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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법신은 형상이 아니다.
참답고 여여한 진리의 본체는 형상이 아니요 생멸도 아니다. 법신은 어떠한 경우라도 상일 수가 없다. 비록 상을 통해서 법신을 유추해 알려고 하더라도 또한 옳지 않다. 상을 통해서 법신을 알려고 한다면 전륜성왕도 진리의 당체인 여래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여래는 스스로 “외형적인 모습으로써 나라고 하거나 설법의 모습으로 나라고 여기는 자가 있으면 그는 사도를 행하는 사람이다. 여래는 꿈에도 보지 못한 자다.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라고 했다.
법신은 모양이 아니나 늘 참되고 항상함을 드러낸다. 들에 날아다니는 새도, 청정한 산빛도 동일한 반야의 광명·본래의 면목을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므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도 고향에 돌아가리라.
제26.법신비상분(제이십육 신체적 특징을 떠난 여래)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 관여래 부.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觀如來 不.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서른두 가지 신체적 특징으로 여래라고 볼 수 있는가?”
수보리언. 여시여시. 이삼십이상 관여래.
須菩提言. 如是如是. 以三十二相 觀如來.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서른두 가지 신체적 특징으로도 여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언. 수보리 약이삼십이상 관여래자 전륜성왕 즉시여래.
佛言. 須菩提 若以三十二相 觀如來者 轉輪聖王 卽是如來.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보리여! 서른두 가지 신체적 특징으로도 여래라고 볼 수 있다면 전륜성왕도 여래겠구나!”
수보리 백불언. 세존 여아해불 소설의 불응이삼십이상 관여래.
須菩提 白佛言. 世尊 如我解佛 所設義 不應以三十二相 觀如來.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서른두 가지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는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이시 세존 이설게언
爾時 世尊 而說偈言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형색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면 삿된 길 걸을 뿐 여래 볼 수 없으리.”
제27. 무단무멸분 無斷無滅分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일체상이 끊어져서 텅 비었으나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단멸이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아니다. 여래가 상호를 쓰지 않음으로써 보리를 얻었다고는 생각하지 말라. 여래는 모든 법이 텅 비어 없음만을 말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집착하기 좋아하는 중생들은 말만 떨어지면 거기에 매달려 병을 만든다. 그래서 말을 할 수도 없고 아니할 수도 없다. 여래를 보고 보리를 얻으려면 무상무주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상이요 무주라고 집착하면 그 또한 상인 것을. 여래는 일찍이 상을 긍정한 적도 부정한 적도 없었느니라.
제27. 무단무멸분(제이십칠 단절과 소멸의 초월)
수보리 여약작시념 여래불이구족상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須菩提 汝若作是念 如來不以具足相 故得阿褥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여! 그대가‘여래는 신체적 특징을 원만하게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수보리 막작시념 여래 불이구족상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須菩提 莫作是念 如來 不以具足相 故得阿褥多羅三邈三菩提.
수보리여! 여래는 신체적 특징을 원만하게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말라.
수보리 여약작시념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
설제법단멸 막작시념
須菩提 汝若作是念 發阿褥多羅三邈三菩提心者
說諸法斷滅 莫作是念
수보리여! 그대가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의 마음을 낸 자는 모든 법이 단절되고 소멸되어 버림을 주장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
하이고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 어법불설단멸상
何以故 發阿縟多羅三邈三菩提心者 於法不說斷滅相
왜냐하면,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의 마음을 낸 자는 법에 대하여 단절되고 소멸된다는 관념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26분 법신비상분(신체적특징을 떠난 여래) ,제27분 무단무별분(단절과소멸의 초월)
제26 분, ‘法身非相分(법신비상분)’
법신은 형상이 아니다
‘ 法身非相分(법신비상분)’, 법신은 상이 아니다, 형상이 아니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수보리 어의운하
須菩提(수보리)야 於意云何(어의운하)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可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不아
가이삼십이상 관여래부
可以三十二相(가이삼십이상)으로 觀如來不(관여래부)아,
可以三十二相(가이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觀(관)’하는가?
저 앞에서 ‘견여래부아’라 그랬어요. 볼· ‘見(견)’자, 여기는 볼· ‘觀(관)’자가 하나 더해지는데,
‘見(견)’은 사물을 직접 보는 것을 ‘見(견)’이라고 한다면은, 여기서 ‘觀(관)’은 사물을 통해서 그 이면을 보는 것, 관찰이잖아요, 관찰, 관조라고도 하고,
‘觀(관)’자는 이제, 육안을 통해서 그 이면을 이해하는 것,
‘見(견)’은 바로 육안으로 현상을 보는 그 자체,
그래서 여기도 이제,
須菩提가 言하사대 如是如是하니이다 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니이다
수보리 언 여시여시 이삼십이상 관여래
須菩提(수보리)가 言(언)하사대, 수보리가 말하기를
如是如是(여시여시)하니이다, 예, 그렇습니다.
