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어의 의미를 규정하는 방법 - 동의어와 다의어
오광만 교수/ 장신신학원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단어를 한층 분명하게 규명하기 위해서는 단어의 의미 관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기능하는지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단어의 의미의 다양성과 그것이 문맥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구별하는 것의 중요성, 그리고 다른 단어와의 관계에서 의미를 규정하는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1) 의미의 삼각형
이 문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로 단어의 의미 관계를 설명한 Ogden과 Richards의 의미의 삼각형을 소개하겠습니다. 아래와 같은 삼각형과 각각의 꼭지점의 상관관계입니다.
단어 자체에 고정된 의미가 있지 않고 그것이 어떤 단어와 관련하고 있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내용은 이미 확인하였습니다. 위의 삼각형에서 왼쪽 아래 각에 있는 “단어“는 우리가 글을 읽을 때 만나는 의미의 기본 단위인 낱말입니다. 동일한 낱말에는 삼각형 위쪽에 있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의미가 여러 개일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단어나 어구나 문장의 기능적인 의미로서 문장에서 변용 가능한 여러 의미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가 글을 쓸 때에는 여러 가지 가능한 의미 중에서 어떤 특정한 맥락에서 언급하는 실재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삼각형 오른쪽 아래에 있는 “지시어“ 또는 지시물인 것입니다. “지시어“란 어떤 단어를 사용하여 저자가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을 뜻합니다. 의미와 지시어는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의미가 지시어보다 범위가 크다는 사실입니다.일반적인 의미와 지지어가 다른 예를 성경에서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악한 농부 비유에서 예수님은 비유적인 말(“단어“)로써 당대 있음직한 예를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비유를 다 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았다“(마 21:45)고 적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비유에 사용된 단어(“농부“)가 의미하는 것에는 바리새인이나 대제사장을 가리키는 말이 없었지만, 이야기 전체를 종합해 볼 때, 이것은 분명히 “자기들“을 지시하는 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단어에서 의미와 지시어를 구별하는 것이 항상 쉽지만은 않습니다만, 많은 경우에 의미와 지시어는 결속되어 있으며, 의미는 지시물을 떠나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말에서 또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머니, 은행으로 빨리 나오세요. 제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라는 글을 읽었다고 합시다. 우리 머리 속에 그려지는 영상은 무엇일까요? 머리 속에 어떤 영상이 그려진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단어와 관련하여 어떤 개념(“의미“)이 형성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에 형성된 개념이나 영상은 단어를 사용하는 우리의 언어생활에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이것을 단계별로 표현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의미 전달을 말(言)로써 표현합니다. 그것이 고정되어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말이 된다면, 그것은 글(단어, word)로 표현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문자로 표현된 글(예를 들어 “단어“ 같은 것)은 바로 발음된 말을 표현하는 기호가 되고, 이것은 우리에게 그 단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영상을 떠올리게 하거나 개념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형성된 개념이 하나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여러 개가 된다는 것이 현실이고, 거기서 우리는 의미를 밝혀내는 작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기호(단어)가 여러 다른 것을 지시하는 수도 있고, 또한 다른 기호(단어)가 사실은 하나의 실체를 지시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 언급한 예에서 말한 사람이 지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그가 사용한 용어 중에서 의미 파악에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단어를 찾아야 할 텐데, 위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은행“이란 단어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행“이 지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문제 해결의 관건이 될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서 “은행“이라는 단어(또는 기호)가 표현할 수 있는 의미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한글의 “은행“은 다른 여느 단어와 마찬가지로 한 단어에 여러 다른 의미가 존재하는 다의어(polysemy)입니다. 제가 찾은 범위에서 “은행“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은행(銀行). 예금을 받아 그 돈을 자금으로 하여 대출, 어음 거래, 증권의 인수 따위를 업무로 하는 금융 기관. 이 경우, “은행“은 이런 기능을 하는 추상적인 집단을 생각하게 됩니다. “한국의 은행들은 외국의 은행에 비해 이런 저런 장, 단점이 있다“는 말에 사용되는 은행이 첫 번째에 해당하는 “은행“의 의미입니다.
