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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당김(Attractive)과 접문(接吻)의 시학
―이영식, 꽃을 줄까 시를 줄까의 시적 미학
황치복(문학평론가)
끌어당김, 혹은 온기(溫氣)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 그리스 철학사에도 심오한 사유를 펼친 학자들이 많지만, 그중 가장 흥미롭고 매력적인 사유는 엠페도클레스(Empedocles)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의 기본적인 개념 중에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라는 기본적 4개의 원소인 아르케(arche, 原質)를 비롯해서 인식론상의 감각 지각의 통로라든가, 전생 윤회와 영혼 정화 등 독특한 것들이 많은데 그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사랑(Philotes)과 미움(Neikos)”이라는 개념이다. 아무리 초기 철학자라 해도 독특한 개념의 정의와 그것의 운동과 원리 등에 대한 복잡한 절차가 있어서 쉽게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는 흙과 물, 불과 공기와 같은 원질(原質)이 존재의 궁극적 실체라며, 이 네 가지 요소들의 혼합과 분리로 인해 현상세계가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즉 한번 존재했던 것은 파괴되지도 않고 창조되지도 않으며 다만 아르케의 혼합으로 존재가 생성되고, 분리로 인해서 해체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르케의 혼합과 분리를 야기하는 근본적 동인이 바로 ‘사랑과 미움’의 원리라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엠페도클레스의 독특함이 있다. 그러니까 현상세계의 운동과 변화의 근본 원인이 바로 인력(引力)을 의미하는 사랑과 척력(斥力)을 대변하는 미움이라는 주장인 셈이다. 엠페도클레스처럼 사랑(philotes)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고대 그리스 철학자 중에도 사물들이 끌어당기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현상의 발견으로 범신론(汎神論)과 물활론(物活論)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예컨대 밀레토스 학파의 개척자인 탈레스는 호박(琥珀)과 자석이 서로 끌어당기는 것을 보고 그 속에는 프쉬케(Psyche, 靈魂)가 들어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돌과 같이 생명이 없는 사물에조차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주장했다. 탈레스의 이러한 범신론적 경향은 피타고라스까지 영향을 주게 되었는데, 그는 전 우주가 살아 있고 윤회의 사슬에 묶여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서로 끌어당기는 성질은 영혼과 생명의 징표처럼 받아들여졌는데, 엠페도클레스는 이러한 끌어당기는 힘인 사랑에 의해서 존재가 생성되고 미움에 의해서 해체된다고 설파한 것이다. 그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인 사랑만을 우주의 운동과 변화의 원인으로 지적한 것은 아니지만, 사랑에 의해 네 요소들이 하나로 뭉쳐서 촘촘한 덩어리이자 완전체인 구체(球體)의 일자(一者)를 형성한다고 주장한 것을 보면, 그가 주목하는 원리가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생명의 발생과 존재 생성의 원리로서 서로 끌어당기는 힘인 사랑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영식 시인의 꽃을 줄까 시를 줄까라는 시화집을 읽고 나서 엠페도클레스가 떠오른 것은 아마도 시인의 시적 세계가 끌어당김의 미학으로 그려져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이 시집의 특장점에 대해 여러 가지 관점에서 다양하게 논할 수 있겠지만, 예컨대 이전 시집인 꽃과 정치의 해설에서 필자가 명명한 것처럼 ‘숭고의 미학이라든가 성스러움의 아우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진정성의 시학, 혹은 공자가 시경에 대해 한마디로 정리한 ‘사무사(思無邪)’의 시학으로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영식 시인의 이번 시집은 종교적 색채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서도 어떤 성스러움의 기품이 나타나고, 속살이 다 비치는 듯한 투명성과 어린아이의 마음과 같은 맑고 깨끗한 시심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번 시집에서 주목되는 현상은 시인과 시적 대상, 또는 시적 대상들끼리 서로 끌어당기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서로 끌어당겨 접촉했을 때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의미들이 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영식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심미적 효과가 발휘되고, 정동의 울림이 퍼져나가는 지점은 대부분 이처럼 서로 끌어당기고 접촉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는데, 그 구체적 양상을 작품으로 확인해 보자.
