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제주4.3.평화문학상)
로프 / 김산
공중의 바람은 한시도 그대로 머무는 법이 없다 붙들린 기억 저편으로 얽매이고 달아났다 이내, 방치하고 짓무른 거리의 흙 알갱이들을 토해냈다 13년간 복직을 위해 뛰어다닌 관절염은 헛기침 소리에도 소울음을 게워냈고 욕설처럼 들이밀던 탄원서는 침묵의 목도장만 시뻘건 일수를 찍어댔다 끝까지 몰려본 사람은 안다 눈 덮인 산기슭에 놓인 덫을 알고 있으면서도 외길로 쏜살같이 뚫고 나가는 산짐승은 안다 배낭에 생수 몇 통을 聖水처럼 짊어진 조성옥 씨는 지상 50미터 철강회사 굴뚝 위로 올라갔다 나선형의 계단을 징검돌처럼 한 생 한 생 밟을 때마다 죽지 위로 날개가 파닥거렸다 경계와 경계 사이에는 금을 긋는 법이 없다 땅은 땅이면서 하늘은 하늘 그대로를 담고 있다 굴뚝의 몸뚱어리가 후끈 달궈진 쇠근육처럼 매일같이 조여왔다, 휘어졌다 장미보다 들국을 좋아하는 눈이 파란 아내, 코넬리아는 배낭에 울음을 담고 로프를 묶고 있다 대롱대롱 매달린 배낭이 출렁이며 경계를 넘을 때 그는 순간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자신을 동여매고 산 한 올의 가닥은 무엇이었을까 백만 원 남짓의 서정적인 급료와 선술집에서나 통할 법한 철강 대기업의 명함 한 장 아니다 결코, 그건 아니다 웃자란 수염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공중의 바람이 지난날, 그가 배포했던 굴뚝 아래 뒷굽들의 처우개선 유인물처럼 세상의 길가 구석구석까지 낮게 낮게 손짓하고 있었다
바람이 제법, 쌩쌩하다
(제5회 제주4.3.평화문학상)
검정 고무신 / 박용우
어린 동생이 끌려가던, 길이었다
따라오지 말라고 눈물로 던진, 길이었다
여기다, 여기다 하며 두려움이 떨어뜨린, 길이었다
누이가 주워 가슴에 품고 가는, 길이었다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석날, 까마귀도 종소리에 숨죽인, 길이었다
섯알오름에서 노을이 핏물처럼 흘러내리는, 길이었다
땅 밑에서 고구마가 굵어지고 땅 위에서 고구마 꽃이 자주 빛 울음을 터뜨리는, 길이었다
누이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손으로 막고 초경을 앓던, 길이었다
동생에서 누이에게로 흘러내린 붉은 핏줄기가 상모리(上慕里) 불타는 골목마다 비린내를 몰고 가는, 길이었다
(제5회 제주4.3.평화문학상)
취우翠雨 / 정찬일
봄비 맞습니다. 누가 급히 흘리고 갔나요. 밑돌 무너져 내린 잣담에서 밀려 나온 시리 조각. 족대 아래에서 불에 타 터진 시리 두 조각 호주머니 속에서 오래도록 만지작거립니다. 손이 시린 만큼 시리 조각에 온기가 돕니다. 온기 전해지는 길에서 비 젖는 댓잎 소리 혼자 듣는 삼밧구석입니다. 푸른 댓잎에 맺힌 빗방울 속이 푸릅니다.
이 봄비 그치면 취우 속에 가만히 들어 한밤 한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매 순간 모든 것이 흔들리고, 빛 속에 숨었던 얼굴들 다 드러나고, 누구도 내 모습을 보지 못하고, 진저리치는 생으로 불거진 물집 하나 서러운 적요로 붉게 물든 열매 하나조차도 투명하게 사그라지는
내게 와서 내가 되지 못한 눈빛들이, 돌을 뚫고 깨부수던 말들이, 견고한 나무의 길로 위장했던 내 비린 상처들이, 어둠을 혼자 견뎌내던 새들조차도 흔들리며 다 흩어지겠습니다.
이 봄비 그치면 취우 속에 가만히 들어 몸으로 번지는 비취색 나뭇잎 하나 배후로 삼아 한밤 한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단 한 번도 따뜻한 적 없는 시리 조각에 잠겨 한밤 한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주머니 속 시리 두 조각, 긴 세월 지나도 맞붙이 치는 소리 잇몸 시리게 쩡쩡거립니다. 이 봄비 그치면 취우 속에 가만히 들어 한밤 한낮을 꼬박 잠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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