뭐, 부처님도 외양을 통해서 부처님의 정신세계를 충분히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정도는 누구든지 생각할 수가 있죠.
무슨 뭐, 身言書判(신언서판)이라고, 사람 얼굴보고, 외형보고 사람 내면 대강 짐작하듯이, 부처님 32상보고 그것을 통해서 부처님의 정신세계도 어느 정도 아, 저 정도 생겼으면은, 참 저 정도 근사한 모습, 그리고 행동거지가 저 정도라면 그 부처님 정신도 참, 어지간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말이죠. 如是如是(여시여시)하니이다,
그러니까
以三十二相(이삼십이상)으로 觀如來(관여래)니이다,
이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봅니다.
그러니까,
佛言하사대 須菩提야 若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者인댄 轉輪聖王이 卽是如來로다
불언 수보리 약이삼십이상 관여래자 전륜성왕 즉시여래
佛言(불언)하사대 須菩提(수보리)야 ,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수보리야!
若以三十二相(약이삼십이상)으로 觀如來者(관여래자)인댄
이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관한다면은,
삼십이상을 통해서 여래의 이면을 관찰할 수 있다면은
轉輪聖王(전륜성왕)이 卽是如來(즉시여래)로다,
전륜성왕도 역시 32상을 갖췄으니까 즉시 여래이라,
‘그럼 전륜성왕 32상을 통해서도 그러면 그 사람보고도 여래라고 볼 수 있겠네’ 이런 말이라. 그런 생각해보니까 수보리가 잘못 생각한 거죠.
그래, ‘如來(여래)’라고 하는 것은, ‘如來(여래)’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엄격하게 말하면은, ‘見聞覺知(견문각지) 卽是佛(즉시불)’이야.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것, 날씨가 춥고, 덥고, 배가 고프고, 밥 찾아먹을 줄 알고 하는 이 능력이 곧 부처라.
그거는 형상하고 아무 상관없어. 어린 아이도 할 줄 알고, 노인도 할 줄 알고, 남자도 할 줄 알고, 여자도 할 줄 알고, 동쪽사람도 하고, 서쪽사람도 하고, 흑인도 하고, 백인도 하고, 다해. 형상하곤 아무 관계없어.
그런데 형상을 통해서, 만약에 백인이라고 하는 형상을 통해서, ‘아, 그 사람 어떻게했구나’, 그러면 그럼 흑인에게는 해당이 안 되잖아요.
동양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그러면 서양사람에게도 해당이 안 되잖아.
여기 전륜성왕이야기하고도 똑 같은 거예요.
이‘見聞覺知(견문각지)하는 그 본성’, 우리가 ‘佛性(불성)’이니, ‘眞如(진여)’니 하는 그런 표현을 쓰는데, 그 본성이야 말로 그게 진짜 부처라!
‘善惡(선악)’하고는 관계없어요. 선한행위하는 사람, 세상에 천지야. 그런데 그걸 보고 부처라 하지 않잖아요. 아주 뭐 보살이다, 점잖다, 훌륭하다, 이런 표현을 하지마는 진짜 ‘부처’라고는 보지 않아.
뭐 우리 속담에는 뭐 ‘부처님 가운데 토막’ 이런 말을 씁니다.
사람이 아~주 선량하면은 ‘아 그 사람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다’이것도 역시 잘못 이해하는 거야. 진짜 부처는 선한 행하고 관계없어요.
점잖은 것 하고 관계없어요. 점잖하고 선한사람은 세상에 불교하고 관계없는 사람도 천지야. 저기 인도에 ‘마더 테레사’ 같은 사람들은 천하에 관세음보살 아닙니까, 행이. 그렇지만 그를 보고 누가 부처라 합니까? 아니거든요.
부처라고 하는 차원은 우리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닙니다.
선악하고 관계없고, 생긴 모습하고 관계없고, 그래서 선불교적 차원에서 우리가 불교 궁극적 안목으로 볼 때, ‘見聞覺知(견문각지)’하는 것은 ‘즉시불’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하는 그 능력,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똑 같습니다. 여기는. 그러니까 ‘不思善(불사선), 不思惡(불사악)’이야.
선도 악도 그 자리엔 해당이 안 된다는 뜻이지요. 진짜 그 자리에는 선악이 해당되지 않는 자리다. 그러니 ‘불사선, 불사악하라’는 거지요.
‘선에도 걸리지 말고 악에도 걸리지 말라.’