어린왕자가 물었다
아저씨 직업이 뭐예요?
나는 시인이란다
이 별에서는 시가 밥이 되나봐
그보다는
시에게 나를 떠먹이는 거지
―「시인」, 전문
사실 이 시는 끌어당김의 미학을 실천하는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시인(詩人)이란 시의 사원을 지키는 사제와 같은 사람이어서 시가 시인을 위해서 복무하는 게 아니라 시인이 시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역설적 구조를 통해 강렬하게 전달되고 있다. 그러니까 시가 시인의 생명을 위해서 밥이 되는 게 아니라, 시인이 시의 생명을 위해서 자신을 밥으로 바쳐야 한다는 말인데 시인은 왜 “시에게 나를 떠먹이”려고 하는 것일까? 누가 강요한 적도 없는데, 시인은 자신의 직업이 시인이라 단언하며 시를 위해서 자신을 떠먹이겠다는 희생의 결단을 자초한다. 엠페도클레스가 설파한 사랑의 소용돌이가 중앙에 모이게 되면 원소들이 서로 끌어당겨 하나의 존재를 생성하듯 시인 또한 내면에서 시에 대한 사랑이 우러나서 자발적으로 시를 향해 끌려 들어가기를 원하게 되었음이다. 그러니까 시인은 시가 끌어당기는 자력에 의해서 그 자장 안으로 들어가 시와 한 몸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끌어당김의 아름다움은 다음 시에서 더욱 빛난다.
미국의 어느 초등학교 과학시험 문제다
“m으로 시작하는 단어 중
상대방을 끌어들이는 성질과 힘을 가진 단어를 쓰시오”
정답은 magnet(자석)이었다
그런데 85% 이상의 학생들이 답을 mother라고 썼다
고민하던 선생님은 마침내 mother도 정답으로 처리했다니
참 따듯하고 지극한 이야기다
아이들의 마음을 자석보다 먼저 끌어당겼던 mother
세상에서 가장 따듯한 이름, 우리엄마
―「mother」, 전문
“상대방을 끌어들이는 성질과 힘”은 저 그리스의 탈레스나 피타고라스, 그리고 엠페도클레스의 생각처럼 신비한 힘을 지닌 영혼만이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객관적인 자연 현상에서는 자석(magnet)이 그러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존재의 진실이 드러나는 현존재(Dasein)로서 인간의 삶에서는 엄마(mother)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끌어당기는(attractive) 신비의 매력, 혹은 마력을 지닌 힘은 어머니라는 존재와 등가관계라 할 수 있는데, 그 같은 끌어당김의 법칙은 우주생성과 유지의 원천이라 하겠다. 이 시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따듯한 이름”이라는 형용이 끌어당기는 힘으로 사랑의 가치와 의미를 대변하고 있으며, 이는 곧 포용과 배려, 위로와 환대의 다른 이름이다. 결론적으로 어머니라는 자석은 자식들을 끌어당겨 감싸고 위로하는 소용돌이의 힘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고민하던 선생님은 마침내 mother도 정답으로 처리했다니”라는 구절을 보면, ‘mother’라는 기표는 이 세상의 이치와 관습을 뛰어넘어 존립하는 어떤 절대적인 대문자 기표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데, 선생님 또한 그러한 끌어당김의 자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은 당연하다. ‘mother’는 끌어당기는 초월적인 힘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그런 힘을 가지게 된 것은 시적 논리에 의하면 ‘따뜻함’에서 온다. 이영식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끌어당기는 힘은 대부분 온기와 결합 되어 있으며, 그러한 온기에서 정서적 파동이 형성되어 큰 울림을 준다. 다음 시도 그렇다.
