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 2024년 봄호에서
애지가 선정한 이 한 편의 시 후보작
권기선 정구민 박용숙 신대철 조용미 이병률 박분필 반칠환 오은 정해영
이두예 강현숙 이선희
책벌冊罰
권기선
나는 시를 좋아해서 너는 책을 많이 읽어서 우울하다 벌 받으며 사는 기분을 어릴 때부터 배운 거야 우리는, 그렇다고 믿는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슬픔에 쉽게 빠지고 내 시를 좋아하는 너는 슬픔을 이해하려다 우울해진다. 이런 사랑이 있을까 나는 시를 좋아해서 너는 나를 좋아해서
그런 사랑이 있다고 믿는다, 책을 좋아하는 너를 좋아해서 쉽게 우울해지는 기분들을 시로 안아주고 싶어서 나는 시를 좋아하게 됐나보다.
이것은 벌이다, 주머니 속에 숨겨 도망치듯 살면서
침묵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도 싶었다. 그 집 아이는 말이 없어, 조용해, 친구가 없어,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으면 성숙에 다른 이름이 생기는 걸까
그렇다고 믿는다. 문학을 해야 할까 봐 우리는
우울은 달빛을 사랑하도록 설계됐다. 밤은 행복으로 읽힐 단어였다. 그런 마음으로 하루를 견디는 거니까
믿는다, 나는 시를 좋아해서 너는 책장 넘기는 소리 종이의 질감 하늘을 보고 있는 시간을 좋아해서 우리는 더 행복해질 거야 이 벌의 끝에 다다라서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죽었어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죽었어요, 소리를 들을 때까지
이것은 벌, 별,
법
달밤 아래 부서지는 파도
길가 담벼락에 빈 병에 꽂혀있는 마른 아카시아
눈 내리는 봄
나는 시를 좋아해서 너는 나를 좋아해서
시를 좋아하는 나는 쉽게 슬픔에 빠지고 책을 좋아하는 너는 벌을 받는 것 같다, 가족이 되어도 그럴까
가끔 아주 가끔
생각한다, 가장이 된 나는
광장을 걷다가 멈춰 하늘을 본다, 생각에 잠겨 있다 울고
따라 쓴 시를 읽어주다 혼자 있고 싶어진다. 문학을 한다는 내가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할까 봐
행복을 배웠어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될까 봐
(하고 싶은 말은 이런 말이 아닌데, 별 같은 이야기인데)
(법처럼 잘 지키고 싶은 것들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
사랑의 다른 말들을 고백한다, 나는 시를 좋아해서 너는 나를 좋아해서
---애지 2024년 봄호에서
문어
정구민
물갈피에 글을 쓰는 선비
먹고
먹히는
ㄱ ㄴ ㄷ ㄹ
ㅏ ㅑ ㅓ ㅕ
홀소리와 닿소리
문어 발끝마다 흘러나오는 먹물냄새
행간에서 물비늘로 반짝인다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글자들
누가 문어를 뼈 없는 동물이라 말했는가?
마르기도 전에 지워버리는 글이랑
한국에서 태어난 문어는
한글밖에 몰라
시를 번역하는 물고기를 만나지 못해
머리 가득 까만 먹물이 고인다
붓을 꺾어야 할까?
바다 환경 살리려 마지막 먹물까지 짜낸다
펄펄 끓는
기적의 도서관
흡반처럼 빼곡한 도서들
인류와 동행하는 문어文語
인류에 기록되어 문화유산으로 남을 문어의 생태시
공동경비구역
박용숙
엘리베이터 가운데 둔
아파트 공동경비구역
남북의 문 열리고 예견치 않은
회담 성사될 때마다
열대야에도 찬바람 휑하다
애써 외면한 얼굴, 무표정한 근육
어색한 시선은 애꿎은 거울 겨냥한다
누가 이곳에
거울을 달아 놓을 생각했을까?
