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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川李氏 聾巖先生 宗家의 吉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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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吉祭와 聾巖先生의 종손 1) 길제의 의의 길제의 일정은 담제(禫祭)를 지낸 다음날의 길일을 잡는다. 길일은 담제를 지낸 후, 한 달이 지난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이 된다. 길제는 사당이 있어 신주(神主)를 모실 때 지내는 절차로서, 새로운 신주가 만들어짐에 따라 4대 봉사의 원리에 의해 한 대의 신주를 사당에서 물리는 절차이다. 그것은 곧 신주를 사당에 정식으로 모시는 절차임을 의미한다. 길제는 향간에서는 일상적으로 길사 또는 합사라 한다. 정식의 명칭은 길사나 합사보다 길제나 합제이며, 공식적으로나 예서의 기록상으로 ‘길제’라 쓴다. 『사례수용(四禮受用)』에 상례절차를 칠언일구(七言一句)로 하여 기록한 절구가 있다. 여기에 기록한 자료는 상례의 전 과정을 엮어 누구든 외우기에 좋게 지은 글이다. 일상생활에서 상례의 비중이 얼마나 높았던지를 쉽게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자료이다. 상례 한시(漢詩)의 마지막 절구에서 길제에 관한 내용을 확인하게 된다. 그 부분은 ‘祔祖上祥大祥禫 喪畢吉祫乃成儀(부조상상대상담 상필길합내성의)’이란 내용이다. 끝의 31~32절구는 졸곡(卒哭) 이후 부제(祔祭)에서 길제까지의 과정인데 31절구는 부제에서 담제까지이며, 32절구는 길제에 관한 내용이다. 상례를 마치면 길제를 지내는데 길제는 매주(埋主)를 하는 5대조와 고조부에서 조부까지 뿐 아니라 고비위까지 합제(合祭)로 지낸다. 이런 연유에서 길제는 합사(祫祀) 또는 합제(祫祭)라는 말이 나온 듯하다. 가사에서는 길제를 지냄으로써 한 사람에 대한 의례를 완결짓게 되는 것이라 본다. 길제는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즉 고인의 사후 세계까지 의례의 근간을연결한다는 내용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길제는 상례를 마친 다음에 산사람으로서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 종결이며, 죽은자에 대한 의례를 시작하는 단계임을 알리는 셈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산사람은 자연스럽게 일상인이 된다 길제는 상기를 다한 고인에 대하여서는 조상의 사당에 들어가는, 죽은자의 정상적 위치를 갖는 것이고, 사당에서는 세대에 따른 최고 조상으로서 지위를 가지고 있던 고조위 1)가 가묘(家廟)를 떠나 산천의 묘소로 가므로 산 자손과 관계가 느슨해지는 것이며, 산 사람의 입장에서는 특히 종자(宗子)는 새 주인의 자리를 얻는 공개의 장이다. 이제 막 지위를 얻은 주인은 사당의 조상과 산천의 묘소에서만 모시는 조상의 봉사자로서 효자나 효손이 된다. 길제로 그들의 집안에 여러 조상과 사람에게 변화가 생긴다. 그들을 열거해 보면, 사당에 처음 자리를 차지하는 고비와 사당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조상, 또 사당 내에서 새 지위를 얻는 조상들, 그리고 삶의 공간에서 위 조상들을 봉사하는 주인, 그로 인하여 주인의 관계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이다. 조상과 사람 속에서 본 길제는 서로 지위가 교체하는 관계를 확인하는 뜻깊은 제사이다. 그래서 제사는 길제가 되고 상주는 마지막 단계의 담제에서 상시간이 완료됨과 동시에 일상의 사람이 된다. 곧 일가와 타성(他姓)은 길제 후부터 ‘상주’에서 ‘종손’으로 바꿔 부른다.
2) 聾巖先生의 宗家 -肯構堂 원래 농암(聾巖 李賢輔, 1467~1555)선생의 종택은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부내)에 위치해 있었다. 1975년 안동댐 건설로 긍구당, 농암사당, 애일당, 분강서원, 신도비 등 문화재로 등록된 것만이 이건되고, 1960년대에 중수한 종택은 물 속으로 사라졌다. 종택 사랑채의 별당인 긍구당(肯構堂)은 안동시 도산면 운곡동으로 옮겼는데, 이 건물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농암선생의 후손들은 최근 종택을 복원하고 이들 유적들을 옛 부내의 모습대로 집단화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문중에서는 소장하고 있던 유물과 유품을 정리하여 자료책자를 냈다. 남아 있는 그림과 사진 자료를 보면 농암종가는 근 600여 년을 한 번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긍구당은 농암의 고조부(諱:李軒)가 건축한 살림집으로, 영천이씨 농암 종택의 당호이다. 그는 영천이씨를 안동에 세거하게 한 입향조이며, 농암선생도 여기에서 출생하였다. 결국, 긍구당은 안동 영천이씨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지금 도산면 운곡리에는 농암 선영의 재사인 도곡재사(道谷齋舍)가 있고, 그 옆과 뒤로 긍구당과 사당이 있다. 또 조금 떨어진 곳에 선생을 재향한 분강서원이 있다. 농암종택은 현재 임시로 안동시 옥정동에 있다. 사당과 긍구당이 이곳 운곡리로 이건할 수밖에 없는 연유는 모두 댐 건설로 인한 것이다. 사당에 감실은 4개가 있다. 원래 사당의 감실도 그러하였다. 이곳에 불천위와 4대조의 신주를 봉안하고 있다. 농암선생이 저술한 「제례」편에는 16세기 초반에 나타난 회재(晦齋, 李彦迪, 1491~1553)선생의 『奉先雜儀』와 함께 아직 3대 봉사를 주로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주자가례의 체계가 그대로 실행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16세기 중반의 예서에서는 4대 봉사에 의한 주자가례적 체계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때의 예서들은 그 이전의 것과는 달리, 거의 모두『朱子家禮』를 해설하거나 보완한 것이다. 수많은 예서 가운데, 도암(李縡, 1680~1746)선생의 『四禮便覽』(1844)은 주자가례의 해설서라기보다는 비교적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게 제의례(諸儀禮)를 편집한 것이다. 농암이 불천위로 배향된 연대는 아직 정확하지 않으나, 대체로 그와 때를 같이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실직(實職)으로 안동부사(安東府使),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호조참판(戶曹參判), 숭정대부(崇禎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그리고 사후, 효절공(孝節公)이란 시호(諡號)를 받았다. 농암종가는 사당의 최서(最西) 감실에 불천위를 모시고 최동(最東)의 감실에 조고(祖考)의 신주를 봉안하고 있으니, 고위는 동남쪽에서 서향하여 주독으로 모셔져 있다. 불천위는 사당과 신주를 보존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대개 십 여대 주손(冑孫) 집에서는 사당이 없어졌고, 감실(龕室)조차 위태로우나 인근 안동의 불천위 종가는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불천위 종가의 경우, 일반적으로 4대 감실을 봉사하는 주손 집의 경우와 달리 의례에서 차이를 빚는다. 또 그러한 종가는 아직까지 삼년상을 거치는 것은 물론, 길제까지도 행하여 의례를 마무리한다. 2) 사당을 설치하고 있으므로 여러 가지 의례가 아직 남아 있다. 농암 불천위의 제사 때는 가묘가 있는 곳(도산면 운곡리)까지 신주를 봉안하여 살림집이 있는 안동시에서 지내지만, 4대조까지의 기제에서는 지방으로 대신한다. 그러나 정월 설날과 추석 때는 운곡동 사당에서 차사(茶祀)를 지낸다. 농암공의 자손들은 이곳 긍구당의 사당까지 참례하러 오는데, 길제와 같은 큰 일은 사당에서 모든 행사를 행한다. 도곡재사에서 사당과 긍구당을 관리하며, 선대의 묘소를 관리하는 사람이 있고, 긍구당 윗쪽에 분강서원이 있으며, 농암의 본손 몇 집이 아직 운곡동을 지키고 있다. 영천이씨의 본거지 분천리는 물에 잠겨서 거기서 느껴지는 삶의 체취를 생생하게 전할 수 없지만, 그들의 선영이 있고 의례가 실천되고 있는 운곡동에서 농암 자손들의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3) 농암 16대 종손용헌 이용구 선생 여기서 길제가 있게된 연유를 설명해야겠다. 그것은 물론 농암 가문에 종손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 종손은 농암선생의 16대 손으로 사람들은 그를 용헌선생(庸軒 李龍九 1908. 12. 29~1998. 5. 30)이라 했다. 그는 농암 종손이기보다는 당대의 대학자이셨다. 선생은 평생을 학문에 전념하고 격동의 20세기를 온몸으로 체험한 세대이다. 선생은 전 생애를 학문에 몰두했는데, 그것은 조선시대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그대로 잇는 것이었다. 선생은 학문에만 전념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하고자 한 분이다. 용헌선생이 운명을 달리 했을 때 향중 유림들은 유림장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장례시 안동향교에서는 각 문중의 유림 대표들이 모여 장시간 협의한 끝에 고인에게는 한국 유림의 정통을 잇는 ‘처사(處士)’라는 명칭을 부여하기로 결의하고 요즈음 보기 드문 크기의 부고장을 마련했다. 각 문중과 향교, 서원의 부고(訃告)는 여기에서 보냈다. 용헌처사는 농암 선생의 16대 종손이기보다는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로서 진정 존경받았던 것이다. 그는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했음은 물론이고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옥정동 그의 대문에는 당대의 학자들이 드나들었고, 그의 제자들은 선생의 선비정신과 학문을 잇고자 하는 학회를 만들었다. 그 학계가 분상학계(汾上學稧)이다. 한 가문의 종손이란 신분이 그러한 삶을 살도록 하는 요인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오로지 용헌선생의 참다운 선비정신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농암종택에는 3년 상(喪)을 치루었다. 이는 한 가문에서 수 백년을 이어왔기에 그 전통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상. 장례가 변형되어 가고 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하나의 문화로 존재한다. 한 가문의 종손에게 부과된 사명으로써 결코 소홀히 넘길 것은 아니다. 상례의 여러 가지 의식은 3년 상이 결정•진행되는 것과 함께 나타나는 문화현상이다. 각 가문마다 가가례에 의한 의식이 있겠지만 대체로 전통의 보편적인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번 농암종택의 길제 역시 농암종택의 이러한 전통의 일환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여진다. 오늘날 보기 드문 이런 길제라는 제례의식은 그 선악의 가치적 차원을 넘어서서 전통문화의 존재양상 속에서 그 의의를 검토하고 되새겨 보는 기회가 된다고 보여진다. 그것이 용헌처사의 올곧은 생애와 마감, 그리고 그런 삶과 정신이 다음 종손에게 이어가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초석이 되는 약속의 장을 이루는 길제의 진정한 의의인 것이다.
2. 神主改題 告祀 1) 改題出就 告由 길제는 우선 신주의 전면에 있는 내용을 고치는 절차로서 시작된다. 길제 전날 주인이 성복하고 사당에 가서 분향•재배하고 주인이 헌작을 한다. 헌작은 불천위에만 한다. 축관이 주인의 왼쪽에서 동향하여 개제고사(改題告辭)를 아래와 같이 읽는다. 주인과 참례자는 부복한다. 이 종가에서는 개제출취 고유를 불천위에만 대표로 아뢰었다. 그 내용은 길제에 앞서 사당의 신주를 개제하기 위하여 청사(廳事)로 출주하려 한다는 고사이다.
<改題出就告由> 維歲次庚辰九月己丑朔十一日己亥孝後孫性源敢 昭告于 顯先祖考 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 贈諡孝節公府君 顯先祖妣 貞夫人安東權氏改題有事于 顯五代祖考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將軍府君 顯五代祖妣淑人固城李氏 顯高祖考處士府君 顯高祖妣孺人固城李氏 顯高祖妣孺人全州柳氏 顯高祖妣孺人潘南朴氏 顯曾祖考通德郞府君 顯曾祖妣恭人眞城李氏 顯祖考學生府君 顯祖妣孺人全州柳氏敢請神主出就廳事恭伸追慕 유세차 경진년 구월 기축삭 열 하루 기해일에 후손 성원은 감히, 선조 할아버지 숭정대부 행지중추부사 증시 효절공 부군과 선조 할머니 정부인 안동권씨께 고합니다. 신주를 고쳐 쓸 일이 있사오니, 5대 할아버지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장군 부군과 5대 할머니 숙인 고성이씨, 고조 할아버지 처사 부군과 고조 할머니 유인 고성이씨 고조 할머니 유인 전주류씨와 고조 할머니 유인 반남박씨, 증조 할아비지 통덕랑 부군과 증조 할머니 공인 진성이씨, 할아버지 학생 부군과 할머니 유인 전주류씨의 신주께 대청으로 나가시기를 감히 청하오며, 삼가 추모하는 마음을 올리나이다. 개제는 긍구당에서 했으며, 개제자는 신주의 전면을 향을 끓인 물에 모두 씻고 회분으로 바른다. 향불을 계속 피우는데 칠한 신주의 전면은 향을 피운 화로에 서서히 말린다. 완전히 마르면 신주에 세대를 고쳐 쓰고 봉사자를 현 종손으로 바꾼다. 불천위부터 고조위, 증조위, 조위, 고위 순서로 해 나간다. 이전 봉사자의 증조고는 고조고가 되고, 조고는 증조고, 고위는 조고가 되며 상기를 끝낸 고인이 고위가 된다. 불천위는 봉사자 이름만 바꾸는데 중요한 것은 부조묘(不祧廟)라서 그 대손만 계속 내려온다. 5대조가 되는 신주는 그대로 두었다. 신주의 개제자로 초청된 사람은 의성군 점곡면 사촌의 김창회(金昌會)선생이다. 그는 안동김씨 천사(川沙 金宗德)종손이다. 종손의 말을 빌면, 천사종손은 개제시 손이 떨려 몇 번이나 중지하고 다시 쓰고 했다 한다. 개제하는 일이 지니는 중압감 때문이리라. 신주를 씻어 말리어 일일이 정성껏 써야 하므로 그럴 수 밖에 없다.