둘째, 위의 업무를 하는 구체적인 건물. 사당동 사거리에 있는 “○○은행 건물“이 여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셋째, 어떤 때에 갑자기 필요해지는 것이나 대체로 부족한 것 따위를 모아서 보관, 등록하여 두었다가 필요한 사람의 이용 편의를 도모하는 조직. 이것은 첫번째 은행의 의미에서 나온 것이지만 경제적인 기능을 하지 않고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서로 돕고 도움을 받기 위해 만든 무슨 조합 같은 것입니다. “골수 은행“이나 “문제 은행“이 그러합니다.
넷째, 은행(恩倖). 잘 상용되지 않는 단어이지만 명사로서 “은행“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뜻하는 것으로, 임금이 총애하여 가까이 두는 신하입니다.
다섯째, 은행(銀杏). 식용하거나 약용으로 사용하는 은행나무의 열매. 또는 은행나무를 줄여서 “은행“이라고 하기도 합니다.앞에 언급한 예에서 말한 사람이 지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그가 사용한 용어 중에서 의미 파악에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단어를 찾아야 할 텐데, 위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은행“이란 단어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행“이 지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문제 해결의 관건이 될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서 “은행“이라는 단어(또는 기호)가 표현할 수 있는 의미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한글의 “은행“은 다른 여느 단어와 마찬가지로 한 단어에 여러 다른 의미가 존재하는 다의어(polysemy)입니다. 제가 찾은 범위에서 “은행“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위에 소개한 “어머니, 은행으로 빨리 나오세요. 제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라는 글에서 “은행“이 지시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적어도 위의 여섯 가지 의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만한 어떤 단서가 있어야만 합니다.
다음으로, 동사와 관련하여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 어머니에게 은행으로 “빨리 나오세요“라고 했을 때는 어머니에게 어떤 동작을 해주기를 구하였을까요? 어떤 장소에서 밖으로 나와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나오다“는 사전적인 의미 이외에 우리가 실생활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니 이 단어 역시 의미의 다양성이 있는 단어인 셈입니다. 첫째, “은행 업무와 관련하여 어떤 행동“(예컨대, “부도를 막다“, “예금하다“, “이자를 수령하다“ 등등)을 요구할 수도 있고, 둘째로 비가 오니 “우산을 갖고 은행 앞으로 오라“는 재촉하는 내용일 수도 있고, 셋째는 은행에서 “만나자“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서는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 몹시 까다롭다고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모든 경우,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말을 하고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해석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이런 과정이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성경을 읽으시므로 오해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어머니, 은행으로 빨리 나오세요“에 사용된 단어가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즉 지시어)이 무엇인지, 또 이 문장 전체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는 주변에 사용된 다른 단어들과 관련시키거나 비교하여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아 단어의 의미를 구체화시키는 작업을 해보십시다.
(2) 의미 관계 - 동의어와 다의어
단어의 의미는 크게 유사성에 근거한 의미 관계와 대립성(대조)에 근거한 의미 관계에 의해 결정됩니다.
1. 유사성에 근거한 의미 관계(의미 중첩)
두 개 이상 되는 단어가 뚜렷이 구별되기보다는 서로 비슷한 말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 이 단어들의 의미가 분명하게 구별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여기에 속한 단어들은 서로 번갈아 가면서 사용될 정도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21:15이하에 “사랑하느냐“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헬라어의 두 단어 αγαπαω와 φιλεω는 실제로 요한복음의 다른 문맥에서 서로 바꾸어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두 단어는 유사성의 관계에 있는 단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엄격하게 구별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좀더 분명하게 이야기하자면 αγαπαω가 φιλεω보다는 더 포괄적인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전서 5:23의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에서 “영“과 “혼“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이 두 단어가 뚜렷이 구별되는 별개의 실체를 가리킨다고 볼 경우 이 구절은 인간 구성의 삼분설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고, 문제의 두 단어가 언어의 유사성에 의해 사용된 것이라고 한다면 이 구절은 이분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사실, 본문에 사용된 영(πνευμα)과 혼(ψυχη)은 유사한 관계에 있는 단어들로서 다른 곳에서 서로 바꾸어 가며 사용되는 의미 중첩에 해당하는 동의어입니다.
