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소의 추억
하나님께선 우리가 아직 볼 수 없는 미래를 보시고, 아시고, 당신의 뜻대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그걸 모릅니다. 그래서 나중에서야, 아하, 하고 무릎을 치며 감탄(또는 탄식)할 때가 있습니다. 덕소에서 제가 살게 된 것도 그렇습니다. 오래 전이죠. 20년 전 쯤에 덕소와 이곳 근처를 많이 지나다녔습니다. 특히 서울에서 와서 덕소 삼패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해서 양평, 양수리, 춘천 쪽으로 많이 갔죠. 그때는 서울 어느 교회의 부목사였을 때입니다. 교회에서 무슨 수련회나 야유회, 크고 작은 나들이를 갈 때마다 이곳을 지나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제가 이곳에서 살게 되리라는 걸, 오늘 저의 모습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죠.
한 번은 교회 교사 한 분이 덕소 아파트로 이사를 해서 이사예배를 드려주려고 온 적도 있습니다. 그때도 역시, 덕소란 데가 이런 곳이구나, 했을 뿐이죠. 뉴질랜드와 광주를 거쳐 2012년 잠시 도농에 살 때, 친구가 덕소에 살고 있어서 놀러온 적이 있었죠. 그때! 우연히 길가에 있던 지난 번 건물의 한소망교회를 봤습니다. 아주 반가웠습니다. 여기 기장교회가 있네, 하면서요. 그때도 역시, 몇 년 후에 한소망교회로 올 줄은 꿈에도 몰랐죠. 그런데 2년 후, 2014년 한소망에 부임을 합니다.
그리고 1년 후, 화양동에 있던 저희 가족, 함께 살던 장인장모님이 모두 덕소로 이사를 오게 됩니다. 그 당시 장인어른의 건강에 어려움이 생기면서, 저로 인해 덕소로 집을 사서 옮기게 됐죠. 그때 사정상 제 이름으로 집을 샀지요. 이번에 교회가 도로계획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3구역에 있는 주택을 교회당으로 쓰려고 드디어 매입을 했습니다. 2억 대출을 받아야 하겠지만 어쨌든 한소망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 땅’을 갖게 됐습니다. 그런데 교회 이름으로는 대출이 안 되기 때문에 제 이름으로 계약을 했습니다. 졸지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집이 제가 두 채나 생겼습니다. 세무조사 들어올까, 은근히 걱정됩니다. 2005년 말, 뉴질랜드 사역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전 재산 3천만 원 이하의 최하위층에 속해있던 제가 이제(?) 집이 두 채가 됐네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제 덕소에 영원히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현재까지는, 그럴 수밖에 없는 형편으로 하나님이 몰아가십니다. 이럴 줄 몰랐거든요. 그래서요, 저는 덕소가 더욱 좋습니다. 덕소는 독특한 곳이죠. 농촌과 서울 변두리 뒷골목과 아파트촌이 공존하는 곳.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소통하는 곳입니다. 이제 덕소의 추억이 아니라, 덕소의 미래를 봐야겠습니다. 우리 한소망교회와, 이곳 덕소에 앞으로 하나님이 베푸실 은혜를요. 여러분, 함께 봅시다! 메리 해피 추석!☺
(2018년 9월 23일 주보에서)
▲ 2015년 처음으로 덕소에 전세로 와서 살던 백합빌라 뒷마당입니다.
상상이 안가시겠지만 위에 빈 뜰처럼 보이는 곳에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다 버리고, 깨끗이 하고, 텃밭으로 만들었죠.
이 집에서 1년 살았을까, 떠나면서 좀 아까웠던, 그러나 여기도 덕소의 추억이네요.ㅎㅎ
첫댓글 할렐루야~~아멘 아멘!
목사님 드디어 고난속의 꽃은 피어나고 간절한 기도와 하나님의 인도
하심으로 승리의 깃발을 꽂으셨습니다,
한소망 교회가 지금까지 가져보질 못했던 염원의 우리교회 터전이
생겼습니다.ㅎㅎ
남의 건물 셋방살이 삽십 삼년의 종지부를 찍고 한소망의 은혜로운
성전과 우리의 땅 우리 건물을 허락하셨습니다.
목사님과 한소망 교회의 온 가족들의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건물이 도로가 난다는 소식에 노심초사 애태우셨던 이 년세월 눈물로
간구한 기도의 시간들 주님께서 예비하신 시간은 따로 있으셨습니다.
담임 목사님을 덕소로 인도하신 주님의 크신 뜻을 이제서야 밝혀
주셨습니다 ★
그렇게 봐주시니 부끄럽고 황공하지만... 또 감사합니다.
부족한 이 사람을 주님이 불쌍히 여겨서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앞으로 우리 모든 한소망 식구들이
한소망으로 마음을 모아 함께 이길을 행복하게 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