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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계간 파란신인상
아스마라 / 장대승
국경을 넘어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멈춘 시계탑 앞에서 광장 가득한 사람의 행렬을 바라볼 때 더는 숨을 내뱉을 필요가 없다고 느낄 때
당신은 우체국에 들어가 금빛 보에 둘러싸인 모래시계를 들고나왔다 이게
내가 여기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한국의 고원은 대체로 배추밭인데 이곳에는 아름다운 근대식 건물과 극장이 있다 상영 중인 영화는 없지만 이름 모를 영웅을 기리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고
두 세기 전의 혁명가였어
춤을 참 잘 췄다고 당신이 말할 때
모래바람과 함께 귓속에 질문이 스민다 언제부턴가 당신은 나와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겨 왔고
우리는 서로의 국적도 모른 채 밤하늘 보며 소원을 빌었다 가족, 없고 건강, 그럭저럭 빛, 그건 왜
사랑을
말할 때쯤 당신은 코를 골았다 나는 모닥불 타오르는 사막 한가운데서 나무에 묶인 낙타처럼 하염없이 아침을 기다렸다 당신이 눈을 떴을 때 맑은 하늘이 나타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발을 아무리 뻗어도
중심부는 경계 지역이라 들어갈 수 없었다 뿌리를 도려낸 나무를 바라보다가
아픈 걸 알면서도 바깥을 향해 돌아서 걸어야 했다
손이 따뜻한 사람이라 좋았어
말하는 당신을 따라 이어지는 긴 행렬 모두 다른 인종 다른 눈동자 다른 언어를 썼지만
알고 있었다
돌아갈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
마음을 가진 사람과
마음밖에 남지 않은 사람에 대해
나는 문득 당신의 이름이 떠올라 소리치고 싶었는데
모래시계가 멈춰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걸까
강을 거슬러 오르니 숲이 나왔다
나무에 상처를 내며 잊히지 않을 길을 걷는다 까마귀 떼가 하늘을 어둑하게 만들고
사람들이 강에 뛰어들고 있다 솟구쳐 오르는 물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게 처음 보는 할머니가 다가와 나 일곱 살 때는, 말하며 앳된 웃음을 짓는다
그 웃음 너머 어두운 숲속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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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트레아"Eritrea"는 아프리카 북동부에 있는 나라로, 1889년 이탈리아령이 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7년의 강화조약에서 이탈리아령에서 벗어났다. 1952년 에티오피아 연방에 속하게 되었으나 30년간의 분리 독립운동 끝에 1993년 4월 주민투표에 의해 독립을 결정하였다.
수도는 아스마라"Asmara"다.인구는 2009년 기준 64만 9천 명이다. 고도 2,325m에 위치한 고원 도시(高原都市)이다.
에리트레아 면적은 약 11만 7600k(한반도의 1/2)으로 세계 99위, 인구는 2012년 기준 약 600만 명이다.
에리트레아의 1인당 GDP는 약 715달러(세계
180위)로 국민소득이 세계 최하위이다.
티그리냐족이 시민의 77%를 차지하며, 그 다음은 티그레족(15%)이다. 티그리냐어가 주로 쓰이며, 아랍어, 이탈리아어, 영어도 널리 쓰이고 이해된다. 종교는 에리트레아 정교회 신자가 시민의 60%이며, 로마 가톨릭 신자 15%, 수니파 이슬람교도가 25%이다.
[ 당선 소감]
이번 겨울은 관측 이래 가장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비가 내린다, 말하지 않고 비가 온다, 말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간 나는 얼어붙지 않기 위해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빗물의 의지를 생각하고, 팔을 벌리고 품을 만들어 내게로 오는 것들의 너비를 헤아려 보며 지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금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슬프고 아픈, 그러나 아름다운 문장을 적어 냈다고 생각하면 기쁜 표정을 감출 수 없게 되기도 했어요. 무릇 곁이라는 말의 다정함을 짐작할 때쯤
내게 이다지도 많은 사람이 당도하고 흩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나의 좋음을 위해 누군가는 생활의 아픈 구석을 감추고, 풍등을 날리며 기도하고, 새벽부터 몸을 일으켜 하루를 견디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날 함박눈이 내렸는데요. 그때 금방 녹고 잊히더라도 선명한 문장을 적어 보자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 생활을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나의 쓸모와 아름다움이 그저 사람의 것이기를 바랐습니다. 일단 사람이 되어서 사람 아닌 것들을 생각하는 마음을 갖게 되기를요.
