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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 조선왕조 실록(98편)
관왕묘.생뚱맞죠.1
예전에 맥아더 동상 철거 문제로 시끄러윘지요.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져서 철거해야 한다.못 한다 티격태격 싸우더니만 결국 대통령 까지 나서서 맥아도 동상 철거 반대 입장을 표명 하면서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따지고 보면, 맥아더가 한국 전쟁에 참전한 건 대통령에 출마하기 위해서 였고.
대통령 당선을 위해 한국전 에서 승리해야 했던 맥아더는 핵폭탄
투하까지 주장했던 걸 보면.여하튼 뭐 맥아더는 맥아더 이니까
이쯤해서 맥아더 이야기는 접겠다.
자,그런데 말이다.
이 맥아더 사건과 비슷한
케이스 가 5백여 년 전 조선에서도 벌어졌으니 바로 말 많고 탈 많은
관왕묘가 바로 그것이다.
이거, 관왕묘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삼국지 아니 삼국지 연의와도 상당히 연관이 있는 이야기 인데 이 이야기를 다 읽으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 삼국지연의’에 환장하는지도 나온다.
자,그럼 관왕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 봅시다.
잠깐!! 요대목에서 관왕묘에 대하여
알아보고 갑시다.
관왕묘(關王廟) 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명장인 관우(關羽) 의 위패나 조각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입니다.
관우를 무신(武神)이나 영웅으로 숭배하는 중국의 '관우 신앙'에서 비롯되었으며, 관제묘(關帝廟) 혹은 무묘(武廟)라고도 부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관왕묘는 꽤 깊고 독특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조선에 관왕묘가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선조 대)였습니다.
이때 참전한 명나라 장수들과 군사들은 전쟁터에서 무운을 빌기 위해 관우 사당을 지었습니다.
이들은 "전투 중에 관우의 신병(神兵)이 나타나 왜군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주장하며 조선 조정에 관왕묘 건립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성리학적 가치관을 따르던 조선의 유학자들은 역사 속 일개 무장인 관우를 종교적으로 숭배하는 것을 낯설어했습니다.
하지만 명나라의 압박과 외교적 필요성, 그리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국가 차원의 관왕묘를 건립하게 됩니다.
한양(서울)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곳에 관왕묘가 세워졌으나, 현재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곳은 동묘(동관왕묘)입니다.
동관왕묘 (서울 동묘): 1601년(선조 34년)에 완공되었으며, 현재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있습니다(보물 지정).
앞뒤로 긴 직사각형 평면과 벽돌을 쌓아 올린 벽면 등 중국식 건축 양식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 특징입니다.
오늘날 주변의 '동묘 벼룩시장'으로도 유명합니다.
남관왕묘 (남묘): 1598년 명나라 장수 진유격의 요청으로 숭례문 밖에 가장 먼저 세워졌던 관왕묘입니다. (지금의 사당은 동작구로 이전되었습니다.)
지방의 관왕묘: 명나라 군대가 주둔했거나 왜군과 격전을 벌였던 지방 요충지에도 관왕묘가 세워졌습니다.
안동 관왕묘, 성주 관왕묘, 강진 관왕묘, 남원 관왕묘 등이 대표적입니다.
강진 고금도에 세워졌던 관왕묘의 경우, 후대에 명나라 제독 진린과 함께 이순신 장군을 별사에 함께 배향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후기 국왕들의 격상: 선조 대에는 마지못해 지었으나, 숙종, 영조, 정조를 거쳐 특히 고종 대에 이르러서는 관우 신앙을 국가적으로 크게 장려했습니다.
고종은 관우를 '왕'에서 '황제'로 추존하며 서묘와 북묘를 추가로 건립했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난세를 극복하는 수호신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관왕묘는 국가 제사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재물과 복을 기원하고 병란을 막아주는 강력한 민간 신앙(관성교 등)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지난 6월21일 서울지역답사때 갔었지요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어이 이흘 너 이번에 진유격이 접반관 으로 뽑혔으니까 알아서 진유격 잘 모셔라.
괜히 밑 대주고 뺨맞는다고, 접대는 접대대로 하고 나중에 뒷소리 나오지 않게 한번 탬버린 흔들 때도 힘 있고, 절도 있게.알았지.
아 젠장,또 접반관입니까.