위에 예로 든 단어들은 의미 중첩이 일어나는 동의어들이며, 이럴 경우 이 단어들은 유사성에 근거한 의미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알다“라는 단어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는 οιδα와 γινωσκω 역시 사실은 유사성에 근거한 단어들로서 의미 중첩이 발생하는 단어들인 것입니다.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유사성은 포괄관계(포의성)로 확장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단어가 이와 관련된 단어와 관련하여 그 단어를 포함하여 전반적인 것을 포괄하면서 언급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장미에 대해 “꽃“, 나귀에 대해서 “짐승“, 피에 대해 “액체“ 등이 그러합니다. 저자는 이런 단어들을 엄밀하게 구분하기 위해 사용할 수도 있고, 개괄적으로 언급하기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10:34에 있는 어떤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만난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갔다고 한 것이 이런 의미의 포괄성을 이용하여 어떤 상황을 언급한 좋은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필시 “나귀“를 끌고 갔을 것입니다.
2. 대립성에 근거한 의미 관계
대립성에 근거한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다른 단어와 대조를 통해 단어의 의미를 밝히는 경우인데, 이것은 단어간에 서로 구별되는 관계, 또는 반의적인 관계로써 나타나는 의미입니다. 단어들 중에는 다른 단어와 뚜렷이 구별되는 의미를 가진 단어가 있어 다른 단어와 분명하게 대조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명확하게 반대되는 단어인 경우에 해당되겠지만, 명백한 반의어는 아니지만 의자(chair)는 건물(building)처럼 최소한 다른 단어와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는 단어들도 있는 것입니다.
단어의 대조를 하기 위해 사용하는 표준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상호 보충 관계를 이용한 대조 - 기혼/ 미혼; 친족 관계를 이용한 대조 - 남편/ 아내; 사회적 관계를 이용한 대조 - 의사/ 환자, 선생/ 제자; 방향 관계를 이용한 대조 - 오다/ 가다; 공간 관계를 이용한 대조 - 위/ 아래; 운동 관계를 이용한 대조 - 달리다/ 멈추다 등등.
누가복음 22:10에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단지, 물을 긷는 여자로 생각하기 쉬운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자와 반의 관계에 있는 “남자“입니다. 남자는 물을 긷는 경우가 드물고, 혹시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물장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반면에 어떤 단어들은 막연히 하나의 의미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다“ 또는 “가다“를 가리키는 단어가 바로 그것인데, 심지어 예수께서 여리고 근처에서 눈 먼 사람을 고쳐주신 사건을 다룬 기사에서 누가복음 18:35의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같와 마가복음 10:46의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같는 방향 관계상 서로 대립되는 용어이지만, 막연히 “근처에서“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모호성에 근거한 의미 관계
한 나라의 언어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바꾸어 이해하는 데 있어 그 단어가 지시하는 것이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할 때 우리는 이것을 단어의 모호성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헬라어의 “람파스“(λαμπα )는 어떤 경우에 횃불(torch)로 번역되기도 하고(요 19:3; 계 8:10), 어떤 경우에는 등잔(lamp)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마 25:1이하; 행 20:8; 계 4:5). 반대로, 헬라어의 “떠돌이 개“(κυων)(눅 16:21; 빌 3:2)나 “애완용 개“(κυναριον)(마 15:26이하) 모두 일괄적으로 하나의 단어인 “개“(dog)로 번역되었습니다. 헬라어 “프뉴마“(πνευμα)의 경우는 심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기도 하고, 사람의 영혼, 또 동물의 영혼을 가리키기도 하기 때문에 그 단어만 놓고 볼 때 정확한 의미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단어의 의미를 규정하는 데 있어 모호함이 발생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 간에 발음은 같지만 다른 의미의 단어인 동음이의어(homonyms)가 존재하기도 하고, 발음은 같지만 철자가 다른 동음이자어(homophones)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동음이의어의 대표적인 예는 영어에서 “참다“(인내하다)와 “낳다“라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동사 bear를 들 수 있고, 동음이자어의 대표적인 예는 영어의 to, too, two를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she cannot bear children이란 문장은 그 여자는 “어린애를 낳을 수 없다“는 의미도 될 수 있으며 “어린애를 참지 못한다“는 의미도 될 수 있습니다.