고마운 사람의 이름과 마음을 여기에 다 남기지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민호 형과 웅기 형의 그늘 아래에서, 태훈, 병헌, 아영의 눈으로, 주성, 재민, 준섭, 형초에게 곁을 배우며, 천수호 선생님, 이병철 선생님, 안도현 선생님의 다정을 기억하고, 광주 친구들의 웃음으로 기쁨을 알고, 윤겸과 가족에게 오래라는 말의 지속력을 느끼며
나는 끝끝내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어느 밤에는 시를 포기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사람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당위를 찾으려 노력했고, 술에 잔뜩 취해 한탄도 하고 헛소리를 내뱉고 그랬는데요.
시는 대단한 무엇이 아닌 그저 살아가는, 살아온 우리의 생활과 그 속에 깃든 사랑을 기억하기 위한 것임을 조금씩 알아 가는 중이에요. 오늘 날씨는 구름 한 점 없고 적당한 바람이 불어요. 다음의 우리가 지금의 우리를 사랑하길 바라요.
장대성 / 1998년 광주 출생. 단국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24년 계간 《파란》 신인상 시 부문, 2024년 〈무등일보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
심사위원 _ 김건영 송현지 이찬 이현승 장석원 정우신
[ 심사 총평 ]
올해로 네 번째를 맞는 신인상, 응모작이 예년보다 늘었다. 여전히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자발적인 목소리들이 많았고, 이는 그만큼 시가 필요하고, 시가 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오래된 시형에 기대거나 감상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시들도 상당했다. 아직 시에 본격적으로 입문하지 못한 분들이며 기성의 시단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올해 응모된 원고들을 이슈의 측면에서 다양하게 검토해 볼 수 있겠으나 코로나19의 여파가 느껴졌던 작년처럼 팬데믹이나 사회적 참사 같은 두드러진 이슈가 보이지 않은 것이 특기할 만한 지점이었다. 눈에 띄는 이슈가 사라졌다는 것이 어쩌면 최근 우리 시단 전체가 가지는 문제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분명 소재도 감성도 더 다원화되었는데 왜 시단이 더 비좁아졌다고 느껴지는 것일까? 비단 신인상 심사의 문제와 떨어져서 다시 숙고할 만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시의 소재나 목소리가 다원화되었지만 주도적인 이슈가 보이지 않는 것이 차라리 지체(기성의 문인들이 새로운 감성을 따라가지 못하는)의 문제라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니지만 반대로 현실에서 어떤 숨 막히는 문제가 커져 가고 있는데 이것을 주도적으로 의제화하고 돌파할 수 있는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면 이것은 우리 시단 전체가 한 번쯤 심각하게 고민할 문제일 것이다. 혐오의 정치와 사회적 대참사의 시대, 입이 틀어막히는 권력의 횡포 속에서 너무 오래 유지되고 있는 분노가 앞으로도 유지될 것 같다는 유의 정치적 무기력과 피로로 가라앉아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문예 진흥 정책의 축소나 문화 소비의 주류 플랫폼의 변동에 따른 사양화, 세대 변화와 감성의 변화, 문단의 폐쇄성 등 우리 시와 문학에 부여된 여러 문제들 앞에서 느리지만 또 하나씩 풀어 가야 할 문제들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과 함께 눈길을 끌었던 작은 것은 심사를 하는 원고들 속에 ‘빛’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특기할 만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응모된 원고들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누어 볼 수 있었다. 암중모색의 초심자들이 있었고, 이미 자신의 목소리가 일정한 시적 형식을 얻은 분들이 있었으며, 막 피어나기 시작한 신예가 있었다.