나무 그늘 아래
노숙자의 굽은 등에 떨어진
햇볕 한 조각
유난히 고맙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저 볕뉘만큼
나눔과 결이 통하는 말이 있을까요
지상의 낮고 그늘진 곳
작은 틈으로
살며시 부어주는 사랑
쥐구멍까지
두 손을 쬐게 하는
햇살 한 줌
그 지극한 온도
―「‘볕뉘’라는 말」, 전문
햇빛 한 조각, 혹은 햇살 한 줌을 뜻하는 ‘볕뉘’라는 말이 품고 있는 온기와 파동을 시화하고 있다. “나무 그늘 아래/ 노숙자의 굽은 등에 떨어진/ 햇볕 몇 조각”이라는 온기는 ‘그늘’과 ‘노숙자의 굽은 등’에 떨어졌기에 더욱 그 따스함이 증폭된다. “지상의 낮고 그늘진 곳/ 작은 틈”으로 찾아들기에 그것은 더욱 소중하고 값진 것일 수밖에 없다. 여러 시편에서 시인은 ‘작고’ ‘낮은’ 곳에 거처하는 존재들의 곤경과 신산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노숙자의 굽은 등’ 또한 그러한 이미지를 대변한다. 거기에 비추는 “햇볕 한 조각”, 혹은 “햇살 한 줌”은 ‘mother’가 함축하고 있는 따스함으로 위로와 환대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왜 볕뉘는 ‘노숙자의 굽은 등’과 ‘지상의 낮고 그늘진 곳’, 혹은 ‘작은 틈’을 찾아가는 것일까? 그것들은 앞서 인용한 시의 ‘mother’처럼 따뜻한 온기와 당기는 힘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그들이 볕뉘를 끌어들이는 이유는 아니겠다. 그렇다면 누가 그렇게 했는가? 시인의 여리고 따뜻한 온기를 지닌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의 여린 마음은 노숙자의 굽은 등과 낮고 그늘진 곳, 작은 틈에 대해 애써 외면하지 못하고 연연해 있었기에 작은 볕뉘를 끌어당겨 거기에 “살며시 부어준” 거다. 이 시의 감동은 노숙자의 굽은 등에 내리쬐는 볕뉘의 온기라기보다 볕뉘를 끌어당기는 시인의 마음과 온기에서 발현되었다는 게 더 적절하겠다. 볕뉘처럼 따뜻한 시인의 시선은 다음과 같이 또 다른 착한 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살구꽃 그늘 아래
노인과
개 한 마리
앙상한 뼈와 뼈가
곁을 주고
앉아서
이름만 봄나들이지
서로를
쬐고 있네
―「무심無心」, 전문
한 편의 아름다운 단시조이다. 이 짧은 시 한 편에는 얼마나 많은 정서적 파동이 울렁이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서사와 담론이 들끓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세계의 이해와 생명에 대한 연민의 해석이 우글거리고 있는가? “노인과 개 한 마리”가 봄볕의 “살구꽃 그늘 아래” 무심히 앉아 있는 담백한 풍경이다. 그들이 “앙상한 뼈”만 남은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그동안 어떤 시간을 통과하며 어떤 삶을 겪었는지 육신이 걸어온 길의 굴곡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순간에 지나가는 화무십일홍의 살구꽃을 보며 이들이 느낄 죽음의 도래에 대한 두려움과 누구 하나 찾아주지 않는 외로움의 자각으로 그들이 느낄 회한 또한 헤아릴 수 있겠다.
상황이 그러하니 앙상한 뼈의 노인과 개 한 마리는 온기뿐 아니라 위로와 위안이 필요하고 절실한 처지에 나앉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따뜻함이라는 물리적 온도뿐 아니라 외로움이라는 관념적 빈자리까지 채워야 한다는 말인데, 이러한 결핍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으로 작용했음이 자연스레 예견된다. “앙상한 뼈와 뼈가 곁을 주고 앉아”서 곁을 주는 일은 각자 지닌 외로움에서 시작되었고 서로 나누는 온기 또한 상대방의 처지에 대한 공감대에서 나왔을 것이다. 바싹 마른 노인과 개가 동병상련인 처지를 위로하고 외로움의 자리를 서로 쬐는 모습이 눈물겹게 아름답다. 다음 시도 따뜻한 온기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천변
오방오리 가족
빗속에 오종종 모여 젖고 있다
어미가 날개 펼쳐서
빗물 젖은 새끼들 모아들인다
몸 하나로 세운
집
한
채
보일러도
이부자리도 없다
몸과 몸으로 서로를 녹이는
지상에서 가장 작고
따뜻한
방
그래,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그때를 아시나요」, 전문
“천변”에 내리는 비를 맞으며 “오종종 모여 젖고 있”는 “오방오리 가족”은 「‘볕뉘’라는 말」에 나오는 “노숙자의 굽은 등”처럼 벌거벗은 삶을 대변한다. 최소한의 권리나 보호막도 없이 추방된 궁벽의 처지에 놓인 이들은 누구보다 따뜻한 온기가 필요하겠고 더구나 오갈 데 없는 어린 것은 어미의 날개가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으니 어미의 품은 따듯한 온기를 가지고 새끼들을 끌어당기고 있는 셈이다.
