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정신과 낮은 것의 시학
― 전종호 시인의 시 세계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전종호 시인의 시 세계를 한마디로 얘기하면 ‘긍정의 정신’이다. 그의 시를 읽으면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고, 아무리 불행한 일이 닥치더라도 감내할 수 있는 무한 긍정의 에너지를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그의 시가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는 삶의 고뇌와 고통을 직시한다. 하지만 이런 시선이 비관적 세계관이나 절망의 심연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딛고 일어서는 든든한 정신적 지평을 제공해 준다. 그의 시의 이런 긍정의 정신은 먼저 삶에 대한 당당한 태도에서 온다. 다음 시에서는 이런 삶의 태도가 참나무로 비유된다.
너처럼 살고 싶었다
푸른 빛 맨몸을 던져
순간에 온 산을 덮고
햇빛 찰랑이는 이파리를 흔들며
무릎 아래 도란도란
새끼들을 키우며 살고 싶었다
독야청청 소나무는 아닐지라도
비탈이나 능선 아니면
아무데서나
…(중략)…
지켜보면서 그렇게 서서
여름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었다
…(중략)…
온몸을 태워 진갈색으로 타올라
가을이 지나면
한꺼번에 아래로 땅속으로 져서
작은 풀벌레들의 먹이가 되거나
살아 있는 것들의 거름이 되어
날 기억하지 마오
산속으로 걸어 들어가
겨울 눈꽃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 「참나무처럼」 부분
시인은 참나무처럼 살기를 꿈꾸고 또 그렇게 살려고 실천하고 있다. 그런데 참나무와 같은 삶은 어떤 것일까? 위 시에 그것이 잘 나와 있다. 그것은 소나무처럼 독야청청하게 자신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싹틔운 생명들과 함께하는 공존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하늘을 쳐다보며 거리낌이 없는 그런 삶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자신의 몸을 버려 다른 생명을 위한 먹이나 거름이 되는 그런 삶을 시인은 꿈꾸고 있다. 그런 삶의 태도에는 세속적인 출세욕이나 소유욕은 끼어들 수가 없다. 당당하게 살다 가장 낮은 곳으로 돌아가서 또 다른 생명들에게 도움을 주면 그뿐이다. 이 아름다운 긍정의 세계를 시인은 “겨울 눈꽃처럼 사라지고 싶다”라고 빛나는 이미지로 마무리하고 있다.
전종호 시인의 시들에서 긍정의 정신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바닥의 시학에서 온다.
오대산에 가면 새벽 일찍 일어나
전나무숲길을 걸을 일이다
숲에서는 절대 키와 나이는 재지 말고
숲길을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일 일이다
바람은 발이 없어서 빠르고
말이 없어도 통하지 않는 법이 없으니
바람 한 주먹 깊이 들이마실 일이다
…(중략)…
꽃내음이 코를 찔러 아는 체하거든
무명의 풀꽃들 은밀한 민원을 가슴에 새기고
오대산에서는 오로지 낮은 자세로
흐르는 물소리의 진언眞言에 무릎을 꿇고
오대천 물소리 한 바가지 떠안고 돌아올 일이다
- 「오대산에 가면」 부분
“숲에서는 절대 키와 나이를 재지 말”라고 시인은 말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숫자로 환원한다. 연봉과 아파트 평수는 물론 가지고 있는 차의 배기량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키와 몸무게로 한 사람의 신체적 등급을 매기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계층을 구별하고 등급을 만든다. 시인이 거부하는 것은 바로 이런 세속적인 평가이다. 시인은 이런 평가를 내려놓고 “오로지 낮은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길 권유한다. 그럴 때 비로소 “꽃내음이 코를 찔러 아는 체하”고 “무명의 풀꽃들이” 하는 말을 가슴에 새길 수 있다고 한다. 세상의 아름다움과 삶의 비의가 이 낮은 자세를 통해 얻어질 수 있다는 시인의 사색이 담겨 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오대천 물소리 한 바가지”는 우리의 지친 삶을 위로해 줄 긍정의 에너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낮은 자세를 취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높이의 극한을 바라거나
앞만 보는 직선의 낙관주의는
바닥을 바로 보지 못한다
바닥까지 떨어졌다거나
바닥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어둠의 깊디깊은 슬픔을 모른다
발 디딜 바닥 없이
하늘 아래 설 수 없고
밟히는 사람들의 바닥 없이는
땅 위에 낙원을 세울 수 없음을
캄캄한 어둠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다
- 「바닥」 부분
바닥 즉 가장 낮은 곳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바닥을 보지 못하고 앞만 보거나 위만 쳐다보는 낙관주의를 “직선의 낙관주의”라 명명하며 비판한다. 상승과 발전을 믿고 끝없이 전진하는 그런 삶의 태도를 지적하는 것이다. 사실 현실적으로 이런 낙관주의를 믿고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할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문명이 바로 이런 낙관주의적 발전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은 이런 낙관주의로는 결코 “낙원을 세울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오직 바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닥은 추락의 끝이기도 하지만 시작의 발판이기도 하다. 이 바닥이 든든해야 어떤 구조물도 단단히 세워질 수 있고, 바닥의 삶이 있어야 건강하게 사회도 발전한다.
