 대표로 참석해 엘리너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부인을 비롯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프랑스 르네 카생 박사들과 함께 ‘세계인권선언’을 작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이후에도 시사평론가로서 차별에 맞서 싸우고 문학아카데미 총재로 취임한 뒤에도 언론전을 계속 전개했다.
총재는 유럽에 거주하는 우인에게서 신이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저서도 읽었다. 또 브라질SGI 멤버들과 교류하면서 그 사상과 실천에 강한 관심과 공감을 품게 되어 신이치와 만날 날을 열망해왔다고 한다.
공항에서 이제나저제나 신이치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총재에게 건강을 염려한 SGI 관계자가 “좀 더 쉬십시오” 하고 말하자 총재가 이렇게 답했다.
“저는 94년 동안이나 회장님을 기다렸습니다. 계속 기다렸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1시간 2시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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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치가 리우데자네이루 공항에 도착한 때는 2월 9일 밤 9시였다. 신이치 일행을 브라질문학아카데미 아타이드 총재 일행이 감싸 안듯 웃는 얼굴로 맞아주었다.
총재는 1898년생으로, 1900년생인 은사 도다 조세이와 비슷한 연배였다. 신이치는 총재와 도다의 모습이 겹쳐져 도다가 자신을 맞이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총재와 신이치는 서로 팔을 붙잡고 끌어안듯 인사를 나눴다.
“회장님은 금세기를 결정지은 분이십니다. 힘을 합쳐 인류의 역사를 바꿉시다!”
신이치는 총재의 과분한 찬사가 황송했다. 틀림없이 전 인류의 인권을 지켜내야만 한다는 절실한 바람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담은 말일 것이다. 신이치가 이렇게 답했다.
“총재님은 동지입니다! 우인입니다! 총재님이야말로 세계의 ‘보배’와 같은 분이십니다.”
세계는 차별이라는 벽에 둘러싸여 있고, 인권은 권력과 재력 그리고 폭력에 짓밟혔다.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을 실현하려면 인류는 아직 멀고도 험난한 길을 끝까지 나가야 한다. 총재는 이 바통을 이어받을 사람을 진지하게 찾고 있었을 것이다.
이튿날인 10일, 신이치는 리우데자네이루 시내에서 개최한 리우 대표자회의에 참석해 다음날 11일이 도다 조세이의 탄생 93주년 기념일이기도 하여 은사의 지도를 인용해 불법(佛法)과 사회생활을 언급했다.
“도다 선생님은 ‘어본존을 수지하고 있으니 장사 방법 등은 생각하지 않아도, 노력하지 않아도 반드시 공덕이 있을 것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하는 자가 있는데 이것은 큰 잘못이고 큰 방법(謗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다는 니치렌불법이 이른바 ‘기복신앙’ 같은 것이 아니라 어본존에게 제목을 불러 자신의 생명에 내재한 지혜와 힘을 끌어내 노력하고 활용하면서 가치를 창조하는 가르침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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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치는 모든 동지의 행복을 바라며 힘주어 말했다.
“도다 선생님은 ‘법화(法華)를 아는 자(者)는 세법(世法)을 깨닫느니라’(어서 254쪽) 하는 성훈을 들어 ‘노력도 하지 않고 공덕이 있다는 해석은 완전히 틀렸다’고 단언하시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장사에서 자신의 결점이나 개선할 점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크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장사에 대해 끊임 없는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다. 내 소원은 회원 여러분이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사업 속에서 세법을 깨달아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이다.’
도다 선생님의 소원이 곧 제 소원이기도 합니다. 지금 세계에는 불황이라는 세찬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한탄하기만 하면 안 됩니다. ‘신심’으로 위대한 지혜와 생명력을 발휘해 고경을 훌륭히 이겨내야 비로소 ‘세법을 아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심하고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안이함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신심하고 있기에 당면한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더욱 진지하게 기원하고 노력한다. 이 ‘진지함’과 ‘도전하자’는 일념이 최고의 지혜를 낳습니다. 모든 승리의 열쇠는 이 ‘신심즉지혜’라는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습니다.
도다 조세이의 탄생 기념일인 2월 11일, 신이치가 광선유포를 향한 도다의 발자취를 쓴 소설 ‘인간혁명’ 12권이 세이쿄신문 지면 게재를 완결했다.
소설 ‘인간혁명’은 1964년 12월 2일, 오키나와에서 기고하기 시작해 이듬해 1965년 1월 1일부터 세이쿄신문에 게재했다. 도중에 해외방문이 이어지거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오랫동안 연재하지 못한 기간도 있지만 지난해 1992년 11월 24일에 탈고해 이해 2월 11일자로 1509회에 걸친 게재를 마친 것이다. 마지막 원고에 신이치는 ‘나의 은사 도다 조세의 선생님에게 바친다’고 썼다.
