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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곡, 초원, 대연 세 분 묘소에 조선 측백나무 묘목 심기
2023년 6월 20일(화)
겨울에 차를 타고 가면서 강화도 마니산 앞에서 양도면 진강산을 바라볼 때마다
하곡 정제두 선생 묘소에 있는 푸른 소나무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소나무들이 많지는 않지만 언제나 푸르릅니다.
겨울에 눈이 하얗게 내렸을 때는 소나무들이 더욱 푸르게 돋보입니다.
진강산에는 참나무도 많고 각종 활엽수 나무가 많아 식생 환경이 아주 좋습니다.
묘소 주변에 있는 나무들이 자꾸 묘소 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묘소에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옵니다.
하곡 정제두 선생 묘소에는 측백나무가 없습니다.
소나무도 많지 않고 측백나무도 없기에
측백나무 묘목을 심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측백나무가 가진 뜻도 생각해보고 자료도 찾아보았습니다.
한국 자연환경에 오랫동안 적응해온 조선 측백나무를
유적지에 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골랐습니다.
요즘에는 유럽에서 들여온 서양 측백나무 여러 수종을
정원이나 공원에 심는 붐이 일어났고 가격도 상당합니다.
조선 측백나무 묘목은 오히려 서양 측백나무 또는 향나무의 접목용 대목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측백나무는 물을 좋아하기에 3월 4월 가물 때보다는
오뉴월 빗물이 떨어진 뒤에 심는 것도 괜찮다고 합니다.
5월부터 좋은 묘목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실생 2년 묘목 가운데 좋은 묘목을 골라서 파는 곳이 있는데 금방 매진되었습니다.
어쩌다가 6월이 되어 더는 늦출 수 없어서
실생 1년 묘목을 골라 파는 곳에서 200주를 샀습니다.
하곡 정제두 선생 묘소에 100주를 심고
초원 이충익 선생 묘소에 50주, 대연 이면백 선생 묘소에 50주를 심으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가을에 빨간 열매가 열리는 마가목 10주를 사서 묘소에 한두 주씩 심고
남는 것은 회원들 집에 심으려고 생각하였습니다.
묘목을 심고 몇 년 또는 몇십 년이 지나면 크게 자라서 묘소를 잘 지켜주길 바랍니다.
하곡학 연구원 회원들과 일찍 상의하였고
하정숙 선생이 최근에 회원들에게 자주 연락하여
21일(수)에는 전국에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니 20일(화)로 날을 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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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곡 정제두 선생 묘소에 묘목 심기 :
요즘 먼동 트는 때가 일러서 20일(화) 7시에 강화읍에서 만나고 싶었으나
회원들 사정에 따라 8시에 모였습니다.
한재호 현임 회장을 비롯하여 하정숙 전임 회장, 류현익 전임 회장, 황영자 선생, 김성호 선생(세계적인 아이돌 가수 김우진의 아버지)에 저까지 합하여 모두 6명이 묘목과 연장을 들고 일찍 모였습니다.
날씨는 흐리고 바람이 불지 않아 나무 심기에 아주 좋았습니다.
김성호 선생은 새벽에 일어나 서울에서 일찍 출발하여 7시에 김포 마송에서 저를 태우고 강화읍에 왔습니다.
류현익 선생은 1톤 트럭에 큰 물통에 물을 담고, 삽, 낫, 곡괭이 검정 비닐 1롤 등 자재를 싣고 왔습니다.
하정숙 선생과 함께 마트에서 막걸리 3병을 사고 다시 중간에 참으로 먹을 과일 등 식재료 몇 가지를 샀습니다.
8시에 강화읍 플러스 마트에서 양도면 하일리 정제두 선생 묘소에 갔습니다.
김성호 선생은 가는 길에 황영자 선생을 안양대학교 근처에서 태우고 왔습니다.
한재호 회장은 엔진톱, 예초기 2대를 승용차에 싣고 하점면에서 곧바로 묘소로 왔습니다.
