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어는 쫄깃한 육질, 아싹한 연골을 씹는 재미, 톡 쏘는 독특한 맛에 배탈까지 없는 별미 웰빙 음식이다. 또 홍어와 같이 술을 마시면 다음날 숙취가 없어 주당들이 인정하는 최고의 음식이고, 남도 사람들의 관혼상제에 빼놓을 수 없는 음식으로‘홍어가 빠진 잔치는 잔치도 아니여’라는 말까지 나오는 전통음식이다.
홍어의 주산지는 조선시대 이래로 흑산도 근해였다. 그러나 식도락문화의 본향은 흑산도가 아니라 옛날 영산강의 물류 거점이던 나주 영산포이다.
옛날 해산물을 육지로 가져갈 때 1주일이상 뱃길에 해산물이 상하기 일 수였다. 홍어도 마찬가지로 바닷가에서 출발하여 영산포에 닻을 내리면 ‘푸욱’발효되어 ‘썩은 홍어’가 되고 만다. 이렇게 육지 사람들은 썩은 홍어에 입맛이 적응되었다. 정작 흑산도 사람들은 싱싱한 홍어를 먹었지 썩은 홍어를 먹지 않았다. 또한 남도 사람들은 코가 얼얼할 정도로 쏘는 맛이 강한 홍어보다 덜 삭힌 홍어를 즐긴다. 지금의 일반화된 톡 쏘는 강한 맛은 서울의 몇몇 사람들이 옛 맛을 그리며 강한 맛의 홍어를 즐기는데서 기인했다. 이렇게 톡 쏘는 맛을 즐기는 정도는 원산지인 흑산도에서 영산포를 거쳐 수도권에 이르면서 더해져만 갔다.
나주 영산포는 흑산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고려 말, 왜구들이 노략질을 할 때마다 도서지방의 피난민들이 영산강을 거슬러 이곳에 머무르곤 하다가 아예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흑산도 앞 영산도 사람들이 몰려와 살면서 ‘영산포’라는 지명이 붙었다.
<영산포의 역사>
영산강을 이용한 수운의 발달은 영산포라는 새로운 도시의 발달과 지역경제의 발전을 가져왔다. 영산포는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와 내륙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고려 때부터 조운제도에 의해 영산포에 진(津)이 설치되었고,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탈에 못이긴 흑산도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와 영산현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흑산도에서 가장 큰 섬의 이름이 영산도(永山島)인데 그 이름을 따와 마을 이름을 영산현(榮山縣)이라 하였으며, 그 이후로 강의 이름도 영산강, 나루의 이름도 영산포라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다시 조창제도가 부활되면서 세곡을 거둬 저장했다가 서울로 운송하는 국영창고인 영산창(榮山倉)이 지금의 택촌마을에 설치되기도 했다. 이 영산창에서는 나주, 순천, 강진, 해남 등 전남 17개 고을의 세곡을 모아 저장하였던 곳으로서 53척의 크고 작은 배들이 있었다. 이 영산창은 수로가 길고 험난해서 해상사고가 많이 났던 까닭에 1512년에 영광의 법성창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러나 구한말부터 1960년대 말까지도 영산포는 포구의 역할을 가장 활발히 수행하였던 곳으로서 소금과 생선과 젓갈을 싣고 들어오는 배, 가마니와 면화와 쌀을 싣고 떠나는 배로 선창은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특히 목포항의 개항과 동시에 영산포는 일본인들의 진출이 가장 두드러진 곳으로 전남의 새로운 경제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일본인들이 영산포를 침략 교두보로 삼고 교육시설과 상업. 금융시설을 갖추게 됨으로써 그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국토개발계획에 의한 영산강 하구언 건설은 영산포의 몰락을 가져왔고 여기에 육로와 철로의 발달은 수운의 침체를 가져오게 하였다. 1975년 영산포에 배가 들어오지 않음으로써 영산포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목포보다 앞서 번창했던 홍어의 본 고향 영산포는 조운선과 남도의 고깃배들이 몰려들어 유일하게 강에 등대(실제는 영산강 수위 관측시설)가 들어서 불을 밝히던 곳이다. 영산강 하구언 공사로 물길이 막혀 쇠락했지만 옛 선창가 주변 홍어거리의 홍어집들과 등대를 비롯한 왜식건물들이 영산포의 영화와 일제의 수탈사를 말해 주고 있다.
※영산포 등대
영산포의 영산강 제방에 붙어 있는 이 시설은 흔히 ‘영산포 등대'라고 불려왔지만, 실제로는 1915년에 일제가 영산강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하여 설치한 시설이다. 지금까지 내륙하천에 남아있는 유일한 등대라고 하였지만 영산포지역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25년경이므로 등대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그렇지만 지금은 배가 드나들지 않아 수위를 측정할 필요성은 없어졌지만 저녁이면 불을 밝혀 영산포구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홍어 맛보기>
1.홍탁 삼합
홍탁삼합(洪濁三合)은 알싸하게 톡 소리는 맛의 삭힌 홍어에 텁텁한 막걸리, 군동내 풍기는 묵은 김치와 익힌 돼지고기를 곁들여 먹는 것을 말한다. 그 외에 회, 무침, 튀김, 구이, 찜, 전, 포 등으로 먹기도 한다.
