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도령 예수와 메시아 탄생설화/ 임의진
(마태복음 2: 10-12)
1. 베들레헴, 한 아이의 데뷔 무대
동방에서 마고이(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유대땅 베들레헴(빵집이라는 뜻)까지 찾아와 아기 예수를 발견했단 이야기는 성탄 스토리를 매우 극적으로 발화시킵니다. 구약성서엔 베들레헴이 10회 나오는데, 신약성서에는 베들레헴이 마태와 루가에만 등장해요. 대신 나자렛이 30회 이상 나와요. 이는 다윗 왕의 고향 베들레헴, 다윗 가문의 후손을 통해 메시아가 나온다는 민중의 소망을 충족시키는 스토리임이 분명합니다.
2. 동방박사 마고이 부족의 등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촌락, 머리베고 누울 편한 자리가 아닌 말구유통에 눕힌 아기 예수지만 만왕의 왕이 되실분이니만큼 이쯤 경축사절단이 필요하지요.
마고이 부족, 동방박사는 낙타몰이 상인(베두윈)으로 멀리 인도 끝의 사막과 페르시아까지 산재하다가 종적을 감춘 부족입니다.
메시아, 아기장수 이야기의 결부는 이들이 ‘어린이 청소년 노동력 보급, 인력 장사꾼’이었단 얘기이기도 합니다. 식민지 시대 생계곤란 때문에 아이를 내버리거나, 노동력으로 매매할 때 거간꾼 노릇을 하기도 합니다. 전쟁은 많은 고아들을 낳게 됩니다. 한국전쟁도 고아들이 있었고, 선교사들은 ’서방박사‘로 찾아와 구제한 격입니다.
또 등에 칠성별을 지니고 태어나 산에 버려져서 늑대 엄마가 키운다는 아기 장수, 이를 마을로 데리고 내려와 누군가 아이를 낳지 못한 이에게 선물로 전해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낳기도 합니다. 마고이 부족 동방박사들은 별을 좇아 가다가 아기 예수를 친견합니다. 이는 온 세상이 바라던 새로운 개벽 세상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는 줄거리입니다.
3. 마리아의 혼전 임신 사건
동정녀라는 그리스어 ‘파르테노스’는 히브리어 구약성서 이사야에 의하면 알마(almah)라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는 ‘처녀, 아가씨’를 뜻할 뿐입니다. 성적 경험이 전혀 없는 여성이라는 동정녀와는 다른 뉘앙스입니다. 성생활을 도외하고 추한 이미지로 두려는 이런 시도는 성적 타락에 대한 부정적 시각 때문입니다.
일부일처의 제도가 정착기가 아니었던 당시 시대에서, 한 부자 사내가 다수 여성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또 성착취도 만연하였는데, 남성과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것이 부와 권력의 과시요 낭만(?)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자유 연애는 당시 지방 파견 장교와 부르주아들에게 유행이었습니다. 더구나 식민지에서의 여성의 성적 결정권은 매우 약화된 상황었죠. 적법 절차가 아닌 강간 등 성폭행도 수시로 자행되는 실정이었지요. 여성이 고발조차 쉽게 못했고, 오히려 모함과 혐오를 받아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율법에도 처녀가 혼전 임신하면 사형(신명기 22장)이었어요. ‘동정녀설’은 그래서 성적으로 선별된 존재라기보다, 결혼제도 바깥의 임신한 여성에게 긴요한 ‘생존 출구’였습니다.
4. 예수의 보호자 요셉
약혼자인 요셉의 이야기는 아주 짧게 등장하게 됩니다. 이는 성부 하느님, 그러니까 삼위일체상 하느님의 존재를 부각하기 위함이며, 당연히 요셉은 이야기속에서 아버지보다는 보호자, 호위 무사 정도로 전락하게 됩니다. 약혼이라는 것은 이미 결혼제도로 접어든 상태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혼정 임신은 둘의 결정으로 생존 출구가 열려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즈음 요셉의 결정이 산모의 목숨을 살리고 죽일만큼 매우 중요했죠.
