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버스 - 청교도들이 아메리카로 떠났어요 1620년 영국 청교도의 미국 이주
인기멤버
hanjy9713
2023.09.05. 17:43조회 3
댓글 0URL 복사
세계사 버스
청교도들이 아메리카로 떠났어요
1620년 영국 청교도의 미국 이주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은 영국의 왕은 제임스 1세였단다. 그런데 다시 영국에서는 종교로 인한 문제가 일어났어. 무슨 일이었는지 당시 영국의 모습을 살펴보러 가 볼까?
새 왕 제임스 1세는 영국 국교회(성공회)가 아닌 다른 종교는 심하게 탄압했단다. 그러자 청교도 신자들은 더 이상 영국에서 견디기가 힘들어졌어. 청교도가 뭐냐고? 앞서 종교 개혁 때 나온 프로테스탄트(신교) 중에서도 칼뱅의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을 말하지.
제임스 1세의 폭정과 탄압을 견디지 못한 청교도 신자 102명은 종교의 자유와 새 삶을 찾아 길을 떠나기로 했어. 그리고 1620년 9월 16일, 이들은 메이플라워호라는 배를 타고 출발했어. 북아메리카로 이주해 자유로운 새 삶을 꾸리고자 했던 거야.
이들은 항해하는 배 위에서 정부를 수립하고는 모든 것을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운영할 것을 결의했어. 이것이 바로 ‘메이플라워 서약’으로 나중에 미국 헌법의 기초가 된단다. 이들은 9주간의 항해 끝에 드디어 매사추세츠 근처 항구에 도착했어. 새 정착지에는 자신들 고향의 지명을 따 ‘플리머스’라는 이름을 붙였단다. 이들은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순례하는 아버지라는 뜻)’라고 불리며 오늘날 미국을 만드는 데 기초를 다진 인물들로 여겨지지.
하지만 이들이 영국 사람으로서 아메리카 땅을 처음 밟은 것은 아니었어. 당시 아메리카에는 이들보다 먼저 도착한 영국 사람들이 있었단다. 제임스 1세가 런던에 있던 영국 회사들에게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는 허가를 내주면서 이 회사들이 아메리카로 이주할 사람들을 이미 모아 보낸 적이 있었거든.
식민지에 가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홍보하자 당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마침내 영국의 버지니아 회사는 1607년 남자 100여 명을 북아메리카로 보냈어. 그리고 그곳에 제임스타운이라는 마을을 세웠단다. 하지만 식량 부족과 전염병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 간신히 살아남은 몇십 명의 사람들만이 원주민인 인디언에게서 담배 농사법을 배워 겨우 자리 잡을 수 있었지.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플리머스와 제임스타운이 자리를 잡자 영국에서는 종교의 자유나 돈벌이를 위해 아메리카를 찾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었어. 1732년까지 13개의 식민지가 건설될 정도였지. 이들은 해마다 선거를 치러서 관리를 뽑았는데, 이 전통은 뒷날 미국 민주주의 씨앗이 되었단다.
물론 여기에는 아픔도 있었어. 초기에는 원주민인 인디언과 영국에서 온 식민지 사람들이 사이좋게 지냈지만 식민지 사람들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인디언의 땅까지 넘보게 된 거야. 그러자 결국 전쟁이 벌어졌고, 많은 인디언들의 목숨이 희생되기도 했단다.
이번 정거장에서 더 알아보기 영국의 식민지가 된 북아메리카 애초에 북아메리카는 식민지로 그리 매력적인 곳은 아니었어요. 남아메리카와 달리 귀금속이 나오지 않는 땅이었거든요. 하지만 영국의 인구가 계속 늘어나자 영국은 자기 나라와 가까운 곳에 식민지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뒤 영국 사람들은 북아메리카의 기후가 온난하고 땅의 크기가 매우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또 북아메리카를 통해 아시아로 갈 수 있는 항로까지 발견되면서 영국 사람들의 북아메리카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요. 영국의 삼각 무역 아메리카 발견 이후 18세기까지 영국은 노예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어요. 당시 서인도제도에는 담배와 사탕수수 농사가 잘 되었는데, 일손이 매우 부족했어요. 그러자 영국은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을 잡아다가 서인도제도 대농장 지주들에게 노예로 팔았지요. 노예를 팔아 번 돈으로는 아메리카 지역에서 나는 설탕과 담배 따위를 사서 영국으로 가지고 와 다시 팔았어요. 이렇게 해 이중으로 이득을 챙겼지요. 이것이 바로 유럽과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잇는 삼각 무역이에요. 또한 이는 아메리카 노예 제도의 시초가 되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