또 흔히 코미디 프로에 등장하는 말장난에서, 옆의 사람과 같은 것을 의미하기 위해 “Me, too“라고 해야 할 것을 “Me, two“라고 알아들은 척 하면서 다음 사람은 “Me three“라고 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 말에서도 이런 예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뜨다“라는 동사는 대단히 많은 다양한 의미가 있습니다. 뜨개질하다, 기름이 뜨다, 눈을 뜨다, 옷감을 뜨러 가다, 글이나 판을 뜨다, 행동이 뜨(떠)다(느리다), 메주를 뜨다, 장판이 뜨다, 기분이 좋다, 비행기가 뜨다(날다), 싸우다, 말이 뜨다, (선생님이) 교실에 오시다, 인기가 상승하다 등등 여러 가지입니다. 만약 “엄마 지금 뭐하시니?“라는 질문에 “어머니 지금 뜨고 계셔“라고 대답했다고 합시다. 이 때 화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어머니의 구체적인 행동은 무엇이겠습니까? 위의 “뜨다“는 단어의 예에 열거된 것 중에서 두어 가지를 제외하고는 어머니에게 다 적용 가능할 것입니다. 이것은 음은 같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는 단어입니다.
의미의 모호성과 정반대에 있는 것이 앞에서 언급한 유사성(동의어)에 근거한 의미 관계입니다. 즉 음은 다르지만 뜻은 같은 단어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I am glad to meet you나 I am happy to be with you나 사용된 단어는 다르지만 의미는 같습니다. 심지어 우리나라의 경우 “씹는 것“(chewing)이나 “마시는 것“(drinking)이나 “먹는 것“(eating)이나 구별하지 않고 총괄적으로 “먹는다“고 표현하는 것도 의미의 모호성의 한 예라고 하겠습니다. “먹는다“는 말이 사용된 경우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성경에서 예를 찾아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7:1에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It is a good thing for a man not to touch<απτεσθαι> a woman)에서 “가까이 하다“고 번역된 헬라어 απτεσθαι는 απτομαι를 옮긴 것인데, 이 동사가 여기서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염두에 둔 것인지에 따라 이 단어가 지시하는 구체적인 행위, 즉 바울 사도가 이 글을 쓰면서 염두에 둔 것이 무엇인지가 달라집니다. 실제로 이 단어가 “근접한다“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만지다“라는 의미인지 혹은 “성적인 관계를 갖다“는 의미인지 모호하여 번역 성경마다 이 구절의 해석을 다양하게 하였습니다. “남자는 여자와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공동번역); “It is good for a man not to marry“(NIV); “It is well for a man not to touch a woman“(RSV); “사람이 결혼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쉬운 성경).
이렇듯 이해의 다양성이 나오게 된 것은 단어마다 의미의 모호함이 있기 때문이며, 이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여 단어 자체에 의미의 다양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단어가 해당 문장에서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떤 단어가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현재 사용되는 단어는 의미의 유사성을 공유하는 동의어도 존재하고, 몇 가지 상반된 의미를 지니는 다의어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성경 언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여기서 단어의 이미는 단어가 지니는 의미의 정확성 때문이 아니라 다른 단어들과 관계하고 있는 전체 문장에서 그 의미를 얻어낸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된 셈입니다. “음“과 의미 사이에는 1:1의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음“만 가지고 정확한 의미를 포착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자가 의도한 단 하나의 의미를 정확하게 간파하기 위해서, 단어의 의미는 문장이 제시하는 상황(문맥, context)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문맥은 좁게 문장과 문단의 흐름에서, 넓게는 그 단어와 문단이 들어 있는 책의 문학 형식(장르)에 이르기까지 폭이 다양합니다. 특히 문장에서 단어의 의미는 심지어 각 단어들이 어떻게 배열되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을 정도로 문맥은 중요합니다.
(월간 <교회와신앙> 2002년 1월호)
- 생명나무 쉼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