2) 사당에서 粉面한 昭穆別 神主 신주는 3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그 부분은 전판(前板)과 함중(陷中) 및 좌판(坐板)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제를 하는 곳은 전판이고 함중에서 끼웠다 빼내었다 할 수 있어 개제 때마다 빼내어 쓴다. 보통 제사나 의례 때 시각으로 접하는 내용은 전판의 문구이다. 함중 내용은 고인(故人)에 관한 글이기 때문에 처음 신주를 만들면 고쳐 쓰는 일이 거의 없다. 좌판은 전판과 함중으로 이루어진 목주(木主)를 받치는 받침이다. 이 3부분을 통틀어 신주(神主)라 한다. 한 사람의 신주는 장례 때 만든다. 상주들이 성복을 하고 나면 밤나무로 신주를 만든다(造主). 신주에 구비할 것을 모두 갖추어 놓은 다음, 제주하는 일은 장례의 치장에서 하관을 하고 봉분을 설치하기에 앞서 함중과 분면한 전판에 한다. 바로 제주전(題主奠)을 드린다. 대개 조주할 때 미리 제주를 해 둔다. 신주는 고인의 신이 혼백에 의지해 있는 도중에 만들어 제주를 하면 혼백과 함께 모셔둔다. 이때 함중의 내용이 결정된다. 전판은 판으로 되어 있어 뒷부분은 사면체이다. 즉 앞이 트인 하나의 함인 셈이다. 그 안쪽 면에 내용이 있다. 이 부분을 함중이라 한다. 여기에 기록되는 내용은 고인의 관직으로 실직과 행직(行職)과 증직(贈職), 존휘(尊諱), 자(字), 그리고 신주라는 글귀이다. 부인의 존휘는 쓰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신주에서 함중에 쓰여져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이 함중의 내용은 처음 작성될 때 외에 평소에는 볼 수 없고, 개제 때 확인 가능하다. 그러므로 거의 볼 기회가 없다. 아래는 분면에 쓰인 내용만 적었다. 그 이유는 직접 개제시에 관찰을 하지 않았기에 불가능하다. 더욱이 보여달라고 부탁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결례가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1) 不遷位 神主 ① 聾巖公位 顯先祖考 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 贈諡孝節公府君神主 孝後孫性源奉祀 ② 聾巖先祖妣位 顯先祖 妣貞夫人安東權氏神主 孝後孫性源奉祀 (2) 祧埋位(5代祖位) ① 考位 顯高祖考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府君神主 孝玄孫龍九奉祀 ② 妣位 顯高祖妣淑人固城李氏神主 孝玄孫龍九奉祀 (3) 高祖位 ① 考位 顯高祖考處士府君神主 孝玄孫性源奉祀 ② 妣位:初娶 顯高祖妣孺人固城李氏神主 孝玄孫性源奉祀 ③ 妣位:再娶 顯高祖妣孺人全州柳氏神主 孝玄孫性源奉祀 ④ 妣位:三娶 顯高祖妣孺人潘南朴氏神主 孝玄孫性源奉祀 (4) 曾祖考位 神主 ① 考位 顯曾祖考通德郞府君神主 孝曾孫性源奉祀 ② 妣位 顯曾祖妣恭人眞城李氏神主 孝曾孫性源神主 (5) 祖考位 神主 ① 考位 顯祖考學生府君神主 孝孫性源奉祀 ② 妣位 顯祖妣孺人全州柳氏神主 孝孫性源奉祀 (6) 考位 神主 ① 考位 顯考處士府君神主 孝子性源奉祀 ② 妣位 顯妣孺人興海裵氏神主 孝子性源奉祀
긍구당에서 개제를 마치고 신주는 3부분을 합한다. 세운 목주 부분을 명주로 된 도자(韜藉)로 씌우고 그것을 나무로 된 주독에 넣는다. 이때 부부가 한 독(櫝)에 들어간다. 왼쪽은 고위이고 오른쪽은 비위이며, 비위는 초취부터 재취, 삼취 순서로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이 한 조를 그 덮개로 덮는다. 비위가 여럿이면 주독은 폭이 넓어진다. 그러면 한 세대의 신주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한 세대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서는 몇 번이나 확인하고 검토한다. 한 번 실수하면 고칠 때까지 잘못 봉사하는 불효를 저지르게 된다.
3) 새로 改題한 神主로 合祭한 내용의 祝文 개제한 신주는 이제 다시 사당으로 모시는 고유를 한다. 모두 각기 감실에 신주를 모셔 개독을 한다. 이 때 선친의 고조는 조매되므로 감실로 옮기지 않는다. 선친의 증조대에서 한 대씩 올려 각기 고조, 증조, 조위의 감실로 옮긴다. 상기(喪期)를 다한 선친과 선비의 신주도 사당으로 뫼신다. 5대조는 내일 길제를 위해 사당에 모셔둔다. 그 신주는 길제 후 매주(埋主)된다. 이에 대한 고유의 축식은 아래와 같다. 이 6대의 위는 한꺼번에 모시고 합제(祫祭)를 한다. 維歲次庚辰九月己丑朔十一日己亥孝後孫性源 敢昭告于 顯先祖考 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 贈諡孝節公府君 顯先祖妣 貞夫人安東權氏 顯五代祖考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府君 顯五代祖妣淑人固城李氏 顯高祖考處士府君 顯高祖妣孺人固城李氏 顯高祖妣孺人全州柳氏 顯高祖妣孺人潘南朴氏 顯曾祖考通德郞府君 顯曾祖妣恭人眞城李氏 顯祖考學生府君 顯祖妣全州柳氏玆以先考處士府君喪期已盡禮當遷主入廟 顯先祖考 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 贈諡孝節公府君 顯先祖妣 貞夫人安東權氏 顯五代祖考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府君 顯五代祖妣淑人固城李氏 顯高祖考處士府君 顯高祖妣孺人固城李氏 顯高祖妣孺人全州柳氏 顯高祖妣孺人潘南朴氏 顯曾祖考通德郞府君 顯曾祖妣恭人眞城李氏 顯祖考學生府君 顯祖妣孺人全州柳氏神主今將改題歲次迭遷不勝感愴謹以酒果用伸虔告謹告 생각건대 해의 차례는 경진년 구월 기축삭 열하루 기해일 후손 성원은 감히 선조 할아버지 숭정대부 행지중추부사 증시 효절공 부군과 선조 할머니 정부인 안동권씨, 5대조 할아버지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장군 부군과 5대조 할머니 숙인 고성이씨, 고조 할아버지 처사 부군과 고조 할머니 유인 고성이씨 고조 할머니 유인 전주류씨와 고조 할머니 유인 반남박씨, 증조 할아비지 통덕랑 부군과 증조 할머니 공인 진성이씨, 할아버지 학생 부군과 할머니 전주류씨께 고하옵니다. 이제 돌아가신 선친 처사부군의 상기가 이미 끝났으므로 예에 따라 마땅히 신주를 모셔서 사당에 돌아가셔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조 할아버지 숭정대부 행지중추부사 증시 효절공 부군과 선조 할머니 정부인 안동권씨, 5대조 할아버지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장군 부군과 5대조 할머니 숙인 고성이씨는 모시는 대수가 다 하였으므로 신주를 조매하게 되었으며, 고조 할아버지 처사 부군과 고조 할머니 유인 고성이씨 고조 할머니 유인 전주류씨와 고조 할머니 유인 반남박씨, 증조 할아비지 통덕랑 부군과 증조 할머니 공인 진성이씨, 할아버지 학생 부군과 할머니 전주류씨의 신주를 장차 고쳐 쓰게 되어 세차가 바뀌게 되었으니 슬픈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삼가 이에 술과 과일로써 경건히 고하옵니다.
이 종가에서는 불천위에만 주과포를 차리고 대표로 선조고에만 축을 고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에서 보면 불천위와 고조, 증조, 조위는 사당으로 모시게 됨을 아뢰고 선친의 고조로 5대조는 매주할 것을 삼가 고유한 듯 하다.
3. 온 門中이 함께 한 길제 용헌선생의 소•대상(小•大祥)이 지나가고 담제(禫祭)가 금년 7월 18일(음)에 지나갔다. 담제 후, 길제가 논의되었다. 길재는 농암문중에서 그 절차와 경비를 감당했다. 오랜 전통일 것이다. 용헌선생의 다음 종손은 이성원(李性源)씨이다. 그는 ‘이 큰일을 어떻게 치를까!’염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중에서 이를 논의하고 그 경비를 비롯한 일체를 준비하기에 대과 없이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를 무척 고맙게 여겼다. 실제로 종가에서 이 일은 전부 감당할 수 는 없는 노릇이었다. 경비도 그러하였겠지만 그 절차와 준비가 여간 손길이 가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길제야말로 문중의 일이기에 문중을 중심으로 행사를 치루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한다. 전일에 문중의 여러 분들이 도곡재사(陶谷齋舍)에 모여 당일 의식에 필요한 물품을 구비하고 행사를 위한 항목을 갖추었다. 여자들은 제수를 장만하고 이날 접대할 음식을 마련하였다. 종부 역시 이들과 함께 했다. 종부는 요즘은 종친들이더라도 일할 사람은 많지 않다고 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여러 딸, 며느리들이 모여들어 무난히 음식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한다. 종부는 “이런 큰 일은 아무리 잘 한다 하더라도 혼자서는 일을 치를 수도 없고 하지도 못해요.”라 한다. 행사를 문중에서 모두 준비하고 추진한다 하더라도 그 내막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 종손과 종부가 그 실질적 진행을 이끌고 있었다. 제례가 끝난 후 종손과 종부와 함께 차를 타고 나오는 데 종손은 오늘 길제에 대해 몇 마디 했다. 사실 이런 문사(門事)를 진행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겨 어려움도 없지 않은데 이번에는 다행히 서로 합심하고 이해하고 도와서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마음이 가볍다고 했다. 그는 “종가는 문중의 화목과 단결을 도모하는 상징적, 실질적 임무가 있고 그것을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길제를 진행하는 내내 그 의미와 그 의의를 이제 젊은 종손의 몇 마디 이야기 속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그러면 길제를 진행하는 과정은 어떤가 알아보자.
4. 時到와 執事分定 및 陳設 1) 時到 길제를 행하기 훨씬 전에 긍구당과 도곡재사 마당 입구에 시도소(時到所)를 차렸다. 천막 차일을 세워 그 안에 회의용 탁자와 의자 서넛을 두었다. 시도집사 2명이 의자에 앉아 참례객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각기 분담한 일이 있다. 시도를 담당하는 집사는 사서(司書)이고 재화를 맡은 집사는 사화(司貨)이다. 참례객은 오는 즉시 시도집사와 인사를 나누며 시도기에 시도를 한다. 그들은 글씨도 잘 써야 하지만 문중과 향내 어른들을 웬만큼 안면이 있어서 대체로 묻지 않고 기록하나, 모를 경우 확인하여 쓴다. 시도에 등재되는 사항은 성함과 거주지역이다. 표지에 보니 ‘時到記, 庚辰 九月 十一日’을 붓으로 세로 쓰기해 놓았다. 후에 알고 보니 첫 머리에 시도한 사람은 오늘 상례(相禮)를 직임한 문장인데 그 어른의 성함과 거주지역을 기재해 놓은 것이다. 대개 시도는 아무나 오는 대로 바로 쓰지 않는다. 관례상, 그 날의 최고 문장이나 종손을 쓴다. 어느 정도 항렬과 연령을 고려하여 앞에서 써 나간다. 이런 어른은 누가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어 짐작이 된다. 시도록을 작성하는 것은 부조기가 있어 참여자의 정성을 받아 드리는 경우가 있다. 대개 지파문중이나 지역 화수회, 또는 각기 단체에서 부조를 한다. 지금은 거의 일금(一金)이다. 여기에는 도착순으로 이름, 거주지역, 일금을 기재한다. 후에 부조기를 참작하여 작성한다. 연사가(聯査家)일 경우도 같은 방식으로 밝힌다. 그의 이름과 거주지로 그 분이 누구인지 알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본관을 쓰지 않아도 된다. 누구든지 동명일 경우 간지로 연치를 구분한다. 이 분들이 정성을 가지고 왔으면 이때 건넨다. 연사가에서는 예의상 평소 부금에 비해 고액을 부조한다. 이는 이 집과 혈연적 인연을 맺은 정리에 의한 후원이다. 이들에 대하여서는 종가의 당내친의 대표가 행자돈으로 다시 답례한다. 이때의 행자금은 자신의 혈연적 관계에 의해 진심에서 우러나는 사례표시이다. 시도기와 부조기는 후에 답신을 보내거나 다음 일을 할 경우에 참고가 된다. 요즘도 오는 손님에게 담배, 약간의 행자돈을 준다. 예전에는 보자기와 소책자(있을 경우)도 주었다. 요즘은 보자기 대신 수건을 주는 경우가 잦다. 모두 지나치지도 야박하지도 않은 보답에 대한 답례이다. 우리 조상의 집회에서는 어디, 어떤 곳이든 이러한 것이 행해져 왔고, 안동과 경상도에서는 아직 남아 있다. 향내와 인근의 영천이씨 일가들은 물론이고 연사가의 어른들이 모여들었다. 참례자는 교통이 불편하여 종친회에서 운행하는 대행버스로 함께 왔다. 이들은 일가 외, 사전에 통지를 낸 연사가의 상객, 농암공의 방손(南谷公派), 타 문중의 주요 어른이다. 종손은 타 문중의 주요 어른들께는 통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길제는 농암선생 본손의 대사이고 문중의 행사이기 때문에 집안의 일을 다른 가문에까지 초청한다는 것 자체가 다른 문중에게 알리는 일이고 그들에게 부담을 주는 경우가 된다. 안동지역 유가에서는 일을 행하는 데 항상 청렴한 생활을 중요하게 여겨왔기 때문이다. 예전과 달리, 이 본손(本孫)들은 댐 수몰로 전국에서 모여든 일가이다. 또 종가의 당내친은 도시로 가 있다. 종부는 말하길, 길제는 잘 볼 수 없는 큰일이기 때문에 멀리 있는 일가와 딸네들이 이번 행사에 참례하도록 연락을 하였다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길제는 곧잘 일어나는 일이었다. 딸들과 며느리들은 길제로 서로간에 자신의 견문을 넓히고 의례의 법도를 익히는 기회로 삼았다. 그러면서 부족한 일손을 부조하기도 한 셈이다. 개별적으로는 서로 소식을 전하고 친목하는 장이 되었다. 그러나 일가라도 친속을 벗어나서 출입하는 일이 잦지 않았다. 지금도 그러한 의식이 남아 있다. 게다가 사당에서는 많은 경우에 여성의 출입이 삼가되는 편이었다. 여성들은 기필코 사당의 뒤곁과 담 너머로 구경하려 했다. 그렇더라도 예전부터 길제는 희귀하고 길한 대사이고, 세대에 걸쳐 일어나는 의례였던 것이다. 이번에 행하는 길제도 75년 만에 행하는 일이다. 오늘 참례한 일가 가운데 유일하게 경험한 사람은 상례(相禮, 李裕民, 90세))이다. 그는 의례에 관심을 두었기에 젊은 시절에 본 길제를 아직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더욱이나 한 짐안의 길사는 자료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를 참작하여 행하는 편이다. 그래서 실제로 일을 행할 때는 더러 혼란을 일으키는 일이 일어난다. 반드시 경험한 사례를 많이 참고한다.