시적 화자는 이러한 어미의 품을 “몸 하나로 세운/ 집/ 한/ 채”라고 비유하기도 하고, “지상에서 가장 작고/ 따뜻한/ 방”이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품 하나로 새끼들에게 온기를 제공하는 어미의 몸이 하나의 집이 되고 방이 되고 있다. 이러한 시적 상황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오방오리 가족처럼 몸 하나로 서로에게 체온을 나누던 우리네 헐벗었던 시간을 환기토록 하기 때문이다. 아마 시인도 오래전 쪽방촌 어디쯤 어미 품에서 오방오리 새끼처럼 떨었던 기억이 이런 시를 견인하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그때를 아시나요」, 이토록 짧은 시 한 편으로 아득히 먼 시절을 그림처럼 눈앞으로 끌어와 펼쳐 보이는 이영식 시인의 시적 매력, 바로 이 끌어당기는 온기의 힘에서 나온 것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2. 접문(接吻), 혹은 사랑
앞 단원에서 이영식 시인의 이번 시집에 대한 매력으로서 끌어당기는 힘이 지닌 울림과 파동을 살펴보았는데, 끌어당김은 자연스레 접촉과 결합이라는 현상과 연결된다. 사실 온기를 나누는 일도 이쪽에서 저쪽으로 따뜻한 기운이 퍼져나가는 운동을 의미하며 그것은 접촉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서로 몸을 맞대고 비비는 행위는 사랑의 행위의 다른 이름일 터, 그것은 엠페도클레스의 사랑이 아르케들을 끌어당겨 존재의 생성을 야기는 것처럼 가치와 의미를 생성하는 중요한 질료가 됨을 알 수 있다.
시인은 「봄비 오는 날」이라는 시에서 “맨살 위에/ 뛰어내리는 간지러움 견디다 못해/ 꽃망울이 터지는 거라네요”라고 추측하기도 하고, “나도 봄비처럼 가고 싶다/ 너의 어깨 위에 맨발로 뛰어내리고 싶다”라고 고백도 하는데, 이러한 시적 논리에서는 꽃망울이 터지고 꽃이 피는 하나의 사건이 나무와 봄비의 접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키스」라는 시에서는 “앵두 빛 네 입술 위에/ 봄 같은 내 입김이 닿으며/ 세상 모든 꽃이 활짝 필 것 같아서/ 그래서……”라고 노래하는데,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의 접문이 세상의 모든 꽃을 피우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존재들의 접촉은 단순히 접촉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어떤 생명의 생성이나 개화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다음 시가 이를 선명히 보여준다.
잡초 같지?
예야, 아무리 그래도
뿌리까지 뽑지는 말거라
눈 맞추고
이름 불러주면
세상에서 가장 작고
예쁜 꽃 피워낼 테니
―「풀꽃」, 전문
“눈 맞추고/ 이름 불러주”는 행위는 곧 끌어당겨서 온기를 나눠주는 행위라고 할 수 있으며, 봄비가 꽃망울에 부딪혀 개화를 촉발하는 현상과 같은 스킨십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의 행위는 결과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작고/ 예쁜 꽃”을 피워내는 효과를 거두게 된다. 시인의 시선은 역시 세상의 가장 따뜻한 온기를 필요로 하는 잡초 같은 작은 “풀꽃”으로 향하고 있는데, 시인의 이러한 따스한 온기가 아름다운 시 한 편을 피어나게 하는 셈이기도 하다. 사랑의 접문 행위는 꽃의 개화와 같은 물리적인 결과만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 시편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것은 마음의 평화와 행복 같은 내적인 충일을 가져오기도 한다.
