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61,1-2ㄱ.10-11; 1테살 5,16-24; 요한 1,6-8.19-28
+ 찬미 예수님
눈이 내려서 성모상 옆 ‘노은동 성당’ 글씨가 씌어 있는 언덕이 케잌처럼 보이는데요, 미끄러운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입니다. 세 번째 대림초에 불이 켜졌는데요, 제대 앞 꽃꽂이를 보니, 우리 마음의 골짜기는 메워지고 산과 언덕들이 낮아져 주님 모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아가자고 광야에서 누군가 외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림 제3주일은 ‘장미 주일’이라 부르기도 하는데요, 예수님 오심을 기뻐하며 사제는 장미색 제의를 입을 수 있습니다. 이제 8일 뒤면 성탄인데, 대림 제4주일 다음날이 성탄절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주님 맞이할 준비가 덜 된 것 같은데 벌써 오신다니 마음이 급하고, 좀 천천히 오셨으면 싶은 심정이기도 합니다.
제가 20여 년 전에 교구 성소 계발 담당 신부로 일하면서 예비 신학생들을 담당했었는데요, 그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게 세 가지 있는데, 셋 다 한 글자로 되어 있고 쌍기역으로 시작한답니다. 무엇일 것 같으세요?
끼, 꿈, 깡입니다. 어떤 분에게 문제를 냈더니, ‘끈’이라 말씀하셔서 무척 씁쓸했었고요, 또 어떤 분은 ‘꾀’라고 답해서 무척 당혹스러웠는데요, 저는 이 세 가지에 힌트를 얻어 예비 신학생들에게 ‘성소의 길을 가면서 필요한 것 세 가지를 물어보았습니다. 두 글자로 되어 있고 기역으로 시작합니다. 무엇일까요?
제가 준비한 대답은 ‘기쁨’, ‘기도’, ‘감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수녀원에 미사 드리러 가서 이 문제를 냈더니 저 뒤에서 할머니 수녀님 한 분이 ‘건강~’이라고 대답하셔서 모두 웃었는데, 당시 2년 차 신부의 철없는 생각보다 할머니 수녀님의 혜안이 맞았다는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깨닫게 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쁨, 기도, 감사가 다 나오네요?
기쁨과 기도와 감사는 좋은 것이지만, 항상 그렇게 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또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한 가지가 무너지면 다른 두 가지가 같이 무너지고는 합니다.
우리는 환난이나 역경이 닥치면 기쁨은 무너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1서 1장 6절에서 “여러분은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와 주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환난’으로도 무너지지 않는 기쁨에 대해 말씀하시는데요, 이러한 기쁨은 감사와 기도 안에서 꽃 피우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온 사제와 레위인들에게서 “당신은 누구요?”라는 질문을 받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들은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말라키 예언서에 의하면,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하느님께서 엘리야를 보내신다고 했기 때문에(말라 3,23-24) 이렇게 물은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으면서도, 그 자신이 엘리야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세 번째로 “그러면 그 예언자요?”하고 묻습니다. 모세가 말한 예언자를 일컫는 것인데요, 신명기(18,15)에서 모세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예언자’란 결국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요한은 또다시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결국 그들이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느냐”고 묻자, 세례자 요한은 대답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구절을 주해하며,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실 수 있도록 ‘소리’인 세례자 요한이 ‘말씀’에 앞서 왔다고 해석합니다.
오늘 1독서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첫 번째로 복음 선포를 하실 때(루카 4,18)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이어지는 구절은 우리가 화답송에서 노래한 성모님의 노래를 연상케 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제가 대림 특강 때에 예수님, 성모님도 거룩한 독서를 하셨다고 말씀드렸는데,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성모님,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들을 외우고 계셨고, 이 말씀들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성령 안에서 알아차리셨습니다. 이 말씀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기쁨’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성모님도, 바오로 사도도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데, 기쁜 소식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은, 환난 때문에 사라지고 마는 표면적 기쁨이 아니라,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가운데 따라오는 영적 기쁨이고, 자연스레 기도와 감사로 이어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을 받았습니다. 곧 “나는 누구인가?”와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리고 자신이 맡고 있는 직책이나 하고 있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대답은 매우 현명합니다. 그는 엘리야의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엘리야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오로지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만 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예수의 데레사 성녀께서는 기도하기 전에 기도를 바치고 있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내 기도를 듣고 계시는 분이 누구이신지 먼저 생각하고 나서 기도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면 분심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 하십니다.
언제나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안에서 조금 더 기뻐하고, 5분 더 기도하고, 당연히 여겨왔던 한 가지 일에 감사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날은 주님께서 오심을 조금 더 기뻐하고, 10분 더 기도하고, 한 가지 더 감사를 드리면 어떨까요.
내가 준비가 되었건 덜 되었건, 구세주께서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내가 스러지지 않는 기쁨과 기도와 감사를 주님 구유 앞에 예물로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https://youtu.be/760z2VHbuHo?si=DihO51hTEYuaL6FN
헨델, 메시아 중 서곡 (유진 굿센스 편곡), 토마스 비첨 지휘,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첫댓글 요한의 신원에 대한 질문이 '말라기 예언서, 신명기의 근거(아주 구체적임) 인 줄 오늘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