2) 老成들이 의결한 執事의 爬錄 참례자는 주로 머리가 희끗희끗한 장로들이고, 성복으로 갖추는 도포와, 갓이나 유건을 착용하고 있다. 젊은 청년들은 거의 양복차림이고 그렇게 많지 않다. 장로들은 긍구당 사랑채 마루와 방에 모였다. 주로 문중의 일을 주도하거나 이 일을 주시하는 70~80세의 존중받는 분이며, 연사가의 손님들이다. 이들은 이내 종손과 문장 및 장로들이 둘러앉은 가운데 분정을 집필했다. 길제를 준비할 때부터 대략 집사로 모시려고 통지도 하고, 문중의 문장들에게 자문도 받았기 때문에 초안(抄案)이 만들어져 있다. 공론에서는 예상한 분들이 개인적 유고로 참례하지 못하거나 수정, 보충하면서 분담을 확고히 한다. 참례한 모든 일가에게 각자의 역할분담을 공포하는 서식이다. 파록에 작성된 집사들은 길제를 진행하고 돕는다. 물론 이전부터 일을 해 온 집사도 있다. 집사의 공개로 그들의 수고도 알리는 셈이다. 방안과 마루에 둘러앉은 장로들은 집사의 분정을 확인하며 잘못된 점을 바로잡는다. 상례와 여러 문장이 지시하고 집필자는 집사의 직책과 성함을 붓으로 창호지에 적는다. 하지먼 참례자들에게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 시도기를 펴놓고 서로 추천한다. 배정되는 집사의 직책과 명칭, 및 수효는 거의 비슷하다. 이때 가문마다 내세우는 순서나 즐겨 쓰는 용어, 삼가는 글자 등이 있다. 이러한 관습은 비록 미세한 부분이지만 그 집의 역사와 규범이 서려 있어서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허용한다. 향내의 유림이나 문중에서 큰 행사나 의식을 행할 때 반드시 집사분정을 세워놓고 일과 의례를 행한다. 파록의 집사는 엄선하여 정하므로 각기 재계와 더불어 준비하는 시간적 여유를 가진다. 안동 향내에서는 파록을 반드시 행해야 하는 의식의 한 절차로 여긴다. 이 과정은 본격적 의례를 시행하기에 앞서 서로 논의하여 분정을 하기 때문에 의례에 들어서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 부분적으로 의례를 지시해 준다. 참례자는 거의 의관을 정제하여 참여한다. 이렇게 마루에서 분정을 집필하는 와중에도 뒤늦은 장로들이 와서 문장과 어른들에게 서로 절하며 안부를 묻는다. 이번 길제의 각기 집사분정을 보면 아래와 같다. 聾巖先生 吉祭時執事 分定
분정판에는 위 집사들의 성함이 긴 두루마리의 창호지에 붓으로 써 놓았다. 이 분정판을 긍구당 사랑마루 윗벽에 붙인다. 긍구당 앞마당에서 고개를 들면 누구든 자연스럽게 읽을 위치가 된다. 이로써 실제의 길제준비에 들어간다. 모든 집사는 대체로 더욱 분주하다. 문장과 장로들은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분정을 하는데 열중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집사분정의 게시가 되어야 의례를 행하므로 예정시간보다 지체된다. 분정판은 길제를 행하기 약 30, 40분전에 게시되었다. 참례자들은 잠시 분주하도록 긍구당 아래에 모여들어 집사를 확인한다.
3) 제상의 陳設 사당 안에는 이미 청소를 해서 제상과 교의 등 제구들을 갖추어 놓았다. 제상으로는 불천위를 비롯해 5대조위와, 고조위, 증조위, 조위, 그리고 새 신주인 고위의 상이 정열되어 있다. 매주할 5대조위와 고조위는 서로 직각으로 차렸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사당 안은 비좁고, 감실은 불천위, 고조위, 증조위, 조위 뿐인데다가, 고위는 감실이 없다. 5대와 고조위에 대한 진설은 별도의 위를 만들기가 곤란한 사당의 구조적 배치를 감안한 방법인 듯하다. 밖의 굽은 상은 고조위 감실보다 윗쪽이므로 5대조위가 된다. 재실에서는 어제부터 지금까지 일가 딸들과 며느리들, 장정들이 진설하도록 제수를 종류별, 수별로 각기 제기에 괴어 놓았다. 훈기있는 제수는 이제 제기에 담고 있다. 장정들은 제수를 대 위 별로 구별하여 품목대로 사당으로 옮긴다. 사당 안에서는 빨리 가지고 오라고 하고, 밖에서는 젊은 두 세 사람이 바삐 쫓는다. 그들은 불천위부터 5대조 이하 제위까지 이미 반상에 담아 놓은 반잔, 시접, 실과, 채소, 포, 혜 등으로 나른다. 다음으로, 도적, 편, 탕류, 메와 갱 등도 사당 안으로 부지런히 나른다. 사당 안에는 서너 명의 진설 집사가 불천위부터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초벌진설을 갖추고 있다. 한편 사당의 뒤곁에서 봉향을 담당하는 집사 2명이 향로에 향불을 지피고 있다. 숯에 불이 붙도록 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므로 오래 지체한다. 그 불을 사당의 향안 위에 둔다. 향안은 불천위 제상 앞에 있다. 그 위에는 향로와 향합과 더불어, 고위와 비위 잔도 가지런히 둔다.
우선 진설을 해 보니까 제상의 크기에 비해 실과가 많은 편이다. 장로는 정성껏 마련한 것은 진설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실과로 말하자면 농암종가의 후손들은 조동율시와 이동시서를 적용한다. 또 농암선생이 대부를 지내 5탕을 쓴다. 이와 같은 일은 집례와 찬자(78세)가 일일이 지시하며 진설을 감독한다. 장로들은 젊은 사람이 성복을 하지 않고 사당 안에 출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일손이 부족하여 어쩔 수 없었다. 제상에 진설할 제수는 아래의 것들이다. 크기가 커 다른 제수를 놓는데 불편하고 헌작을 드릴 때 떨어뜨릴 것을 염려해 제수를 분산시킨다. 메와 국은 감실 안 신주 앞에 두고 불천위의 포는 다른 위보다 대포이므로 상의 우측에 반상을 이용하여 분리한다. 다른 위에는 그보다 약간 작아도 따로 놓을 공간이 없어 동쪽의 대추, 배, 사과 위에 올렸다. 편들은 모조리 제상의 왼쪽에 따로 둔다. 어떤 위는 적을 편 옆에 둔다. 제상의 크기는 정해져 있으므로 그때 제수의 양과 규모에 따라 조절한다. 진설은 평소 방식대로 따르나 이와 같은 조건에 따라 바꾸어 적용한다. 제수의 품목은 6위가 모두 같다. 단지 불천위에는 양이 보다 많고 더 잘 괴어 놓은 듯하다. 5대조에도 다른 위보다 조금 많다.
<진설 제수> ◦편:(下)본편:시루떡(10층)-웃기:부편-잡과편-검은깨구리-전-조약(上),편청 ◦도적(모두 생):명태(下)-방어-상어-조기-쇠고기-닭고기(上) ◦배추적, 간장. ◦멧국시(고사리 웃기), 멧자반(날상어), 식혜(고사리 웃기), 대구포, ◦5탕:명태, 방어, 상어, 조기, 쇠고기. ◦채소:배추, 무, 도라지, 토란, 고사리, 콩나물, 산나물, 무물김치 ◦각위:콩나물무국, 메 ◦각위:시접과 잔반 ◦불천위 실과:후열-땅콩, 호도, 감, 밤, 전열-약과, 유과, 수박, 사과, 배, 대추, ◦헌주, 모사, 술
4) 길제전 宗婦의 분장 행사시간이 임박하자 사당 안의 진설준비는 거의 되었다. 부인들은 이제 여유가 생겼다. 재사에는 일가의 부인들 뿐이다. 연치가 훨씬 위인 종부의 시고모와 형님은 ‘이제 종부를 좀 다듬어 볼까?, 오늘 색시로 한 번 만들어 보자.’며 온 방을 웃음으로 채운다. 종부는 미리 갖추어 온 한복과 원삼을 꺼낸다. 요즘은 원삼의 띠를 어떻게 매어야 하는 지 모를 정도로 거의 입지 않는다. 한 분이 원삼은 띠를 밖으로 맨다며 손수 마무리한다. 그런데 종부가 쓴 족두리 밖으로 머리카락이 늘어져 있다. 부인들은 머리핀으로 단정히 해 주고 싶으나 모두 파마머리를 한 탓에 구하지 못한다. 모두 아쉬워한다. 종부는 현재 여강이씨 회재(李彦迪, 1491~1553)선생의 후손이다. 지금은 중년의 주부(李原定, 42세)이다. 종부는 유수 가문에서 성장한 체모 덕택에, 농암선생의 17대 종손의 종부로서 자애로운 품성과 위엄이 한껏 보인다. 여기에 함께 한 부인들에 비하면 아직 어린 젊은 새댁이다. 종부가 예복을 준비하는 도중에 방안은 환한 웃음과 덕담으로 가득찬다. 종부는 어른들이 다듬어주는 대로 따를 뿐이다. 원삼과 족두리는 본디 여성에게는 성복의 한 종류이다. 이 차림은 평생에 몇 차례 입을 기회가 있다. 원삼은 일반 서민들이 큰 의례가 행해질 때 입을 수 있다. 이 옷은 궁중의 왕비가 소례 때 입는 옷이며, 반면 왕비는 대례 차림에서 활옷을 입고 의식을 거행한다. 여성이 평생에 원삼을 입을 경우는 주로 다음의 시기이다. 먼저, 혼인을 앞두고 성인의 한 의례로서 계례를 행할 때이며, 이 때는 족두리 대신 주로 화관을 쓴다. 또 신부가 되어 대례를 치르는 교배례와 친영 후 현구고례를 할 때 입는다. 그리고 오늘과 같은 길제가 있을 때 주부가 된 여자는 이 옷을 입고 아헌을 한다. 즉 신부가 시집올 때 입고 온 성복을 다시 입는다. 대개 길제는 4감봉사를 하는 일반 서민 집에서나 종가에서 행하는 경향이 있고, 또 감실이 없는 집에서는 거의 길제를 행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또 맏며느리가 되지 않으며 이러한 기회는 우선 없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로서 주부가 되어 길제의 아헌례를 드린다는 것은 한국 문화에서 여성으로서 부여받은 책임이 막중할 뿐더러 그 의무도 커 주부의 입지가 어떤지를 드러내고 있다. 종국에 한 일생을 마무리 할 때 여성은 4계절의 옷 위에 예복으로서 원삼을 수의(襚衣)로 입고 이승을 하직한다. 원삼은 서민 여성이 성인과 주부가 되어서 입는 성복이며, 그것을 의례에서 의식을 거행할 때마다 징표로서 입는 상징의 의례복이다. 원삼은 오색으로 되어 있고 수색의 실로 문양을 놓아 아주 화려하다. 모양은 겉옷으로서 소매가 넓고, 천은 명주로 된 비단 옷이다. 옷 자체가 이미 경사스런 때 입는 길복임을 알린다. 종부는 이와 같은 의례복으로 길복(吉服)을 입고 있다. 길제가 행해지더라도, 종부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집사가 오라면 양 수모(手母)의 안내를 받아 사당으로 간다. 수모들은 종부보다 10년 이상이나 연치가 위이다. 수모는 품행과 덕성이 바르고 예절을 체득한 일가 부인이 그때마다 정해진다. 수모도 한복을 단정히 입고 나온다. 그들은 종부가 족두리에 대례복을 입고 선조와 조상 앞에 예식을 할 때 절을 돕는다. 행례 때에는 한 가지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닐 때가 많다. 만일 혼자서 성복하고 각 위마다 절하면 혹 실수하고 거동이 불편해질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종가의 경우, 주부는 각 세대 위에 4배를 한다. 6대의 신위로 되어 있으므로 사당 안으로 들어서면 24번의 절을 한다. 종부 혼자 계속 큰절을 한다면 마침내 절도있는 예를 갖추지 못할 지도 모른다.
5. 조상•후손간의 혈연 확인 장치와 그 기능 찬자는 진설을 지시하고 있다가, 사당 안에서 “진설 다 되었니더”라는 집사의 말에, 마이크로 “참례자는 사당 앞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양복입은 분은 담 밖에서 참례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며 알린다. 장로들은 긍구당에서 도포차림으로 사당 뜰로 와서 대략 열을 맞추어 선다. 마지막으로 김이 나는 메가 도착하고 점검 도중, 퇴주기를 가지고 온다. 찬자는 다시 “장내를 정리하겠습니다.”며 양복입은 분과 참례구분, 사진촬영의 협조를 부탁한다. “지금부터 행사를 진행하겠습니다.”