신인상에 응모된 원고들에는 여전히 시는 읽지 않지만 시를 쓰고 싶은 충동에 못 이긴 원고들이 상당하다. 시의 자생성이랄까 자발적 충동이랄까 이런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더 잘 말하고, 더 정교하게 쓰기 위해서는 잘 읽고, 잘 들어야 한다. 따라서 응모하셨던 많은 분들이 당선자의 원고나 심사평을 먼저 읽어 주시기를 바란다. 나보다 못한데 왜 뽑았을지, 이 정도면 나는 백 편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불평들을 함께 쏟으면서 읽어도 좋다. 부탁 말씀대로 몇 번을 읽어도 여전히 수긍이 안 간다면 거기에 또 좋은 씨앗이 하나 자라고 있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참 좋은 신인을 뽑았다고 생각된다면 낙선자로서는 당선이 멀지 않았다는 뜻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들 겪어 온 일들이다. 모두가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시나 문학에 정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형식이 갖추어진 말은 어떤 필연적인 구조를 동반한다. 완성된 시는 아주 분명한 발견과 자기주장을 갖는다. 그래서 이렇게 읽어도 되고 또 어떻게 읽어도 되지만, 어느 쪽으로 읽든 분명하고 확실하다. 그러한 확실성은 아마도 충분한 읽기를 통해서 수련되는 것일 터이다. 따라서 여러 차례 말씀드리지만 못마땅하고 화가 나서든,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지지하는 마음에서든 눈앞의 원고를 꼼꼼히 읽고 거기에서 일종의 질문을 꺼내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마시라고 권한다.
다른 그룹의 원고들은 시 쓰기가 일정한 자기 개성의 단계에 도달한 작품들이었다. 소품형의 작품에서 가벼운 여행이나 일상의 경험을 아이러니컬한 배음으로 결합하는 서정시들. 응모된 작품을 읽으면서 이상하게도 원고가 꽤 많을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분들이 있었다. 최선의 경우라면 시 쓰기의 일신을 통해서 오래된 원고들은 혁신될 필요가 있겠지만, 몇몇 분들의 원고는 시집 투고 같은 것을 생각해 보면 좋겠다 싶었다. 시집을 꾸리는 작업을 통해서 자기 시를 객관화해 보는 것도 자기를 일신하는 시 쓰기의 한 방법이다. 다작과 시집의 출간을 노리는 방법이 아니더라도 대기만성의 시들이 이 원고의 묶음 속에서 자라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묶음의 원고들은 대체로 3차의 심사 최종심에 올라와 있었다. 이분들은 신인에게 첫 번째로 요구되는 개성이 충분하고, 다음으로 그 개성을 떠받치는 최소한의 언어적 수련이 일정 정도 도달해 있었다. 이번 계간 파란 신인상 최종심에는 총 열한 분의 신인이 이름을 내밀었고, 그중에 넓은 지지를 등에 업고 마지막까지 결정을 다투었던 분들은 김승빈, 김용희, 박정효, 장대성, 정아희, 홍수림 이상 여섯 분이었다(이상 가나다순). 물론 어느 최종심 심사의 원고도 비슷하겠지만 가려 놓은 원고들 속에서는 계간 파란이 무엇보다 개성적이고 자유분방한 목소리에 많은 지지를 보내고 있으며, 그러한 개성을 더욱 사회적인 방향으로 개방하는 작품들을 응원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인의 개성이란 어쩌면 당연하게도 기성의 세계에 대한 응전과 저항의 목소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 개성이 조금은 더 일관된 목소리로 정련될 필요가 있다.
