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독립공원은
우리나라 자주독립 정신을 후손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하여 조성된 공간으로
독립문, 순국선열추념탑, 역사관,
독립관, 3.1 운동기념탑 등이 있으며
매점, 쉼터, 도서관 등
시민들을 위한 편의시설도 많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
내리면 바로 앞에 있어 가족과 함께
가볍게 나들이하기 좋다.
독립문은 조선이
외세의 간섭을 거부하고 자주독립의 길을
모색하던 역사적 배경아래 세워졌으며
한국인의 국가적 자긍심과 민족주의
정신을 고취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중국과 일본은 과거부터
우리나라와 어떤 관계인가?
o. 지배기간을 비교하면
중국 503년, 일본 36년이다.
우리에게는 중국과 일본 중
어느 나라가 더 큰 원수국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중국 503년, 일본 36년으로
중국이 훨씬 더 큰 원수다.
o. 일본은 한국에 부스러기라도 남겼지만
(부스러기가 아니라 근대산업화
기반과 기술 재산) 중국은 가져만 갔다.
일본에 위안부가 있다면
중국은 50만에 이르는 환향녀가 있다.
병자호란이 끝나면서 당시 조선
인구의 10%를 청으로 끌고 갔다.
환향녀뿐인가? 걸핏하면
우리나라의 처녀들을 중국 놈들이
공물로 데려가지 않았는가.
중국은 사실상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서부터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 때까지 503년 간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지배했던 것이 사실이다.
조선 왕조는 이성계가
나라 이름도 명나라에 조선과 회령
중에서 정해달라고 요청했다.
1407년 태종은 중국을
숭모한다는 모화루(모화관)를 세웠고,
중국의 요구로 1539년 중종 때
중국의 은혜를 영접한다는 '영은문'으로
이름까지 바꿔 세운 것이다.
사실상 조선은 무력을 포기하고 중국
밑으로 스스로 들어간 나라였다.
치욕적 이게도 중국 황제가
승인해야 왕이 될 수 있었으며
매년 바쳐야 하는 온갖 공물에
백성들의 진이 빠졌다.
심지어 중국 사신의 서열이
조선 왕보다 높았다.
사신이 한 번 뜨면 조선의
산천초목이 벌벌 떨었으며
중국 조정에 뇌물을 바치고
사신에 임명된 者들이 조선에 와서
본전의 몇 배를 뽑았다.
중국 사신이 오면 조선 왕이
나가 영접하던 곳이 영은문이었다.
중국 황제의 은혜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ㅇ. 1894년 청일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에서 패한 중국이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일본 이토 히로부미와
중국(청) 이홍장 간의 조약으로
"청국 은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조선은 중국의 503년 지배에서
독립할 수가 있었기에 일본에게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서대문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바꾸고
영은문 자리에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독립문을 세운 것이다.
독립하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으로만
아는데, 서대문에 있는 독립문이나 독립관은
36년간 지배해 온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503년 동안 지배받던 중국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97년
서재필 박사가 주축이 돼 만든 것이다.
[ 일제 강점기 : 1910~1945 ]
그런데, 중국 공산당을 존경하고
반일을 내세우는 사람들로 인하여
중국이 우리에게 준 막대한 피해는
서서히 묻히고 잊혀간다.
독립문에 대한 무식과 오해가
희극이 돼버린 사례가 있다.
3·1절 기념행사를 마치고
독립문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니
참으로 역사인식이 부족한 사람이다.
우리를 중국으로부터 독립시킨 것은
일본이고,
우리를 일본으로부터 독립시킨 것은
미국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에겐 8.15만 광복절뿐 아니라
1895년 4월 17일도 광복절임으로
둘 다 기념해야 될 것이다..
암튼, 중국과의 관계는 과거 오래된
역사이니 잊자고 한다면, 일본도 이젠 잊고
극일을 위한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안전과
미래 후손들의 안녕을 위하여..
첫댓글 몰랐던 사실을 알게되었네요.. 독립문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바르게 잘 가르쳐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