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가 나를 찾아왔어,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어 있었어. |
Poetry
Pablo Neruda
And it was at that age ... Poetry arrived
I did not know what to say, my mouth
And I, infinitesimal being, |
시(詩)
파블로 네루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그리고 나, 이 미소(微少)한 존재는 |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만큼 칠레를 세상에 알린 작가는 없었다. 또한 20세기 칠레의 역사에서 네루다는 매우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위인이었다. 그는 칠레의 민중시인이자 존경받는 정치인이었다.
그의 본명은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에스 바소알토(Neftal Ricardo Reyes Basoalto)였다. 칠레 중부의 파랄(Parral)에서 어머니와 생명을 바꾸고 태어났다. 당시 서른 여덟 살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난산(難産)으로 고생하다 네루다를 세상에 내어놓은 후 절명(絶命)하였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탓에 그는 평생동안 어머니를 그리워했으나, 그 그리움은 어머니에 대한 정을 느낀 후 기억하는 그리움이 아니라, 친모(親母)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었다. 그 품에 앉아 젖을 물고 눈을 마주치지 못한 그였기에, 그 모성(母性)에 대한 선천적 결핍은 평생을 따라다녔다. 그리고 그 모성은 관념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여자의 육체, 하얀 구릉, 눈부신 허벅지,
몸을 내맡기는 그대의 자태는 세상을 닮았구나.
내 우악스런 농부의 몸뚱이가 그대를 파헤쳐
땅 속 깊은 곳에서 아이 하나 튀어나오게 한다.
- '사랑의 시' 중에서
네루다의 고장 파랄(Parral)의 마울레(Maule)호수 풍광
어린 시절부터 네루다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동정심이 많은 아이였다. 한번은 누군가 상처 입은 고니 한 마리를 네루다에게 주었다. 네루다는 상처를 물로 씻어주고는 빵조각과 생선조각을 부리에 넣어주었는데, 고니는 모두 토해버렸다. 상처가 아물었는데도 고니는 네루다 곁을 떠나지 않았다. 네루다는 고니를 고향으로 보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새를 안고 강가로 갔다. 그러나 고니는 슬픈 눈으로 먼 곳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20일 이상을 고니를 강으로 데려갔지만, 고니는 늘 너무도 얌전했고 네루다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니를 다시 데리고 집으로 오려고 안았는데, 고니의 목이 축 처졌다. 어머니의 죽음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 어린 소년은 고니를 통해 죽음을 맨 가슴으로 받아 안았다. 그가 일찍 경험한 생사의 의미와 그 번민들은 그를 문학의 사색으로 향하게 했다.
12살 소년 네루다는 어떤 강렬한 감정이 북받쳐 올라 첫 시를 쓰게 되었다. 그 시는 새어머니에게 바쳐졌다. 철도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시를 읽고 그의 내면에 자리한 어떤 비범함을 느꼈으나, 설마 어린 아이가 이런 시를 쓸 리가 없다고 생각해 "어디서 베꼈냐?"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 날 네루다는 처음으로 자신의 시가 비평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느꼈다. 그러던 중 유명한 여성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이 근처 여학교에 부임하였고, 네루다는 매일같이 그녀를 찾아가 문학 지도를 받았다. 이미 네루다는 식을 줄 모르는 독서열로 닥치는 대로 책을 탐독하던 때였다. 미스트랄은 그에게 러시아 소설책을 잔뜩 빌려 주었고, 그로 인해 문학에 대한 열정은 더욱 깊어졌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시인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해 그가 쓴 시집 노트들을 불태워 버렸다. 그는 이 때부터 아버지의 강압을 벗어나기 위해 이름을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로 바꾸었다. 이 이름은 체코의 작가 얀 네루다(Jan Neruda)와 크리스트교 성인 파울로(Paulo)에서 따온 것이었다.
1921년 산티아고의 사범대학 불어교육과에 입학한 네루다는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그의 창작열은 칠레의 자연만큼이나 왕성했다. 1923년 8월 그는 첫 시집 <황혼 일기:Crepusculario>를 펴냈다. 20세가 안 되는 어린 시인의 가슴속에서는 맑고 투명한 정열이 샘솟고 있었다.