2.홍어 코, 애와 보리애국
홍어의 코는 호남 본토박이들이 으뜸으로 치는 부위이며 톡 쏘는 맛이 가장 강렬하다. 음식은 코 다음으로 날개와 꼬리를 친다.
홍어 식도락의 가장 높은 격은 살코기를 먹는 것이 아니라 생물 홍어 내장, 애(창자나 쓸개의 옛 말)를 참기름 친 소금장에 찍어 먹는 것이다. 구수하고 부드러운 맛이다.
보리애국은 ‘애’라 부르는 홍어 내장을 봄철에 보리 새싹을 뜯어 넣고 끓여낸 홍어탕이다. 남도에서도 “맛을 못 보면 한철 땡친다”고 할 만큼 선호도가 높다. 전주 쪽에는 보리애국보다는 살코기를 이용한 얼큰한 홍어탕을 즐겨먹는다.
3. 만만한 게 홍어 거시기
전라도 속어로 ‘만만한 게 홍어 X'란 말이 있다.
홍어는 「자산어보」에 몸의 폭이 넓어 넓을 홍(洪)자를 넣어 홍어라고 속명을 썼지만 「본초강목」에선 해음어(海淫魚)로 적고 있다. 옛날 어부들이 홍어를 잡을 때 암컷을 묶어 바다에 던지면 수컷이 배지느러미 뒤쪽에 달려있는 두 개의 커다란 생식기로 교접한 것을 잡았다. 다른 보통의 동물과 달리 가오리류와 상어는 수놈의 생식기가 2개이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암놈의 구멍도 두 개이다.
홍어의 수컷 생식기에는 가시가 나 있어 잘 떨어지지 않는데, 잡힌 뒤에도 수컷은 암컷보다 맛이 떨어지고 가시가 조업을 방해해 생식기를 잘리는 수난을 당하곤 했다. ‘만만한 게 홍어 X’이란 속어는 여기서 유래한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수놈에는 양경이 있다. 그 양경이 곧 척추이다. 모양은 흰 칼과 같은데, 그 밑에 알주머니가 있다. 두 날개에는 가는 가시가 있어서 암 수가 교미할 때에는 그 가시를 박고 교합한다. 낚시를 문 암컷을 수컷이 덮쳐 교합하다가 함께 잡히기도 한다. 결국 암컷은 먹이(食貪) 때문에 죽고, 수컷은 그 암컷을 색탐(色貪)하다 교미한 상태로 죽어 음(淫)을 탐내는 자의 본보기가 될 만하다.”고 적었다.
결국 우리나라 서해의 홍어는 혼음을 하는 서양의 홍어와 달리 1부1처제인데다 사랑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기에 해음어(海淫漁)라는 이름까지 얻었다.
※홍어의 다른 이름
「본초강목」에는 태양어(邰陽魚)라 하였고, 모양이 연잎을 닮았다 하여 하어(荷魚), 생식이 괴이하다 하여 해음어(海淫魚)라고도 하였다. 「자산어보」에는 분어(擥魚)라 하였고 속명을 홍어(洪魚)라 하여 형태와 생태 및 음식으로서 나주지방의 홍어에 대한 기호를 소개하고 있다. 「식감」에는 소양어라 하였다.
전북에서는 간재미, 경북에서는 가부리, 나무가부리, 전남에서는 홍해, 홍에, 고동무치, 함경남도에서는 물개미, 신미도에서는 간쟁이라 불린다.
※흑산도와 수입홍어
홍어의 명품은 흑산도 홍어다. 국내 흑산도 홍어는 어획량이 적어 칠레, 미국, 러시아, 카나다, 호주 등의 외국 수입산이 판을 치고 있지만 진품 흑산도 홍어 값은 예나 지금이나 금값이다.
「자산어보」에“동지 후에 비로소 잡히나 입춘 전후라야 살이 두껍고 제 맛이 난다. 2~4월이면 몸이 쇠약해져 맛이 떨어진다.”고 했다. 당연히 제 철의 홍어가 맛도 좋았고 가격도 비쌌다. 한말에도 만만한 가격이 아니었다고 한다.
※홍어와 가오리 구별법
홍어와 가오리는 매우 흡사한 모양이다. 하지만 홍어는 마름모 꼴로 주둥이가 뾰족하며, 굵은 꼬리 윗부분에 2개의 지느러미와 가시가 2~4줄 늘어서 있다. 이에 비해 가오리는 주둥이 부분이 둥글거나(목탁 가오리, 전기가오리), 약간 모가 나(노랑 가오리, 흰가오리, 상어가오리) 있는 것이 특징이다.
<2010 제6회 영산포 홍어축제>
나주 영산포 영산대교와 영산교 사이의 영산강 하천둔치에서 2009년 4월 9~11일까지 있었던 ‘영산포 홍어축제’의 이모저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