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중 김충현 선생의
서집에서
석야 신웅순
1982년 가을 일중 김충현 서집을
구입했다.
일중의 화갑
기념 서집이다.
벌써
30년이 넘었다.
오랜 세월이
스쳐 이 서집도 고색창연해졌다.
필자는
70년대 초부터 서예 공부를
시작했다.
그 때 처음
접한 책이 일중 김충현 선생의 『일중 한글서예』였다.
당시엔 별다른
서예 교재가 없었다.
필자는 그
책을 스승 삼아 공부한 것이 필자의 서예 시발점이 되었다.
저서로는
『우리글씨
쓰는 법』,『서예집성』,
『국한서예』,『근역서보』,『일중
한글서예』
등 이
있으니 서예집성과 국한서예는 역대의 필적을 망라하여 동일본에 국한문을 실은 효시가 되어 서학도의 진보로 각본,
쌍구본에
의지한 후진들에게 등불을 비춰 준 학서 결정판이 되었다.
-
권창륜의
‘일중
선생의 생애와 예술’에서
일중 선생은 현대 한글서예를 개척한
일세대 서예가이다.
한글서예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당시 선생의 서책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필자도 붓을
든지 어느덧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늘에야 일중 김충현 서집을
꺼냈다.
지난날
스승처럼 모시고 공부했던 책이 뿌연 먼지로 덮혀 있었다.
소중히
간직해왔던 서책이라 이제금 펼쳐 보기에 미안한 생각이 든다.
한문을 제외하고
일독했다.
텍스트는
정읍사,관동별곡,고시조,시,
소학,동동,정과정,노계가,수연시,비문,사모곡,농가월령가,상춘곡,충무공순신기념비,월인천강지곡,백호임제선생기념비
등이었다.
이를 궁체
현대 한글정자,
현대 한글
흘림,
그리고 고문
궁체 흘림,
고체,
일중
한글체,국한문혼용체 등으로
썼다.

