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 천상병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 시선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 중에서
****************************************************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그의 ‘행복’을 난도질 한다면 아마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아내의 벌이로 연명하는 지지리도 못난 남자.
요즘 세상 대학 나온 게 뭐 대수일 것도 없고
언제부터 시인이 그렇게 명예로운 직업이었는가.
정말 웃기는 짬뽕이다.
마흔둘 늦장가 들어 감지덕지이긴 한데
생긴 것 하며 어디 마누라 말고 다른 여자 넘볼 능력이나 되면서 하는 말인가.
억울하게 붙들려가서 성기에 전기고문 받아 아이 생산이 불가능하다는 부분은
지극히 통탄할 대목이며
의정부에 마련된 구옥이나마 행려병자 경력의 소유자에겐 대궐임에 틀림없다.
좋아하는 막걸리를 아내가 다 사주었다는 말은 말짱 거짓인 것이
그에게 막걸리 값으로 5백 원씩 적선해준 문인 친구 후배가 어디 한둘이라야지.
그리고 그리 사는 사람이 하나님 빽이라도 없다면 어쩔 것인가.
뭐 대충 시비를 걸어도 이 정도며 어느 대목은 아니꼽기까지 하다.
그런 그에게 우리는 이 시대 마지막 순수시인 이란 수식을 골잘 붙였다.
그의 시와 이력, 그의 기행과 생긴 모습 등이 모두 그러한 칭호를 쌓아올린 조적물이다.
어떤 시들은 너무 단순 소박해서 겉으로 드러난 그 천진성에 기가 막혀
현학적인 비평가들은 모욕감까지 느낀다고 했다.
시는 고급 예술이고 매우 진지한 것인데
"이런 시는 유치원에서도 쓸 수 있는 것 아닌가" 불평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천상병이야말로 동시대의 시인 가운데 가장 '정직한 시인'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그 작품이 지닌 깊이와 진실은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가난과 무능력이 빗어낸 나름의 삶의 방식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비린내와 구린내를 풍기며 정직과 진실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보다야 하나님 빽을 둘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다.
위선과 죄악으로 오염된 세상에서 그는 분명 지진아로 살았으며,
하루 용돈 2천원이면 마냥 행복했던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였다.
그런 그에게 막걸리 값 한 닢 줘보지 못한 지인은 내심 불쾌하다.
‘나한텐 왜 돈 달라는 얘길 못해’
왜냐하면 그 순진무구한 천상병에게 거북살스럽게 느껴진 친구거나
속된 놈일 것이라 찍힌 경우가 십중팔구일 터이므로.
어제(4월28일)는 그가 이 세상 소풍 마치고 하늘로 돌아간 지 16년 되는 날이었다.
그가 살아생전 만져보지 못했던 몇백만원이 그가 죽고서 조의금으로 걷혔다.
생전에 그렇게 ‘큰돈’을 만져본 적 없는 시인의 장모도 가슴이 뛰었다.
이 큰 돈을 어디다 숨길까. 퍼뜩 떠오른 것이 아궁이였다.
거기라면 도둑이 든다 해도 찾아내지 못할 곳이지 싶었다.
노인은 돈을 신문지에 잘 싸서 아궁이 깊숙이 숨기고서야 편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시인의 아내는 하늘나라로 간 남편이 추울 거라는 생각에
그 아궁이에 불을 넣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 푸르스름한 빛이 이상했다.
땔나무 불빛사이로 배추이파리 같은 것들이 팔랑거렸다. 조의금은 그렇게 불타버렸다. 다행히 타다 남은 돈을 은행에서 새 돈으로 바꿔줘,
그 돈을 먼저 떠난 시인이 ‘엄마야’라며 따르던 팔순의 장모님 장례비로 남겨둘 수 있게 되었다. 시인은 그렇게 가는 순간에도 슬픈 동화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그리고 지난 4월24일엔 찬상병 시인을 기념하는 공원이 상계동에 조성되었다.
생전 약 8년간 거주했던 수락산 자락에 이 시대 순수 시인을 기리며
시인의 다양한 작품을 음성으로 감상할 수 있는 시비도 세웠다.
또 시인이 생전에 쓰던 안경과 찻잔, 고무신과 재떨이, 집필 원고 등
유품 2백여점을 모아 만든 타임캡슐을 공원에 묻었다.
이 캡슐은 시인의 탄생 200년이 되는 2130년 1월 공개할 예정이란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우리에게 풍요로운 행복을 선사했던 시인의 삶을 추억하며
공원을 거니는 것도 ‘행복’일 수 있겠다.
'행복은 느끼는 자의 몫'이란 낡은 메시지가 객관적 패자를 위한 위로의 허사가 아니라
진정한 삶의 태도로서 유용한 잠언임을 일상의 마디마디에서 느끼며
하늘로 돌아갈 때 까지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ACT4
귀천- 이동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