이런 바닥의 상상력은 최근 쓴 전종호 시인의 시들에서 이 땅의 바닥에 사는 존재들의 구체적 모습을 그려내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다.
…(상략)… 개새끼 주는 것이라고 왜놈들 속이고 굶주린 내 불쌍한 자식들에게 먹이던 떡이 이남에 와서 전쟁 통에 죽을 목숨을 살리고 가라앉던 섬마을을 부풀려 다시 떠오르게 한 섬마을 재생의 떡이 되었다고 하네 황해도 연백 떡이 바다를 건너와 이제 강화 교동 떡이 된 강아지떡 옆집 궁전다방 노른자 쌍화차와 함께 먹으면 더 기막힌 개떡도 아니고 메떡도 아니고 무엇이든 찰떡같이 알아듣고 살리고 살리는 멍멍멍 찰찰찰 강아지떡이라 하네
- 「강아지떡」 부분
가장 못사는 사람들이 차마 굶을 수 없어서 먹었던 ‘개떡’이 맛있는 찹쌀떡인 ‘강아지떡’이 되어 팔리고 있는 것을 보고 이 땅의 민초들의 가난했던 시절의 삶을 돌아보고 있다. 그 시절 가장 밑바닥에서 허덕였던 민초들의 삶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번영도 불가능했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관광 상품이 되어 팔리고 있는 강아지떡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먹었던 “생존의 떡”이었음을 시인은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이 바닥의 정신을 잃어버렸을 때 지금 우리 사회의 번영은 헛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다음 시는 우리 사회 가장 밑바닥에서 힘든 노동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노동자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허무하게 죽는 생명을 파리 목숨이라고 부르는 것이
파리가 하찮다는 것인지 목숨이 가볍다는 뜻인지는
알 바 없으나 날마다 노동자들이 저리 쉽게 떨어져
죽고 끼어서 죽고 깔려서 죽고 찢기고 불타서 죽어도
힘 있는 놈 누구 하나 눈 한 번 꿈쩍하지 않는 것은
사람 목숨을 발바닥의 때처럼 여기는 시절 탓이니
…(중략)…
파리가 얼굴에 붙어 성가시게 해도 귀찮아하지 말고
용처럼 귀하게 대접하고 내친김에 파리 목숨을 청룡
목숨이라고 바꿔 부르면 혹시나 일하는 사람 목숨도
귀히 여기지 않을까 대낮에 헛꿈을 꾸어보는 것이다
- 「파리 목숨」 부분
시인은 노동자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간주하는 사회는 결코 바람직한 사회가 아님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돈과 성과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사람의 생명마저 이런 것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중에서 가진 것 없이 하루하루 육체적 노동을 통해서만 생존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의 목숨은 쉽게 희생될 수밖에 없고 사회는 이들의 희생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시인은 이들의 목숨이 파리 목숨이 아니라 “청룡 목숨”처럼 소중하고 무거운 것으로 여겨지는 그런 사회가 되는 꿈을 꾼다. 그게 “대낮에 헛꿈을 꾸”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런 꿈이 모여 더 나은 세상으로 한발 다가가는 것이리라. 시인들이 꾼 이 헛꿈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작은 그러나 위대한 힘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시인들이 시를 써야 하는 이유가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