1) 參禮者의 降神儀禮와 進饌 사당 안 제상에는 각 제상에 주과포 등을 진설하고 진찬할 제수도 각 제상 가까이 두었다. 모든 참례자는 사당 뜰에 줄지어 서 있으며, 미처 성복을 하지 못 한 사람은 사당 밖에 모인다. 그들은 담으로 둘러친 사당의 서편 너머, 긍구당 뒤뜰에 선다. 다음 그림에서 보듯이 찬자는 동계 위 동쪽 기둥(楹) 앞에서 창홀을 한다. 찬자가 선 안쪽에 집례가 서 있다. 그 사이에 손을 씻는 대야와 수건이 놓여 있다. 상례는 서계 위 서쪽 기둥(楹) 앞에서 동향하여 서 있다. 여러 집사자는 불천위 제상 좌우와 아랫대의 제상에도 서 있다. 동계와 서계를 기점으로 뜰 안에 서너 줄로 서열한 참례자는 50여명이다. 모두 사당의 신위를 향해 북향하고 있다. 동쪽 계단 앞, 첫 열 맨 동쪽에 종손이 서 있다. 여기가 참례자의 기준이다. 옆에 알자가 서고 제 종헌관이 한 줄을 거의 채운다. 알자의 바로 옆에 찬인이 서 있다. 축관은 그 다음 줄 동쪽에 위치해 있다. 헌관을 채운 다음 앞 열과 중간에는 장로들이 연치 순으로 메운다. 뒤에는 그 중 나이가 적다. 젊은 장정은 도포를 입어도 담밖에 성복하지 않는 참례자와 함께 있다. 참례자는 항상 공수(拱手)를 하고 있다. 남자는 길례에 왼손을 오른손 위에 얹고 배 위에 가지런히 하여 서 있다. 이 자태는 항상 대기 또는 의례의 바른 자세이다.
찬자(贊者)가 홀기로 각 절차를 읽으면 각기 절차에 해당되는 집사가 나아가 의식을 행한다. 한문식 문구의 순서와 안내에 익숙하지 않은 참례자들은 앞선 집례(執禮)의 지시에 따른다. 집례는 찬자가 창홀을 빨리 읽으면 천천히, 이미 다 했으면 서둘러 읽게 조절한다. 찬자는 사당 안에서 집사가 행하는 과정을 살펴가면서 창홀해야 마땅하나, 순서와 상황을 동시에 살피면 자칫 혼란을 일으킨다. 찬자는 창홀도 능숙하고 의례의 식견도 갖춘 가운데 그 집 의례의 세부적 과정을 잘 알고 이끌어야 한다. 당연히 찬자는 실제로 의례 경험이 풍부해야 한다. 상례(相禮)는 의례전반을 총지휘한다. 즉 그는 사당 안의 의례과정과 집례의 지시, 참례자의 동태, 찬자의 창홀 순서 등을 바로잡는다. 집례와 찬자, 제집사가 잘 수행하면 거의 관계하지 않아도 된다. 의례에서는 항상 예기치 않은 것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연습이 아닌 실제로 행하므로 의식이 엄숙하고 절도있게 진행되도록 해야 한다. 사실은 상례의 일을 집례가 다 한다. 실무는 집례가 한다. 결국 창홀로서 집례의 일을 찬자가 거의 한다. 찬자, 집례, 상례는 예를 모르는 사람도 같이 상황을 알아 행하도록 이끌어가는 자들이다. 상례는 명분으로 세우나 연륜과 경륜, 덕망으로 감독하고 지휘한다. 찬자가 창홀을 시작하자 그 내용을 계속 읽어나간다. “主人以下執事者盥洗詣祠堂(주인이하집사자관세예사당)……焚香 告辭(분향 고사)……” 초헌관은 당연히 종손이다. 그 집 신위의 주손(冑孫)이 모든 집례의 주인이 된다. 주인은 사당에 나아갈 준비를 하며 기다리고 있다. 알자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벌써 찬자는“參神再拜(참신재배)”라 한다. 몇 명의 참례자들은 순서를 듣고 있다가 금방 행동하지 않은 알자와 주인을 향해 “분향 안하고 하나”며 제의한다. 찬자는 “참신재배하이소”라며 권유한다. 모든 참례자는 찬자가 제대로 이끌고 있음을 안도하며 전원 재배한다. 사당 안에는 이미 감실에 주독과 도자(韜藉) 3)를 열어 참신례를 하도록 해 두었다. 원래 주인이 신위 앞에 가서 분향하고 의례 사유를 알린 후, 봉독집사가 개독하고 와서 참신례를 한다. 이에 어른들은 강신례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찬자, “行降神禮(행강신례), 謁者引初獻官詣香案前(알자인초헌관예향안전)”창한다(이하 “‥‥‥”안의 한문은 찬자의 창홀임). 이때 알자(謁者)는 주인을 인도하고 안내를 한다. 알자는 예의 시작과 끝의 진행을 읍(揖)으로 알린다. 이에 맞서 초헌관인 주인은 답례로 동시에 읍한다. 알자는 주인의 두세 걸음 앞에서 사당으로 모신다. 주인은 조계(阼階)로 하여 동쪽 계단 위의 관세위(盥洗位)에서 손을 씻고 서문으로 들어간다. 주인이 사당 안에서 의례를 행할 동안 알자는 동문 앞에서 기다린다. 주인은 제상 아래 불천위의 향탁 앞에 꿇어앉는다. 향로에 향합의 향을 3번 넣고 불을 피워 연기를 낸다. 주인은 재배하고 부복한다. “執事者取盤盞(집사자취잔반), 斟酒于盞(침주우잔), 獻官受之灌于茅上(헌관수지관우모상)”불천위의 술잔은 제상 우측 주안(酒案) 위에 놓여 있다. 주인은 우집사자가 따른 술잔을 받았다가 좌집사자에게 건네 불천위인 농암공의 제상 위에 올리게 한다. 좌집사자는 다시 잔을 내려 향안 밑의 퇴주기에 술을 비우고 신위 앞에 올린다. 주인은 부복해 있다가 좌집사자의 행동이 끝나면 재배한다. 주인이 신위 앞에서 물러 나와 동문으로 나오면 알자는 주인을 안내하여 제자리로 모신다. 각 대위의 제상 밑 서쪽 가장자리에 솔가지를 유리병에 꽂아 두었다. 이것은 모사에 해당한다. 모사에 술을 따르는 의식을 하지 않고 퇴주기에 술잔을 비우므로 강신례를 하는 셈이 된다. 강신례(降神禮)는 최상의 조상인 불천위의 고위 술잔으로 함으로써 그 아래의 세대에도 그렇게 한 것으로 인정한다. 아직 집례가 찬자의 창홀에 맞춰 전체 의례를 감독하지 않고 있고, 참례자는 찬자의 창홀에는 어리둥절한 경우가 잦다. 뜰의 장로가 “복창(復唱) 좀 해주면 좋겠다.”고 제안한다. 이때 찬자는 옆의 집례에게 사당 안에 가서 사정을 복창하라 한다. 신위 앞에서 행해지는 행위는 뜰 밖에 있는 참례자가 모두 볼 수 없다. 그래서 앞 사람의 행위를 따라 한다 하나, 궁금하고 답답하다. 사당 안과 계단 위에 넓은 공간이 있지만 그 거리와 위치가 다 달라 집례시 대개 복창을 한다. 이리하여 집례는 자연스럽게 복창을 하게 되었다. “執事者陳設(집사자진설)”이번 길제는 대 위가 많은 데다가 사당이 좁고 행할 의식은 복잡하므로 여러 가지 우려와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평소 다른 의례와 달리, 미리 각 위 상에 진찬(進饌)까지 해 두었다. 이번 진설에서 올리는 제수는 주로 어육도적, 편, 탕류, 멧국시, 메와 국이다. 제수도 윗대부터 차례로 아랫대로 진설한다. 메와 국은 모두 감실의 신주 앞에 두었다. 이 제수는 다음에 진설되는 음식이다. ◦편:(下)시루떡(10층)-부편-잡과편-검은깨구리-전-조약(上), 편청 ◦도적:명태(下)-방어-상어-조기-쇠고기-닭고기(생)(上) ◦탕:명태, 방어, 상어, 조기, 쇠고기(5탕) ◦멧국시-삶은 고사리, 멧자반-꼬지 상어(양쪽) ◦각 위:콩나물무국, 메 2) 初獻官禮:6대조위에 첫 잔 드리기와 讀祝 “行初獻官禮(행초헌관례)……謁者引初獻官詣一位香案前(알자인초헌관예일위향안전)……獻官受之奠爵(헌관수지전작)”찬자는 한 행위가 마무리되면 다음 행위에 해당하는 과정을 창(唱)한다. 다시 알자가 강신례와 같이, 초헌관을 안내하여 서문으로 모시고 동문 앞에 기다린다. 초헌관은 불천위의 제상 앞에 꿇어앉았다가 집사자가 주는 불천위의 술잔을 받아 헌작한다. 헌관은 부복한다. 헌주(獻酒)는 제자리에 놓는다. 불천위의 비위 제상에도 그렇게 한다. 초헌관은 향안에서 조금 물러나 꿇어앉는다. “……祝取版獻官之左跪(축취판헌관지좌궤),主人以下皆跪(주인이하계궤)……”라 읽는 찬자의 말을 듣고 참례자의 뒷줄에 서 있던 축관은 곧 조계를 따라 오르고, 첫 기둥(東楹) 앞을 지나 서문으로 들어간다. 모든 참례자는 축관의 행동을 따라 그 자리에 부복한다. 계단 위의 찬자를 제외하고 모두 부복한다. 담 너머 참례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오로지 창홀의 소리와 간간이 알리는 집례의 복창으로 의례를 따라 행한다. 축관은 초헌관의 왼쪽에서 동향하여 앉고 향안의 왼쪽 아래 있는 축판을 들어 축문을 고유한다. 축문을 고유할 동안 사당 안에 있는 집사자는 상에서 물러나 적당한 자리에서 부복한다.
<不遷位의 祝告由文>
維歲次庚辰九月己丑朔十一日己亥孝後孫性源敢
昭告于
顯先祖考 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 贈諡孝節公府君
顯先祖妣 貞夫人安東權氏性源罪逆不滅歲及免喪
世次迭遷昭穆繼序先王制禮不敢不至謹以淸酌
庶羞祗薦歲事尙
饗 유세차 경진년 구월 기축삭 열 하루 기해일에 후손 성원은 감히, 선조 할아버지 숭정대부 행지중추부사 증시 효절공 부군과 1선조 할머니 정부인 안동권씨께 고하옵니다. 성원의 죄역이 다 하지 않았는데 해는 이미 상기가 끝나기에 이르렀습니다. 세대의 차서가 바뀌게 되어 소목이 차례를 잇게 되었으니, 선왕이 제정하신 예법을 감히 지극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이에 맑은 술과 여러 음식으로 이 제사를 올리옵니다. 흠향하소서.
그 내용은 불천위께, 세대가 바뀌어 4대의 소목계서(昭穆繼序)가 달라지니 5대조위는 이곳을 물러나고, 그 아랫대는 한 대씩 올라오며 이제까지 봉사한 16대손이 고위가 되었으므로 17대손으로서 주인이 되는 사유를 삼가 아룀이다. 독축을 다 읽으면 주인이하 모두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 공수해 있다. 축관은 뒤로 물러서고 초헌관은 그 신위께 재배한다. “……次詣諸位前獻官祝如初(차예제위전헌관축여초)……”홀기에는 그 이상 지시하지 않고, 이제 각 대 위별로 가면서 불천위에 드린 고유처럼 축관은 초헌관을 대신하여 독축한다. 5대조위는 고조부 제상과 접하고 있어 주인은 조심해서 신위를 이동한다. 서문의 벽과 그 제상 사이 간격은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 밖에 남지 않는다. 고위 앞에 향안 한 조가 또 마련되어 있다. 초헌관은 평생에서 오늘 제사가 처음 당하는 길제이다. 몇 년 전, 경주 처가에서 생긴 길사에서 종헌관을 해 보았지만 집례가 일러주는 대로 행한다. 앞에서 일하면 실수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종손이 고조위에 꿇어앉아 있으니 집례는 즉시 5대조위로 돌아앉으라고 일러준다. 초헌관의 행위에 따라 집사자가 ‘여기에 분향은 없니껴’물으니, 복창은 ‘향은 없어도 된다.’한다. 5대조위는 서쪽으로 배치한 제상에 최서(最西)의 가장자리 중앙에 신주를 동향하여 설치하고 그 앞에 제수를 진설한 형태이다. 그러므로 고위는 남쪽으로, 비위는 북쪽에서 동향한다. 배치구성은 사당 안에서는 서문과 중문 사이의 벽을 이용한 신위의 설치이다. 참례자는 밖에서 5대조위를 보지 못 한다. 초헌관은 5대조위에 전작(奠爵)하기 위하여 5대조와 대응 방향으로 앉았다. 그 자세는 중문 쯤 공간에서 서향하여 꿇어앉아 있다. 5대조위에 첫 헌작을 돕는 축관과 집사자는 신위와 초헌관을 따라 정해진다. 전작 집사자는 고위 옆에 서고, 이 집사자와 초헌관 사이에 축은 중문벽을 등지고 북향하여 있으며, 봉작집사자는 주인의 오른쪽에서 남향하여 술을 잔에 채워 주인에게 건넨다. 이와 같은 복잡한 상황과 짧은 시간, 조상과의 관계를 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술잔을 미리 주상(酒床)에 집사자가 갖추어놓는다. 이렇게 한 형태에서 5대조에 대한 전작과 독축이 행해진다. 창홀없이 5대조위에 전작하고 독축하니, 참례자는 창홀하라고 제기한다. 복창은 그대로 계속하라 한다. 사실, “……次詣諸位前獻官祝如初(차예제위전헌관축여초) ……”홀기 내용 다음에는 다른 절차가 없다. 참례자는 이 내용을 숙지하고 있지 않는다.
<5대조위에 대한 고유축> 維歲次庚辰九月己丑朔十一日己亥五代孫性源敢
昭告于
顯五代祖考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府君
顯五代祖妣淑人固城李氏玆以先考處士府君
喪期已盡禮當遷主入廟先王制禮祝止四代
心雖無窮分則有限神主當祧將埋于墓所
不勝感愴謹以淸酌庶羞百拜告辭尙
饗 유세차 경진년 구월 기축삭 열 하루 기해일에 5대손 성원은 감히, 오대조 할아버지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 부군과 오대조 할머니 숙인 고성이씨께 고하옵니다. 이제 돌아가신 아버지 처사부군의 상기가 이미 끝나서 이에 따라 마땅히 신주를 모셔서 사당에 들어가셔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왕이 제정하신 예에는 제사를 4대에만 이르게 하였습니다 마음은 비록 무궁하지만 분수에는 한도가 있어서 신주를 장차 산소에 묻으려 합니다. 슬픈 마음을 이길 수 없어 맑은 술과 여러 음식으로 백 번 절하고 고하옵니다. 흠향하소서.