잠시 딴청 피우지만
매번 낯선 몇 년째 통성명 없는 앞집 여자의
장바구니와
피부와 옷차림새, 액세서리 슬쩍 훑어보며
유기농일까, 아닐까
순금일까, 아닐까
별별 생각 스친다
언제쯤 우리 무장 해제하고
봄꽃 따뜻이 피워낼 수 있을까?
----애지, 2024년 봄호에서
땅 껍질
신대철
화악산 꼭대기 주목 군락지에
텐트 치고 한 달간
미군 레이더 기지 경비를 섰다.
대원들은 틈만 나면 주목 그늘에 벌렁 누웠다. 새도 바람도 햇빛도 푸르게 그늘지어 넘어갔다. 고향에서 온 구름이 내가 모르는 곳으로 하얗게 물결쳐 갔다. 그 물결을 타고 바둑판 이야기가 흘러 들었다. 몇 백년 된 주목을 자르라니! 나는 아름드리 주목 사이를 산책하는 듯 서성이다 미군들이 화악리 캠프로 내려가던 저녁, 서울 불빛을 보며 주목을 생각했다. 우리보다 더 빛을 어둠을 알고 우리보다 더 땅과 하늘을 알고 오래 지구를 버텨 줄 나무들. 정들인 생명붙이 나무들을 돌며 오늘은 이 나무 내일은 저 나무, 매일 바둑판 재목을 바꿨다. 마침내 술 기운으로 톱질하던 고참 대원은 ‘우린 군인이야, 미안해, 미안해요’ 하고 계속 중얼거렸다. 속살 불그레한 나이테 옆에서 남은 숨처럼 두근거리고 있었을 뿐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상부에서는 나무 아래 토막은 가져오고 나머지는 흔적없이 태우라고 했다. 철수하던 날, 대원들은 용담리로 내려갔고 나는 트럭을 인솔하여 화악산을 내려왔다. 가평 헌병대 검문에 재목이 발각되었지만 어디서 온 전화 한 통화에 하룻밤만에 풀려나왔다.
전역이 꿈이었던 고참 대원은
어디에서 꿈을 이루었을까?
안개 자욱한 날
숨통 터 주던 그 높은 숨결
쿵 하고 쓰러지던 그 높은 나무
땅 껍질
기억 속에 으스러져 박혀 있는
가로 42cm, 세로 45cm* 화악산
*바둑판 표준 규격.
먹으로 휘갈긴 문장
조용미
반곡역 가는 길에 지났던 황새쟁이 사거리, 황새와 사람을 말하는 쟁이가 만나 황새쟁이가 되었나
황새처럼 큰 사람 황새처럼 다리가 긴 사람을 말하는 건 아닐 텐데
크게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는 황새가 옛날부터 좋았다 목과 다리를 쭉 뻗고 일자로 나는 그 자세가 나는 더욱 좋았다
검은색 날개깃은 먹으로 휘갈긴 문장 같아
겨울에 찾아오는 귀하고 보기 드문 조용한 황새가, 멸종위기종이 된 황새가 나는 좋았다
이른 봄 밭둑에서 만나는 황새냉이도 솜털 같은 북극황새풀도 좋았다
올겨울은 황새를 보러 어디로 가야 하나 황새 날개를 보면 또 먹을 듬뿍 먹은 붓을 들고 무언가 그리고 싶겠지
희고, 검고, 붉은 황새는 아주 크고 아주 고요해서 가까이 갈 수 없겠지
소년에게
이병률
아버지와 목욕하러 온 아이
아버지가 머리를 감으며 거품을 헹구는데
샴푸를 아버지 머리에다 자꾸 짜대는 아들
