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내 옆의 의자에 앉아
너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으면 좋겠다
밤을 새워주었으면 좋겠다
눈을 가리고 만든 물건들 속에는
내 손이 섞여 있을 거야
눈을 가리고 그린 그림 속에서
나는 너를 더듬고 있을 거야
- 이렇게 앉은 자세 中 / 신해욱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없는 황금과
밤의 올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 이별은 미의 창조 / 한용운
누구나 살아가면서
가슴으로 쓰는 편지에 붙일
우표 하나 담고 살아갈 일이다
그리움에 깨인 밤은 아직도 길어
아득한 기억을 베고 잠을 부르면
낡아버린 우표가 기척하는
징검다리 같은 꿈을 꾼다
지워짐이 두려운 꿈을 깨어
온 몸에 돋아난 그리움으로
마음에 둔 우표를 붙이면
그리운 사람 가슴에 있었다
- 안부 / 이일영
모든 사랑 이야기는 잠재적으로 비탄의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아니었대도, 결국 그렇게 된다.
-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中 / 줄리언 반스
이름이 있다
다른 이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숨겨둔, 아무도 없는 밤에 아껴서 발음하는
병약한 아기의 부모가 누구도 외우지 못할 만큼 길게 지은, 그러나 결국 악령에게 들켜버린 이름처럼
부르지 않으려 기억하는 이름이 있다
여러번 개명하지만 곧 들키고 마는
입속에 묻힌 이름이 있다
- 입 속의 무덤 / 유병록
내 손길이 네게 닿으면
넌 움직이는 산맥이 된다
내 입술이 네게 닿으면
넌 가득 찬 호수가 된다
호수에 노를 저으며
호심으로
물가로
수초 사이로
구름처럼 내가 가라앉아 돌면
넌 눈을 감은 하늘이 된다
어디선지
노고지리
가물가물
먼 아지랭이
네 눈물이 내게 닿으면
난 무너지는 우주가 된다
- 꿈 / 조병화
해질 무렵
서울 가는 야간열차의 기적소리를 들으며
산그림자가 소리없이 내 무덤을 밟고 지나가면
아직도 나에게는
기다림이 남아 있다
바람도 산길을 잃어버린
산새마저 날아가 돌아오지 않는
두 번 다시 잠들 수 없는 밤이 오면
아직도 나에게는
산새의 길이 남아 있다
어느날 찬바람 눈길 속으로
푸른 하늘 등에 지고 산에 올라와
국화 한 송이 내 무덤 앞에 놓고 간
흰 발자국만 꽃잎처럼 흩뿌리고 돌아선
당신은 진정 누구인가
어둠 속에서도 풀잎들은 자라고
오늘도 서울 가는 야간열차의 흐린 불빛을 바라보며
내가 던진 마음 하나 별이 되어 사라지면
아직도 나에게는
그리움의 죄는 남아 있다
- 당신에게 / 정호승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거나 바라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 결과와 상관없이 사랑은 진정함과 진실을 요청하는 행위여야 한다.
-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中 / 줄리언 반스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그 사람 살아 있을까
비켜간 꿈을 쫓아
가슴에 달이 흐른다
그리움 살아 있는 것처럼
그사람 살아 있을까
가슴에서 달이 녹는다
- 가슴에서 달이 녹는다 / 이일영
우리가 서로 만난 것은 우리가 서로 만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던 시절의 일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은 지나간다.
만약 우리가 행복했었다면, 뭘 몰랐기 때문,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 청춘의 문장들+ 中 / 김연수
당신의 얼굴은 봄하늘의 고요한 별이어요
그러나 찢어진 구름 사이로 돋아오는 반달 같은 얼굴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어여쁜 얼굴만을 사랑한다면 왜 나의 베갯모에 달을 수놓지 않고 별을 수놓아요
당신의 마음은 티없는 순옥이어요 그러나 곱기도 밝기도 굳기도 보석같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아름다운 마음만을 사랑한다면 왜 나의 반지를 보석으로 아니하고 옥으로 만들어요
당신의 시는 봄비에 새로 눈트는 금결같은 버들이어요
그러나 기름같은 검은 바다에 피어 오르는 백합꽃 같은 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좋은 문장만을 사랑한다면 왜 내가 꽃을 노래하지 않고 버들을 찬미하여요
왼 세상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아니 할 때에 당신만이 나를 사랑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여요 나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여요
- 사랑을 사랑하여요 / 한용운
눈동자를 가진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대화법에 의해
당신과 나는 서로를 완성하는가
그리고 나는
나를 언제까지 연습할 수 있을까
밝아지면 아침
어두워지면 저녁
- 카프카의 오후 中 / 하재연
미처 허공에 줄을 긋지 못한 거미들이
너와 나 사이를 지나쳐 가기도 하였으나
벌레들이 네 몸을 뒤집어 집을 짓고
얼크러진 꿈들을 채우는 일 보며
나 없이 너의 뼈가 되어 살아도 좋았다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계절풍처럼
일정하게 떠나기도 하지만 이내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그길 지워지지 않도록
검게 야윈 금들을 붙잡은 축원
끝나고도 식지 않는 사랑이다
- 담쟁이 / 최광임
그 나라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수명은 시간이 아닙니다
사랑의 존재는 님의 눈과 님의 마음도 알지 못합니다
사랑의 비밀은 다만 님의 수건에 수놓은 바늘과
님의 심으신 꽃나무와 님의 잠과 시인의 상상과
그들만이 압니다
- 사랑의 존재 中 / 한용운
그녀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가면서 나는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하기보다는
마음속에 그냥 간직해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마음에 동요가 일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에 나는 알게 되었다.
그녀를 향한 어떤 말 못할 진실이 그때 내 마음속에서 움트고 있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오랫동안 마음의 헛간에 처박아둬서 먼지가 쌓이고 녹이 슬어 있던 열정이라는 것이
그렇듯 우연찮은 순간에 조용히 나를 흔들며 지나갔던 것이다.
아, 인생이란 이런 덧없는 흥분의 한때를 가리키는 것이었구나.
- 지나가는 자의 초상 中 / 윤대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