하느님, 당신은 하늘을 불 밝히는 이 놀라운
구릿빛 황혼을 어디서 찾으셨나요?
황혼은 저 자신을 다시 기쁨으로 채우는 법을 가르쳐주었어요”
- 시 '마루리의 황혼', 시집 <황혼 일기>에 수록된 시
푸생(Nicolas Poussin) 작, <시인의 영감:The Inspiration of the Poet>(1630)
<황혼 일기>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학창시절 네루다가 숭배했던 칠레 시인 페드로 프라도(Pedro Prado)는 “확신컨대, 나는 이 땅에서 그 나이에 그만한 높이에 다다른 시인을 따로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칭찬은 네루다의 창작열을 더욱 북돋아 1년 만에 두 번째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Vei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on desesperada>(1924)를 펴내게 한다. 이 시집이야말로 네루다를 깊이와 넓이를 확보한 인기 있는 시인으로 만들어주었다.
네루다의 문학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 후의 작품 <무한한 인간의 시도:Tentativa del hombre infinito>(1926) <열렬한 투척병>(1933)을 거쳐, 초현실주의의 걸작으로 주목 받은 <지상의 거처:dencia En La Tierra,>(1935)까지 그의 시작 활동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이 즈음에 그는 정부 관료의 일을 맡게 되어 1926년 버마의 랑군(오늘날의 양곤) 주재 명예영사로 임명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외교관의 직책으로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등 견문을 넓혔다. 그러다 그는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필생의 가장 큰 선택이자 굴욕이었던 이 행동은 그가 스페인 바르셀로나(Barcelona)로 체재할 당시 스페인 내전을 경험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스페인은 프랑코(Franco)의 파시즘(Fascism)정권의 지배하에 있었고, 스페인 민중은 그 속에서 압박받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자유의 투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공산주의 이념에 입각한 민중해방 운동을 솔선하였다.
그러나 그의 좌익 편향적 행동들은 칠레 정계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상원의원의 직위가 박탈되었고 국가원수 모독죄로 체포 영장이 발급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고단한 방랑과 은둔의 삶을 시작하였다. 안데스 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탈출한 그는 유럽을 두루 다닌 뒤 멕시코에 체류하였다. 그 즈음 서사시 <모두의 노래>(1950)가 쓰여졌다. 그의 정치적 박해는 1952년 끝나서 다시 고국에 돌아가나, 정치에 환멸을 느낀 그는 대통령 후보직을 사양하고 파리 주재 칠레 대사를 자처하여 유럽을 돌아다녔다.
그는 생애동안 세 번 혼인하였고 평생을 떠돌아 다녔다. 그는 늘그막에 정착하여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누리다가 1971년 노벨 문학상의 수상의 영예를 받은 후 2년 후에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당시 칠레는 내전의 비극적 상황으로 수년 간 시달리고 있었는데, 네루다는 죽는 날까지 조국의 미래와 평화의 도래를 걱정하였다.
이 작품은 '시인이란 누구인가', '시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시인 네루다의 대답을 시로 읊은 것이다.
중세 음유시인 알브레히트(Albrecht)의 필사본 시집
그에 의하면, 시적 영감은 갑자기 '나'를 찾아와 눈을 멀게 하고 입을 다물게 한다. 시의 화신(化身)은 짐작도 하지 못하는 때에 소리없는 발걸음으로 다가온다. 영감의 메시지는 무언(無言)의 침묵도, 성대(聲帶)로 떨려나오는 음성도 아닌, 거룩한 감각으로 시인의 마음에 직접 들어온다. 그 소리는 매일 지나다니는 길거리에서, 한밤중의 산책 중 떨리는 나뭇가지에서, 또는 마음의 걷잡을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의 불을 통해 '나'를 부른다. 그 존재가 나를 부르기 전까지 나는 얼굴없는 소시민이었다. 그러나 그가 나를 건드리는 즉시 그 떨림과 속삭임은 바로 시가 되고, 나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마치 음유시인(Minnesinger)이 달빛과 폭포에서 영감을 얻어 몽환적인 순간에 시를 쏟아내는 것처럼 그렇게 시가 만들어졌다.