다 헹구었을 만하면
또 짜고
다 헹구었을 만하면
또 짜고
아이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아이의 머리카락 많이 자라라고
머리를 빡빡 밀어준 적 있을 것이다
아이가 크면서 아이 머리를 감겨준 적도 몇 번 있을 것이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코 밑을 궁금해 하고
배꼽 한참 아래를 슬쩍슬쩍 내려다본 적도 있을 것이다
한쪽은 웃음을 참느라 한쪽은 씻어내느라
두 엉덩이 계속 실룩거린다
두 사람 사이를 가려주는 듯 수증기가
수줍게 메아리를 만드는 것 같다
북해도의 원주민 아이누 부족은
사내아이의 앞 머리카락에 구슬을 장식해 주고
아이가 첫 사냥에 성공하면 머리카락 끝을 잘라
구슬을 분리해주는 의식이 있다는데
아이야
이제는 너도 세상의 급소를 알았으니
머리카락 끝을 조금 잘라
목욕물에 흘려보내주어야겠다
나의 고도를 찾아서
박분필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고 다시 달이 지고 해가 떠올랐다
낭떠러지에 걸린 철길 위로 벽도 창문도 없는 열차를
타고 철컥철컥 협곡을 지나 협곡으로 접어드는 길
접어들수록 세상이 아득하다
나의 고도를 찾아서
하늘 끝에 닿아있는 아슬아슬한 시월의 산
너무 높아서, 번개가 내리칠 때는 머리보다
배꼽을 조심해야 한다는 산이 배꼽을
감았던 구름을 한 겹 한 겹 풀어낸다
산꼭대기에 태양이 걸린다, 어제 쏟아진 함박눈이
하얀 외뿔고래처럼 헤엄치고 파랗게 담긴 시간이
넘실대고 단풍은 완벽한 색채의 춤사위다
산이 대뜸, 위풍당당한 그림자를 길게 끌며
협곡바닥 푸른 물속에 발을 담근다
물에 비친 마음을 들여다본다
맑은 물에 마음을 닦는 일과
순수한 저 여유로움이 나의 고도였을까
사람이 늙는 일과 단풍으로 물드는 일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길, 모두 물이었으니까
한 방울의 물로부터 시작되었으니까
즐거운 동티
- 멸종의 기쁨
반칠환
당산나무를 베고 마을길을 넓혔어. 산을 깎아 산신의 거처를 헐고, 바다를 메워 해신의 궁전을 없앴어.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리면 더 풍요로워진다는 걸 알았어. 별처럼 꽃처럼 많던 신들이 실업자가 되었어. 사람의 땅에는 백 년 만에 처음이라는 축제가 날마다 벌어지고 있어. 얼음 땡! 수만 년 술래였던 빙하가 풀리고, 낮은 자존의 바다가 높아져 뭍으로 넘치고 있어. 투발루 총리가 연설하며 두 발로 힘을 주니 섬 행세 하던 작은 섬이 가라앉고 있어. 목마른 아라비아 사막에 눈이 내리고, 불모의 시베리아 영구동토에 꽃이 피고 있어. 우리가 만든 동화의 세계야. 최후의 한 생명까지 피안으로 건네주는 뗏군 호모 니르바나스여, 건배!