당시 나자렛 주변 4~5km 근방에 있었던 로마 주둔군지대 세포리스엔 잔악한 공수 전차군단이 있었고 이들은 갈릴래아 농민저항군들을 진압, 시카리들을 색출하는 비밀경찰까지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병영 막사를 짓고 주둔하면서는 성벽을 쌓기도 했는데, 이를 짓는데 동원된 목수가 요셉과 그 아들 예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셉의 꿈에 어느날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알리는데(마태 1, 20), 요셉의 아이가 아니라는 이 부분, 마리아를 끔찍히 사랑한 요셉에겐 매우 고통스러운 소식이었겠죠. 하느님이 세상과 함께한다는 뜻의 ‘임마누엘’ 메시아. 유대땅의 지도자 헤롯 왕조가 아니라 옛 전설의 다윗 왕조로 비롯된다는 이야기도 그렇지만, 목수 요셉의 씨앗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비가 누구라고 밝힐 수도 없는 비밀스러운 이 상황에서, 요셉은 그저 피하고 숨고 싶었을 뿐입니다.
5. 나자렛이라는 변두리, 변방, 외곽, 촌구석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요한 1, 46).
깡촌 깡시골 나자렛 출신들 가운데 태어난 예수는 ‘왕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라는 마태복음의 지속적인 관점과 버성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훗날 부활 승천이라는 판타스틱한 결말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은 이 장면을 아주 짧게 다루면서 처리합니다. 아마도 마가복음이 얘기하고 싶은 것은 갈릴래아 나자렛의 농부이자 목수 아들 예수가 전한 복음과 해방사역에 ‘메시아 등극’보다 더욱 관심을 둔 때문일 것입니다. 나자렛 농부들은 율리우스 황제 시절부터 작물 재배 후 20%의 세금을 바쳤고, 십일조를 힐카누스(대제사장)에게 또 바쳐야 했습니다. 도탄 그 자체였지요. 사회 치안을 담당한 로마군대, 세금 징수원, 총독, 로마인들, 앞잡이들의 부는 날로 축적되어 갔습니다. 그들은 현세에서 누릴 것을 내세에도 누리고 싶었지요. 다분히 내세적 영혼구원관은 어쩌면 예수님의 복음과는 전혀 다른 종교(?)인지도 모릅니다. 갈릴래아 나자렛 예수와 십자가가 없는 기독교는 결코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도 그것은 가짜입니다. 오늘 이곳에 ‘하나님 나라’가 긴박하게, 또한 전격적으로 도래함을 믿고 실천함이 예수 운동의 핵심입니다.
6. 유아 대량학살과 임신하는 여성들
마태복음 2장의 헤롯왕은 제 나라의 무고한 사람, 게다가 아이들을 무참히 학살합니다. 메시아가 필요한 세상은 사울과 다윗 왕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울과 다윗은 당시 블레셋과 대결하는 중에 등장한 메시아였습니다. 민중들은 로마 제국과 분봉왕 헤롯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운 유대인의 왕이 필요하고, 그 왕이 평화를 가져다줄 것으로 대망하였습니다. 이 대결의 시작은 여성, 그 가운데도 임신한 여성입니다. 그러니까 메시아를 가진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이 이르기를 “마리아여! 당신은 여자들 가운데서 복을 받았습니다”(누가 1, 42)
그들 권력이 계속 아이들을 죽이면 죽일수록 여성은 계속 예수(들)를 임신하고 또 낳아서 끈덕지게 변혁적 세계를, 하나님 나라를 이어갑니다.
마리아는 임신 그 자체로 로마와 분봉왕 헤롯에 대적하고 있는 여전사입니다. 임신하는 여성은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담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물론 임신하지 않는 여성도 협조자 ‘이모, 고모, 유모’로 동일한 지위입니다.
7. 로마 시저인가, 유대 예수인가
다음은 주전 9년 로마리온(로마를 향해 세워진 신전)의 아시아지역 집회에 내린 명령의 비문입니다.
