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슈퍼우먼 / 양선례
서른 중반에 섬에서 3년을 근무했다. 들어갈 때만 해도 어디나 사람 사는 데니 비슷할 거라고, 나만 잘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라 다섯 살에서 열 살이 되는 아이 셋을 데리고 들어가다 보니 어려운 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전화만 하면 배달이 가능한 통닭과 피자, 아무데서나 살 수 있는 생일 케이크나 김밥도 모두 만들어야 했다. 가장 힘든 건 아이들이 아플 때였다. 제법 큰 섬이라서 보건소 안에 내과와 치과가 있었지만 근무하는 의사는 아직은 공부가 더 필요한 공중 보건의였다. 응급 상황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간간이 마루타가 된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뭔가 한 보따리 약을 주기는 하는 데 낫지는 않았다.
작은딸은 세 아이 중 가장 약하게 태어났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입덧으로 나를 힘들게 하더니 태어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낮에는 잘 놀다가 밤에 갑자기 열이 올라 응급실에 가면 39도는 예사이고 언젠가 한 번은 40도가 넘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수업을 하는 내내 정신이 몽롱했다. 밤새 열이 오르면 어쩌나. 응급실도 없는 섬에서 다치기라고 하면 어쩌나. 섬에 들어가면서 가장 큰 걱정은 그것이었다. 모든 걸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져야 했다. 함께 근무하면서 아이도 키우고, 섬 점수도 딸 수 있는 부부교사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어쩌다 육지에 있는 교육지원청으로 출장 갈 일이 있어도 여수가 집인 선생님께 부탁했다. 한 번 들어오면 주말이 되기 전까지는 나가지를 않았다.
주5일 근무제가 시작되기 전이어서 토요일에도 출근했다. 섬이 근무지인 초, 중학교, 농협, 보건소 직원들이 원래는 짐을 싣는 용도인 사선을 임대하여 월요일과 토요일에만 통근용으로 썼다. 새벽 6시에 눈도 뜨지 못하는 세 아이를 승용차 뒷자리에 태우고 한 시간 사십분을 달려 부두에 도착했다. 그곳 주민의 밭 일부를 월세로 빌려서 차를 주차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길가에 세워두면 간혹 바퀴나 차 안의 오디오를 도둑맞는다. 배는 여객용이 아닌, 화물용이라서 크고 높았다. 물때에 따라서 긴 널빤지 다리가 부두와 배 사이에 걸쳐지면 경사 심한 그 위를 지나서 배에 올라야 했다. 어른인 나도 누군가가 잡아줘야 건널 수 있었다. 일주일치의 간식이 든 배낭을 올망졸망 멘 아이들은 초등학교나 중학교의 남선생님들이 안아서 올려줄 때가 많았다.
육지와 가까운 섬이라서 웬만한 비바람에도 배가 운행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섬에서 낮 12시에 출발하는 배를 타면 오후 3시 반이 되어야 집에 도착했다. 점심때도 훨씬 지나 버렸지만 전화하면 배달해주는 식당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한 번은 월요일 아침에 섬으로 들어가던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오도 가도 못하고 파도 따라서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했다. 먼 바다는 풍랑주의보가 뜬 날이었다. 바닷물이 들이쳐서 뱃전에 선 사람들 옷이 다 젖었다. 배 안에 있는 작은 방은 여자와 아이들 차지였다. 중학교는 승진을 목표로 온 남선생님이 주로 근무했는데 그 해에는 웬일인지 도덕을 맡은 여선생님이 한 분 오셨다. 그 분은 섬까지 가는 30분 내내 울었다. 그 곁에서 우리 아이들은 롤러코스터를 탄 듯 재밌다며 깔깔댔다. 그래. 여기서 좌초되면 어느 한 아이도 고아 만들지 않고 같이 갈 수 있겠구나. 그게 위로가 되던 날이 있었다.