9시에 묘소에 막걸리 3잔을 올리고 절하고 묘목 심는 것을 아뢰었습니다.
모여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얼마 지난 뒤에 세 팀으로 나누고 묘목 100주를 셋으로 나누어 묘소 뒤에 있는 소나무들보다 더 위쪽으로 올라가서 산길이나 언덕에 햇빛이 드는 곳에 여기저기 드문드문 심었습니다.
측백나무 묘목이 묘소에 있는 소나무들과 경쟁하지 않도록 멀리 위쪽에 심었습니다.
발로 삽을 눌러 흙을 열십자로 흔든 뒤에 틈새에 묘목을 심고 발로 밟아 공기를 뺐습니다.
심은 뒤에 검정 비닐을 가로세로 50cm 넘게 멀칭하여 습기를 보존하고 풀들이 덤비는 것을 막았습니다.
황영자 선생이 마가목 1주를 묘소 오른쪽에 벌초하지 않는 양지바른 곳에 심었습니다.
한재호 선생은 엔진 톱을 쥐고 묘소 주변에 있는 자잘한 잡목을 베었습니다.
한재호 선생은 평소에 묘소에 올 때마다 자잘한 잡목들이 묘소를 가리는 것이 눈에 거슬렸다고 합니다.
하정숙 선생은 묘소 옆에 앉아 검정 비닐을 적당하게 낫으로 열심히 자르고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묘목을 다 심고 내려온 류현익 선생과 김성호 선생은 한재호 선생이 엔진 톱으로 베어낸 나무들을 멀리 옮겨 쌓아놓았습니다.
황영자 선생은 묘소 왼쪽 진달래 나무들 곁에 있는 잡목을 낫으로 쳐냈습니다.
저도 묘목을 다 심고 내려와서 베어낸 나무를 옮기는 것을 도왔습니다.
회원 모두 묘목 심고 잡목을 옮기느라고 땀이 옷에 몇 차례나 흔건히 젖었습니다.
묘목을 심는 동안에 너도나도 하는 말이 나무는 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심은 뒤에 돌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아무튼지 나중에 다시 찾아와서 심은 묘목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였습니다.
하곡 정제두 선생 묘소에 묘목 심기는 9시에 시작하여 11시에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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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연 이면백 선생 묘소에 묘목 심기 :
초원 이충익 선생 묘소부터 갈까? 가까운 이면백 선생 묘소부터 갈까?
점심 때문에 가까운 묘소에 먼저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건창 선생 묘소가 있는 건평리에 11시 반에 닿았습니다.
이면백 선생 묘소와 이희원 선생 묘소에 잔디가 상당히 깨끗하고 말끔하게 자랐습니다.
강화군청 문화재 팀에서 지난해부터 이건창 선생 묘소에 벌초할 때 벌초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앞서 작년 가을에도 회원들이 모여 벌초하였고
또 올봄에는 류현익 선생과 김영우 선생 두 분이 잡풀을 없애는 제초제를 두 번이나 뿌렸습니다.
묘소에 막걸리 술잔을 올리고 절하고 묘목 심는 것을 아뢰었습니다.
먼저 묘목을 묘소에서 떨어져서 심으려고
한재호 선생이 예초기를 들고 벌초하지 않은 곳(이희원 선생 묘소 오른쪽)에 풀을 베었습니다.
다른 회원들은 잘라낸 뽕나무 가지를 붙잡고 잘 익은 뽕 열매를 먹으면서 웃었습니다.
김성호 선생과 하정숙 선생이 함께 묘목을 심고
류현익 선생과 황영자 선생이 함께 묘목을 심었습니다.
마가목 나무 1주도 심었습니다.
한재호 선생은 잡초를 베고 잡목을 잘랐고 저는 풀과 나무를 옮겼습니다.
묘목을 심은 뒤에 보니 묘소가 시원합니다.