5대조위는 불천위 종가에서는 사당에서 불천위 다음의 윗대 조상이며, 사사집의 사당에서는 가장 윗대 조상이다. 이때 사사집은 4감을 봉사하는 당내친으로 형성된 큰집이다. 일반적으로 소종(小宗)의 큰집에서 초헌관은 그 주손이다. 5대 조상은 길사와 같은 시기에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과정으로, 고조위까지 사대봉사를 하던 봉사자가 사망하면서 성립된다. 사실 다음 봉사자이며, 고위의 효자는 5대조가 되어 길제를 기점으로 직접 모실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나 초헌관의 윗 대 당내친이 많으면 초헌의 5대조와 아직 당내친의 친속을 갖고 있는 직계비속들은 고조부 내의 조상으로서 봉사를 해야 한다. 생존한 그 친속 가운데 최장방의 당내친은 초헌관의 5대조 신주를 모셔간다. 대개 최장방은 종손과 숙질간인데, 길제에서 고위로 말하자면 그의 형제일 가능성이 많다. 최장방은 친진할 고조부와 관계에서 높은 항렬의 최연장자를 말한다. 이렇게 하는 것을 ‘친진(親盡)한다’라 한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친진에 해당하는 사람은 오늘의 초헌관인 종손과 그 형제이다. 아직 친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와 관계에서 당내친에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오늘, 주인은 확실히 소목계서의 원칙에 따라 매주하는 것을 사유로 한다. 5대조위는 이번 길제가 사당에서 이별하는 의례이다. 그 5대조는 고조부로써 현재 고위가 현손으로 섬긴 조상이다. 현손이 죽고 고조부가 종손의 생활공간 근처, 사당에서 물러나 묘소로 가도록 차마, 5대손이 행해야 한다. 그것을 축관을 통하여 초헌관은 고비위에게 헌작을 하면서 고유한다. 축식은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방식은 불천위에서 한 것과 같다. 매 위에 독축을 하면 참례자도 초헌관을 따라 부복한다. 독축이 끝나면 축관은 뒤로 물러나고, 집사자는 다음 위로 가며, 참례자는 제자리에서 일어서 공수해 있다. 초헌관은 일어나 재배하고 고조부위로 간다. 이번에 길제를 행함으로써 증조고에서 고조고위가 됨을 고유를 한다. 사손집에서 감실이 열향(列向)으로 되어 있을 경우, 고조위는 대개 감실이 최 서쪽이며 당내친에서 한 종(宗)을 이루는 최상의 조상이지만 불천위가 있는 종가에서는 최 서쪽이 불천위이고 다음에, 4대조의 최고 조상이다. 농암종가에서는 고조부의 감실은 불천위 다음 위, 동쪽에 위치한다. 고조위 옆은 증조위이다. 각기 4개 감실이 붙어 있고 칸만 구분된다. 고조위의 독축 고유는 조상을 섬기는 예식에 따라 효현손(孝玄孫)으로서 초헌관이 고조위를 모시게 됨을 알린 내용이다. 그 절차와 방식은 조고위 전까지 모두 같다. 단지 축문에서 증조위는 효증손(孝曾孫)으로써, 조위는 효손(孝孫)으로써 각 대 위의 고위와 비위께 아뢴다. 어떤 위는 비위가 두 분 이상일 수도 있다. 그러면 모두 한 개의 주독에 모신다. 봉사의 사유를 ‘소목계서’로 표현하는데 “孝○○(봉사자와 조상의 관계)奉祀”말은 종법의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고조위에 대한 고유 축문> 維歲次庚辰九月己丑朔十一日己亥孝玄孫性源敢
昭告于
顯高祖考處士府君
顯高祖妣孺人固城李氏
顯高祖妣孺人全州柳氏
顯高祖妣孺人潘南朴氏性源罪逆不滅歲及免喪世次迭遷
昭穆繼序先王制禮不敢不至謹以淸酌庶羞祗薦歲事尙
饗 유세차 경진년 구월 기축삭 열 하루 기해일에 현손 성원은 감히, 고조 할아버지 처사 부군과 고조 할머니 유인 고성이씨, 고조 할머니 유인 전주류씨와 고조 할머니 유인 반남박씨께 고하옵니다. 성원의 죄역이 다 하지 않았는데 해는 이미 상기가 끝나기에 이르렀습니다. 세대의 차서가 바뀌게 되어 소목이 차례를 잇게 되었으니, 선왕이 제정하신 예법을 감히 지극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이에 맑은 술과 여러 음식으로 이 제사를 올리옵니다. 흠향하소서.
고조위에서 조위는 초헌관이 신위 앞에 헌작을 하고, 축관이 왼쪽에서 동향하여 고축하고 나서 초헌관이 재배하는 절차로 진행된다. 전작(奠爵)은 미리 봉작(奉爵)이 신위의 잔을 내려 우측에 두면 우집사가 술을 따르어 헌관에게 준다. 헌관은 이를 받아 좌집사에게 주면, 그 집사는 신위 앞에 올린다. 축의 고유내용은 각 위의 봉사자가 지금의 초헌관이 됨을 아뢰고, 그 세대관계가 현손, 증손, 손자, 아들로서 봉사함을 알린다. 각기 축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축을 할 때마다 참례자는 마이크를 사용하도록 요청한다.
<증조위에 대한 고유축문> 維歲次庚辰九月己丑朔十一日己亥孝曾孫性源敢
昭告于
顯曾祖考通德郞府君
顯曾祖妣恭人眞城李氏性源罪逆不滅歲及免喪世次迭遷
昭穆繼序先王制禮不敢不至謹以淸酌庶羞祗薦歲事尙
饗
유세차 경진년 구월 기축삭 열 하루 기해일에 증손 성원은 감히, 증조 할아버지 통덕랑 부군과 증조 할머니 공인 진성이씨께 고하옵니다. 성원의 죄역이 다 하지 않았는데 해는 이미 상기가 끝나기에 이르렀습니다. 세대의 차서가 바뀌게 되어 소목이 차례를 잇게 되었으니, 선왕이 제정하신 예법을 감히 지극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이에 맑은 술과 여러 음식으로 이 제사를 올리옵니다. 흠향하소서.
<조위에 대한 고유 축문> 維歲次庚辰九月己丑朔十一日己亥孝孫性源敢
昭告于
顯祖考學生府君
顯祖妣孺人全州柳氏性源罪逆不滅歲及免喪世次迭遷
昭穆繼序先王制禮不敢不至謹以淸酌庶羞祗薦歲事尙
饗
유세차 경진년 구월 기축삭 열 하루 기해일에 손자 성원은 감히, 할아버지 학생 부군과 할머니 유인 전주류씨께 고하옵니다. 성원의 죄역이 다 하지 않았는데 해는 이미 상기가 끝나기에 이르렀습니다. 세대의 차서가 바뀌게 되어 소목이 차례를 잇게 되었으니, 선왕이 제정하신 예법을 감히 지극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이에 맑은 술과 여러 음식으로 이 제사를 올리옵니다. 흠향하소서.
길제는 효자(孝子)로 봉사하던 주인이 죽음으로써, 고인은 부위가 되어 사당의 감실에 신주로 봉안되는 의례이다. 부위의 자리는 부재모상(父在母喪)이 원칙이 아니라 모재부상(母在父喪)이 되면 가능하고, 이어 길제를 지낸다. 그 후 모상으로 인한 비위를 사당으로 봉안한다. 혹, 부재모상을 당하였다 하더라도 상례에서 남편과 자식은 11개월의 연복(練服)을 입고 13개월인 소상에서 대상을 지낸다. 굳이 연복은 말하자면 모재부상이나 부상 이후에 일어나는 모상(母喪)에 대한 소상과 같다. 요즘 고인의 사후 1년만에 찾아오는 첫 기일을 소상(小祥)으로 지내는 의례와 같은 의식이다. 15개월에 담제를 지내고 그 다음에 날을 받아 길제 지내면서 사당의 동쪽에 따로 모신다. 아직 세대가 바뀌지 않아서 상기간을 단축하는데 그 의례는 3년이 아닌 2년으로 짧아진다. 의례의 규모나 과정도 간단하다. 자식은 심상 3년을 한다. 부상 이후의 모상에서는 부상과 같은 상기간을 얻고 담제까지 부상과 같은 절차로 간다. 길제는 이미 부상 이후에 행했으므로 의식만 밟아 정식으로 사당에 봉안한다. 부재모상으로 상례를 마친 후 비위가 사당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고조위가 그 집의 사당에서 물러나는 것은 아니다. 아직 봉사자인 주인은 살아 있으므로 그 비위는 기일의 제사와 시제인 절사, 등과 같은 일반적 상례에서 봉사를 받는데, 비위의 아들이 봉사자가 되지 않고, 그 남편이 봉사자가 된다. 비위는 아직 감실에 들어갈 수 없다. 남편이 고위가 됨으로써 고위의 자격을 따라 아들로부터 정식으로 부위의 지위를 얻는다. 이때 한 세대의 조상이 된다. 이러한 결실은 길제로 얻어진다. 이번 농암공 종가의 길사는 모상 후의 부상으로 행해진 제사이다. 고비위 모두 사당으로 봉안되고, 최저의 자리인 열향에서 벗어나 동쪽 벽에서 서향하는 자리를 얻는다. 대개 안동지역에서는 사당의 사당 안은 4개의 감실을 설치해 두고 있다. 주손집에서는 4대조가 열향하고, 부재모상일 경우, 최 동쪽에 서향하여 비위의 신주를 모셨다가 고위가 들어옴으로써 열향한 감실의 최 동쪽이자 최저의 자리인 감실로 들어간다. 그런데 불천위가 있는 종가에서는 여전히 열향을 따르고 4개의 감실을 둔 경우가 많다. 최 서쪽이 불천위의 자리가 되며, 소목으로 조위까지 온다. 그러면 고위는 열향에서 벗어나 동문 안 동남쪽 벽에 서향하여 설치된다. 사당 안의 신주를 이렇게 배열한 것을 곡설(曲設)이라 한다. 이럴 경우 감실을 축조하는 것이 마땅하나 거의 구비하지 않은 채 모셔온 것이다. 제상 안쪽에 주독을 세워둔다. 이 종가도 그러하다.
<부위에 대한 고유축문> 維歲次庚辰九月己丑朔十一日己亥孝子性源敢
昭告于
顯考處士府君
顯妣孺人興海裵氏性源罪逆不滅先妣喪畢
有年禮當配享隮入于廟追遠感時昊天罔極
謹以淸酌庶羞祗薦祫事尙
饗
유세차 경진년 구월 기축삭 열 하루 기해일에 맏아들 성원은 감히, 선친 처사 부군과 선비 유인 흥해배씨께 고하옵니다. 성원의 죄역이 다 하지 않았는데 선비의 상기는 이미 마쳤고, 해가 지나 예에 따라 이제 선대가 계신 사당에 배향하게 되었으니, 때마다 부모님의 높고 드넓은 은혜를 느낍니다. 삼가 이에 맑은 술과 여러 음식으로 선대와 합사를 올리옵니다. 흠향하소서.
축문에는 선친(先親)의 상기가 다 하여 사당에 선대(先代)의 여러 조상과 함께 사당에 모심을 아뢰는 의례임을 고유한 내용이다. 이때 장자(長子, 嫡子)가 봉사자로서 효자(孝子)가 된다. 이 종가에서 고축은 한 명의 축관이 불천위에서 고위까지 각각 6대 위에 아뢴다. 이렇게 각 대 위별 고축이 끝나면 축관은 먼저 동문으로 물러나와 뜰의 제자리로 돌아간다. 참례자도 제자리에 서 있다. 종손은 부위에서 재배하고 동문으로 나온다. 곧 알자가 사당 뜰로 모셔간다. 이것으로 초헌관례가 끝난다. 한 의식이 끝날 때마다 찬자는 창홀을 하느라 바쁘다. 집례는 홀기 절차와 순서를 분명하게 초헌관의 행위와 다음에 이을 행위를 구분하여 참례자들이 시각적으로 확신하도록 보여준다.
3) 圓衫입은 종부의 亞獻官禮 안동은 대부분 종가와 주손의 큰집에서 아직 주부가 아헌관례를 하는 관행이 많이 남아 있다. 주인과 주부가 함께 그 집의 제사를 받든다는 것은 부부가 그 집을 세워나간다는 뜻이다. 주인과 동반한 주부는 당연히 아헌관으로 조상 앞에 나간다. 특히 길사에서 주부는, 유고가 없다면, 지속적으로 가문의 한 세대를 책임지고 잇는다는 시점에서 아헌관례를 맡는다. 농암공 종가에서 이번 길제에 주부로서 종부는 이 날의 유일한 여성 참례자가 되었다. 의례를 시작하기 전에 한복에 원삼과 족두리로 성장을 하고 재실의 안방에서 대기하고 있다. 종부는 길사가 시작되자, 재실의 안방에서 사당에 헌관으로 참례할 것을 대기하고 있다. 찬자가 “行亞獻官禮(행아헌관례)”라 한다. 찬인(贊引)은 알자 옆에 그대로 있다. 장로가 “알자, 종부 모시고 와라.”하자, 다른 장로가 “찬인이 가야지.”한다. 찬자는 이제 찬인에게 저 문밖에 가서 종부 모셔 와라 한다. 찬인은 즉시 사당의 외문(外門) 앞으로 간다. 종부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문밖을 나간다. 곧 찬인이 먼저 외문으로 들어온다. 온 참례자는 이 문으로 시선을 모은다. 문 앞에 선 화려한 신부, 종부가 보인다. 종부는 족두리를 쓰고 한복 위에 오색의 원삼을 입은 가운데 오른손을 위에 올려 가슴에 가지런히 하고 다소곳이 있다. 한복 입은 수모가 뒤따르고 있다. 일제히 “들어오이소”한다. 이때 찬자가 “贊引引亞獻官詣一位前(찬인인아헌관예일위전)”하니, 찬인은 읍으로 사당으로 들어올 것을 요청한다. 종부는 찬인의 뒤를 따라 서열한 참례자 앞, 계단 사이의 앞쪽을 지나, 알자의 안내를 받은 초헌관과 같이, 동계로 하여 위에 오른다. 아헌관은 거기서 기둥 안쪽의 세수대야에 손을 씻고 서문으로 간다. 여기서 찬인이 읍하고, 아헌관이 답읍한다. 찬인은 동문으로 간다. 집례와 장로가 “한복 입은 사람 따라 오시오.”하니, 금방 2명의 수모가 종부가 오른 길로 서문에 이른다. 집례는 즉시 종부를 서문에서 들어와 불천위 앞에 꿇어앉으라고 권유한다. 그 양쪽에 수모가 선다. 집사자는 잔을 비우는지 집례에게 물으니, 물론이라며 초헌의 전작을 퇴주기에 비우도록 한다. 종부는 그 자리에 꿇고 양 수모는 조저 앉는다. 좌집사자가 불천위 고위의 잔을 가지고 퇴주기에 퇴작하고 주부에게 준다. 바로 우집사자가 술주전자로 주부의 손에 들린 잔에 술을 따른다. 주부는 그 잔을 들어올린다. 좌집사자는 그것을 받아 제자리에 놓고, 비위 잔도 퇴작 후, 주부에게 건네고, 다시 채우면 잔을 그 자리에 드린다. 그러면 아헌관인 주부는 수모의 도움으로 4배를 한다. 잠깐 부복을 하다가 일어서 그 곳을 물러난다.
