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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3927Bible 말씀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사랑하는 마음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삼가라(마23:1-12)
마태복음 23장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정죄하는 내용이다.
그들은 율법 아래의 관헌들로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판단하는 율법 선생들이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율법을 고수하여 예수를 거절하고 대적한다.
이는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이 모세율법(제도)과 다르기 때문이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께서 주장하신 내용을 생각해 보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신다(마26:63-64).
하나님 아들이라고 함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당시에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계신다.
예루살렘 성전은 여호와의 처소이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모든 율법 제사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성전을 헐면 새로운 성전을 지으리라고 주장하신다(마26:60-62, 요2:19-21).
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부인하고 다른 새로운 성전을 세우겠다는 말이다.
이처럼 모세율법은 땅에 대한 일이나 예수의 가르침은 하늘에 대한 일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모세율법과는 전혀 다른 참되고 온전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예수를 거절하고 대적한다.
그들이 예수를 거절함은 그를 보내신 여호와를 거절하는 일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삼가라고 경고하신다.
마태복음 23장은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정죄하신 내용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정죄는 그들을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판으로 완성된다(마23:37-39).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은(마23:37-39) 열매가 없는 자에 대한 결론이다(마21:18-22)
본문이 속한 큰 단위는 예수와 율법 아래의 관헌들과 충돌을 언급한다.
단위의 시작은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이며(마21:18-22),
율법 아래의 관헌인 대제사장과 서기관이 나아와서 힐문하고(마21:23-27),
예수께서는 세 비유로 그들의 심판을 선언하시며(마21:28-22:14),
예수께서는 율법 관헌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율법사들의 세 번에 걸친 도발에 지혜롭게 답변하셔서(마22:15-40),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시고(마22:41-46),
마지막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삼가라는 경고와(마23:1-36)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선언을 배치한다(마23:37-39).
이 단위의 시작인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 저주와(마21:18-22)
결론인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삼가라는 경고는(마23:1-36) 짝을 이룬다.
그 사이에는 예수께서는 율법 관헌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율법사들을 정죄하신 내용이 배치되어 있다.
이처럼 마태복음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그들은 백성들을 넘어지게 하는 거짓 목자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모세의 자리에 앉은 거짓 선생을 심판함으로(마23;1-36)
옛 이스라엘의 심판을 완성한다(마23:37-39).
이처럼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정죄하심은 종말의 하나님 뜻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모세를 통하여 시행하셨던 율법 통치가 종결하셨음에도 옛것(율법)을 주장하고 견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옛것(율법)을 견지함으로 백성들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을 가로막는다.
이처럼 마태복음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경고를 통하여(마23:2),
모세율법(구약성경)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말고,
예수에게 나아와서 그를 믿고 따름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길 것을 권면한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삼가라는 말씀은
종말의 하나님 뜻을 거절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완성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삼가라는 내용은 공관복음서마다 다 언급한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사람들의 문안을 받으며
윗자리에 앉고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길게 기도하는 외식하는 자들을 정죄하신다.
누가복음에서도 바리새인에 대한 세 번의 저주와 율법사에 대한 세 번의 저주가 언급된다(눅11:42-45).
이러한 세 번의 반복은 저주의 확실함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승천할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그가 가시려는 장소로 70명의 제자를 파송하신다(눅10:1).
70인은 하늘에 이름이 새겨진 새 백성이다.
그들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소망하였던 천국 복음을 들은 복된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형제 사랑의 새 율법과 종말의 기도를 가르치시고(눅10:25-37),
성경을 사랑하고 배우는 마리아를 칭찬하신다(눅10:38-42).
그러나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은 자들을 정죄하신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자신을 집으로 초대하고도 믿지 않은
바리새인과 율법사를 ‘너희’라고 지목하여 정죄하심에서 잘 드러난다(눅11:37-52).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서 나오실 때
그들은 거세게 달려들어서 따져 묻고 책을 잡으려고 노린다(눅11:53-54).