1시에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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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먹기 :
건평리 포구에 있는 식당에서 농어회, 광어회 둘을 시키고 잘 먹었습니다.
하정숙 선생은 구본일 선생이 일러준 식단에 따라 몇 년 동안 섭생하여 약을 버릴 만큼 건강합니다. 그래서 회원들을 둘로 나누고 식탁을 농어회, 광어회로 나누어 앉혔습니다.
식사 중에 신민애 회원이 왔습니다.
요즘 시아버님 병환이 위독하셔서 간병하기 바쁘지만 찾아와서 회원들을 만났습니다.
각자 식성대로 식사를 잘하였습니다.
김성호 선생이 식비 큰돈을 냈습니다.
김성호 선생과 황영자 선생은 오후에 일이 있기에 식사를 마친 뒤에 먼저 헤어졌습니다.
신민애 선생도 식사를 마친 뒤에 강화읍으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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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초원 이충익 선생 묘소에 묘목 심기 :
점심 먹을 때부터 하늘이 흐리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정숙 선생, 류현익 선생, 한재호 선생에 저까지 모두 4명이 선두리 초원 이충익 선생 묘소로 갔습니다.
차에서 연장을 내리고 산사태를 막는 철망 아래 개구멍으로 들어가서 콘크리트 수로를 따라 올라갔습니다.
초원 이충익 선생 묘소를 보니 잔디가 아주 파랗게 잘 자랐습니다.
류기정 전임 회장이 묘소 가까이 덕포리에 살기에 가끔 와서 벌초하였고
하곡학 연구원 회원들이 해마다 벌초하였습니다.
묘소에 막걸리 술잔을 올리고 절하고 묘목 심는 것을 아뢰었습니다.
얼마 지난 뒤에 한재호 선생이 먼저 엔진 톱을 들고 묘소 주변에 있는 잡목을 베었습니다.
우리들은 베어낸 나무들을 옮겨 쌓았습니다.
묘소의 오른쪽과 왼쪽이 시원하여
멀리 진강산에 있는 하곡 정제두 선생 묘소도 잘 보이고
이충익 선생이 지내셨던 왼쪽 초피산도 잘 보입니다.
묘소 앞에 있는 너른 조산평야도 잘 보입니다.
측백나무 묘목을 묘소에서 가급적 멀리 심었습니다.
마가목 1주도 심었습니다.
오후 5시 넘어 빗방울이 떨어지자
하정숙 선생이 얼른 마치라고 재촉하였고
모두 얼른 마치고 내려왔습니다.
한재호 선생은 요즘 바쁜데 오늘 일도 고되어 지친 모습이 얼굴에 역력하게 나타났습니다.
류현익 선생은 집에서 몇 번이나 전화 와서 언제 오냐고 물었습니다.
묘소에서 내려와서 연장을 챙겨 차에 싣고 헤어졌습니다.
원래 계획은 여러 사람이 일찍 모여 점심때까지 묘소 3곳에 얼른 심고 마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은 하다보면 늘어나고 새 일이 생기는 것이라서 오늘도 늦게 마쳤습니다.
류현익 선생 트럭에 저도 타고 강화읍에 왔고
한재호 선생이 승용차에 하정숙 선생을 더리미 집까지 태워다 주었습니다.
오늘 묘목 심기는 잘 마쳤습니다.
화요일 밤부터 소낙비가 내리고 이튿날 수요일 낮까지 내렸습니다.
묘목이 활착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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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측백나무가 가진 뜻 :
고려말에 목은 이색 선생은 포은 정몽주 선생이 이성계에게 굽히지 않아 죽자 정몽주 선생을 송백에 비유하며 불굴(不屈)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높이 평론하였습니다. 이때부터 한국의 지식인들과 문인들은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군자의 불굴(不屈)을 상징한다고 여기고 많은 글을 지어왔습니다.