「갠지스강」 등 10편의 김승빈의 시는 “식성과 이성”의 유비 위를 미끄러지면서 활강한다. 식민성과 조난과 악천후와 선악의 오류에 낭만과 폭력의 주석을 붙이는 그의 목소리는 패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더 정교해지는 데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 보였다. 「달방의 자몽」 등 10편의 박정효는 가족 알레고리를 모형으로 일상의 상처와 폭력을 여러 몽상으로 펼쳐 보인다. 형은 물에 잠기는 반지하 달방에서 계속 아랑곳하지 않고 자몽을 씻는 모습으로 나타나고(「달방의 자몽」) 남동생의 죽음이 얼비치는 시 「아무개 이야기」에서는 화자의 가족이 “철장에서 나고 철장에서 지는” 개의 모습으로 제시된다. 개미가 죽은 참새의 눈알을 물고 가는 이미지가 선명한 「자작나무숲」, 그 밖의 작품에서도 훼손된 신체 이미지가 일상에 만연한 폭력의 이미지와 그로테스크하게 뒤섞인다. 이런 기괴한 이미지들은 만연한 폭력과 공포, 이로 인한 억압에 대한 적극적 응전으로서 환영할 만한 것이겠지만 더욱 깊은 매혹을 위해서는 흔히 ‘힘을 좀 빼라’는 조언이 필요해 보였다. 「괜찮아, 당신의 개그가 지구를 지켜 줄 거야」 등 10편의 정아희의 시들은 톡톡 튀는 서사의 재치로 무장된 작품들이었다. 단 한순간의 지루함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다국적 인물들의 전사와 내세를 종횡무진 넘나드는 이 은하수 히치하이커 서사에는 그러나 태풍의 눈처럼 조금 더 위협적인 구심점이 필요해 보인다. 「로라」 등 10편의 홍수림의 원고도 활달한 상상과 재치 아래에 현실의 난폭성과 비극을 절제된 목소리로 배치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안타까운 상실의 자리를 메꾸는 텅 빔의 이미지를 다채로운 빛의 이미지로 변주하는 장면들이 눈길을 끌었다. 아직은 만개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더 성장할 여지가 많아 보였다.
「아스마라」 등 10편의 장대성을 신인상 당선자로 뽑은 심사 위원들에게 가장 많은 미련을 안긴 분은 「잔상」 등 10편의 김용희였다. 김용희의 원고는 활달하고 리드미컬한 언어가 압도적이었다. 여름밤 잠에서 깨어나 붙잡은 잔상으로부터 찰나처럼 아름답고 다정한 꿈의 입구를 발견하는 「잔상」이나 빈대가 들끓는다는 뉴스로부터 도시와 회사와 밤을 곤충의 모티프로 통합해 가는 상상력을 보여 주는 「충」은 활달하고 유연했다. 최저시급에 격주 토요일에도 근무해야 하는 선박 부품 제작 업체(광명기업)가 내놓은 외국인 노동자 구인 광고를 환한 아이러니의 언어로 균열시키는 「<구인> 광명기업」, “만약/기차를 타지 않았다면” “이 가정은 없었겠지”라며 가정(假定)과 가정(家庭)을 유쾌하게 횡단하는 「가정」에서 보듯 김용희의 시들은 개인의 내면 깊숙한 심미적 세계에서부터 사회와 노동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그의 활달한 아이러니와 리드미컬한 언어의 성찬을 보여 주었다. 묶음 원고의 후반부에 놓인 시편들에서 조금 힘이 빠졌는데, 이 원고들의 감상성이 극복된다면 김용희의 시재 또한 지금의 시단에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변은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가’라는 답변을 포함한다는 분명한 예시가 장대성의 시에는 있었다. 장대성의 시들은 마음의 보폭과 시선의 보폭이 비슷해 보였다. 그만큼 시선의 언어가 섬세하고 기민하다. 그의 원고들은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을 때나, 나고 자란 고향 마을에서나, 가족이나 친구, 연인과의 거처에서나, 심지어는 게임 속 공간에서조차 일정한 생각의 보폭을 유지하고 있다. 그만큼 갈고 닦았다고 생각된다. 편편의 작품에서 서술들은 개성적이면서도 전체를 아우르는 일관성이 충분하다. 예측 가능한 지점에서 예측 가능하지 않은 보폭으로 나아가지만 조금도 억지스럽거나 무리하지 않는다. 발상과 진행이 낯설지만 또한 흥미를 잃지 않는다. 신인다운 신인의 등장이다. 이러한 점들이 시작부터 끝까지 이 신인을 쳐다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최종심에서 맨 처음 언급된 작품도 장대성의 것이었고 마지막 언급된 작품도 장대성의 것이었다.