아니, 내가 떼놈들 술 상무 해주려고
뼈 빠지게 과거 공부 했는지 아십니까.
야이 자식아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리게 생겼어 나라의 운명이 걸려있는 마당에 술상무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떠냐.
네가 두 눈 딱 감고, 탬버린 한번 더 흔들어 주고, 윤발이 형 성냥개비 물고 부르던 노래 그 뭐시냐 아 그래 당년정.그런거 불러주면서 분위기 한번 맞춰주면 나라가 편해진다니까.
힘들더라도 좀 참아봐. 조국은 지금 너의 탬버린 쉐이크 스킬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알겠지.
임진왜란 당시 조선.정말 죽다 살아났다.
명나라의 파병이 없었다면, 지금쯤 이 연재 한글이 아니라 쪽빠리 나라글인 히라가나로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뭐,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명나라 만세, 중국 만세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명나라 애들도 실상은 자기들 국경을 지키기 위해 참전한 것이지 조선을 위해서 참전한 것도 아니고.조선에 와서는 아예 안 오느니 못한 짓을 하고 다녔으니.
오죽하면 ‘왜군은 얼레빗이요,명군은 참빗이다’라는 말이 나왔을까 왜군은 그나마 설렁설렁 약탈해 갔지만, 명나라는 참빗처럼 저인망식, 쌍끌이 수탈로 전란에 지쳐있는 조선 백성들을 괴롭혔으니 이런 상황임 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힘없는 나라의 설움을 곱씹으며 명나라 장수들에게 맨투맨 으로 술상무’를 하나씩 붙였으니 그 이름이 바로 접반관 이었던 것이다.
요대목에서 접반관 에 대하여^^
접반관(接伴官)은 조선 시대에 외국의 사신(주로 명나라나 청나라의 사신)을 맞이하고 대접하기 위해 임시로 임명했던 관리를 뜻합니다.
조선 왕조에서 외교적으로 가장 중요했던 대중국 외교(사대 외교)의 핵심 실무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신이 조선 국경(압록강 등)을 넘어 한양으로 들어올 때부터 다시 돌아갈 때까지, 모든 일정에 동행하며 이들을 안내하고 호위했습니다.
사신의 요구 사항을 조정하거나 조선 조정의 입장을 전달하는 외교적 소통 창구 역할을 했습니다.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고, 이들이 머무는 객사에서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세심하게 챙겼습니다.
사신을 상대하는 일은 국가의 체면이 걸린 중대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접반관은 보통 아무나 임명되지 않았습니다.
보통 정3품 이상의 당상관(堂上官)이나 판서급(정2품) 등 거물급 관료가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중국 사신들과 한시(漢詩)를 주고받으며 학문을 논할 수 있을 정도로 문장력이 뛰어나고 성리학적 소양이 깊은 인물이 발탁되었습니다.
시 한 편으로 사신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외교적 난제를 풀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명나라 사신들은 종종 까다로운 요구를 하거나 무리한 은(銀)과 토산품을 요구하여 조선 조정을 곤란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이때 접반관이 중간에서 얼마나 세련되게 외교 수완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국가적 부담이 줄어들기도 하고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기나 인조 대의 친명배청 정책 등 외교적 위기 상황 속에서 접반관들의 역할은 특히나 막중했습니다.
다시 원위치하여서^^
예나 지금이나 한민족들.영업 하나는 잘했다.아유, 유격이 형 오늘 너무 몸 사리는 거 아니예요
왜 도우미들이 맘에 안 들어요
아 쉬파 마담 어딨어.
엉 지금 우리 유격이 형이 삐졌잖아!
유격 형 좀만 기둘려요
제가 금방 애들 교체 해주께.
어디서 이런 생기다 만 것들을
뽑아가지고.
일단 한잔 해 형.
응.흘아.너 오늘 너무 오바 한다 해 형,
내가 원래 좀 한 오바 하잖아.
형이 오바하지 말라면 안할게.
화풀어 형어이 마담!
빨랑 안와.이것들이 지금 수질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엉.
청계천을 아무리 뚫어놓으면 뭐하냐고!
애들 얼굴이 완전 시화호구만!
아 됐다 해!그런 외모지상주의 옹호 발언은 한명으로 족하다 해
그나저나 너한테 살짝 청이 있다 해.
