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예대학 출신 작가 작품>
말하지 못한 비밀
서영숙
분명 우리 집인데 거실에 키가 큰 화초들이 가득하고 아름다운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 사이로 맑은 물이 흘렀다. 엄마는 그곳에서 화초에 물을 주고 있었다. 옷도 옛날에 입던 옷 그대로 입고 활짝 웃는 모습이 여유로워 보였다. 이 방 저 방을 둘러봐도 온통 꽃으로 가득했다.
1년 전 내 품에 안겨 돌아가신 엄마의 기일이 다가온다. 장례를 치른 후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가 누워계시던 방문을 열어 보곤 했다. 횟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요즘은 거의 열지 않는다. 기일이 다가와 엄마 생각을 며칠 했더니 꿈에 나타나셨다. 말은 없었으나 꽃밭에서 활짝 웃는 모습을 보니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tv 예능 프르그램에 게스트로 나온 남자가 아버지 얘기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다. 사람들은 부모님에 대해 말할 때 울컥해지는 것을 본다. 특히 여자들은 엄마 얘기만 나오면 눈시울을 붉힌다. 나 역시 백 세에 가셨으나 여전히 그렇다. 간직하고 있던 사진을 들여다보며 ‘엄마 우리 엄마’ 수없이 불러보았다. 모든 엄마가 그렇듯 우리 엄마도 허리 펼 여가 없이 일하고 자식들 건사하면서 고생하신 터라 더 애틋하다.
나는 엄마를 많이 닮았다. 성격이랑 생김새를 비롯해 혈액형도 같다. 엄마는 딸부잣집 맏이로 태어났지만, 당신은 아들을 여럿 낳고 딸은 둘만 낳았다. 그나마 예순을 넘어서며 큰딸을 가슴에 묻고 작은 딸인 나를 의지하는 딸 바라기였다. 우리는 성정이 비슷해 싸우기도 많이 했으나 서로를 잘 이해했다.
결혼 후 구미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버스로 한 시간 거리 되는 직장에 출퇴근했다. 입덧이 심해 먹지 못해 힘들어할 때 엄마가 입맛 돋우는 파란 봄동 나물을 가져오셨다. 청도에서 겨우내 자란 나물, 맛나게 먹은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딸네 집에 온다고 바리바리 장만해 온 것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엄마의 사랑이 담겨있었다. 신혼살림을 차리고 처음으로 오신 엄마를 붙들고 한참을 서럽게 울었던 그때의 기억이 아련하다. 비로소 부모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딸아이를 키우다 사춘기가 되어 속상한 일이 있었다. 말대꾸하며 대들고 좋아하는 연예인펜클럽에 가입해 전국적으로 따라다녔다. 웬만큼 힘든 일로는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그날은 너무 속이 상해 전화를 했다. ‘엄마’라고 부르는 순간 눈물이 앞을 가려 말문이 막혔다. ‘엄마 옛날에 내가 속 썩인 것 잘못했어요.’라고 말했다. 속 썩이는 딸을 고자질하고 싶어서 전화했는데 사과하는 말이 먼저 나왔다. 왜 그러느냐 묻지도 않고 단번에 답을 주셨다. “자식 키우다 보면 다 그렇다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달래라, 시간 지나면 괜찮아진다.”
그랬다. 엄마는 내 목소리만 들어도 무슨 일인지 알았다. 어쩌다 시가의 일로 조심스럽게 마음 아픈 이야기를 하면 한 번도 내 편을 들어준 적이 없었다. 늘 하시는 말씀이 “너무 카지마라, 그럴 수도 있다, 네가 잘해라, 고맙게 생각해라, 불쌍하게 여겨라.”였다. 때로는 섭섭해서 다시는 엄마한테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한두 번 아니었다. 세월이 지난 지금 나도 딸에게 그렇게 하고 있으니 모전여전인가.
먹고 사는데 바빴던 시절이라 교육이라고 가르친 적은 없었으나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셨다. 그것이 산교육이었음을 나이 들어가면서 조금씩 알 수 있었다. 나에게 좋은 점이 있다면 장점이 많은 엄마에게 물려받은 것이고 나의 모자람은 엄마의 뜻을 거역하여 엇길로 나갔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키가 작고 얼굴이 동그스름한 엄마는 아버지와 11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아버지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거기서 아들 둘을 낳을 때까지 살았다. 가난이 너무 싫어서 해방 후에도 한국으로 나오기 싫어했는데, 아버지의 뜻으로 고향에 돌아와 산 아래 조그만 단칸방에 살림을 시작했다. 엄마는 고생했던 일을 얘기할 때마다 그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때 일본에서 일자리도 있었고 살기도 괜찮았는데 괜히 나와서 온갖 고생을 하고 살았다며 회상하셨다.
엄마는 매년 봄이 되면 허기증이란 병을 앓았다. 허기증은 엄마가 이름 지은 병명이었다. 영양실조처럼 힘이 없고 맥을 못 추는 현상이라 몹시 힘들어하셨다. 어른이 되면서 초봄에 태어난 나 때문에 생긴 산후 후유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늘 죄송한 마음을 가졌다. 변변한 약도 없어 오랫동안 고생을 하셨다.
칠순이 지난 어느 봄날, 그날도 엄마는 몸져누웠다. 나는 직장 일로 갈 수가 없어서 우리 집으로 오시라고 했다. 자가용도 없던 시절이라 시외버스와 시내버스를 번갈아 타고 기어 오듯 겨우 오셨는데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바로 쓰러졌다. 몸이 아파도 택시비 아까워 못 타는 시골 노인네였다.
어른들의 권유로 칠성시장에서 개고기를 사 와 준비해 놓았다. 잘 끊여진 진국을 연거푸 두 그릇 마시게 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더니 몸이 개운하고 눈이 뜨인다며 “무슨 약인지 참 신통하다.”라고 했다. 나머지도 다 드신 후 기력을 회복하셨다. 그때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개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내가 귀한 보약이라고 하니 고맙다고 하며 두고두고 얘기했다.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었고 할 시기도 놓쳐버려서 잊고 살았다. 아무렴 어떤가, 그 후로는 허기증이 사라졌다. 엄마 생전에 말하지 못한 비밀로 남았다.
사리에 밝고 재주가 많았던 엄마는 어려움을 딛고 지혜롭게 자기의 삶을 승화시켜 백 세가 되도록 건강한 노후를 보냈다. 미소를 머금은 엄마의 사진은 여전히 나를 보며 웃고 있다. 저세상에 가셔서 비밀을 아셨을까. 보고 싶다.
(《수필문예》 제22집, 2023. 수필문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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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프로필
수필문예회 회원
수필과 비평작가회의 회원
2019년 대구광역시 치매센터 공모전 우수상 수상
2020년 극동방송 청취자 소감 공모전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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