이때 참례자는 종부의 모든 행동을 유심히 지켜본다. 곧바로 5대조위에 와 수모와 더불어 꿇어앉는다. 아헌관은 불천위에 잔을 드리고 4배를 한 것처럼, 5대조, 고조, 증조, 조, 신주(新主)와 같이 봉안한 순서대로 그렇게 한다. 소요 시간은 초헌관례에서 독축한 시간에 버금갈 정도로 엄숙하고 오래 걸린다. 집례는 종부에게 잔을 드릴 때마다 손으로 신위 전에 높이 올리는 자세를 취하면서 어깨를 움츠린다. 다음의 잔에서 종부는 높이 올리는 자태를 취한다. 수모는 종부의 겨드랑이를 잡는다. 이들은 종부가 절을 하면서 앉으면 앉고, 다른 방향으로 수모없이는 6대위까지 바로 잇기가 곤란할 듯 늦어진다. 종부는 정성을 다 하려 노력한다. 그로써 각 위마다 6대에 걸쳐 4배로서 큰절하니 24번의 절을 한 셈이다. 그 절차가 끝나면 종부는 찬인의 도움을 받아 동문에서, 동계로, 뜰로, 외문을 나와 수모와 함께 사당에서 벗어난다.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찬인은 원래 자리로 가 선다. 그러므로 아헌관례를 다 하게 된다. 아헌관은 다른 제사에서처럼 독축, 고유가 없고 헌작과 배례만 있다. 다른 제사와 구별되는 것은 길제에서만 오색과 화초문양으로 둘러싼 화려한 원삼을 입고 구슬과 금박이 박힌 화사한 족두리를 쓴 주부가 의식을 행한다는 점이다. 그만큼 길제가 중요하고 큰 의례임을 보여준다. 일가들은 이 광경을 직접 확인하고자 하며, 남자들은 주부로서, 종부로서 여성의 위엄과 지위를 갖추는 일에 새삼 감복한다. 그것은 길제 후, 종부에게 답례하는 것으로 보면 서로가 인정하고 있음이다. 남성들은 저마다 ‘종부요, 오늘 참 이쁘디더. 제일 멋있디더. 참 대단하던데요. 새색시이던데요.’라며 격려한다. 오가는 몇 남성들과, 종부와 주변의 여성들은 종부가 오늘 인사를 많이 받는다며 서로 웃고 떠든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은 없고 남성만의 의례적 시공간이었다. 길제의 의식은 갈수록 엄숙하고 대단하다.
4) 향내 聯査間이 함께 지내는 終獻官禮 다음이 종헌관례이다. 찬자의 창홀은 “贊引引終獻官詣一位前贊(인종헌관예일위전)”을 알린다.
종헌관은 각기 소목마다 정해져 있다. 불천위부터 고위까지 6명이다. 이들은 뜰의 동쪽에서 종손, 알자, 찬인, 다음으로 나란히 서 있다. 이들은 모두 종손과 연사간(聯査間)의 관계를 유지하고, 또 종가의 길사인 만큼 연비에서 볼 때 타 가문의 종손이나 덕망있는 분의 후예나 그러한 사람이다. 이날 종헌관으로 분정례에서 집사가 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연사간은 종손의 증외가(曾外家), 4)에서 이동광씨, 진외가(陳外家) 5)에서 류해종씨, 외가 6)에서 종손 배재진씨가 왔다. 종손의 외가는 다른 가문이고, 종가에서 특별히 상객으로 예우한 집이다. 다른 류씨는 선고가 생전에 세운 분상학회의 제자이다. 이 종가에서 길제를 오늘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참례했으니 특별히 우대한 것이다. 나머지는 방손(남곡공파)의 후손(류철주씨)과 종손의 종형(이재민씨)이 종헌관을 했다. 대개 종헌관은 이와 같이 엄선한 분이다. 조상을 예우할 만한 관계의 사람에게 헌작을 청원한다. 이들은 찬인이 안내하는 대로 관세위에서 손을 씻고 사당 안으로 들어간다. 각기 한 신위에 꿇어앉는다. 종헌관을 안내하는 찬인은 알자와, 아헌관을 모시는 찬인처럼 사당의 동문입구에 서 있다. 집사자가 “종헌관 제작(除爵)있니껴.”하니, 집례는 “제롄데 뭐, 제작해라.”며 다짐을 준다. 불천위 제상에서 아헌관의 잔을 퇴작(退酌)시키고, 종헌관은 바로 잔을 받아 제작하고 신위 앞에 드린다. 그리고 부복한다. 종헌관들이 한 대씩 술을 따르고 한꺼번에 전작하고 배례(拜禮)하려면 시간이 지체된다는 것을 참례자들은 안다. 5대조위에서와 고조위에 술잔을 채울 때, 이를 확인한 집례는 윗대는 집사자가 전작하고 찬자는 창홀을 계속 하라며 지시한다. 아랫대는 아직 잔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술이 모자란다. 찬자는 전부 잔을 올려야 하지요 하며 절도에 맞지 않는 의례라 한다. 이에 상례는 “창홀해도 한쪽에서 배례를 하고 다른 위에서는 잔을 드리면 되잖아. 창홀해라”며 집례를 돕는다. 찬자의 창홀은 재배로 이어진다. 불천위부터 고조위까지는 배례를 하고 그 아랫대에는 전작을 하며, 예를 마친 헌관이 동문으로 하여 제자리로 돌아갈 때 전작한 헌관은 배례하고 뒤따른다. 이때 상례는 “축이 들어가서 첨작을 해야 하는데 모두 못 하니 집사자가 하도록 하지.”하며 참례자의 동의를 구한다. 집사자는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5) 주인이 여러 조상께 권유한 祭需 창홀에서는 ‘유식(侑食)’을 알린다. 좌우에 선 제집사자는 향내의 종헌관들이 제작하고 드린 고비위의 헌작에 첨작(添酌)을 한다. 첨작은 축관이 메뚜껑에 술을 떠 신위의 잔에 3번 정도 나누어 채우는 의식을 말한다. 참례자들은 굳이 혼자 드리지 않아도 되는지 집사자들에게 맡긴다. 상례인 문장은 집사자가 첨작하는 것이 더디게 느껴진지 집례에게 다시 복창(復唱)을 재촉한다. 밖의 참례자는 사당 안의 동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므로 복창(復唱)을 해서 다같이 참례할 수 있도록 하라 한다. 이 문장은 80여 년만에 지내는 오늘 길사의 유일한 경험자이다. 집사자는 “첨작 다 했어요.”라 한다. 이내 집사자들은 각 위의 메와 다른 음식에 삽시정저를 한다. 숟가락과 젓가락은 서병말동(西柄末東)으로 놓는다. “삽시 다 되었다.”라는 복창(復唱)의 말이 떨어지자 무섭게 장로들은 “나와라.”소리친다. 사당 안의 집사자는 문밖으로 나오고 사당문을 닫는다. 합문(闔門)을 한다. 사당 뜰의 제참례자는 그 자리에 부복한다. 집사자들과 상례와 집례는 당 위에서 일렬 횡대로 부복한다. 긍구당 뒤곁의 참례자도 일제히 옷 여미는 소리를 낸다. 상례 옆에 부복한 집사자가 의문을 구하길, “부복 전 배례있잖니껴.”하니, “상례가 지나갔거든 그만 가만히 있거라.”며 소란할 것을 미리 잠재운다. 홀기에는 그 내용이 없는데 대개 유식에서 첨작 후 주인이 배례를 한다.
한 식경(食頃) 후, 찬자가 “祝三噫歆(축삼희흠)”한다. 축관은 그 자리에 서서 기침을 한다. 앞에 선 장로와 참례자는 고개를 들어 주변의 상황을 살핀다. 찬자는 즉시 “올라오소”지시한다. 자신의 실수를 알고 빨리 조계로 하여 당에 오르고 동쪽 기둥 앞을 지나 중문 앞에 선다. 상례는 “에험- 3번 하면 되잖아”며 종용한다. 그는 어른들이 권하는 대로 허리를 약간 굽혀 에헴- 에헴- 에헴, 삼희흠(三噫歆)을 한다. 모두 그 소리에 일어서고 축관은 되돌아온다. 삼희흠은 사람들이 문 앞에서 방문을 열고 들어갈 때 인기척을 알리는 것으로 서양에서 출입문에 서서 노크하는 것과 같은 신호이다. 이 집에서는 초헌관이 와서 희흠을 하는 모양이다. 잇따라 집사자가 동서와 중문을 연다. 계문을 한다. 집사자는 각 위의 불천위인 윗대 선조부터 갱그릇의 국을 큰 양푼이에 비우고 거기에 집사자가 주전자로 물을 조금 담는다. 메에 꽂힌 숟가락으로 밥을 3술 떠 그 물에 만다. 숟가락은 서병이 되게 놓는다. 제위에 모두 이렇게 가지런히 했으면 정위치에서 국궁을 한다. 국궁은 허리를 90°로 굽힌 자세이다. 식후 숭늉을 마실 시간임을 드러낸 의식이다. 축관이 에헴하지 않아도 평신(平身)이란 절차를 듣고 참례자는 이내 바로 선다 십 서넛 위마다 절차를 거쳐 행하므로 시간은 연장된다. 제사, 길제는 주인과 주부, 손님만이 아닌 참례자 모두 함께 지낸 것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6) 受胙와 嘏辭 이번의 절차는 수조(受胙)음복이다. 수조는 계절의 중월(仲月), 4대조에 지내는 시제와 이제(禰祭) 그리고 길제에 있는 절차이다. 대개 시제와 이제에서 이 절차는 잘 행해지지 않고 있다. 평소 잘 못 보는 의례이다. 수조는 조고가 새 봉사자 주인에게 복을 받게 한다는 뜻을 지닌 의식이다.
초헌관은 선조의 신위 앞에 꿇어앉으니 축관에게 사당 안으로 들어가라고 알린다. 축관은 평생 처음 겪는 의례여서 어리둥절한 듯 하다. “가사해야 하잖아”라는 지시에 올라가 초헌관의 왼쪽에 앉는다. 집례는 주머니를 찾는다. 종손이 소매에서 푸른 주머니를 내어주니 그 속에 축문 크기의 문종이가 들어 있다. 축관은 그 종이를 들고 불천위 각 메를 숟가락으로 조금 떠놓는다. 집례는 이를 싸 주머니에 넣고 새끼손가락에 걸어라면서 초헌관에게 준다. 초헌관은 왼손 새끼손가락에 끈을 걸어 손에 쥔 채, 좌집사자가 메뚜껑으로 조금 떠 주는 퇴주기의 술을 받아 마신다. 집례는 이 주머니를 오른손의 새끼손가락에 바꿔 걸어라 한다. 집례는 창홀을 쉬게 한다. 이제 5대조에서 고위 앞의 메도 불천위에 한 것처럼 그 종이에 첨가하길 권유한다. 주인은 주머니를 다시 내어주고 축관은 그것을 받아 아래 여러 위의 메를 조금씩 떠 담는다. 이 과정을 집사자도 돕는다. 축관은 모든 신위의 메를 싸 주머니에 넣고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걸어준다(원칙은 左袂). 초헌관은 부복한다. 한 어른이 가사는 “主人之右(주인지우)에 서야 한다.”며 미리 가르쳐 주자, 집례는 “예”다음 상황을 자연스럽게 진행한다. 축이 오른쪽으로 가는데, 집례는 가사(嘏辭)는 조고위에서 해야 하므로 중앙의 조고위로 안내한다. 초헌관이 조고위를 향해 부복하자 축관은 축문처럼 그렇게 앉아 읽는다.
<가사(嘏辭):새 주인에게 축복> 祖考命工祝承致多福于汝孝孫來(釐)汝孝孫使汝受祿于天宜稼于田眉壽永年勿替引之. 할아버지는 온 우주의 주재자에게 일러 너에게 많은 복이 이르기를 비노라. 이제 손자 네가 왔으니, 손자 너로 하여금 하늘의 복을 받고 생업이 뜻대로 되며 수명을 길게 누리며 모든 일에 변함이 없도록 하기를 바라노라.
가사는 평소에는 잘 들을 수 없는 말이고, 축문과 좀 다르다. 집례는 한자씩 축관에게 미리 읽어준다. 초헌관은 다시 불천위 앞으로 올라와 꿇었다가 재배하고 부복한다. 축관이 술을 건네자 조금 마시고 잔을 물린다. 청색주머니를 다시 도포소매에 집어넣는다. 이로써 수조의 음복은 완료된다. 곧바로 찬자의 “告利成(고이성)”이 있다. 초헌관은 불천위 앞에서 서문으로 나와 뜰에서 동향하여 선다. 뜰에 선 종헌관들은 일제히 손가락으로 그 위치를 알려준다. 한 어른이 큰소리로 “獻官東齋舍(헌관동재사)에 가서 西向立(서향입)하라는 말이다”며 정확히 설명해 준다. 초헌관이 서문을 나와 중문의 동편에서 남향하여 선다. 축관은 초헌관의 동태를 보고 초헌관 앞에서 마주보고 읍하며 “이성(利成)”이라 한다. 초헌관도 읍으로 답례한다. 제사에서 이성은 ‘예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다 이루었습니다.’는 뜻으로 주인에게 경과를 보고하는 한 양식이다. 알자는 초헌관을 모시고, 축관도 본 자리로 간다.