이 책은 제자 야마모토 신이치의 광포 서원이자 스승에 대한 보은의 책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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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신이치는 리우데자네이루연방대학교에서 열린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에 참석했다.
답사에서 그는 이날이 은사 도다 조세이의 탄생일인 점을 들고 스승의 철학에 관해 말했다.
“저는 은사에게서 ‘누구든 평등하게 내재하는 생명 최극의 보배를 열 수 있는 철학’을 배웠습니다. 또한 ‘성실한 대화를 거듭해 민중의 연대를 넓히는 평화의 길’을 의탁받았습니다. 그리고 ‘민중을 위해, 인간을 위해라는 자비의 일념을 철저히 실천할 때 지혜는 한없이 솟아난다는 인간학’을 이어받았습니다.
은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곧바로 ‘지구민족주의’라는 이상(理想)을 청년에게 제창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전혀 평가 받지 못했지만 민족분쟁의 격화로 괴로워하는 현대세계가 이 ‘공생(共生)의 길’을 지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이치는 스승의 위대함을 세계에 선양하고 싶었다. 또 자신을 육성해주신 은사에게 이 명예박사학위를 바치고 싶었다.
이튿날인 12일, 신이치는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브라질문학아카데미를 방문해 아타이드 총재와 회담했다. 이 회담에서는 예전부터 이야기가 나온 대담집 ‘21세기 인권을 말한다’를 발간하기로 합의했다.
대담의 진행방식으로는 먼저 신이치가 몇 가지 질문사항을 준비해 전달하기로 했다.
총재가 이렇게 답했다.
“기쁩니다. 인권문제에 관해 이토록 잘 이해하시는 회장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분명 ‘세계인권선언’은 발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정신을 가장 명확하게 현실에서 행동으로 번역하고 유포하는 사람은 회장님이십니다. 작성한 분들의 공적 이상입니다. 인간은 ‘행동’입니다. 아울러 ‘사상’이 중요합니다. 둘이서 대담집을 완성합시다.
신이치는 총재의 이 커다란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고 결의를 새롭게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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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이드 총재는 조용하지만 깊이 있는 어조로 신이치에게 절실히 호소했다.
“저는 곧 백 살을 맞이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토록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은 처음입니다.
회장님은 위대한 사명을 띤 분이십니다. 인간학과 인간성을 고루 갖춘 분이자 정신적 지도자이십니다.
회장님의 인생은 모두 의미가 있습니다. 세계의 명운은 회장님의 행동과 함께 차츰 크게 열렸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진화하고 있는 분이십니다.
저는 회장님이 자신의 행동으로 구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해오신 데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신이치는 자신을 기대하는 총재에게서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을 어떻게든 실현해야 한다는 강한 일념을 느꼈다.
총재는 신이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머지않아 ‘새로운 세기’가 옵니다. 그것은 브라질과 일본 그리고 전 세계에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총재님은 ‘새로운 시대’를 만들기 위해 투쟁하셨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적은 인류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입니다.”
신이치가 이렇게 답하자 총재는 웃음을 머금고 힘주어 말했다.
“‘언어’를 뜻하는 라틴어 ‘웨르붐(verbum)’은 ‘신(神)’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숭고한 ‘언어’를 최대 무기로 삼아 싸웁시다.”
두 사람의 혼이 강하게 격렬하게 공명했다.
신이치는 아타이드 총재와 회담한 뒤 이어서 브라질문학아카데미 재외회원(외국거주자) 취임식에 참석했다.
이 아카데미는 브라질이 왕정에서 공화제로 이행한 뒤인 1897년에 조국 브라질을 ‘지혜의 빛’으로 이끌겠다는 뜨거운 열의를 담아 창립되었다. 국내 회원 40명과 재외 회원 20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종신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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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문학아카데미가 ‘문화, 문학의 위대한 보호자’라고 인정하는 재외회원에는 러시아 문호 레프 톨스토이, 프랑스 인도주의 작가 에밀 졸라, 영국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 등 지성의 거인들이 이름을 올린다.
신이치는 일본인으로서도, 동양인으로서도 첫 재외회원이다.
취임식에는 대통령을 대신해 참석한 안토니오 오아시스 문화장관을 비롯해 브라질 각계의 저명한 식자와 문화인들이 참석했다. 또한 이타마르 프랑쿠 대통령도 축복의 마음을 담은 메시지를 보냈다.