이익(李瀷), 『성호사설』, 「목은 불굴(牧隱不屈)」 )
정경운(鄭慶雲, 1556∼?) 선생은 임진왜란을 겪은 뒤에 조정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구절에서 1605년 12월에 「목단측백설(牧丹側栢說)」을 지었습니다. 목단이 당나라 시기에 부귀를 상징한 꽃은 불음불이불굴(不淫, 不移, 不屈)를 상징하는 측백나무에 비교할 수 없으며 심지어 추운 겨울을 견디어내고 이른 봄에 꽃을 피는 매화조차도 측백나무에 비교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주장하였습니다.
(鄭慶雲, 1556∼?, 『고대일록(孤臺日錄)』, 을사(乙巳, 1605) 12월 29일 庚午, 「牧丹側栢說」)
조선시기 이정귀 선생은 측백나무가 가진 뜻이 한마디로 말해 “홀로라도 바르다”는 뜻의 “고정(孤貞)”이며 군자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이정귀(李廷龜, 1564-1635), 『월사집(月沙集)』, 「숙평의 연가행(燕歌行)에 차운하다.」 : “松柏本孤貞”)
측백나무는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처럼 묘소에 심었습니다.
그래서 평양에 있는 기자 묘에도 측백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張維, 「기자를 애도하는 노래」)
한국고전번역원 자료를 살펴보면 울릉도와 금강산에 측백나무 군락지가 있다고 합니다.
조선시기 홍만선 선생은 측백나무를 오뉴월에 구덩이를 파고 지난해 가을에 걷은 보리를 넣어 거름으로 삼아 심으면 잘 자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홍만선, 『산림경제』, 제2권, 측백나무 심기, 種側柏)
측백나무 가지를 삽목할 때는 삽수 끝이 쉽게 무르거나 병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삽수 끝을 불에 그을려서 심었다고 전합니다.
(이덕무(李德懋), 『청장관전서』, 제48권, 「이목구심서 1(耳目口心書一)」)
측백나무 열매와 잎의 약효와 경험 처방은 양예수(楊禮壽) 『의림촬요』에 많이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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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기에 봉건제에서 군현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군현제에서는 유능한 행정관료가 필요하였기에 충성스럽고 유능한(賢能) 관원을 양성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공자와 맹자 모두 관원의 충성스러운 태도를 상징하는 나무로서 상록수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꼽았습니다. 물론 군주는 충성스러울 필요가 없고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하여야 하며, 현능(賢能) 두 가지 덕목은 신하에게만 해당합니다.
당나라에서는 부귀를 나타내는 목단꽃이 유행하였고 신라의 쟁반처럼 커다란 국화꽃이 당나라에도 퍼져서 유행하였다고 합니다. 송나라에 들어와서 신하의 절개를 강조하면서 성리학자와 경세학자들이 소나무와 측백나무의 상징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산동성 곡부뿐만 아니라 신하를 양성하는 관립학교 또는 서원 유적지에 가보면 현재도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많이 심겨 있습니다. 남쪽 따듯한 지역에서는 소나무가 적합하지 않아 측백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공자가 겨울에 날씨가 추운 뒤에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다른 나무들보다 나중에 잎을 떨어뜨린다고 말하여 송백(松柏)을 군자에 비유하였고 널리 유행하였습니다.
(『論語、子罕』:“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
맹자는 대장부의 태도를 세 가지로 요약하였습니다. 부귀하더라도 분수에 넘치게 우쭐하지 않고, 가난하고 관직이 없어 신분이 낮더라도 남에게 아부하려고 자기 생각과 의지를 쉽게 바꾸지 않고, 남이 무력으로 위협하더라도 굽히지 않는 태도 셋(不淫, 不移, 不屈)을 들었습니다. 이때부터는 공자가 말한 군자와 맹자가 말한 대장부의 뜻을 모두 소나무와 측백나무에 얹었습니다.
