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오늘도 나는 주님을 나타내는 그릇으로 살아갑니다.”
-오늘의 말씀-
내 안에 계신 주님을 해방하라
09/29금(金)요 12:24-26 /눅 9:23-24 /고후 4:10-11
“내가 진정으로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요 12:24)
영안이 열리면 내 영의 상태가 보입니다. 나는 왜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는가? “그들의 경우를 두고 말하면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고후 4:4). 세상을 너무 좋아하니 세상 신이 눈을 가려놓은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가리니 혼미해집니다. 말씀을 들을 때 졸음이 오는 것은 믿음의 싸움, 의지의 싸움입니다. 기도, 찬양, 말씀은 영적 눈이 열리는 수단입니다. 영안이 열리면 성경이 깨달아지는 것이 많아 즐겁습니다. 그 말씀이 살아서 내게 다가오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인간(나)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내 안에는 구원받은 (예수 생명)와 또 다른 나(거짓 자아)가 살고 있습니다. 영적 눈이 떠지면 내 속에 거짓 자아에 속아 울고 있는 내가 보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싶은데 괴물과 같은 내가 있습니다. 나에 대해 절망해야 하나님이 보입니다.
▣내 안에는 속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속사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롬 7:22-23) 속사람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데 또 다른 내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인해 속사람이 강건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예배 드리는 것은 속사람이 강건해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고후 4:16).
▣내 안에는 또 다른 나, 겉사람이 있습니다.
겉 사람은 거짓 자아, 옛사람, 육신입니다. 사단을 주인으로 섬기는 거짓 자아는 십자가에서만 처리됩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 데도 소용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이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요 6:63) 우리를 살리는 것은 속사람, 예수 생명이고 겉 사람, 자연 생명인 육은 무익합니다. 볍씨가 깨져야 씨눈이 나와 열매를 맺습니다. 내가 죽을 때 주님이 나를 통해 흘러나갑니다. 예수 생명만 나타나게 하면 예수 생명이 열매를 맺게 합니다.
▣어떻게 겉 사람을 깨트리고 속사람을 해방시킬까?
나는 나를 이길 수 없습니다. 스스로 겉 사람을 깨트릴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깨트릴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겉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롬 6:6)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내가 날마다 질 때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내가 넘겨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눅 9:23). 내가 지는 십자가를 날마다 믿음으로 질 때 효과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고후 4:10).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은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죽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를 내가 지는 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겉 사람은 죽은 것처럼 행동합니다.
십자가 체험을 하지 않으면 주님이 죽여 놓은 효과를 누릴 수 없습니다. 주님이 지신 것을 내 몸에 짊어질 때 내 죽을 몸에 예수 생명이 나타납니다. 항상 예수 죽음에 나를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죽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고후 4:11) 이것은 진행형입니다. 죽음에 넘겨지면 죽음이 완성되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계속해서 죽음을 만들면 죽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And...
모든 종교의 기도는 자기의 뜻을 구하지만, 기독교의 기도는 내가 죽고 예수가 나타나게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해 주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내 안에 계신 주님의 양식입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주님이 다스리는 폭이 커집니다. 이때 삶이 쉬워집니다.
처음에는 기도하는 것이 힘이 들 수 있습니다. 영적 방해도 있고, 아직 주님과 친숙하지 못한 관계일 때는 어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시작할 때 성령께서 인도해 가십니다. 기도할 때 내 생각이 떠나고 주님 생각으로 채워집니다. 눈앞에 불편한 행동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있는 증거입니다.
기도하면 성령이 나의 지·정·의를 지배합니다. 그러면 불편했던 인간관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됩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을 때는 나 중심의 사고로 모든 것이 상대의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모든 문제는 나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사고로 바뀌면서 갈등이 있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먼저 손을 내밀게 됩니다. 그리고 상대를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는 관념적 신앙을 경계해야 합니다. 관념적 신앙은 성경의 지식, 훈련된 습관입니다. 이런 것들은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게 됩니다. 이미 고정된 생각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저런 문제를 왜 기도해? 그건 내가 알아서 하면 되지, 이런 생각을 갖는 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주 작은 문제도 기도하기 원하십니다. 주차 문제를 기도하게 됩니다. 어떤 날은 아주 가까운 곳에, 어떤 날은 조금 멀리 주차할 때도 있습니다. 기도해서 무엇을 이루었다는 결과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기도했기 때문에 어떤 결과에도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친밀함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쉬지 않는 기도는 일상에서 늘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기도는 실재적인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이 땅에서 이렇게 주님과 가까이 살아갈 때 육신이 깨지는 순간 두려움 없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늘 가까이하는 사람은 자유함이 있습니다. 어떤 율법에도 매이지 않습니다. 진리이신 주님이 안에 계시니 어떤 문제에서도 자유합니다. 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위기는 기회입니다. 주님이 역사하실 찬스입니다.
주님은 내 안에 오셨지만 나 때문에 갇혀 있습니다. 그분이 해방되어야 길이 열립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나에게 있습니다. 기도할 때 내가 작아지고 그분이 커집니다. 그분이 커져야 그분이 길을 여실 수 있습니다. 그분만 내게 막힌 물질, 직장, 배우자, 학업, 자녀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기도할 때 장벽이 깨어집니다. 그 깨어진 장벽 사이로 주님이 오십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겉 사람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속사람이 겉 사람을 뚫고 나와야 예수가 보입니다. 날마다 내 안에서 주님의 영역이 커질 때 속사람으로 강한 사람입니다. 속사람이 강한 사람은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을 통해 예수를 보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 예수 생명이 나타나야 합니다. 착하고 얌전해 보인다는 것은 겉 사람의 모습입니다. 속사람의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하며 겉 사람을 깨트립니다. 날마다 십자가에서 내가 죽고 예수가 사심으로 내 안에 계신 주님을 해방시키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이름 불러본다
https://youtu.be/sdFBeUS8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