더욱이 이 자리에서 신이치에게 ‘마샤드 데 아시스 포장(褒章)’을 수여했다. 문학아카데미의 초대 총재인 마샤드 데 아시스의 이름을 딴 이 포장은 ‘세계적 업적을 남긴 문화인’에게 특별 수여하는 이 아카데미의 가장 영예로운 현창이다.
신이치는 재외회원 취임을 기념해 ‘인간문명의 희망찬 아침을’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지구일체화가 추진되는 현재, 종교는 인간의 정신성을 도야하고 선(善)한 것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코스모스(조화로운 세계)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열린 종교성이 바로 21세기 지구문명을 이루는 중심축이 될 것’이라고 호소했다.
이 취임식에는 브라질의 여러 신문사가 취재차 방문해 신이치의 재외회원 취임과 기념강연을 보도했다.
신이치는 브라질문학아카데미를 비롯해 브라질에서 받은 현창은 SGI멤버들의 사회공헌과 학회이해를 위한 착실한 노력이 겨둔 승리라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학회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 신이치의 입국조차 허가받지 못했는데 지금은 남미 최고를 자랑하는 지성의 전당에서 높은 평가와 깊은 신뢰를 쟁취해 재외회원에 취임하는 시대를 맞은 것이다. 날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거듭하는 분투가 사회를 움직인다.
신이치는 동지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심으로 상찬하고 ‘브라질 만세!’ 하고 외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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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치가 리우데자네이루를 출발해 처음 방문하는 아르헨티나로 향한 날은 2월 14일이었다.
브라질문학아카데미 아타이드 총재는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몸 상태가 나빠졌다.
그러나 신이치와 함께 발간하는 대담집에 대한 정열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건강을 약간 회복하자 6월 중순부터 신이치의 질문과 의견에 대한 회답을 구두로 말해 테이프에 녹음했다.
제한된 인생의 시간과 치열한 투쟁을 벌이듯 힘을 쥐어짜서 말을 엮어 나갔다.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인권투쟁’에 마지막 순간까지 목숨을 건 것이다.
대답집은 두 사람이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나눈 대화를 토대로 서간을 주고받아 준비했다. 총재가 마지막으로 구술한 때는 8월 중순이었다. 며칠 후 입원해 1993년 9월 13일, 인권의 거성은 아흔다섯 살을 눈앞에 두고 위대한 생을 마감했다.
대담집 ‘21세기 인권을 말한다’는 월간지 우시오에 연재한 뒤 1995년 2월 11일에 발간했다.
신이치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이튿날인 15일 숙소인 호텔에서 알베르토 코엔 前관방장관과 회담한 뒤 시내에서 열린 아르헨티나 대표자회의에 참석했다.
참석자 중에는 18일에 개최되는 제11회 세계청년평화문화제 준비에 힘쓰는 검게 그을린 청년들의 활기찬 얼굴도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도 청년이 훌륭히 성장해 광포의 미래가 한없이 열리고 있었다.
이 15일 저녁은 일본 시간으로 16일 아침에 해당하는데, 니치렌 대성인이 탄생하신 날이다. 신이치는 참석자에게 힘주어 말했다.
“태양이 동쪽 하늘에 한번 떠오르면 그 큰 빛은 전 세계를 골고루 비춥니다. 이처럼 일본에서 탄생하신 대성이의 ‘태양의 불법’은 온 지구의 모든 민중을 혁혁히 비추고 묘법이라는 대자비의 빛을 발합니다. 그리고 이 대성인 불법의 세계성과 보편성을 훌륭히 증명하는 것이 아르헨티나 여러분의 활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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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치는 들뜬 어조로 말했다.
“서로 지구 반대편에 위치하는 아르헨티나와 일본은 거리상으로 가장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 아르헨티나 여러분과 함께 니치렌 대성인의 탄생일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대성인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아르헨티나 속담에 ‘태양은 모든 사람을 위해 떠오른다’고 있습니다. 대성인의 ‘태양의 불법’은 ‘평등한 불법’입니다. 대성인은 모든 사람을 위해, 말법만년의 모든 민중을 위해 대법(大法)을 설하셨습니다. 신앙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인간을 편협하게 차별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부디 여러분은 드넓은 마음으로, 태양처럼 밝게 아르헨티나의 전 국토와 전 민중에 희망의 광채를 보내기 바랍니다.”
신이치는 “임종이 지금”(어서 1337쪽)이라는 마음으로 계속 격려하며 아르헨티나의 위대한시인 아르마페르테의 ‘때로는 위대한 운명이 잠자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것을 불러 깨우는 것은 고뇌다’라는 말을 소개했다.
“불법에서 ‘번뇌즉보리’라고 설하듯 문제나 고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가족도, 지역도 없습니다.