(『孟子、滕文公下』:“居天下之廣居,立天下之正位,行天下之大道。得志,與民由之;不得志,獨行其道。富貴不能淫,貧賤不能移,威武不能屈,此之謂大丈夫。”)
공자와 맹자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측백나무를 노래한 뒤에 오늘날 중국 사람들은 소나무와 측백나무의 상징적 의미를 “올바름을 지키는 태도가 굳건하다”는 뜻의 “견정(堅貞)”이라고 말합니다.
당나라 이백(李白)은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외로우나 곧다(孤直)”고 평론하고 꽃이 화려한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비교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松柏本孤直,難爲桃李顏。) 또 풀이 된다면 오랫동안 은은한 향을 내는 난초가 되고 나무가 된다면 겨울에도 푸르른 소나무가 되겠다고 말하였습니다.(爲草當作蘭,爲本當作松。蘭秋香風遠,松寒不改容。)
물론 중국 문인들은 나무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치는 나무는 소나무입니다. 그래서 송나라 소동파는 어릴 때부터 소나무 가치를 알아보고 1만 주 이상 심었고 나중에 자라서 기둥이나 서까래에 썼다고 합니다. 왕안석도 소나무를 나무의 으뜸이라고 여기고 송(松) 글자에서 발음을 나타내는 공(公)도 뜻이 있기 때문이라고 억지 해석하였습니다.
요즘에는 세한 삼우(歲寒 三友)로서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 셋을 들기도 합니다.
(松、竹、梅,譽爲“歲寒三友”)
명나라 위교(魏校)는 모든 나무가 양(陽)에 해당하지만 측백나무는 음(陰)에 해당하고 곤괘의 정덕(貞德)을 상징하며 서쪽 정색(正色)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위교가 한나라 시기와 위진시기에 유행한 참위서에서 찾은 내용을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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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
1. 이익(李瀷), 『성호사설』, 제21권, 경사문(經史門), 「목은 불굴(牧隱不屈)」 :
목은 이색(牧隱 李穡)은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가 살해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시(詩)를 지었다.
세상에서 영화와 몰락은 돌고 도는데, 世間榮悴似循環
소나무와 측백나무는 언제나 푸르지만 추위도 잘 견딘다. 松栢蒼蒼又苦寒
중니를 배워 아홉 번째 손괘(巽卦)를 펼쳤으나, 且學仲尼陳九卦
늙어 백발이 되면 장단(長湍)에서 노후를 마치련다. 白頭身世付長湍
2. 정경운(鄭慶雲, 1556∼?), 『고대일록(孤臺日錄)』, 제4권, 을사(乙巳, 1605) 12월 29일 경오(庚午):
「목단측백설(牧丹側栢說)」(남명학 고문헌 시스템에서 자료를 찾아 글자를 수정하고 구두점을 찍고 번역을 수정함):
분우(分愚 : 地名)에 사는 사람(정경운 본인은 아니고 벗?)이 집안 뜰에 풀로는 목단을, 나무로는 측백나무를 심었다. 어떤 나그네가 지나가다가 바라보고 말하기를, “꽃이 크고 화려하구나! 꽃잎이 붉고 윤기가 나는 것이 군자 같다! 집주인이 뜰 안을 둘로 나누어 목단을 심은 안목이 아주 높습니다.”