아이 형, 섭섭하게 우리 사이에 무슨 청이야.
형 뭔데 뭐 형 차비 필요해 아님 떡값.
너네는 툭하면 떡값인가 해
떡 못 먹어 환장 했나 해!
아니 뭐.오고가는 떡값 속에 싹트는 장학생 이라고 됐다 해.
에 얼마 전에 양노아 장군을 만났다 해.
아, 노아 형.요즘 노아형은 잘 있대 그 형 만나서 술 한잔 해야 하는데.
너도 알다시피 나도 관사에 관왕묘를 만들었다 해.
너도 삼국지는 읽어 봤다 해.
아, 삼국지 당근 읽었지,그게 뭐시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위해서.
차라리 해리포터를 읽었다 해라 해.
일단 넘어가겠다 해
울리 사람들 관왕에 대해 아주 특별한 감정 있다 해.
울리 명나라 군대가 쪽바리 놈들 맞아 이기는 것도 다 관왕의 도움이 있어서 그렇다 해.
알지,관왕.그분 참 대단한 분이지.
젊었을 때 그냥 맨주먹으로 너 소야 나 관왕이야.
딱 이렇게 가.가서 소뿔을 딱 잡고.
그건.최배달이다 해.
너 계속 개념을 가출시키는 소리 하면 재미없다 해
그래서 계속 말을 하자면, 울리 사람 관사 마다 관왕묘가 있다 해
그래서 그런지 전투 때 마다 관왕의 신령이 내려와 명나라 군대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해.
그런데 울리 관사 너무 좁아서 관왕을 잘 못 모신다 해.
그래서.그래서.이번에 관왕묘를 좀 넓게 확장 이전 했으면 한다 해.
그럼 이전해 형.
포장이사 전화번호 알려줄까.
음 싸고 잘하는데 있으면 알려달… 이게 아니다 해!
너 때문에 말이 꼬인다 해!
울리 사람들이 관왕묘 이전하는데 좀 도와 달라 해!
도와달라고.
그렇다 해.
울리 사람 다 있는데 목수랑 미장이는 조선 사람들이 최고라고 들었다 해.
사람 좀 붙여 달라 해.
명나라 장군 진유격의 묵직한 지원요청.과연 조선 조정은 관왕묘 확장이전 사업을 지원 할 것인가 초특급 대하 울트라 역사 사극 관왕묘.생뚱맞죠’
엽기 조선왕조 실록(99편)
관왕묘.생뚱맞죠.2
술상무.아니 접반관 이흘의 보고를 전해들은 조선 정부는 대책회의에
들어가는데,아니 관우면 관우지 웬 관왕이야 걔가 언제부터 왕이었다고
걔가 나중에 무안왕 되잖아.너 인마, 서울대가 청소년이 읽어야 할 책 100선에 삼국지 넣은 것도 모르지 모르면 좀 읽어 이 자식아.
아 됐구, 일단 결정부터 빨리 하자고, 괜히 미적거렸다간 떼놈시키들 또 삐져서 지랄을 랜덤으로 떨 테니까.
빨랑 결정하자고, 어째야겠냐.
명나라 애들도 관왕묘 만들자고 한건.
다 지들 사정 때문인 거 같은데,
까짓 거 도와줍시다.
걔네들 사정이 뭔데 생각해 봐.
지네 나라 지키러 온 것도 아니고,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왔는데… 병사들 사기가 어떻겠어.
관우가 그나마 떼놈들한테 먹히는 애니까,명나라 장군들이 애들 사기진작 차원에서 계속 관왕이 도와주셔서 우리가 이겼다 라고 설레발치는 거지.
이 자식, 프로파 간다가 뭔지도 모르냐.
그래 나 무식하다 어쩔래
이 쉐이는 툭하면 나만 무시해.
이걸 그냥 계급장 떼고 한판 붙을래, 엉.
야야, 지금 뭐하자는 플레이야 일단 싯 다운 해! 어허! 이조판서 최소한의 체통이라도 챙깁시다.
일단은 우리가 지금 남들이 다 아니오
할 때 예라고 답할 처지가 아니란 건 알지들 알면 됐어.
그랬다. 나라가 엎어지기 직전에 참전한 명나라 덕분에 그나마 나라의 꼴이 유지되던 시기 명나라 장수의 말 한마디에도 전전긍긍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이해가 안 간다면 주한미군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일단 뭐, 조선을 위해 피 흘리는 명나라 군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다니까.