한 번은 여섯 살이던 막내가 학교 주변 내리막길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서 개울가에 처박히는 사고를 당했다. 하필 성형외과에서도 만들지 못한다는 인중에 제법 깊은 상처가 생겼다. 코 몇 번 훌쩍이다 보면 다시 습해지는 자리였다. 약을 발라도 그때 뿐 낫지가 않았다. 지금이라면 아이 돌봄 휴가나 연가라도 쓰고 병원을 데려갈 것인데 그때는 그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학교에 하루 빠지면 큰 일 나는 줄 알던 시절이다. 정기 여객선으로는 하루 만에 여수에 다녀오기도 힘들었다. 토요일 오후에 부랴부랴 나와서 아파트 부근 이비인후과를 간 것은 다치고 나서 거의 한 달이 지나서였다. 신기하게도 병원에서 지어준 약을 바르고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상처 난 곳이 고슬고슬해 지면서 딱지가 생겼다. 흉터는 막내가 청소년이 되어 수염이 나기 전까지 꽤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지금도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이 있다. 막내는 주중에도 편도선이 부어 열이 많이 났었다. 보건소에서 지어주는 약은 효과가 없었다. 토요일에 집 가까운 종합병원의 응급실에서 주사를 맞고 왔는데 얼마 되지 않아 아이가 갑자기 숨을 쉬지 않았다. 정신 좀 차려보라고 소리지르며, 뺨을 때리기도 했지만 얼굴이 점점 보라색으로 변해 갔다. 남편이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뛰는 5분 거리가 천 리 만 리처럼 여겨졌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응급 주사로 조치하니 정상 호흡으로 돌아왔다. 특정한 약에 쇼크를 일으킨 거라고 했다. 아들이 살아난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병원 측에 항의 한 번 하지 못했다. 우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나 혼자 있는 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하늘에 감사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는 운전 중에 옆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한참동안이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운전만 배우면 나도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 걸. 단 1초라도 한 눈을 팔면 큰 사고로 이어진다. 아이를 키우는 데도 마찬가지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치명적이다.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특전사 여군 두 명과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았다. 연예인 한 명이 낙하산에서 뛰어내리는 훈련과 아이 셋을 키우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힘드냐고 질문했다. 아무리 힘든 훈련도 목표와 정해진 기간이 있는데 비해 육아는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지금 당장이라도 훈련하러 갈 수 있다고 했다. 우문현답이다. 질문을 한 연예인이 아직 아이를 키워보기 전의 미혼이라서 용서해 준다. 단 한 명의 육아도 해 본 적이 없기에 감히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그 지난한 세월을 어찌 다 살아 냈을까. 우리 엄마 세대들이 한 집에 여덟 명, 열 명의 아이를 키우면서 농사일까지 억척스럽게 해 낸 것은 이제는 신화가 되었다. 로봇이나 철인 3종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처럼 슈퍼우먼이 되어 살아왔다. 기쁨과 보람인 순간도 많았지만 여기 저기 고장난 몸이 훈장으로 남았다. 젊은 세대가, 내 두 딸만 해도 ‘비혼주의자’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게 한편으론 이해가 간다. 많이 바뀌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육아와 살림은 여성의 역할이라고 여기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워킹맘’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세계 최저의 출산율 국가’가 된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기에는 내 발등의 불이 더 먼저인 젊은이들이 이해가 되는 요즘이다.
첫댓글 아이 셋 잘 기른 것만으로도 이미 인간승리.
힘들게 살아온 지난한 세월이 있기에 속이 야무진 양선례선생님이 있을거예요.
언니는 간간이 곁에서 지켜 보셨으니 이런 저를 잘 아시지요? 그래서 저는 지금이 참 좋습니다.
섬에서 세 아이들과 고생 많았겠습니다. 저도 전기도 없는 섬에서 3년을 근무 했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 때 아이들을 데리고 근무하시는 여선생님을 보면서 슈퍼우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기가 없는 섬이 우리 학교 분교에도 있었어요. IMF로 교사가 부족해지자, 3부 복식을 하던 곳이었지요. 그곳에 다녀오면 같은 섬이지만 본 섬에 근무하는 저는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선생님께서도 어려움이 많으셨군요. 아이 돌봄이를 평생 직업으로 생각하신다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생각 한 끗 차인데 그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지요.
