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공동체를 위해
며칠 전 안동에서 윤동희샘이 들렀다. 작은도서관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와, 얼마 전 옆 마을로 귀촌하신 은복샘과 셋이서 감자전을 붙여먹으며 여러 이야기를 했다.
얘기를 하다가 우연히 이런 저런 모임에서 발견되는 남자들끼리의 경쟁심 이야기가 나왔다. 뱀 대가리가 될지언정 용꼬리는 되지 않겠다는 말이 있다. 어떤 활동이나 조직에서 남자들끼리의 헤게모니 싸움이 느껴진다. 물론 내게도 그런 마음이 종종 느껴졌다. 헤게모니를 잡겠다는 게 아니라 헤게모니에 대한 질투심이나, 자신의 뜻을 나누거나 펴지 못하는 답답함이 컸다. 그 안엔 은근한 경쟁심이 도사리기도 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할 때 상대방이 남자일 때는 더 조심스러워지는 점이 있는 것 같다. 이 무슨 수컷들의 옹졸함인가?
과연 이런 것을 느끼는 것이 나만의 문제일까? 아니면 유독 한국사회가 심한 것일까? 아니면 인류 보편의 문제일까? 우선은 자본주의사회의 생존조건이 극심한 경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경쟁 속에서 시기와 질투라는 심리적 상황이 벌어진다. 주도권 다툼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사익을 추구를 절대가치로 여기는 시장사회는 만인 대 만인의 항쟁을 게임의 원리로 삼고 있다. 한국사회는 물론 극단의 시장사회이다. 거기에 덧붙여 전통적 권위주의와 근대적 권위주의를 떠올릴 필요가 있을 것다. 한국사회는 전통적으로 연령과 직위의 위계가 뚜렷하다. 거기에 개발독재의 근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남자들은 군대문화를 경험하고, 군사문화가 사회의 정치, 경제, 교육 등 모든 문화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의 무의식이 위계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억눌려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것이 예의라는 이름으로 곱게 포장되어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등한 대화와 토론은 참으로 어렵다. 위계예의를 극복하기 어렵기 때문에 솔직하고 깊이 있는 대화를 하기 어려운 구조다. 다만 서로 얼굴 붉힐 말과 행동을 피할 뿐이다. 그러니 당연히 세대차는 극심하다. 극단적인 보수와 진보 사이에 다양한 논의와 대안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제대로 된 토론 경험이 없으니 얼굴 붉히고 감정싸움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선악이분법의 사유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사유정지다.
그래 나는 동희샘에게 이반 일리치 이야기를 하며 우정의 공동체를 이야기했다.
나는 우선 내의 불완전함을 너무도 깊이 느낀다. 그래 함부로 모든 것을 안다고 오만을 떨 수도 없다. 오직 불완을 보완하기 위해 맥락과 근본을 살피는 공부를 해가며 한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다. 바람이 있다면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이들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함께 공부를 하며 우리의 차이 안에 커다란 공공이 마련되길 바란다. 공부 없이 단지 선의로만 일을 벌리고 실천하기에 우리는 우선 우리 자신과 앎으로부터 너무도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직 인간이 인간에 대한 선의와 기쁨을 가지고 서로를 배려하며 같은 방향을 위해 나아간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우정의 공동체이다.
첫댓글 엇? 제가 등장하네요? ㅋㅋ
온갖 파토의 원인을 복기해보면 결정타가 <삐짐>인 경우가 많더군요.
추세외삽하면 <나이 들수록 더 잘 삐진다>는 신묘막측한 결론까지 나오고.
난 나이 먹고 안 저래야지 했는데, 아오, 안 삐지고 연애하기도 잘 안 되더라고요.
책 잘 읽고 있습니다.
얄팍한 생각 요리조리 조립하며 돌진 중에, 뒤에서 들어온 백태클.에 무릎 풀썩 꺾인 느낌입니다ㅋㅋ 근원을 고민하란 말이다~!
<살아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한 공부와 <필요한> 만큼의 벌이.가 대강 개인으로서의 취사 영역인 것 같은데,
요 방탕한 생활습관이... ㅡ,.ㅡ^
우야든동 담엔 제가 맛난 거 해드릴게요~!
- 멩이샘 평안한 정신세계 방해위원회
잡치기님 감사해요. 풀꽃세상 포스터가 너무나 아름답게 됐더라구요. 사람마다 상황과 입장, 기질이 다른 철학과 행동을 만들곤하지요. 그래서 작은 차이가 좁힐 수 없는 거리를 만들기도 하고요. 저는 잡치기님의 방식이 멋지게 꽃피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