이처럼 누가복음은 외식하는 자로서 백성의 존경을 받으며 높은 자리에 앉은 서기관을 조심하라고 가르친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하는 그들에게 엄중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 아래에서 외식하는 율법 선생들이다.
또 그들은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인 조상들의 후손이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는 거짓되고 스스로 높아진 모든 자의 심판만을 언급한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누가복음처럼 대대로 선지자를 거역한 민족적인 죄악이나
마태복음처럼 율법 아래의 관헌들에 대한 화를 언급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권위에 대하여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신다(마23:2).
이는 모세를 대리하여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 나라인 다윗왕국 관헌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가르침과 사역은 율법 아래에서는 정당하다.
율법의 나라인 다윗왕국의 통치질서에 합당하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여호와의 율법 통치를 대리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모세를 대리하여 율법을 따라 백성들을 판단하고 지도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그들을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씀하신다(마23:2).
그런데 예수께서는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한 바를 지키되 저희의 행한 바를 본받지 말라”
고 말씀하신다(마23:3).
이는 율법 통치가 종결되고 새로운 통치가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율법과는 다른 새로운 통치가 시행되었음에도
그들은 율법 아래의 기득권 유지를 위하여 예수를 거절하고 대적한다.
율법 아래에서 누리는 기득권이 무엇인가?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 곧 율법의 짐을 지게 한다(마23:4).
자신들의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이마에 차는 경문과 옷술을 크게 한다(마23:5)
잔치와 회당의 상석에 앉으며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랍비라고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마23:6).
이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삶은 율법 아래에서는 합당하다.
이는 모세율법이 육체를 상관하는 육체의 예법이기 때문이다(히7:16, 9:10).
이는 여호와께서도 이스라엘의 외적인 모습으로 언약에 신실한 유무를 판단하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약은 백성들을 온전히 새롭게 하신 때가 아니다.
구약시대는 모세율법이 명한 바를 따라 물로 씻고 피를 뿌려서 교제하던 때이다.
그러나 모세율법이 명하는 물과 피로는 죄를 없이하지 못한다.
율법이 명하는 물로 씻고 피를 뿌림은 이스라엘의 겉만을 씻는 임시조치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반복적인 피 뿌림이 요구되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하나님 아들을 거부하고 대적한다.
이는 그들이 서잇는 토대인 모세율법과 예수의 가르침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세율법과 그리스도 복음의 불연속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제시된 두 증거로 압축된다.
산헤드린 공화에 제시된 두 증거는
예수께서 하나님 아들이며 성전을 헐라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모세율법의 핵심은 무엇인가?
여호와의 존재 방식과 여호와께서 임재하신 처소인 성전이다.
여호와께서는 휘장으로 가리고 성전에 임재하여 계시며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는 거룩한 처소이다.
따라서 여호와의 존재 방식과 예루살렘 성전은
모세율법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이처럼 여호와께서는 휘장으로 가리고 예루살렘 성소에 계셨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은 여호와께서 계시는 거룩한 처소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신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헐면 새로운 성전을 세우리라고 주장하신다.
이러한 예수의 두 주장은 모세율법의 근간과 토대를 부인하는 내용이다.
구약성경 전체를 부인하고 허무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은 모세율법으로 바라보면 이단 중의 이단이다.
그래서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를 이단의 괴수로 정죄하고 십자가형을 확정한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는 예수와 사도들이 부정하는 모세율법을 다시 살려내서 시행하는가?
왜 모세가 명한 십일조를 행하여 하나님을 섬기라고 강조하는가?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부인하고 허무는 행위이다.
예수께서 폐지하신 예루살렘 성전과 성전에서 드리는 짐승 제사,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위한 구약 제사장 제도를 되살리는 일이다.
이는 종말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신 뜻(갈4:4),
곧 율법 아래에 있는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고 대적하는 일이다(갈4:5).