곁에 있던 참된 은퇴자(眞逸子)가 비웃으며 말하길, “당신은 목단 꽃의 색깔을 말하고 겉모습을 평론하였습니다. 『논어、안연』에서 공자가 ‘이름이 소문난 사람이 겉모습은 어질지만 행실은 인(仁)에 어긋나면서도 스스로 모른다.’는 것을 조심하라고 일렀고(『論語、顏淵』:夫聞也者,色取仁而行違,居之不疑。在邦必聞,在家必聞。) 또 어떤 학자는 ‘바깥 외물에 힘쓰고 속마음에 무관심하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예를 들어 조선 성리학자들은 한결같이 務外遺內 태도를 막았으며, 명나라에서도 顧麟이 왕양명에게 보낸 서신에서 요즘 학생들은 외부 지식을 배워 확장하는 데에 힘쓰고 속마음에서 요점을 생각하는 것에는 무관심하다고 한탄하였습니다. 來書云:近時學者,務外遺內,博而寡要。) 화려한 목단 1백 그루가 어찌 한 그루 측백나무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측백나무만이 소나무(蒼臾)에 견줄 수 있고 심지어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른 봄에 꽃을 피워 고생을 견딘 대가를 받는 매화(梅史)조차도 무시합니다. 측백나무가 곧게 자라는 것을 보면 구름이 있는 높은 하늘까지 솟아오르고 푸르름은 계절을 가리지 않습니다. 따듯한 봄이라고 나무의 푸르름이 더욱 푸르지 않거니와, 추운 겨울이라고 나무의 곧음을 줄이지 않습니다. 정말로 측백나무는 맹자가 말한 대장부의 불음불이불굴(不淫, 不移, 不屈) 세 가지 덕목을 가졌으니 어찌 군자를 상징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불타듯이 화려한 목단꽃은 요행으로 얻은 부귀와 어찌 다르지 않습니까? 측백나무의 영원한 푸르름은 철석같은 마음(鐵肝石腸)으로 다 상징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두 사람의 논변을 들은 뒤에야 분우에 사는 주인이 목단과 측백나무 두 종류를 반드시 심은 뜻을 이해하였는데, 우리가 버릴 것이 무엇이고 지킬 것이 무엇인지를 목단과 측백나무에 비유하였으니 목단을 경계하여야 한다! 목단이 잠시 가장 화려하여 꽃 가운데 임금이라고 말하지만 영원히 절개를 지키는 푸르른 측백나무와 같겠는가?(만고 역사에 남는 절개를 지킨 신하가 세상에서 잠시 가장 부귀한 임금보다 낫다.) 며칠 동안 꽃 가운데 왕 노릇을 하는 목단은 오히려 전국시기 제나라 왕 전건(齊王 田建)이 진(秦)나라에 협조하다가 멸망 당하여 황량한 공(共) 땅에서 굶어 죽은 것만도 못하다. 따라서 목단과 측백나무 두 종류 나무가 상징하는 뜻을 따져서 사람의 됨됨이를 살펴보는 방법으로 삼았습니다.
十二月十九日庚午, 「牡丹側柏說」︰
分愚主人庭植二草木,牡丹也,側柏也。客有過而賞者,曰︰“富哉花乎!顏如渥丹,其君(子)也哉!東君(東主)分土封榮於茲極矣。”
傍有眞逸子哂之,曰︰“公之言言其色,公之論論其外。取仁而行違,聖人之垂訓,舉外而遺內,君子之戒。百牡丹,豈若一介(個)柏乎?夫柏之爲物,肩蒼臾,而反梅史。其直聳雲宵,其靑貫四時,春風不能助其光,冽日莫能減其節,眞所謂‘不淫不屈’者,庸非君子儔乎?一時之灼灼,何異倘來之富貴?不變之靑靑,奚啻鐵肝而石腸呼(乎)?”
吾然後知主人之必種兩介物者,無非取舍之存其間,而以牡丹爲他山之石可乎!而況一時之君,何如萬古之節?數日之王,反不若建共之客。於斯二者取,以爲觀人法。
渥丹:백합(Lilium concolor Salisb), 붉고 촉촉하고 윤기 나는 얼굴.
蒼臾:蒼官이나 蒼臾 모두 松柏을 말함.