우리가 그렇게만 이제 이야기하면은 또 도덕적인 그런 입장을 너무 등한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또 그러한 것과 다 도덕적으로 아주 뛰어난 그런 모습도 다~ 포함한, 또 그야말로 ‘부처’도, 쌍차쌍조 차조동시로 이해해야 된다. 궁극적으로 ‘부처’란 것도 쌍차쌍조 차조동시로 이해해야 된다. 중도정견을 이해해야 되고, 사람도 중도정견으로 이해해야 되고, 종이 한 장도 중도정견으로 이해해야 되고, (종이 한 장을 들어 보이시면서) 종이 한 장이 이게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또 안 있고, 또 안 없고... 그런 면들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근래에 뭐, 완전히 삼당(三黨)이 전부 여인천하다, 어제부터 여인천하란 말이 신문에 막 나는데, 사실은 남자도 여자도 그게 일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구요.
남자도 여자도 그게 꼭 치우친 소견으로 볼 일이 아닌거라, 절대로.
우리 구세대에는 ‘그래도’또,‘그래도’라고 하는 그런 말이 뒤따르는 거라.
그게 아직도 덜 떨어져서 그런 거야. 덜 떨어져서 그런 거라.
아닌 거예요. 불교적인, 제대로 된 불교안목, 불교의 중도적인 안목으로 보면은 남자가 할 일 따로 있고, 여자가 할 일이 따로 있고, 절대 아니란 겁니다.
결코 아니란 것입니다.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고, 가정에서도 남자 일, 여자 일, 이거 나누는 거 이제는 아주 촌놈이 되는 거야.
이 시대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또, 불교의 입장으로서 더욱 더 그렇고. 그게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니까.
그 고정되어 있는 것을 ‘치우친 소견’그래요. 그래 이거는 치우친 소견을 다 부정하는 것입니다. ‘쌍차쌍조 차조동시’라고요.(?)
그래, 치우친 소견은 절대 금물이라는 것입니다.
須菩提가 白佛言하사대 世尊하 如我解佛所說義컨댄 不應以三十二相으로 觀如來니이다
수보리 백불언 세존 여아해불소설의 불응이삼십이상 관여래
須菩提(수보리)가 白佛言(백불언)하사대, 수보리가 부처님께 고하여 올리되,
世尊(세존)하 , 세존이시여!
如我解佛所說義(여아해불소설의)컨댄,
부처님 말씀 듣고 보니까,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 뜻을 이해하는 거와 같아서는,
不應以三十二相(불응이삼십이상)으로 觀如來(관여래)니이다,
응당히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관찰할 수가 없겠습니다.
그러니까,
爾時에 世尊이 而說偈言하사대 若以色見我어나 以音聲求我하면 是人은
이시 세존 이설게언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
行邪道라 不能見如來니라
행사도 불능견여래
爾時(이시)에 世尊(세존)이 而說偈言(이설게언)하사대,
제 삼 사구게죠. 금강경에 네 개의 사구게가 있는데 이것은 제 삼 사구게.
‘若以色見我(약이색견아)어나 以音聲求我(이음성구아)하면 是人(인)은 行邪道(행사도)라 不能見如來(불능견여래)니라 ’,
형상에 치우치거나, 부처님의 설법소리에 치우쳐서 그것을 여래다, 또는 부처님이다 하면은 그 사람은 부처님을 이해를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도를 행하는 것이다 말이야, 사도를.
‘是人(인)은 行邪道(행사도)라 ’사도를 행하는 것이니라.
‘不能見如來(불능견여래)니라, ’능히 여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견문각지가 즉시불이야.
형상이나 음성이 있는 게 아니야.
우리 내면에서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활발발하게 작용하고 있는, 사랑할 줄 알고, 미워할 줄 알고, 시기 질투할 줄 알고, 처~ 불쌍한 사람보면 불쌍한 마음, 자비심이 또 나기도 하고, 그러면 뭔가 보살심이 일어나서 정~말 보살일을 열심히 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도 있고, 그 반대로 전혀 얼토당토 않는 생각도 할 줄 알고 하는 그 근원자리, 그 본성자리, 이것만이 답이에요.
뭐, 뭘 해가지고 얼마만치 쌓는다, 뭘 획득한다 하는 것은 이건 답이 없습니다.
본래 부처자리, 그것만이 답이란 것입니다. 그거 제대로 이해하면요 또 모든 문제 다 해결입니다. 모든 문제 다 해결.