인생은 고뇌와 벌이는 투쟁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덮친 여러 고뇌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입니다. ‘고민’ 저편에 있는 ‘승리’를 향해 지혜를 짜내고 거듭 노력해야 합니다.
‘만약 이런 고민이 없으면’ 하고 현실을 떠나 꿈을 꾸는 듯한 삶은 패배입니다. 어떻게 하면 지금 눈앞에 있는 과제를 극복해 가치와 승리로 바꿀지, 늘 그렇게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인생은 자신의 일념대로 된다’는 진리를 멋진 승리 드라마로 증명하는 명배우가 되기 바랍니다. 또 주변 사람들에게도 자신감을 주는 격려의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신이치는 아르헨티나 동지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불굴의 승리왕’이 되기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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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6일 정오, 신이치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통령 관저에서 카를로스 사울 메넴 대통령을 예방했다.
대화에서 신이치는 21세기를 ‘인류 일체화의 세기’ ‘지구문명 흥륭의 세기’로 만들기 위해 민족융합의 대지인 아르헨티나에 맥동하는 코즈머폴리터니즘(세계시민주의)에 기대를 보냈다.
이번 남미 방문에서는 각국에서 국가 지도자들과 나누는 회견이나 기념행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때 스페인어 통역과 번역을 훌륭히 완수한 사람이 아르헨티나 출신 여자부 벗들이었다.
그 여자부원들은 일본계 부모 밑에서 태어나 아르헨티나에서 자랐다. 소녀 시절 고적대 활동을 통해 신심을 배우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광포를 위해 살고 싶다’고 깊이 다짐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국립대학이나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의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에 힘쓰고 어학 습득에도 힘을 쏟아 SGI 공인 통역사가 되었다.
젊은 생명에 심은 ‘서원’이라는 씨앗은 이윽고 ‘사명’이라는 거목이 되어 하늘 높이 자라난다.
16일 저녁, 신이치는 아르헨티나 상원과 하원을 예방했다.
상원과 하원 양원이 있는 국회의사당은 장엄한 그레코로만 양식으로 1906년에 완성되었다. 군사정권 시대에는 의회활동을 금지해 폐쇄되었는데 1983년 군정에 종지부를 찍자 국회의사당으로 부활했다. 아르헨티나의 ‘민주주의의 아침’을 알리는 상징이 되었다.
상원에서는 신이치의 ‘평화를 위한 부단한 활동’을 기리고 하원에서는 ‘세계 모든 민족의 평화를 위한 투쟁’을 기려 특별현창을 수여했다. 지구 반대편 사람들이 신이치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고 그 행동을 주시한 것이다.
이 또한 아르헨티나 동지가 성실하게 거듭 대화해 신뢰를 넓혔기 때문이다.
신이치는 멤버들의 분투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이 영예를 함께 나누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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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의장은 신이치와 나눈 대화에서 아르헨티니의회가 신이치의 평화제언 등을 바탕으로 법률을 제정했다고 전했다.
그것은 새롭게 ‘평화의 날’을 만들어 아르헨티나의 초, 중, 고 등에서 평화에 관해 서로 배우고 여러 행사를 연다는 법률이다.
이 법률을 제정한 이유에서 ‘어느 훌륭한 일본의 사상가는 우리가 오늘날 살아가는 시대에 도전해야 할 사항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며 1983년 ‘SGI의 날’ 기념제언 중 다음 구절을 인용하고 신이치의 이름을 명기했다.
“21세기가 우리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 빛나는 무대에서 활약할 젊은 세대의 앞날이 결코 전쟁으로 얼룩지면 안 됩니다. 진정으로 민중이 주역인 시대를 구축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는 모두 국민의 손에 달렸습니다. 지금만큼 현명하게 진로를 선택해야 하는 시대도 없습니다.”
이 법률은 1985년 8월에 공포되었다.
상원의장이 이렇게 말했다.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SGI 회장의 외침은 인간이 인간다운 존엄을 갖고 살아가는 세계를 만들자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냉전은 끝났지만 세계에는 수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SGI 회장과 SGI 활동 속에 바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기준’과 ‘가치관’이 있다고 믿습니다.”
세계가 SGI를 크게 기대하고 있었다. 생명존엄의 불법을 기조로 한 평화운동을 시대가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동행한 사람 모두 실감했다.
이튿날 17일에는 아르헨티나 국립 로마스데사모라대하교가 신이치에게 ‘명예박사학위’와 ‘법학부 명예교수’ 칭호를 수여하는 수여식을 열었다. 또한 그 자리에서 신이치의 아르헨티나 방문을 부에노스아이레스주의 공식행사로 하겠다는 주의회의 의결을 발표하고 동시에 이 주의 10개 도시가 ‘시의 열쇠와 패’ 등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