7) 辭神儀禮와 재화합하는 飮福禮 찬자의 “下匙箸(하시저)”에 집사자는 불천위부터 수저를 시접에 거두고, 뚜껑있는 제수는 모두 덮는다. 이어 합독(合櫝)하라고 지시한다. “主人以下辭神再拜(주인이하사신재배)”에, 참례자는 그 자리에서 재배한다. 집사자는 곧바로 불천위를 비롯한 5대조, 고조, 증조, 조, 부위의 각 위에 청홍의 도자(韜藉)의 감실문을 닫는다. 찬자는 “禮畢(예필)”로서 길사의 모든 의례를 마쳤음을 아뢴다. 초헌관과 종헌관 및 상례와 집례, 축관을 비롯한 참례자는 출입문을 나와 긍구당으로 오른다. 찬자는 홀로 중앙에서 감실을 향해 재배한다. 돌아서 긍구당으로 간다. 제집사자는 제수를 철상하고 분축한다. 5대조위는 사당 안의 고위 주독 가까이 동쪽 곁에 임시로 설치한다. 일가들은 종손께 기쁘고 경사스러운 날을 맞은 것에 대해 ‘축하드린다’며 인사한다. 종손은 웃음 핀 얼굴을 하며 ‘감사합니다’로 답례한다. 철상한 음식은 모두 도곡재사로 거두어 가 즉시 각 종류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전 참례자들에게 음복을 싸 준다. 메는 채소와 더불어 비빕밥을 만들어 국과 탕과 함께 점심을 대접한다. 식사에 앞서 복주를 하는데 탕과 국, 제사에 쓴 술을 한 잔 이상씩 나눠 마신다. 이 술을 마시는 의식을 복주한다고 말한다. 종손은 아직 젊어서인지, 밖에서 바쁘고, 상례, 종헌관과 축관, 찬자 등과 장로들은 급히 가지고 온 복주를 헌관들, 축관, 상레순서에 이어 연치 차례로 권한다. 긍구당 사랑방과 마루에 군데군데 놓인 교자상에 여럿이 둘러앉아 있다. 장로들은 음복을 소중히 여겼고 성복한 그대로 앉아 있다. 복주 및 음복을 중요한 한 순서로 여겨 옷을 미리 벗지 않는다. 선조와 조상이 드신 음식을 공유하는 데에는 마음과 몸가짐을 청결하고 단정하여 엄숙한 모습을 드러낸다. 복주를 권한 상례는 뭔가 이야기를 꺼낸다. 종가의 연사간과 다른 가문의 어른에게 실수한 의례를 바로잡아 넘기고 싶은 태세이다. “창홀하는 사람도 하마(벌써) 부복했는데 우리는 그래 하지만, 다시 절. 가가례로 안하는 집도 있고 우리가 하더라도 그만 넘어간다. 내가 우스운 얘기 하나 할까. 왕년에 갑인년 전에……”상례는 오늘 길제의 총감독으로써 어쩔 수 없는 변례를 상기시켜 양해를 바라려고 한다. 곧 의례의 과정을 누락, 실수함으로써 변칙에 대해 이해시킨다. 사람들은 큰 문제없이 잘 끝나서 별 의의는 품지 않는다. 종손은 후에 들어와 복주한다.
긍구당에서는 복반을 받아먹는 데까지 이 날의 길제와 참례한 연비간의 문안인사로 담소를 나눈다. 장년층, 50~60세대는 대개 마당의 차일이 설치된 곳에서 음복과 복주를 한꺼번에 한다. 그 외 간단한 음식을 내었다. 일가가운데 젊은층으로 도포와 유건을 쓰지 않은 사람은 긍구당에 오르지 않고 손님을 접대한다. 참례한 사람은 모두 150여명이다 음식을 분배하는 데는 많은 일손이 필요하고 시간이 걸린다. 여성들은 재실에서 바쁘고, 남성들은 고기음복을 싸느라 바쁘다. 이 집에서는 거의 여성들이 복반과 음복을 준비, 분배하고, 남성들은 이렇게 차린 상 나르는 일로 분주하다. 100여명이 되면 요즘은 집에서 손님을 감당하지 못한다. 일은 많은데 일손이 없고, 그들을 접대할 그릇이나 반상 등 구비기구가 없다. 그래서 식당에서 주문 받아 음식을 접대했다.
6. 5代祖 神主를 묻다 음복이 끝났고 웬만한 손님도 돌아갔다. 상례와 집례가 5대조위의 매주고유를 지시한다. 참례자는 종손과 둘 형제, 종부, 종손의 종형(68세)과 종형수 등이다. 설위(設位)는 사당 안의 최 동쪽, 고위 제상 옆, 동문 가까이에 설치를 해 놓았다. 이때 감실의 문을 모두 열어놓는다. 5대조위의 주독을 열어 놓았다. 제상에는 신주만 설치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아이고”곡을 한다. 종형은 ‘어이곡’을 했다. 곡하면서 큰절을 하는 데 남자는 사당 안에서 재배, 여자는 계단 위에서 4배를 한다. 종손은 주독을 모시고 중문을 나와 동계로 내려온다. 다른 참례자는 감실 문을 닫고 사당 문을 합문하고 계단을 내려와 뜰에서 신주가 사라질 때까지 곡으로 배알한다. 종손의 5대조 묘소는 예안향교 밑, 도산면 분천리 강가의 독짓골에 있다. 여기는 농암공의 선영도 함께 있다. 신주는 승용차로 모시고 간다. 장로들은 종손에게 매주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도자에 든 신주는 조선 종이(창호지)에 싸 매혼하고 주독은 종가로 도로 가지고 오라 설명한다. 장로들끼리도 주독을 가지고 와야 한다는 말과, 그대로 묘소에 묻는다는 의견이 엇갈린다. 종친회 회장은 종손의 종형에게 경험을 많이 하고 의례를 알고 있으니 마음이 든든하다고 격려한다.
신주를 개제할 때 오늘 봉사자의 5대조위는 현재 봉사자로 바꾸지 않고 부위가 된 분의 봉사명의로 길제를 지내고 매주한다. 그러므로 고위에는 ‘顯高祖考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府君神主(현고조고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부군신주), 孝玄孫龍九奉祀(효현손용구봉사)’로, 비위에는‘顯高祖妣淑人固城李氏神主(현고조비숙인고성이씨신주), 孝玄孫龍九奉祀(효현손용구봉사)’로 되어 있다. 고조위는 고조부와 현손의 관계를 지속한 채 사당에서 혈연적 관계와 사후의 조상으로 매듭짓는다. 4대봉사를 받아온 고조위는 5대손에 의하여 매주되면서 혼백이 다시 만나 산천으로 돌아간다. 종손의 3형제와 종형만 갔다. 그들은 묘소에서 주과포를 간단히 진설해 놓고 곡을 한다. 신주는 묘소 앞에 둔다. 종손은 분향을 하고 재배하며, 강신의 술을 따뤄 묘소 앞에 뿌린다. 모두 참신재배를 한다. 다시 술을 부어 진설한 상위에 두고 축관(종형)이 독축 고유를 한다. 4대 선조들이 모셨으나 이제 소목의 이치에 의하여 체백(體魄)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는 고유를 한다. 주인의 재배가 끝나면 그 신주는 주인의 오른쪽, 혼백의 왼쪽 아래에 구덩이를 파 흙으로 묻는다. 신주는 문종이로 싸고 세우지 않고 눕혀 묻는다. 이때 모두 곡을 한다. 곧 사신배례를 하고 철상을 하며 축문은 불사른다. 그리고 모두 묘소에서 되돌아온다. 주독은 가지고 왔다. 이러면 5대조에 대한 매주의례는 행해진 것이다.
<5대조의 매주 축문> 維歲次庚辰九月己丑朔十一日己亥五代孫性源 敢昭告于 顯五代祖考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府君 顯五代祖妣淑人固城李氏之墓今以親盡祗奉神主 將埋于墓所不勝感愴 謹以酒果用伸虔告謹告 유세차 경진년 구월 기축삭 열 하루 기해일에 5대손 성원은 감히, 오대조 할아버지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 부군과 오대조 할머니 숙인 고성이씨의 묘소에서 감히 고하옵니다. 이제 친진의 예가 끝나서, 장차 묘소에 신주를 묻으려 합니다. 슬픈 마음을 이길 수 없어 맑은 술과 여러 음식으로 백 번 절하고 고하옵니다. 흠향하소서.
요즘 사당을 축조하여 감실에 4대의 신주를 봉사하는 집은 잘 없고, 신주가 없더라도 4대의 봉사를 하지 않으려는 데 친진을 하는 사람들은 오죽이나 드물까? 대개 저절로 대진(代盡)이 되어 조매를 할 수 밖에 없다. 당사자들은 소목계서의 원칙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을 사유로 한다. 요즘 신주를 조매(祧埋)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조매란 4대 사지(事枝)를 하는 것이다. 4대의 신주를 섬기되 4대의 례가 끝나는 것을 대진(代盡)이라 한다. 대진이란 4대의 자손이 모두 없어진다는 말인데 4대가 모두 끝나려면 주사손을 비롯하여 8촌 내의 어느 누구도 모실 사람이 없어야 한다. 이럴 때 신주는 그 분의 묘소에 조매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지차집에서 그 신주를 자기집으로 모셔간다. 한 대의 대진을 하면 조매를 하게 된다. 요즘 대개 맏집의 4대 봉사가 끝나면 매주를 한다. 기차집에서 모셔가지 않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모실 만한 공간도 없다. 더욱이, 이와 같이 4대봉사 하는 것조차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주사손에서는 4대의 예가 끝나면 모두 묘소에 묻어 버린다. 이렇게 지차손의 집에서 모셔가지 않고 매주하는 것을 감히 조매라 할 수 없어 장주(藏主)라 한다. 이렇듯 매주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과정이 있으며 조매란 것이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지는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이제 조매와 장주에 있어서 매주하는 상태에서조차 선조에 대한 예우라 할까, 미안하다는 뜻일까 자손들의 태도가 나타난다. 즉 조매를 하지 못할 변란이 있어서 장주해야 할 경우는 신주를 묻을 때 세워서 묻는다. 그러나 집안 사람 모두에게 제사를 받은 조상은 이제 신주를 눕혀서 묻는다. 그러니 장주는 갈 곳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신주를 어쩔 수 없어 당신께 맡기듯 떠맡기는 것으로써, 감추는 것이나 다름없다. 7. 의례문화를 전승하는 농암선생 종가의 특징 담제가 끝난 후, 문중에서는 길제의 날을 논의하면서 초청 범위와 경비 등 여러 일들을 고려했다 한다. 초청은 대략 100여명 정도로 했다. 아울러 문중에서 그 대상을 선정하고 통지를 했다. 초청자는 대체로 안동 영천이씨 입향시조의 후손들로 국한했다. ‘過, 不及(과, 불급)’이라고, 행사에 인원이 너무 많아도 혼란스럽고 너무 적어도 행사가 초라해진다. 그 중용의 인원을 초청한 것이라고 할까. 이들은 분명히 불천위 종가의 이와 같은 길제에 참례하여 보고 들어 넓힌 견문을 그 지역의 족인들끼리 선현의 추모와 위업, 향념 등을 알리고, 익히는 기회로 삼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불천위의 의례는 그 자손들에게는 정신적 구심점이 되는데, 예전에 농암공 종가에서 길제 때 행한 의례를 각기 사손의 집에서는 같거나 엇비슷하게 지키려는 자세를 지니게 된다. 이로써 한 선조의 문화적 전통은 지역을 달리하여 세대로 전승한다. 이와 같은 큰 의례는 종가 자체로서는 힘들고 벅찬 일이나 후손들로서는 좋은 경험과 교육의 장을 얻고, 온 자손은 세대를 이어서 한 뿌리에서 나온 기둥을 다질 역사적 문화를 창출하는 지속성을 갖는다. 오후 5시경, 마무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종부는 행사가 끝난 이후에도 여러 가지 뒷일을 했다. 행사에 필요한 많은 그릇과 가제도구를 안동에서 모두 가져 왔기에 다시 챙겨가야 했던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종부의 몫이었다. 손님과 일가들은 일이 끝나기 바쁘게 가 버린다. 주로 농사일일까? 원거리 때문일까? 우리 안동대 학생들이 도와주기 때문일까. 아무튼 우리들이 그 뒷일을 도와주었다. 제수의 음복은 모두 종부가 한다. 수고가 많았던 사람은 행사 후 남은 귀한 것을 일일이 싸준다. 먼 곳에서 온 당내친은 고기와 떡 등 음복을 보다 많이 넣는다. 서원 동네(운곡동) 일가는 길제 음복이 끝나자 곧 안주인에게 과일 음복을 두루 나눠 주었고, 늦게 고기 음복을 집집마다 돌렸다. 예상보다 참례자가 많아 음복봉지는 손님이 모두 돌아갈 때 쯤 동이 났다. ‘길제는 평생에 한 번 볼 수 있으면 다행이다’는 말이 있듯이, 모두 길제의 음복을 귀하게 여겨 싸 가지고 갔던 것이다. 술과 안주류는 마을 일가들의 뒷풀이 몫으로 두었다. 종부는 집에 빈 그릇만 가지고 온 것이다. 종부는 메밥 쌀을 대두 3되 했는데, 음식맡은 부인들이 모두 점심 음복으로 했다고 한다. 도산면 온혜식당에서 주문받아 해 온 점심으로는 참례자에게 모두 접대할 수 없을 뻔하였다. 종손은 말하길, 유가의 살림살이는 너무 적게 준비해도 야박하고 너무 많이 준비하는 일이란 없는 법이다. 그것은 낭비이다. 모자랄 듯하면서 약간 여유있게 하여 알맞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 큰 일은 음식 하나만 봐도 적절하였다. 식당의 음식은 적절했으며, 맛도 괜찮았고 반찬도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유가에서는 예전부터 먹지 못 하는 것을 보이기 위해 즐비하게 차려 놓는 것을 허식과 위신이라 하면서 삼간다. 종손은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나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와 반대로, 더욱이나 모자라서는 당연코 안되는 일로 여겼다. 돌아오는 길에, 종손과 종부는 안도하는 심정을 가진다. 종손은 길제를 진행할 때 처음에는 두 사람(종손과 종부)이 절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막상 닥치니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와 같이 문중에서 치르는 행사를 아무런 불란 없이 무사히 마치게 되어 그런 다행이 없다 한다. 애초 의도한 대로 문중의 장로들과 일을 맡은 여러 어른들이 함께 합력하여 화목하게 길제를 지내고 서로 편하게 영천이씨 농암공 후손들의 삶의 깊이를 체험하고 돌아갔기 때문이다. 종손에게 안동 유교문화가 바야흐로 전국은 물론 세계로 알려지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떤 식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 물어볼 기회가 있었다. 이에 대해 종손은 우선 의도적으로 알리는 일은 원하지 않았다. 옛부터 선조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과장과 허식으로, 남이 알아주길 기대하는 것을 금물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단지 자연스럽게 알려지길 원하는 듯하다. 알려지는 것은 막을 길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평소 누가 알아주든지 모르든지 소신 있는 바를 생활의 자세로 여겨온 것이다. 일이 닥칠 때마다 자신과 집의 사정과 형편을 따라 있는 그대로 대소사를 행하고 치루어온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큰 일을 대비해 항상 조금씩 준비하고 갖추어 온 것을 강조한다. 급하게 서두르거나 지나치게 잘 하려 할 때 이제까지 지켜온 가통의 법도를 그르칠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또 없어지면 어쩔 수 없이 그때 세월의 풍속을 따라 이어갈 것으로 보고 있다. 유가들이 살아 있는 한, 삶 속에서 이어지는 의례문화는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그대로 나타날 따름이라는 생각뿐이다. 도중에, 1톤 포토로 여러 장비를 운반하는 일가 어른을 만났다. 종손과 종부는 번갈아가면서 ‘바쁜데 너무 수고한다며 나중에 식사나 한끼 하면서 회포를 풀자’는 이야기로 헤어진다. 여기서 오늘 길제의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다시 읽을 만 했던 것이다.
