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제는 고집멸도 이 네가지를 말하고요
팔정도는 여덟가지의 바른 행위를 말합니다.
고집멸도의 고는 인간이 고통을 느끼기에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공부를 시작한다는 말이죠.
고통에는 몸이 아프거나 죽거나 하는 고통이 있고, 마음의 상처를 받아서 고통받는 경우도 있죠.
또한가지는 타인의 고통을 보고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는 고통이 있죠. 이것은 공감능력에 따라서
그 고통의 크기가 달라지겠죠,
석가모니는 왕자로 태어나서 모든것을 버리고 배움의 길을 택한 것을 보면 이러한 공감능력이 탁월했음에 틀림없죠.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석가모니는 진리를 공부하는데 있어서 엄청난 재능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사람은 매우 드물겠죠.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의 삶을 상상해보세요.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를, 이래도 깨달음이 탐이 나십니까? 왜냐하면 깨달은 사람들은 평생동안 전 지구적인 고통을 느끼며 살았을 테니까 말이죠.
집성제는 인간의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온다는 말이죠. 집착이란 모으는것에 애착을 갖는다는 말이 되겠죠? 인간은 무엇을 모읍니까? 사람은 정보를 모으죠. 그것을 DNA에 저장을 하거나 두뇌의 기억세포에 저장을 하죠. 그리고 그것에 애착을 갖는것입니다. 정보를 저장하고 그것을 기억해내어서 활용하는것이 사람의 두뇌이고 이것이 전부인것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째서 이러한 인간의 기억능력이 인간의 고통의 근원이냐고 물으신다면,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가다보면 이러한 결론에 이른다고 할 수있고,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의 관찰을 불가에서는 연기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것이 바로 이 연기법이죠.
연기법이란 의외로 간단합니다. 즉 원인을 찾아가는거죠.
분노의 원인은 공포심이고 공포심의 원인은 과거를 미래에 투영하는 두뇌의 습관적 기능이죠.
욕망에는 자연적인 욕망과 문제가 되는 욕망이 있는데 문제가 되는 욕망의 원인이 바로 기억장치의 폐해라는것을 알게 되는데 이러한 관찰의 도구가 원인과 결과를 생각하는 시스템이고 이것을 연기법이라고 하는것이죠.
스님들은 집착을 버리고 새로운 자아인 불성을 찾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좀 잘못된 이야기 입니다. 집착의 다른이름은 기억장치인데, 인간의 두뇌의 기능인 기억이나 생각을 버리면 사람으로 살수가 없겠죠. 그러나 한가지 대안이 있습니다. 기억의 작용이 필요할때는 작용을 하지만, 평소에는 조용히 그냥 있는것이죠.
인식의 기능이 작동할때는 모든 에너지가 인식에만 쓰이고 기억이 끼어들거나 참견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기억과 인식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무엇이라고 하면 좋을까요? 불교용어 중에서는 중도라는 단어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더군요. 그래서 이러한 상태를 저는 중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이견이 많죠.
원숭이를 보세요. 그들은 끊임없이 꼼지락거립니다. 몸을 잠시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동이 필요하거나 의미가 있거나 하지 않습니다. 적절한 비유가 아닐수도 있지만, 우리의 사고는 이러한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관찰해보면 아실겁니다. 끊임없이 주절거리고, 끊임없이 생각하죠.
인간의 지식 즉 사고는 자기자리가 있다고 할 수있죠. 사회에는 각각의 구성원이 자기 자리가 있듯이
사람의 사고도 자기 자리가 있습니다. 즉 평소에는 가만히 있는것이죠. 이것이 삼매경입니다.
이 상태를 일컬어 고요함이라고 하는것이죠. 그래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라고 하는것이죠.
엔진의 RPM이라는것이 있죠? 천천히 돌때는 소리가 나지만, 고속으로 회전하면, 소리가 없어집니다.
그렇듯이 두뇌가 고요해지는것은 잠자는것이 아니고 최고 속도로 회전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가혹한 훈련을 통해서 두뇌가 데미지를 입고 그래서 조용해지는 두뇌는 최고 속도로 회전하기 때문에 조용해지는것과는 다른것이죠.
평정심을 이루는 경우가 이 두가지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두뇌가 둔감해지면 일종의 평정심을 보이지만, 이것은 의미가 없죠. 왜냐하면 이것은 두뇌가 데미지를 입었다는 것이니까요.