고시조,
1970년
고시조를 현대 한글 궁체 흘림으로 쓴
1970년의 작품이다.
필자는 바로
70년 대초 이 서체를 스승 삼아
공부했다.
당시
이철경.
정주상,
이미경 선생님
등의 서책도 있었으나 궁벽한 시골에서는 쉽게 접해볼 수 없는 책들이었다.
늘 저만치
계셨던 외경스러운 분들이었다.
한글 서예
공부하기가 그만큼 어려웠다.
정주상
선생님의 월간서예가 창간되기도 했으나 이도 얼마되지 않아 폐간되고 말았다.
이들은 현대 궁체 서예사의 산
증인들이었다.
당시 촌뜨기
필자로서 이런 스승을 만나 글씨 공부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이 선생님들의
2,3대 제자들에 의해 반세기동안 현대
궁체의 외연은 엄청나게 넓어졌다.
선생님들의
한글 사랑 덕분이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한문에 밀렸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말에 수장되었던 한글이 현대에도 한문과 영어에 밀려 제자리를 찾고 있지 못하고 있어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
이 때 혜성
같이 나타나 서예문화를 개척한 분이 바로 일중 김충현 선생이다.
일중 김충현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안동 호는 일중이다.
김창집의
6형제 중 막내 김창립의
후예이다.
일가이자
조부의 절친이었던 서화가 김용진으로부터 서예를 익혔다.
1942년 한글 서예 학습서인
국문서법연구서를 완성한 이래로 한글 서예 보급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김충현의
국문서법연구서 정인보 서문,1942년
훈민정음
처음 지으실제 엄과 혀와 입시울과 이와 목궁게의 그대로와 및 변화하는 것을 형상하 사 성음의 미묘함을 눈 앞에 나타나게 하시니 이는 세종
예성으로 인류문화 역사에 처음 비최오 신 광명이라 반포전 용비어천가가 나고 반포한 뒤 여러 가지 서적 번역이 있어 지금에 전하는 바 오히려
몇몇을 세이게 되니 훈민정음을 비롯하야 월인천강지곡을 날로한 석보상절 같은배 가장 두렷하니 문짜 예롭고 장중하야 태를 아니 보이고 규구로만 쓰온
전차로 저 은 주 고전과 같아 부르고 빤 획이 없고 삐치고 어슷하는 모양을 만드지 아니하얐더니 나려오며 여러 손을 지나 비 로소 필법이 생기여
정자 흘림의 두 체되니 비컨대 진 한 이래 예서와 해초 있게 된 것과 같다.
대내에서
쓰오시던 체법이 특히 단정 엄중하야 자미 가운데 예스러움을 가지니 이른바 궁체라 우 리 젊은 벗 김충현이 귀주 고가의 후손으로 이 체를 배워
이미 세상에 알리웠거니와 이제 또 그 쓰는 법을 적어 이 책을 만드니 이로 조차 널리 퍼짐을 볼지라 오호라 글자는 선왕 어제요 필법 은 대내
유전하온 고체라 서를 쓰며 감회를 이기지 못하노라 -
임오
팔월 이십일 뎡인보
임오년은 1942년이다.
김충현이 지은
국문서법연구서 정인보의 서문이다.
이 때 일중은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등의 옛
판본체에 전서와 예서의 필법을 가미한 서체를 선보였다.
일중만의
새판본체 창안이었다.
이는 궁체에만
갖혀있던 한글 서체 영역을 확장시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정인보는 이를
‘고체’라고 명명했다.
이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판서체에
한문의 예전서의 옷을 입혀 새로운 아름다운 한글 고체를 탄생시켰다.
지금의 현대
한글서체들이 다양해지고 다채로워진 것은 선생의 덕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생각해보면
일중은 한글 미래를 내다본 혜안의 서예가가 아니가 생각된다.
우리
글자로 현판도 써야 하고 비문도 새겨야 하며 작품도 해야 한다.
연약해
보이는 작은 글씨 위주의 ‘궁체’로만
만족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고체’는
글자의 크기를 막론하고 필력을 구사할 수 있으니 이 ‘체(體)의
개발과 무궁한 발전이 기대되는 바이다.
-일중
김충현 지은 "예(藝)에
살다
아래는 현대문
고체이다.

1978년 작
또한 김충현은 궁체를
연구,
한글 서예의
보급에도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1947년에
쓴 「유관순 기념비」는 해방 이후 최초의 한글
비문으로,
이후의 한글
비문 제작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작품으로
「윤봉길 열사
기의비」(1949),
「백범 김구 선생
묘비」(1950),
「사육신 묘비」(1955),
「4.19혁명 기념탑」(1960),
「탑동공원 사적비」(1967),
「삼국통일 기념비」(1977),
「인촌 김성수 선생
묘비」(1989)
등이
있다.
저서로
『우리 글씨 쓰는
법』,
『우리 글씨체』,
『서도집성』,
『근역서보』,
『일중 김충현
서집』
등이
있다.
1980년 작 비문의 궁체 정자와 변형된
궁체 흘림의 서체 자료이다.

비문 1980년 작

海於壽詩,
1966년
작
일중 선생의 화갑 서집의 첫장을
열었다.
거기엔
‘임술년 가을 석야
신웅순’
글씨가 써
있었다.
석야 장서
표시였다.
일중 선생의
글씨를 스승 삼아 써서였는지 당시의 글씨가 선생의 글씨와 많이 닮아있다.
감회가
새롭다.

1982년도
서책 안 필자의 서명
봄이 오고 있다.
바람과 햇살이 엎치락
뒤치락한다.
지금쯤 소리없이 봄꽃들이 나드리 준비를 할
것이다.
걸음마를 배우고 있을 것이다.
이제금 김충현 선생의 서집 서장을 열었다.
선생 이후 반세기를 넘는 동안 많은 한글
서예가들의 궁체 자료와 고체 자료들이 축적되어 있다.
이제 누군가의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
서예문화,2016,
2월호,
18,19쪽.
첫댓글 감사합니다 선생님...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