梅史:梅花
不淫不屈:『孟子、滕文公下』:居天下之廣居,立天下之正位,行天下之大道。得志,與民由之;不得志,獨行其道。富貴不能淫,貧賤不能移,威武不能屈,此之謂大丈夫。
建共之客:齊나라 왕 田建을 말함. 제나라 왕 전건은 중원지역 국가들이 연합하여 진(秦)나라 공격을 막는 동안에 연합에 참여하지 않고 오히려 어리석어서 간신들과 간첩들의 말들 듣고 진나라에 협조하였다가 결국에는 진나라에 멸망 당하고 전견은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무성하고 황량한 공(共) 땅에 귀양가서 굶어 죽었다.
『資治通鑒、秦紀二』,始皇帝二十五年:“秦遷之共,處之松柏之間,餓而死。”“松耶,柏耶!住建共者客耶!”
3. 이정귀(李廷龜), 『월사집(月沙集)』, 제5권, 「갑진조천록」 하(甲辰朝天錄下), 「숙평의 연가행(燕歌行)에 차운하다.」 :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나중에 잎을 떨어뜨리는 것을 안다는데, 歲寒識後凋
소나무와 측백나무의 성질이 외롭고 올곧은 것을 아는 것이다. 松柏本孤貞
4. 張維, 『계곡선생집』, 제1권, 「기자를 애도하는 노래, 강 편수의 운에 차함[吊箕子賦, 次姜編修韻」 :
지금까지 수천 년 지났어도, 距今兹幾千祀兮
제사를 잘 지내온 것이 분명하다. 儼祠廟之孔陽
묘소 앞에 있는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우러러보라, 瞻墓門之松栢兮
나무꾼과 목동일지라도 나무들을 벨 수 있겠는가? 豈蕘牧之或戕?
해외 조선에서 기자에게 제사 오래오래 지내왔는데, 綿血食於海外兮
조선이 은나라 좋은 유풍을 이었기 때문이다. 足以迓續乎殷商
5. 홍만선, 『산림경제』, 제2권, 종수(種樹), 측백나무 심기(種側柏):
오뉴월 긴 장마 때 구덩이를 파고 지난가을에 걷은 보리(秋麥)를 펴고 심으면 잘 산다. (심는 법은 위 소나무 조목과 같다. 《경험방》)
五六月長霖時, 鋪秋麥於坎中而種之, 生活 [不枯]。(經驗方:種法上同)
* 측백나무 가지를 삽목할 때는 삽수 끝이 쉽게 무르거나 병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삽수 끝을 불에 그을려서 심었다고 전합니다.(“側栢之枝, 火燒而”種。)
출처 : 이덕무(李德懋), 『청장관전서』, 제48권, 「이목구심서 1(耳目口心書一)」.
6. 『論語、子罕』:“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
『荀子、大略』:“歲不寒,無以知松柏。事不難,無以知君子。”
7. 『孟子、滕文公下』:“居天下之廣居,立天下之正位,行天下之大道。得志,與民由之;不得志,獨行其道。富貴不能淫,貧賤不能移,威武不能屈,此之謂大丈夫。”
8. 唐、李白:“松柏本孤直,難爲桃李顏。”
“願君子長松,慎勿作桃李。”
“爲草當作蘭,爲本當作松。蘭秋香風遠,松寒不改容。”
9. 宋、蘇東坡,「東記」:“予少年頗知種松,手植數萬株,皆中梁柱矣。”
宋、王安石,「字說」:“松爲百木之長,猶公也。故字從公。”
10. 『前漢、東方朔傳』:“柏者,鬼之廷也。”
『春秋緯』:諸侯墓樹柏。
明、魏校,『六書精蘊』:“柏,陰木也。木皆屬陽,而柏向陰指西,蓋木之有貞德者,故字從白。白,西方正色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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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은 하정숙, 황영자, 김성호 세 분과 저의 핸드폰으로 찍은 것을 모았습니다.
벌목하고 벌초한 뒤에 묘목 심느라고 바빠서 사진이 많지 않습니다.
1. 하곡 정제두 선생 묘소
2. 대연 이면백 선생 묘소
3.초원 이충익 선생 묘소
첫댓글 측백나무와 관련된 고사나 이야기 공부 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