또한가지는 두뇌가 최고의 에너지를 가지고 최고의 속도로 회전하기 때문에 사고의 간섭이 없어지고 결과적으로 평정심이 생기는 것이죠.
많은 분들이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두뇌에 데미지를 입히고 있죠. 안타깝지만요. 우리의 두뇌가 어떤경우에 데미지를 입습니까?
두뇌가 가장 싫어하는것은 똑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과부하가 걸립니다.
운동이 아무리 좋다지만 똑같은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하면 육체가 망가지겟죠.
똑같은 경전을 매일 무한 반복해서 읽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혹은 명상을 한다고 하면서 어떤 단어를 무한 반복해서 암송하죠.
혹은 동굴안에서 몇년이고 꼼짝하지 않고 있습니다.
잠을 안자는 사람, 혹은 금식을 하는 사람, 수 많은 자신만의 방법이 있겠죠.
육체적인 정신적인 건강을 잃으면 모든것을 잃는것이라는것을 모르는 바보가 어찌 깨달음을 얻을수가 있나요.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우리는 멸성제에 이르게 됩니다. 고통이 사라지는것이죠.
말이 그렇다는 것이고 제가 보기에는 고통과 적절한 관계를 맺는다는 말이 맞을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거나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된다는 말이겠죠.
이렇게 자아가 멸하게 되면 거기에는 어떻한 질서가 생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있는 상태를 일컬어 도성제라고 하고 이러한 때에 8정도를 이루겠지요?
여기까지가 우리가 할 수있는 전부죠. 모든 수행은 여기까지입니다.
석가모니가 이 다음의 상황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다음의 단계는 워낙에 많은 설들이 있고, 검증하기도 어려우며, 적절한 단어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단이라고 서로 싸우고 있지만, 사실 이러한 단계는 어찌 되어도 좋은것인데
어차피 여기까지 오기도 불가능에 가까운데 이 이후를 걱정하는것을 보면
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공부를 하는데 하나도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죠.
우주의 원리를 알게 되면 깨달음을 얻기가 쉽다고 많은 분들이 생각하시죠.
그래서 천부경이든, 무슨무슨 비서같은것에 매력을 느끼죠. 자신의 마음의 흐름도 읽지 못하는데
하늘의 원리를 알아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하는것인지 저는 이해가 안가죠.
어린아이에게 핵무기를 쥐어주는 바보같은 신이 있을까요? 자연의 섭리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신의 유무를 논하는것이 아니었습니다.
고요해진 두뇌는 머리속에 비어있는 공간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공간에 무엇인가가 들어 온다고 합니다.
그것을 불성이라고 할지, 성령이라고 할지, 우주의 에너지라고 할지, 지혜라고 할지, 사랑이라고 할지, 자비라고 할지, 우주의 질서라고 할지, 얼이라고 할지, 어찌 되었든 이름이 중요하겠습니까?
이것을 편의상 마음이라고 합시다. 이러한 마음은 비어 있는 공간에 들어와 나의 두뇌와 조화를 이루고 협업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마음은 상상할수없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랍니다. 나의 것이 될 수도 없고 너의 것도 아니죠.
그리고 깨달음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모두에게 들어오는것도 아니랍니다.
운이 좋으면 만날수있는 그런것이라고 하더군요.
더 이상은 저도 아는바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8정도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 싶군요.
바르게 본다든지 바르게 행동한다든지 하는곳에 이르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요?
사악한 생각이 든다면 이것을 즉시 멈추고 머리에서 지워버리면 바르게 생각하는 방법을 터득할까요?
긍정으로 가는 길은 부정을 통해서 간다고 합니다. 말이 어렵지 사실은 간단한 겁니다.
즉 내가 어떻게 어리석은지를 정밀하게 관찰하는것을 통해서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난다는것이죠.
어리석음을 피하고 지혜로운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고 지혜로워 지는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잘못된 것을 버린다는 말은 반대 방향으로 튀어 나가는것을 의미하는것이 아닙니다.
분노가 일었을때 분노를 통제하는것이 분노를 극복하는것이 아니죠.
분노에 대해서 완전히 알게 되었을때 분노로 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죠.
이것이 부정을 통해서 긍정으로 간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부정적인 것을 멀리 하거나 지우거나 회피한다고 긍정적인 곳으로 가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것의 모든 모습을 완전히 알게 될때 긍정으로 자연스럽게 가게 되는것이죠.
잘못된것이지만, 그래도 있는 그대로의 것을 사랑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죠.
잘못된 것을 그냥 버리는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이것이 8정도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하는것이죠.