이러한 한국교회 행태는 모세율법을 고집하고 주장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삶의 행태를 정죄하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모습은 구약에서는 합당한 일이다.
모세나 다니엘이 바라보면 참으로 칭찬할 만한 일이다.
이는 모세율법에 부착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는 육체를 상관하는 육체의 예법을 따라 행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보면 종말에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고 대적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율법과는 다른 새로운 뜻과 경륜을 시행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수께서 백성들을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정죄하신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율법에 부착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정죄하신다.
간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
간음하였다고 하였을 때 율법 아래에서는 마음속으로 행한 음욕만으로는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율법 아래에서는 다윗과 솔로몬처럼 아내를 원하는 대로 거느릴 수 있다.
길가는 처녀를 겁탈하더라도 아내로 들이면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부모가 아내로 주기를 거절하면 빙폐물을 주면 여호와 앞에서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구약에서는 남의 아내를 빼앗지만 않으면 율법을 범한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았을 때
여호와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왜 남의 아내를 빼앗았느냐?
네가 아내가 부족하였다면 더 주었을 것이 아니더냐?”
라고 꾸짖은 것이다(삼하11:1-12:14).
이처럼 모세율법은 육체를 상관하는 육체의 예법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가리켜서 외식하는 자라고 말한다.
따라서 외식하는 자라는 말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별칭이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 선생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무거운 율법의 짐을 어깨에 지운다(마23:4).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차는 경문과 옷술을 크게 한다(마23:5).
그들은 잔치와 회당의 상석을 차지하고(마23:6),
거리에서는 랍비라고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한다(마23:7).
이것이 율법 아래에 세워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삶의 모습이다.
이것이 모세의 자리에 앉은 유대 지도자들의 모습이다.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보내신다(갈4:4).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백성을 구원하여 아들로 세우기 위함이다(갈4:5).
율법 아래에 있는 백성을 구원함은 율법과 상관이 없는 세우신다는 말이다.
율법과 상관이 없는 자로 세움이 하나님 아들로 구원하심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신다(마4:18-22).
율법에 부착하여 예수 자신과 교회를 핍박하는 사울을 부르신다(행9:1-19).
이처럼 예수께서는 율법 아래에 있는 제자들과 사울을 구원하여 사도로 세우신다.
율법이 세상에 들어온 죄를 없이 할 수 있었다면,
율법이 그 아래에 있는 자를 온전케 하였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영원한 생명을 주었다면,
종말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유대 사회에 보내셨겠는가?
율법이 시행되는 유대 땅에 보내셔서,
죄와 사망이 점령군처럼 군림하는 세상에 보내셔서,
율법이 요구하는 요구를 따라 십자가 죽음을 죽게 하셨겠는가?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모세율법으로는 없이하지 못하는 죄를 없이하고,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구원하여 온전케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은 모세율법과 다르다.
모세의 율법은 땅에 대한 일이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늘에 대한 일이다.
모세의 율법은 종(머슴)의 도리이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아들(자녀)의 도리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정죄하신다.
이는 예수를 거절함으로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를 거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정죄는 종말의 계시 관점에서 바라본 정죄이다.
모세율법에 부착한 삶은 천국의 질서에 합당하지 않다.
이는 종말에 하나님께서는 율법 통치를 종결하셨기 때문이다.
이제는 크고 작으며 먼저 되고 나중 되는 율법 아래의 차등과 등급이 사라졌다.
이러한 등급과 차등의 철폐에 대하여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같은 형제이다.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이시다.
너희 지도자도 곧 하나이니 그리스도이시다.
너희 중에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고 말씀하신다(마23:8-11).
결론적으로 예수께서는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고 하신다(마23:12).
이는 예수께 나아오면 하나님 아들(자녀)로 세워지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 앞에서 아들(자녀)과 종(머슴) 가운데서 누가 크고 높겠는가?
하늘에 속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