파릇파릇
솟아나는 새싹 머리에
봄비가 입맞춤하듯
햇살 같은 시가
맨발로 나를 꼭꼭 밟고 가는 날
나 혼자의 커피
각설탕 같은 외로움이
혀끝에 달다.
―「작은 행복」, 전문
소꿉놀이하듯 풀꽃 앞에 앉으면
꽃처럼 낮아지고
꽃처럼 작아지고
고놈과 눈이 맞아서 근심 걱정 하나 없네
―「순수시대」, 전문
「작은 행복」에서는 두 가지 접촉 사건이 발생하는데, “솟아나는 새싹 머리에/ 봄비가 입맞춤하”는 사건이 그 하나라면. “햇살 같은 시가/ 맨발로 나를 꼭꼭 밟고 가는” 사건이 또 다른 하나이다. 솟아나는 새싹 머리에 봄비가 입맞춤하는 행위는 온기로 새싹의 꽃몽오리를 벌어지게 하는 일이지만, 햇살 같은 시가 맨발로 나를 밟고 가는 접촉은 외로움을 달콤하게 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시인은 이를 “작은 행복”이라고 명명하면서 마음의 평온과 내적 충만의 효과를 암시하고 있다. 끌어당기고 접촉하는 온기가 내적인 평정을 가져온 것이다.
「순수시대」 또한 “근심 걱정 하나 없네”라고 하면서 마음의 평정과 고요를 강조하고 있는데, 시적 화자가 이처럼 영혼의 정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소꿉놀이하듯 풀꽃 앞에 앉”아서 “고놈과 눈”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작고 가녀린 풀꽃에 바싹 다가앉아서 눈을 맞추는 행위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접문 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풀꽃과의 눈맞춤을 통해서 어떻게 마음의 평정과 영혼의 정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꽃처럼 낮아지고/ 꽃처럼 작아지고”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풀꽃과의 접문을 통해서 대상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엠페도클레스의 사랑이 원질들의 결합으로 존재의 생성을 가능케 한 것처럼 시적 화자 또한 풀꽃과의 접촉을 통해서 낮고 작은 존재로 거듭남으로써 마음의 평정과 정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 시는 접문이 구원과 연결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까르르 쿡쿡
재재재 까꿍 꼬르륵 깔딱
투루루
엄마와 아기,
서로 눈 맞춰 찧고 까부는 사이
예수님 부처님
세상 모든 신들도 허리띠 풀고
까르르 쿡쿡
재재재 까꿍 꼬르륵 깔딱
투루루
사랑 만발합니다
―「모유수유」, 전문
엄마와 아기 사이에 두 가지 접문이 있다. “엄마와 아기,/ 서로 눈 맞춰 찧고 까부는 사이”라는 구절에 암시된 눈 맞춤과 “모유수유”라는 제목에 암시된 엄마 젖꼭지와 아기 입술의 접촉이다. 이러한 접촉의 결과는 무엇인가? “까르르 쿡쿡/ 재재재 까궁 꼬르르 깔딱/ 투루루”라는 음성상징으로 느껴지는 세상의 평온, 그리고 세속적 가치의 무화이다. 음성상징이 의미하는 것은 기표에 아무런 기의도 결부될 수 없으며 언어적 기표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메시지이다. 그러니까 두 번 반복되는 “까르르 쿡쿡/ 재재재 까궁 꼬르르 깔딱/ 투루루”라는 음성상징에는 어떠한 언어적 기의도 담겨 있지 않으며, 단순히 엄마와 아이의 접촉 그 자체, 그리고 소통과 교감에서 우러나는 정서적 충일감만이 넘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 부처님/ 세상 모든 신들도 허리띠 풀고”라는 구절인데, 이러한 표현 속에는 둘 사이가 세상 어떠한 불화와 갈등, 고뇌와 고통도 끼어들 수 없음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니까 인간이 평화와 구원을 간구할 신들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모유수유를 하는 엄마와 아기는 원만구족한 유토피아의 영역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맥락은 곧 사랑과 접문이야말로 끌어당기는 힘으로서의 온기와 정서적 충만을 생성하는 힘이 되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가능케 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3. 사랑, 혹은 죽음을 이기는 힘
시인은 한 산문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김춘수 시인의 「꽃」을 인용하면서 나를 깜박 잊으니 한 다발의 시가 기적처럼 가슴에 안겨왔다고 고백하고 있다. 시가 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시를 위해 존재한다는 「시인」의 논리와 함께 이러한 대목을 되새겨보면, 시인은 한 편의 시를 얻기 위해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시가 시인의 궁극적인 구원이라는 신념을 추론할 수 있다. 이영식 시인이게 시란 곧 끌어당기는 힘으로서의 온기이자 접문이라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곧 사랑이야말로 해방이며, 죽음조차 넘어서는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에서도 그러한 논리가 발현되고 있는데, 앞서 분석한 「모유수유」가 구원의 가능성을 언급한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다음 시도 마찬가지다.