8. 吉祭時 笏記 예시 이날 사용한 홀기의 문서는 다음과 같다.
<笏記> 主人以下執事者盥洗詣祠堂○(주인과 여러 집사자는 관세위의 세수대야에 손을 씻고 사당에 들어가 정위치에 서시오.) 敘立○(참례자는 전원 정한 위치에 도열하시오.) 主人升自阼階○(주인은 알자의 안내를 받아 동계로 하여 불천위 전에 오르시오.) 焚香○(향탁 앞에서 향로에 세 번 향을 넣고 불을 지피시오.) 告辭○(오늘 의례의 사유를 아뢰시오.) 奉主由西階○(여러 신주를 받들어 서계를 따라 내려오시오.) 主人前導至廳舍○(주인은 앞서서 여러 신주를 인도하여 청사에 오르시오.) 置主于座○(각기 교의에 신주를 차례대로 설치하시오.) 主人以下序立○(주인과 봉독 집사는 제자리에 돌아가시오.) 參神再拜○(참사자 전원은 불천위 선조와 5대의 신주에 두 번 절하시오.)
<行降神禮>(강신례를 행합니다.) 謁者引初獻官詣香案前○(알자는 초헌관을 모시어 사당의 향안 앞에 이르게 하시오.) 跪○(초헌관은 꿇어앉으시오.) 三上香○(향로에 향을 3번 넣고 불을 지피시오.) 執事者取盤盞○(집사자는 불천위 제삿상의 술잔을 들어내시오.) 斟酒于盞○(잔에 술을 가득 따르시오.) 跪進于獻官○(초헌관에게 나아가 꿇어 앉으시오.) 獻官受之灌于茅上○(초헌관은 잔을 받아 모사 위에 부으시오.) 以盤盞授執事者○(잔반을 집사자에게 건네시오.) 執事者受之奠于故處○(집사자는 잔반을 받아 본래 자리에 두시오.) 初獻官俛○(초헌관은 고개를 숙이시오.) 伏○(엎드리시오.) 興○(일어나시오.) 少退再拜○(조금 물러나 두 번 절하시오.) 引降復位○(알자는 초헌관을 모시어 제자리로 가시오.) 執事者陳設○(집사자는 각 위의 제사상에 進饌을 진설하시오.)
<行初獻禮>(초헌관례를 행합니다.) 謁者引初獻官詣一位香案前○(알자는 초헌관을 모시어 불천위 향안 앞에 나아가시오.) 跪○(꿇어앉으시오.) 執事者斟酒○(집사자는 잔에 술을 가득 채우시오.) 跪進于獻官○(꿇어앉아 잔을 초헌관에게 건네시오.) 獻官受之奠爵○(초헌관은 잔을 받아 신위께 드리시오.) 執事者受之奠于故處○(집사자는 그것을 받아 본래 자리에 두시오.) 初獻官少退跪○(초헌관은 조금 물러나 꿇어앉으시오.) 祝取版獻官之左跪○(축관은 축판을 가지고 초헌관의 왼쪽에 꿇어앉으시오.) 主人以下皆跪○(주인과 사당 뜰의 참사자는 모두 꿇어앉으시오.) 祝讀祝文○(축관은 축문을 읽으시오.) 初獻官再拜○(초헌관은 두 번 절하시오.) 次詣諸位前獻祝如初○(다음 초헌관 축관은 각 설위 앞에 나아가 불천위에서 한 것과 같이 따르시오.) 引降復位○(알자는 초헌관을 모시어 제자리에 가시오.)
<行亞獻禮>(아헌관례를 행합니다.) 贊引引亞獻官詣一位前(찬인은 아헌관을 모시어 불천위 제삿상 앞에 나아가시오.) 跪○(아헌관, 주부는 그 자리에 끓어 앉으시오.) 執事者斟酒○(집사자는 제사상의 잔반에 술을 가득 따르시오.) 跪進于獻官○(꿇어앉아 주부에게 잔반을 건네시오.) 獻官受之奠爵(아헌관은 잔을 받아 선조에게 드리시오.) 執事者受之奠于故處○(집사자는 헌관의 잔을 받아 본래 자리에 두시오.) 亞獻官少退再拜○(아헌관은 조금 물러나 두 번 절하시오.) 次詣諸位獻爵如初○(다음의 여러 대 신위에 나아가 처음에 한 것과 같이 헌작하시오.) 引降復位○(찬인은 아헌관을 모시고 제자리로 가시오.) <行終獻禮>(종헌관례를 행합니다.) 贊引引終獻官詣一位前○(찬인은 이제 종헌관을 모시어 불천위 제삿상 앞에 나아가시오.) 跪○(그 자리에 꿇어앉으시오.) 執事者斟酒○(집사자는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워 세 번 조금씩 퇴주기에 부으시오.) 跪進于獻官○(채운 잔반을 꿇어앉아 종헌관에게 건네시오.) 獻官受之○(종헌관은 잔반을 받으시오.) 祭酒奠爵○(술을 신위께 드리는 의식을 하시오.) 執事者受之奠于故處○(집사자는 잔반을 받아 본래 자리에 두시오.) 終獻官少退再拜○(종헌관은 조금 물러나 두 번 절하시오.) 次詣諸位獻爵如初○(다음 여러 대 각 위에도 처음에 한 것과 같이 헌작하시오.) 引降復位○(찬인은 종헌관을 모시어 제자리로 오시오.)
<侑食>(여러 조상께 음식을 권합니다.) 執事者添酌諸位○(집사자는 여러 대의 각 위에 술을 조금씩 따뤄 가득 채우시오.) 扱匙正箸○(메에 숟가락을 자루가 서쪽으로 가도록 꽂고 젓가락을 바로잡도록 놓으시오.) 闔門○(집사자는 문밖으로 나오고 사당문을 닫으시오.) 主人以下皆俯伏○(주인과 참사자는 모두 제자리에 부복하시오.) 祝三噫歆○(한 식경 후, 축관은 사당문 앞에 나아가 북향하여 세 번 기침을 하시오.) 啓門○(집사자가 사당문을 열고 참사자는 모두 일어나시오.) 進茶○(숭늉을 가지고 와 각기 국그릇에 옮겨 담으시오.) 點茶○(숟가락으로 메를 조금씩 세 번 떠 숭늉에 개시오.) 在位者皆肅竢少頃○(참사자 모두 그 자리에서 엄숙히 머리를 숙여 잠시 기다리시오.)
<受胙>(주인이 음복례를 합니다.) 謁者引初獻官詣一位前,香案○(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불천위의 향안 앞에 모시십시오.) 跪○(초헌관은 꿇어 앉으시오.) 祝詣一位前○(축관은 그 신위 앞으로 나아가시오.) 擧酒盤盞○(가득 담긴 잔반을 드시오.) 跪進于主人之右○(주인의 오른쪽에 꿇어 앉아 잔을 건네시오.) 主人受之祭酒○(주인은 잔을 받아 신위에 드리시오.) 啐酒○(그 술을 조금 맛 보시오.) 祝取匙並盤抄取諸位之飯各少許○(축관은 숟가락과 메뚜껑을 들고 여러 대 각 위의 메를 조금씩 덜어내시오.) 奉詣主人之左○(축관은 덜어낸 메를 주인의 왼쪽에 나아가 전하시오.) 嘏于主人讀嘏辭○(축관은 주인에게 축복할 가사를 읽으시오.) 主人置酒于席前○(주인은 초석 앞에 술을 두시오.) 俛○(고개를 숙이시오.) 伏○(엎드리시오,) 興○(일어나시오.) 再拜○(두 번 절하시오.) 跪○(꿇어앉으시오.) 受飯嘗之○(메를 받아 조금 맛을 보시오.) 實于左袂○(왼쪽 소매에 메를 싼 청색주머니를 꾸리시오.) 取酒卒飮○(술을 받아 모두 마시시오.) 執事者受盞自右受飯自左○(집사자는 술잔을 받아 오른쪽에 두고 메를 받아 왼쪽에 두시오.) 主人俛○(주인은 고개를 숙이시오.) 伏○(엎드리시오.) 興○(일어나시오.) 立於東階上西向○(뜰의 동계 위에서 서향하여 서시오.) 祝立於西階上東向告利成○(축관은 뜰의 서계 위에서 동향하여 서 주인에게 읍하며 “利成(법도대로 다 이루었습니다)”이라 아뢰시오.) 祝降復位○(축관은 계단을 내려와 제자리로 가시오.) 執事者合飯蓋○(집사자는 여러 위의 각기 제수 뚜껑을 덮으시오.) 下匙筋○(숭늉에 놓인 숟가락과 음식에 놓인 젓가락을 거두어 시접그릇에 놓으시오.) 辭神○(조상을 보내는 예를 하시오.) 主人以下皆再拜○(주인과 참사자는 다 두 번 절하시오.) 奉主歸祠堂○(신주를 받들어 사당으로 뫼십시오,) 禮畢○(예식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참고 문헌☜
◦權璉夏(1813~1896), 『상변찬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관혼상제」, 『민속대관1』,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0. ◦김시덕, 「상례, 누구를 위한 의례인가?-상례절차의 구조분석을 중심으로-」, 『민속학연구』(제7호), 국립민속박물관, 2000. ◦김춘동, 「한국예속사」, 『한국문화사대계Ⅳ』,(풍속•예술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편). ◦윤천근, 영천이씨 소윤공파종가, 안동, 문화모임 사랑방. ◦이광규, 『한국인의 일생』, 형설출판사, 1985. ◦이남식, 「길사」, 『경북예악지』(경상북도•영남대학교), 영남대출판부, 1989. ◦이성원, 「안동의 집회문화」, 『안동문화』(제7집), 안동문화원, 1999. ◦李縡(1680~1746), 『사례편람』 ◦장철수, 『한국전통사회에 있어서 관혼상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 「충청도, 경상도」,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제18책, 예절편), 문화공 보부 문화재관리국, 1987. ◦------, 「길사」, 『경북북부지역의 전통문화』,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1988. ◦------, 「예서」, 『금릉민속지』, 금릉군, 1991. ◦------, 「주자 『가례』에 나타난 사당의 구조에 관한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한국의 관혼상제』, 집문당, 1995. ◦주희(1130~1200), 『주문공가례』, 아름출판사, ◦한중수편저,『사례편람 신•구 관혼상제례대전』, 명문당,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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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길제 보고서는 문헌자료를 검증한 글이 아니다. 현지조사 당시 안동에서 행해지는 실제의 의례를 거의 그대로 기술한 민속지 형식의 글이기 때문에 의례가 다소 예서의 내용에 맞지 않을 수도 있음을 밝혀둔다. 아울러 본 보고서가 자료로 나오기까지 도움을 준 분들께 이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1) 승중(承重)일 경우 5대나 6대도 된다. 이 보고는 지난 1987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일어난 사례이다. 진성이씨 노송정 종가에서는 종손이 먼저 친상을 당하였다. 이후에 조고의 상을 입었다. 길제 당시 손자는 선친을 대신하여 주인이 되어 조고위와 고비위 길제를 지냈다. 종손은 자신의 5대와 6대를 동시에 매주하는 일을 당한 것이다.(이남식 「길제」 경북예악지, 영남대출판부, 1989, 참조)
2) 종가는 물론이고, 안동에서는 아직도 주손과 사손의 집에서는 사당이나 감실을 설치해 있는 집이 많다. 설령 사당에 모실 수 없더라도 신주만은 집안에 벽감으로나 그들의 맞는 편의 조건으로 지키고 있는 집이 많이 남아 있다. 사당과 신주의 소멸은 한국전쟁으로 어쩔 수 없이 집에서 떠나도록 했다. 그래도 3년상에 따른 길제를 사손이나 기차의 집에서도 행하는 것을 종종 접한다.
3) 겉은 명주로 된 천이고 속은 빳빳한 심을 넣어 신주를 덮을 크기로 만든 함이다. 고위는 자줏빛(紫)계 색이고 비위는 화려한 붉은 빛(緋)계의 색상이다.
4)증조모의 친정곳이며 종손 조부의 외그는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하계에 사는 진성이씨로 종손가이다.
5)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박실의 전주류씨로 종손 선고의 외가이며 조비(祖妣)의 친정곳이다.
6) 현재 안동시 송천동에 종택이 있는 흥해배씨 임연재(臨淵齋, 裵三益, 1534~1588) 종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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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상기글은 쿠캔2000년11월호에 실려있는 이연자님의 글에서 올겨온 것입니다.출처를 진작 밝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글을 옮길 당시 본인의 바쁜 정황때문에 출처를 미처 밝히지 못한점 이연자님과 독자여러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9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