경험과 인식 사이에는 시차가 있고, 다시 그 인식과 표현 사이에도 시차가 있다고 할 때, 뛰어난 자질을 가진 시인은 경험의 내용을 인식이라는 해석적 판단 이전에 언어화하는 기민한 자기만 방법이 있다. “보고 싶어를/마지막 장이 찢어진 책을 샀다고 한다거나/날이 정말 맑다를/세상에 그림자가 참 많다고 말한 게 그것입니다//양파에게 좋아하는 시의 구절을 읽어 줬더니/멍이 들며 썩어 버린 건 비밀이에요//이처럼 말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습니다”에서 보듯 이 신인은 서두르지 않고 경험을 그 자체로 보는 훈련이 되어 있었다. “나는 내가 숨긴 마음이다/나는 내가 훔친 물건이야”라고(「복원」)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가장 섬세하고 예민하게 바라보는 사람일 것이다. 「메아리」 같은 작품에서 묘사되는 가족의 유니크함, 아니 가족에 대한 유니크한 묘사(“양말을 뚫고 나온 엄지발가락으로 대문을 밀고 가는 사람의 뒷모습”이나 “밤새 곰 인형의 눈을 붙이는 사람의 동공은 실핏줄로 붉게 물들었고”)는 이 신인이 지극히 익숙한 대상을 바라볼 때에도 그 익숙함에 눌리지 않도록 말을 고유하게 벼리는 사람이라는 믿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주걱에 붙은 밥알을 떼어 입에 넣는다/딱딱하구나 과거라는 건”이라고(「복원」) 이어 붙일 때의 엉뚱하고 유머러스한 보폭에도 넉넉한 깊이가 도사린다. 반려동물이든 피붙이든, 가족의 죽음 이미지가 어른거리는 「청진」이라는 작품에서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너’를 어쩌지 못하는 화자가 “너의 생활 방식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쓰지만 그것이 타박이 아니라 속 깊은 걱정과 연민이라는 것을 재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죽으라는 말보다 죽이라는 말이 더 죽음에 가까운 것이라면/죽을 한 숟갈 떠 입에 욱여넣고 다 돌아간 빨래를 건조대에 널어 둔 뒤에/아깐 말이 심했지 그래도 아침에는 함께 커튼을 열자 우리의 생활에서 우리를 잃지 말자/말하는 일이 사는 거면 좋겠다”에서(「청진」) 보이는 삶의 자세도 미덥다. 같은 죽음일지 모르겠지만, 시 「로그인」에서도 게임 속 공간에서 ‘너’에게 전해 들은 말은 날카롭게 읽는 사람의 폐부를 찌른다. “그쯤 너는 비밀을 털어놓았는데/바깥세상에서 구 년간 개를 길렀고, 이불 속에서 코를 골며 자는 개가 사람처럼 느껴진 적이 있고, 그 개는/사람은 걸리지 않는 심장사상충과 싸우다 죽었다는 일화//개의 눈물 자국을 지워 주다가/슬픔이 무엇인지 깨닫던 날에 대하여”와 같은 구절에서 엿보이는 슬픔의 깊이도 넉넉하다.
‘내’게 친절하지도 않고, 환대하지도 않는 세상에서 한 줌의 응답을 기다리는 오늘날의 청춘의 모습이 담긴 「힘이 닿는 한 좋은 마음」에서도 “죽으란 법 없다는 말이/더는 장난처럼 들리지 않을 때//어둠을 밀어내고 방에 들어서는 햇빛/창가에서 좋은 하루를 다짐할 때/몸에 깃든 어둠이 빠져나가며/바닥에 그림자가 만들어지는 것 같고//어떻게 지내냐고 가족에게 온 연락은/조금만 더 나중에 답하기로 합니다”와 같이 힘겨움과 그것을 견디고 살아 내려는 의지의 비등함이 그 경험에 한껏 생기를 부여한다. 응모된 작품들이 모두 진지하고 유연하며 감각적이다. 시업을 오래 밀고 나갈 재목이라 생각한다. 축하의 인사를 거듭 건넨다. _이현승(시인)
―계간 《파란》 2024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