나무는
새를 품고 싶어한다
새는
나무에 깃들이고 싶어한다
바람 속
나무와 새는
서로 그리워하는 힘으로
허공을 살아냅니다
―「나무와 새」, 전문
“나무는/ 새를 품고 싶어 하”고, “새는/ 나무에 깃들이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다. 이들이 서로 끌어당기는 이유는 각각 상대방이 바라는 온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바람 속/ 나무와 새”라는 구절에 주목해 보면 시련과 역경에 처해 있기에 둘은 어떤 도움과 구원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함을 짐작할 수 있다. 혼자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기 어렵기에 도움이 필요하고, 그래서 나무와 새는 서로에게 온기를 제공하면서 끌어당기는 힘으로 작동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시인은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서로 그리워하는 힘으로/ 허공을 살아냅니다”라고 말하며, 서로 끌어당기고 결합하는 힘으로 “허공”을 극복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허공’은 비어있는 공간이기에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한다. 좀 더 생각을 밀고 나가보면 무(無. nihilo), 무의미, 허무, 허무주의(nihilism)와 같은 부정적인 가치를 연상해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으로 이루어낸 사랑과 결합이 허무의 심연을 건너는 다리가 되어줄 수 있음을 암시한다. 반면에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없는, 곧 허공과 같은 상태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다음 시가 이를 잘 보여준다.
홀쭉한 배낭 한 개
안방 아랫목에 누워 있다
주워 담거나
더 내놓을 무엇도 없다는 듯
옭매던 줄 풀어
안과 밖, 경계를 지웠다
저 작은 주머니
주름투성이 몸피 속에서
내가 꺼내졌다니
나들이 접은 배낭은 일없다는 듯
코만 쿨쿨 골고 계시다
어머니, 살구꽃 다 지겠어요
―「어머니, 소풍가요」, 전문
앞서 인용한 「모유수유」에서의 아기 엄마와 달리 이 시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끌어당김의 힘도 없고 끌어당길 대상을 갖고 있지도 않다. 어머니는 상대방에게 온기를 제공하거나 어떤 온기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어머니를 “홀쭉한 배낭 한 개”라든가 “저 작은 주머니”, 혹은 “주름투성이 몸피”라고까지 묘사하고 있다. 그러니까 “안방 아랫목에 누워 있”는 어머니는 어떠한 온기도 지니지 않은 하나의 사물처럼 취급되고 있는 셈이다.
그녀는 “주워 담거나/ 더 내놓을 무엇도 없다는 듯” “코만 쿨쿨 골고 계시다.” 그러니까 「모유수유」의 아기 엄마와 아기가 “까르르 쿡쿡/ 재재재 까궁 꼬르르 깔딱/ 투루루”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는 언어를 가지고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던 때와 달리 노모는 혼자서 잠만 자고 있다. “옭매던 줄 풀어/ 안과 밖, 경계를 지웠다”는 표현을 보면 주체와 대상이라는 구별도 무화되고, 교감과 소통의 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어머니는 죽음의 영역으로 들어서고 있는 셈인데 시적 화자가 “어머니, 살구꽃 다 지겠어요”라면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는 대목은 어머니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거나 이를 암시한 것이다. 그러니까 「모유수유」가 엄마와 아기의 끌어당김과 결합으로 인해 생의 역동성이 넘쳐났다면, 아무런 끌어당김도 결합도 없는 이 시의 어머니는 혼자서 죽음의 과정을 밟아가고 있는 쓸쓸함으로 물들어 있다. 그 어떤 생기도 환희도 찾을 수 없는 이 시의 풍경 속을 더듬다가도 어느 순간 역설적으로 이영식 시인의 시적 활력이 느껴지는 아이러니와 만나게 됨은 왜일까? 마지막으로 한 편을 더 읽어보겠는데, 다음 시는 죽음을 앞두고도 끌어당김이 있기에 생의 역동성이 살아나는 현장을 보여준다.