5월의 시
오은
5월이 아니니까
5월의 시를 쓴다
아직껏 오지 않았으니까
진작에 가버렸으니까
애착의 한복판에 서 있는 연인은
사랑의 밀도를 헤아리지 못한다
5월이 아니어서
5월의 시를 쓴다
멀리서 볼 수 있으니까
한발 앞서거나
서너 걸음 뒤처져서
현장을 상상할 수 있으니까
아직 사랑인지 몰랐을 때
5월은 우거지고
오직 사랑임을 깨달았을 때
5월은 지기 시작한다
꿈에 지고
아집에 지고
심리 싸움에 지고
어김없이 해가 진다
기약 없이 꽃이 진다
때는 지지 않는다
5월의 기념일들에
구멍이 숭숭 난다
5월이 아니므로
철봉에 매달리듯
5월을 붙잡고 늘어진다
철봉은 그대로 있는데
손아귀에 자꾸 힘이 들어간다
내려다보니
5월의 바닥이 아득하다
말을 보낸다
정해영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는 말
수 없이 해도
아직 다 하지 못한
밑바닥에 남아 있는
몇 마디의 말
너무 늦게 깨달아서
그 때를 놓쳐버려
들어 줄 귀가 없는 말
어디 계시는가 지금 쯤
꿇어 업드려
기도로 하는 말
우리 집 강아지는 들어도
꼬리만 흔드는
오래 두어서
허물 허물 해 진
말 같지 않은 말을 보낸다
커피를 마시는 방식
이두예
문문이 부르는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를 들으며 커피를 마신다
몸에 해롭다고 커피를 빼앗아
코코아를 타주는 착한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음음음, 그 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지금은 맞고 그 때는 틀리다를 찍은 배우와 감독의 사랑을 이야기할 마음은 전혀 없다
코코아를 집에 들이지 않겠다는 생각은 손 안에서 바스라지는 종이꽃
소시지를 코앞에 두고 절대 먹지 않겠다는 강아지가 흘리는 식탐
들판을 헤매는 발그레한 주둥이
여름 한가운데서 들쥐를 낳았다던 겨울이
옆구리에서 어린 여우들을 꺼내
풀리면 안 될 암호,
여우 한 마리 여우 두 마리 들 쥐 세 마리 들 쥐 열한 마리 뒤죽박죽 꺼내 들판에 내동댕이치며
음음음, 멀리 가라
음음음, 게 섯거라
눈이 시리다고 늘 눈을 감고 있는 여자가 커피를 들고 햇빛을 마신다
주홍 글씨 보았다는 호랑나비 한 마리가 여자의 심장을 비켜 멀리 날아갔다
解氷期
강 현 숙
어디선가 밥 끓어오르는 소리 들리는지
어디선가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이의 가슴 끓는 소리 들리는지
겨울 산 아침, 해 뜨는 소리 들리나,
겨울나무 사이로 서걱거리는 바람 소릴 들었지
멀리 놓아 보내준 그리운 것들이
돌아와 들판의 흔들리는 꽃으로 핀다면,
그렇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소릴 들어본 적 있는지
누군가에게로 가는 미세한 떨림의 소리는
먼 망설임일까,
겨울 산에 올라 만나는 아침의
먼 소리,
먼 산,
그리운 소리는
찬 겨울 산의 침묵이었다
언 침묵을 뚫고 나오는,
눈 덮인 나뭇가지와 가지
사이의
눈이 옮겨가는 소릴 들은 적 있는지,
오래 깊이 들여다보지 말자
소리의 우물을,
정적만이 남아 있다
흰 고요만이 남아 어루만지는 아침,
우리는 여기를 떠나갈 것이다
解氷期에 눈을 뜨면,
당신은 다른 곳에 가 있다
타조의 지식백과
이선희
울타리를 벗어나니 본능이 살아나네요
본래 소속이 야생이라
작은 머리에 검고 큰 눈동자가 있어요
머릿속으로 보는 것보다
눈으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해요
눈이 밝아 안경 없이도 멀리 볼 수 있어요
빠르게 맹수인지 아닌지 구분하고
훔칠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를 판단하지요
날개는 펼 수 있지만 한 번도 날아 본 적은 없어요
자꾸 불어나는 몸집
퇴화된 아늑한 날개 속에 고개를 파묻고는 해요
자신을 숨기는 법도 알아야 하거든요
식성은 아무래도 잡식성이 유리하겠지요
초식과 육식 때로는 모래와 돌까지 삼켜요
삶이 다 초원은 아니라서
때때로 사막 같은 곳이라서
무리 속에서 태어나고
무리 생활을 하지만 혼자 있는 것이 좋습니다
날개가 역할을 못해서 다리로 나섰어요
이 다리 좀 보세요 달릴수록 강해져요
태생의 억척은 타고나지 않았어요
다행일까요?
새 중에서는 달리기 잘하는 가장 큰 새거든요
세링게티 국립공원에서 사진 한 장 보내요
자칼 매 하이에나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푸른 초원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고 멋지게 폼 좀 잡아봤어요
아 셀프 사진은 아니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