시를 만나는 것은 황홀하고 떨리는 순간이나, 이를 받아들이는 마음은 혼란스럽다. 마치 세상의 진리가 나를 가격하여 가슴에 큰 구멍을 내고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나를 열망케 한다. 시의 영감은 또한 시인의 마음에 그 자식을 잉태시켜 놓는다. 수태고지(受胎告知)의 장면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처녀 마리아에게 축북하며 그 몸 속에 신성(神聖)한 씨앗을 심어놓듯 말이다.
이제 씨앗은 부풀어올라 시인의 뇌와 입으로 생각하고 말한다. 어느 새 시인은 영감이 시키는 대로 시의 첫 주를 쓰기 시작한다. 그 이슬같은 시의 첫 방울들을 시인은 '순수한 지혜'로 불렀고, '하늘이 열리는' 순간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시의 영감은 화살과 불과 꽃의 농구(農具)로 그의 마음밭을 돌아다니며 곳곳에 논밭과 유성, 밤 등으로 표상되는 우주를 이식(移植)한다. 그리고 시인은 그 이식된 그림자를 자신의 영혼에 투영시키며 시를 토해 낸다.
시인은 시 한 편을 쓰면서 어떤 엑스타시(Ecstasy)를 경험한다. 큰 별들이 총총한 허공에서 노닐며 그 심연의 환한 어둠 속에서 별들과 하나가 된다. 우주와 하나가 되고 자연과 동화하며 시와 시인이 합쳐지는 경지가 도달한 것이다. 이윽고 시인의 마음은 바람으로 흩어져 세상에 가득 시를 날린다.
위의 시에서 네루다는 시가 자연스러운 영감의 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시는 펜과 종이를 통해 억지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햇빛이나 빗줄기처럼 '떨어져' 내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속적으로 생을 성찰하고 사물과 우주를 사색한 후에 갑자기 선물처럼 시의 영감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신경림 시인은 시를 억지로 쓰는 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 시인은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안 보일 정도로 쌓는 훈련을 안 쌓아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한 어떤 시인의 질문이 본래의 취지와는 다른 쪽으로 편리하게 인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만들어도 억지로 만든다는데 있다. 자연스러운 데가 없다는 뜻이다. 처음 읽을 때는 눈에 쉽게 띄지 않다가도 다시 읽으면 억지가 확연히 눈에 드러나고 또다시 읽으면 바느질자국까지 보인다. 나 자신 높이 평가한 바 있는 꽤 반응이 좋았던 어떤 시집은 처음 읽을 때는 참 근사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다시 읽으니 싫증이 나고 또다시 읽으니 지겨워졌던 근래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 이것은 오늘의 우리 시에 거의 공통되는 것 같다."
카라바죠(Merisi da Caravaggio) 작, <시인 호메로스의 초상:Portrait of the Poet Homer>(1639)
시인은 먼저 자신의 몸을 던져 '시를 살아야' 한다. 오감으로 모든 소재들을 받아들이며 그 사물과 현상들의 본질과 의미를 깊이 파헤쳐야 한다. 골똘히 생각하고 치밀하게 사고한 결과들은 시인의 가슴과 머리에 쌓여진다. 그 나날과 과정들이 무르익었을 때, 시는 마치 석류가 스스로 속을 내보이듯 숱한 시어와 이미지들이 갑자기 출현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앞에서 인용된 '피아니스트가 손가락 연습을 하는 것'과 다른 차원이다.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시어를 잘 구사하는 연습을 할 것이 아니라, 자연을 사랑하고 인간의 정신을 탐구해야 할 것이다. 마치 소년 네루다가 죽어가는 고니를 안고 절실한 비통감을 가슴에 품었듯이, 세상과 인생에 대해 많은 눈물과 웃음, 숱한 경험과 공감을 느끼고 난 후 시인은 저절로 문학의 전당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