오십천五十川
죽기에 실패하는 연어는 없다
수 천만리 바닷길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모천의 물 냄새 거슬러온다
서늘하고 맑게 휘어 꺽이는 곡류
궁벽한 곳에 핏줄 댄 채
알을 슬어놓는다
회귀와 죽음
그 너머는 생각지 않고
필생의 약속을 지키는 거다
―「무제無題」, 전문
“죽기에 실패하는 연어는 없다”는 역설은 죽음이 많은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기에 삶의 목표가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실제로 이 시는 연어의 귀소본능과 죽음의 과정을 다루고 있는데, 연어가 “수 천만리 바닷길”을 따라 “모천의 물 냄새 거슬러” 올라오는 모습은 곧 죽음으로의 완성과 또 다른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함에도 앞서 분석한 「어머니, 소풍가요」라는 시의 죽어가는 어머니와 달리 이 시의 연어는 생의 환희와 역동성으로 충만해 있다.
물론 죽어가는 연어가 이처럼 생의 또 다른 에너지로 넘쳐나는 것은 끌어당기는 온기가 있기 때문이다. 연어에게 죽음은 미래의 자식들에 닿아 있다. “궁벽한 곳에 핏줄 댄 채/ 알을 슬어놓는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궁벽한 곳’은 자신의 어미가 핏줄 댄 채 자신을 잉태했던 장소이므로 또 다른 어미가 된 연어에게는 따뜻한 온기를 지닌 원천(原川)이다. 그리고 자신이 슬어놓은 알에서 부화한 새끼들의 또 다른 생이 비롯되는 곳이기에 새로운 원천이기도 하다. 그래서 연어는 그 궁벽한 곳에 핏줄을 댄 채 알을 슬어놓는 거다. “오십천五十川”이라는 “모천(母川)”은 그래서 연어에게는 따뜻한 온기를 지니고 자신을 끌어당기는 곳이며, 그렇기에 연어는 기를 쓰고 거친 물길을 거슬러 올라 그곳에 핏줄을 대고 싶어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온기와 끌어당김으로 인해서 연어의 세계는 계속해서 뿌리를 이어나갈 것이다. 끌어당김과 온기가 우주 순환의 원리며 고리가 됨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이영식 시인의 시화집 꽃을 줄까 시를 줄까의 시적 특징을 “끌어당김과 온기의 미학”으로 살펴보았다. 이영식 시인의 시가 대부분 그렇지만, 이번 시집의 시편들도 시가 굳이 난해하지 않더라고 얼마든지 감동적일 수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것은 진정성이라는 시심의 힘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끌어당김과 온기의 키워드로 분석해 본 이번 시집은 시가 굳이 복잡하지 않더라도 깊은 감동과 함께 심오한 사유의 깊이도 확보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의 말」에서 이 시집이 기존의 시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세상의 독자들을 위함이라는 시인의 출사표가 읽힌다. “요즘 발표되는 시작품들이 독자와 거리가 너무 멀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한 번 읽어서 선뜻 이해가 되지 않고 또 시를 써보려 해도 쉽지 않아 시 세계에 더욱 높은 벽을 느끼게 되는 듯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편하게 읽고 친구처럼 흉허물없이 소통하며 마음 주고받을 수 있을 만한 시들을 모았습니다.” 좋은 시집은 곁에 두고만 있어도 향기가 묻어난다는 이영식 시인의 말처럼 많은 독자들이 시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