“가장 신성하신 존재인 시저여. 당신은 만물의 시초와 동일합니다. 모든 혼돈으로 세상이 무너져 내려도 당신이 회복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선한 운명의 신이시여. 도시 전체가 만장일치로 신성한 당신의 탄신일을 한 해의 첫날로 제정합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를 규율하시는 신성한 섭리자시여. 우리 인생을 절정으로 올리시고 우리에게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주시어 인간 세상을 번영케 하였으며 모든 질서를 잡으셨으니, 시저 당신은 우리에게 어떤 은인들보다 뛰어나십니다. 드디어 신(아우구스투스)의 탄신일은 전 세계의 기쁜 소식(복음 에반겔레온)이 되었으니 다만 당신 홀로 경배받으소서” (OGIS 2, no. 458)
로마인들은 모든 신들이 자신들에게 향하여 주목하고, 복을 빌면 들어준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미 크리스마스는 태양절이 아닌 시저 축일이었죠.
유대인들이 믿는 신 야훼도 시저를 수위권으로 두는, 그저 하수의 신이라 생각했죠. 그래서 그 성전체제를 유지해준 것이고요. 삼위일체설의 전단계로 볼 수 있다는 신학자 호슬리의 주석이 달린 동맹서약문을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는 구원자 신이신 아버지 제우스와 그리고 그처럼 신이시어 강생하신 그 외아들 아우구스투스 시저(옥타비아누스)와 우리의 거룩한 처녀 도시 아테나 폴리아스의 생동감에 힘입어, 우리가 모두 가이우스 시저 아우구스투스의 충성스러운 종임을 맹세하옵나이다.”(to Gaius, 37 C. E)
로마 시저는 2세기에 걸쳐 4차례 갈릴래아 나자렛을 초토화시키고, 그 시점이 예수가 태어난 시점과 겹칩니다. 폼페이 함락에 이어 유대 이스라엘 함락 후 헤롯을 주구 앞잡이 왕으로 앉히고, 갈릴래아의 타르키아 폴리스에다가 주둔군을 배치하면서 무려 3만명 유대인들을 노예로 전락시켰습니다. 이어 저항하던 2천명을 십자가에 처형하여 죽였습니다. 예수 이후 대항쟁기라 불리는 침략전쟁이 주후 135년까지 흘러가는데, 최후로는 저항농민군 대장 ‘바 코흐바’는 ‘메시아, 높이 뜬 별’로 불리며 십자가형에 죽게 됩니다.
시저에 반하여 처형된 나자렛 목수 예수는 그 어느 지점에서 유대인들에게, 또 이방인들에게 메시아로 불리게 되며(메시아를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 그리스도) 이 모든 수많은 메시아의 데뷔들을 그의 수위권(?)으로 결정짓게 됩니다. 로마 시저는 사라지고, 유대 예수가 오롯이 남게 되는데, 그 출신성분을 살피면 인간의 비속한 엘리트주의와 세속적 천박한 우열주의를 뛰어넘게 됩니다.
8. 우리들의 아기 도령, 아기 예수
아기 예수는 나자렛에서 이 세상을 새롭게 하기 위해 니셨습니다.
그리고 이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사에서 수많은 아기 도령 예수 따름이들의 태어남을 목격해왔습니다. 한국교회사에서는 수많은 위대한 신앙인들의 희생적 삶을 보며, 우리는 예수님의 뜨거운 생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편 이름 없이 스러져간 의병들과 갑오농민전쟁에서 죽어간 농민군들, 일제 식민지의 홍범도를 비롯한 독립군들, 한라산 자락 오름들에서 죽어간 예수들, 지리산 자락에서 새로운 세상을 염원했던 빨치산들, 여수와 순천에서 반란군이라 불리며 죽어간 이들, 두 쪽 난 조국의 한 켠을 지킨 정신적 지주 시인들과 어깨를 서로 걸로 불평등, 불공정과 싸워나간 노동형제들, 오월의 <소년이 온다> 속 광주의 영령들, 주한미군 탱크에 깔려 죽은 효순이와 미선이, 차디찬 남쪽 바다에서 죽어간 세월호 어린 동무들, 이태원 골목에서 비명횡사로 죽어가야 했던 이들...
이들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반드시 있고, 우리에게 메시지를 준 의미 있는 탄생이었으며, 이들의 호소는 시대의 복음이었죠. 이들의 대속적 십자가 죽음은 우리들의 각성과 하나님나라 신심으로 오늘도 화산이 폭발하듯 부활합니다. 메시아 아기 도령으로 재탄생하고 있음을 믿고 희망합니다. 우리 식구들도 이 예수 탄생 행진과 해방적 부활에 동참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