그래서 오늘도 나눠드린 책, ‘당신은 부처님’이라고 하는 그 글이 불교를 평생 공부한 결론으로 그렇게 이제 간단하게 썼는데, 혹은 어떤 사람은 불교를 ‘공’이라고 결론을 내린 사람도 있고, 혹은 ‘인연의 이치다’라고 결론을 내린 사람도 있고, 혹은 ‘중도’라고 결론을 내린 사람도 있고, 뭐 그건 이제 각자 소견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표현이 됩니다마는, 저는 ‘人卽是佛(인즉시불)’, 사람이 곧 부처다, 라고 하는 ‘人佛思想(인불사상)’으로써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것만이 곧 답이란 것입니다. 가져 가셔서 열심히 읽어보십시오. 거기는 뭐, 법화경이니, 화엄경이니, 무슨 육조스님이니, 온갖 스님들 근래에 성철스님에 이르기까지 다 망라해놨습니다.
第二十七 無斷無滅分제이십칠 무단무멸분
須菩提야 汝若作是念호대 如來가 不以具足相故로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아
수보리 여약작시념 여래 불이구족상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보리야, 그대가 혹 생각하기를 ‘여래는 잘 갖춰진 상호를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하지 않는가? )
須菩提야 莫作是念호대 如來가 不以具足相故로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하라
수보리 막작시념 여래 불이구족상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須菩提(수보리)야, 그러니까 수보리야,
莫作是念(막작시념)호대, 그런 생각하지 말라, 이런 생각하지 말라.
如來(여래)가 不以具足相故(불이구족상고)로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하라, 구족상을 활용하지, 사용하지 아니한 것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니다 말이야. 얻었다라고 하는 생각을 하지 말라 이말이야. 莫作是念(막작시념).
須菩提야 汝若作是念호대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는 說諸法斷滅가 莫作是念이니
수보리 여약작시념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 설 제법단멸 막작시념
須菩提(수보리)야, 수보리야!
汝若作是念(여약작시념)호대, 그대가 만약 이러한 생각을 하되,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說諸法斷滅(설 제법단멸)가 莫作是念(막작시념)이니, 모든 법이 단멸, 말하자면 텅 비어 없다, 공하다, 무다, 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 말이야.
莫作是念(막작시념)이니, 이런 생각 짓지 말지니,
何以故오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는 於法에 不說斷滅相이니라
하이고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 어법 불설단멸상
何以故(하이고)오, 왜냐하면은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於法(어법)에 不說斷滅相(불설단멸상)이니라,
斷滅相(단멸상), 법에 있어서, 이치에 있어서, 진리에 있어서, 斷滅相(단멸상)을 말하지 않는다. 단멸도 말하지. 하지만은 또, 단멸 아닌 것도 말한다.
그러니까, 雙遮(쌍차)도 말하지만 (雙照)쌍조도 말한다. 단멸은 쌍차고, 단멸을 말하지 않는다는 쌍조고, 그래서 遮照同時(차조동시), (遮)차와 (照)조, 긍정과 부정을 함께 가지고 간다. 차와 조를 함께 가지고 간다. 긍정과 부정을 함께 가지고 있다.
아~무리 허망한 그 종이에 부처· 佛(불)자 낙서를 했다 손치더라도 이미 부처· 佛(불)자로 낙서를 했어. 이거 우리 불자들은, 정말 상식 있는 불자들은 그 종이 함부로 하지 못해. 함부로 뭐 코를 풀거나 무슨 쓰레기를 담거나 못한다고.
왜냐? 그거 부처 불자가 써져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걸.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도 또한 종이에 써졌다. 동시에 우리는 이제 말하자면 이해하는 그런 마음자세가 그게 이제 중도적인 상식인 거라. 중도적 상식, 중도적 견해.
아주 하잘 것 없는 종이라고도 볼 수가 있어야 되고, 아무리 신문지, 버리는 신문지에 쓰인 거기에 부처· 佛(불)자가 써져 있다 말이야.
그래서 나는 이거 함부로 할 수가 없다하는 그러한 그 양면을 우리가 함께 가지고 가는 것, 그러한 소견을 우리가 함께 하는 것, 이게 이제 중도적 소견이고, 중도적 안목, 중도적 생활방법이야.
그게 바람직한 거야. ‘이거 뭐 좋은 거라고 아무리 부처· 佛(불)자 아니라, 부처님 할아버지가 써주셔도 이건 종이인데’ 하고, 사정없이 그렇게 하면 그건 불자로서의 도리가 아니야. 이게 이제 말하자면 중도적 삶의 형태입니다.
중도, 중도하는 것이 무슨 불성처럼 그렇게 있는 걸로 이해하면 안 돼요. 혹은 그렇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어.
이거는 어떤 법을 보는, 사물을 보거나 사람을 보거나, 아니면 이치를 보거나하는 보는 공식이야. 보는 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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