긍정의 힘으로 이기는 선생님이 멋집니다.
저도 어머니가 키워주시기는 했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 일상이었는데 그런 곳에서 셋이나 마음 졸이고 키웠을 생각을 하니 제가 다 맘이 짠해지네요. 하지만 그런 고생은 헛되지 않아 아이들이 엄마의 마음을 다 헤아려서 행동을 하더라구요, 아마 어디에서든 부모를 염두에 두고 더 열심히 살 것입니다.
이제는 아이들도 좋은 추억이라고 말합니다. 자꾸 섬 이야기 우려먹는 듯하여 다른 이야기 쓰려고 했는데...쓰다 보니 또 쓰게 되었어요. 이제는 정말 그만 써야 할까 봅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마냥 부러운 직업군이예요. 모든 게 불편한 섬에서 세 아이 키우며 직장 일하기 힘드셨겠어요. 지나고 나면 모든 게 추억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섬을 막 나왔을 때는 학교를 거기서 다닌 걸 부끄러워 했는데 기억 속에는 많이 남아 있더라고요.
제가 3년이나 채운 것도 흙 속에서 크는 아이들이 보기 좋았거든요.
지나고 보면 잘 살아낸 스스로가 대견하지만 당시에는 참 힘든 시간이었어요.
한편의 드라마 같아요.
고생하신 이야기를 쓰셨는데도 글을 잘 쓰시니 술술 읽혀집니다.
내게 선생님은 곱고 신비스런
분들이셨는데 기억속의 예쁜 선생님들의 고충을 헤아려 보았답니다.
좋은 글 늘 고맙습니다.
글을 잘 쓰시니 술술 읽혀집니다.
여기 읽으면서 소리 내어 웃었어요.
항상 칭찬해주시고, 격려해주시니 제가 고맙습니다.
교사도 생활인인 걸요.
그때는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는 것이 괴로웠는데, 덕분에 제 삶이 풍성해졌어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에서 벗어난 특별한 일이었거든요.
교장선생님 글을 읽으니 시골 어머니가 생각나네요. 농사 짓고, 식사 준비하고, 애들 키우느라 정말 고생 많이 하셨지요.
교장선생님 자녀분들도 엄마의 희생을 고맙다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여자들의 삶이란 게 비슷하지요.
엄마의 희생이 아니라 엄마 때문에 아이들이 고생하며 자랐지요.
방학 때도 5일 정도를 근무했는데 그때마다 아이들 다 데리고 들어갔어요.
남편이 늦게 퇴근하여 아이를 돌보기 힘든 것도 있었고, 제가 무섬증이 많아서 혼자 못 살았어요.
그 시절도 나름 재밌었어요.
아이 아플 때, 비오고 바람 불때 오가는 것만 빼고요.
부두에서 내려 다시 학교까지 5분 정도 차를 타고 가야 했는데 비오면 트럭 위에서 비를 고스란히 맞으면서 갔어요.
그럴 때면 서럽지요. 하하
글을 쭈욱~ 읽다보니
'삶은 결국 살아내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면
어떻게 살아내느냐 이고요,
샘은 그 때나 지금이나
참 지혜롭게 살고 계시는 듯 합니다.ㅎㅎ
(이젠 댓글을 쓰면서도 잘못 썼을까봐 조심스럽네요
알아간다는 게 이런 걸까요?ㅋㅋ)
지혜롭다는 말은 저를 부끄럽게 하는 말이고요.
그냥 닥치면 살아내는 것이라는 말이 더 맞을 듯 하네요.
오늘 하루 먹고싶은 것 먹고,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고,
가고 싶은 곳 가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습니다.
(ㅋㅋㅋ 이런 표현도 쓰면 교수님께 혼납니다. 하하)
아는 게 병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