바르게 본다는것은 내가 어떻게 왜곡되게 사물을 보는지를 깨닫는것으로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주 철저한 방법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상상이상으로 훨씬 더 교활하고 우리를 속이는데 능숙하답니다. 머리가 9개 달린 뱀의 그림을 보신적 있으시죠.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상상의 동물이 아니고 실재하는 동물이죠.
그러니 자신의 생각을 믿지 마세요. 자신의 생각을 믿으면 잠들게 됩니다.
@창발 재생이 연기이군요?
@올빼미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를 합니까라고
제자가 묻습니다
물음에
연기법으로 답하시죠
중도로
상주론(아트만)과 단멸론(물질론자) 오류를 설하시죠
인공지능에게 나를 옮겨 심는다면,
나의 고통은 사라지나요?
나의 고통과 인공지능의 고통을 합하면 두배의 고통이 되겠네요.
이것은 명백하게 나에게 위안이 되지 않습니다.
나의 고통이 사라지는것이 아니고 나의 죽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데
인공지능의 내가 천년만년 산다고 해도 죽음을 바라보는 나에게 위안이 안될것이고
구원이 되는것도 아닐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부처님은 존재는 고라 하시죠
거기에서 불교가 나오게 된거고
다시 태어날때
기억이 저장된 상태로 다시 태어나면 어찌될까요
형벌이죠
죽음은 망각이라는 선물로 자리매김 하는 것 아닌가 합니다
제가 인공지능을 이야기한거는
나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답이 없죠
나라는 존재가 있는게 아니라
느낌. 나. 기억 순으로 보면 가능하지 않나요
@창발 인공지능에 나를 옳겨 심으면 형벌이죠
망각 상태에서 다시 창발할때
나인가 아닌가
나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부처님 말씀을 중생이 어찌 알겠습니까
@창발 누가 그러던데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것은 문을 닫아 버리는것이라고 하던데요.
나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같은것도 아니고 다른것도 아닌데 창발한 것이라면
제가 말한 마음이나 대승불교의 불성이네요. ㅋㅋ
아 그래서 창발이라는 아이디를 쓰는군요. 멋있네요.^^
@올빼미 아트만 논자들은 질문에 답을 못해요
생각으로만 나온 이론이라
그냥 믿으라 하지요
인공지능이니 하는 것은
아트만이라는 개소리를 개소리로 받아친겁니다. 별거 없어요
느낌으로 나가 탄생한거고
재생으로 다시 태어나면 그게 나일까
나도 궁금합니다
결국은 아트만으로 귀결되는게
인간의 한계 아닌가
@올빼미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상주론도 아니고 단멸론도 아니다
같으냐. 다르냐는 답이 아니다
중도. 즉 정도로 가라
같은지. 다른지에 허우적거리지 마라
중도를 설하면서
양극단은 답이 아니다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저는 불교에 입문한 적은 없습니다만....
게시글과 댓글들을 따라가서 이해해보면 사성제는 네 가지의
깨우침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고집멸도라는 말인데...
좀더 분해해서 이해한다면 (고집_멸도)로 두 갈래로 갈라지는
느낌이 듭니다.
한꺼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네가지가 하나로 합쳐진다는 생각
이 드는군요.
(고집)은 어떤 현상의 원인을 말하는 것 같고 (멸도)는 그 해결
의 방법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합쳐서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12연기에
순방향
역방향
순방향은
세상의 이치
세상의 이치 학습
역방향은
이치에 다가가는 방법
즉. 중도
중도를 8정도로 설하신 것 아닌가 합니다
@창발 12연기라 함은 12단계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12가지 갈래를 말하는것입니까. ?
@창발 아~ 순방향 역방향으로 말씀하신 걸로 봐서
갈래가 아니라 단계를 말하는것 같군요.
@유리상자 고의 발생 과정을 먼저 설하시죠
순서가 이렇다
그럼 고를 어떻게 끊나
역방향으로 이리 끊으라고 설하시죠
@창발 알겠습니다.
역시 종과 횡의 개념중에서 종적 개념이라는 말이네요.
단계 또는 순서, 어떤일의 일어난 순서 라는 의미...
어떤 결과에 대해서 역순분석해서 그 원인을 찾는다는개념...
결과라는 개념은 고통을 전제하는 것이겠지요.
@유리상자 고집이 12연기 순방향
고의 원인이 집
멸도가 12연기 역방향
멸의 원인이 도
저는 집중이 안되는게 문제에요.
의식이 자꾸 끊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