네들 그거 알아 찾아가는 서비스.
이게 꼭 보험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니까,
기분이다 내가 비자금.아니 내탕금을 얼마 내놓을 테니까.이걸로 관왕묘 짓는 데 좀 보태라. 그리고 명나라 군이 관왕묘를 짓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따로 도감관 을 뽑아서 연락창구 및 지원인력으로 상시 대기해 알았지.
선조 역시 명나라 장군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상황.약소국의 설움이었다.
자 문제는 이렇게 해서 관왕묘를 만드는 것으로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는데.
문제가 그렇게 쉽게 끝나면 본 필자 관왕묘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 조선 정부의 지원 덕택에 관왕묘를 짓게 되었다 해.
아주 감사하다 해.
스페셜 땡스다 해
그런데 하는 김에 한가지 더 청이 있다 해.
아, 형 계속 왜 그래 우리 사이에 청이 어딨어.
원래 관왕의 생일이 5월13일이다 해 이번에 관왕묘도 이전 확장 개업.
이 아니고, 이사도 했다 해.
기왕 한 거 조선 왕이 와서 절도 하고, 술도 따라주고 그랬으면 좋겠다 해
관왕이 원래 이런 시골 촌구석까지 오실 분이 아니지만, 울리 명나라 군대가 와서 특별히 이 후진 땅까지 왔다 해.
관왕이 이 땅에 왔기에 울리 명나라 군대가 쪽바리 이겼다 해.
쪽바리 이기지 못했으면 너네 나라 왕 쪽박 찼을 거라 해.
명나라 장군 양호의 난데없는 폭탄선언! 관우의 생일날 국왕이 관왕묘로 찾아와 절을 하라니. 양호의 건의 아닌 건의.
아니 강요라 할 수 있는 주문에 조정은 발칵 뒤집혀지고 5월12일 관우의 생일 바로 전날 비변사의 관료들이 총 소집되어 ‘관왕묘 배향에 관한 대책회의’가 열리게 되었는데,
아니, 이게 무슨 개념을 바겐세일 해버리는 소리냐구.
임금이 어디 관우 같은 애 절하라고 세운 존재냐고. 임금이 무슨 백화점 도우미 아가씨인 줄 알어.
현실적으로 생각하라니까,
만약에 명나라 애들 삐지면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할래.
그렇다고 전하가 관우한테 가서 사배례.4번 절하는 것 하는 건 오바 아니냐 걔가 언제부터 왕 이었냐고.
그리고 같은 동급 왕끼리 절하는 것도 그렇고. 아니지 동급 왕도 아니지.
그렇다고 쌩깔 수도 없잖아.
일단 절충안을 만들어 보자고, 사배례하는 건 아무리 봐도 오바같고, 자존심도 상하니까.
사배례 빼고, 그래…접때 북한 애들 현충원 가서 참배했던 것처럼 대충 묵념만 하는 순에서 쑈부 보자고.
이 의견을 낸 것이 바로 한음 이덕형이었다.이덕형이 내놓은 최종안을 보며 선조는 똥 씹은 표정이 되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관우가 언제부터 왕이었냐는 것이다.
정사 삼국지에서는 별로 부각도 되지 않던 인물이 나관중이 촉한정통론을 들먹이며 만든 삼국지연의 덕택에 우주 소년 아톰을 능가하는 괴력을 발휘하는 신장(神將)으로 만들어진 인물이 관우가 아니었던가.
삼국지연의에서 관우와 제갈공명의 활약은 말 그대로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 그대로였던 것이다.
어쩌겠냐.나라가 힘이 없다는데.덕형아, 네가 하자는 대로 할테니까 스케줄 잡아라.선조의 체념, 이것이 바로 힘없는 설움이란 말인가 선조는 과연 관왕묘에서 묵념만 하고 빠져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초특급 대하 판타지 사극 관왕묘.생뚱맞죠 는
다음회로 이어지는데.
엽기 조선왕조 실록(100편)
관왕묘.생뚱맞죠. 3.
관우의 생일인 5월13일(짜식 흑표랑 생일이 똑같네).
선조가 관왕묘로 가 절을 하고, 술을 따라야 하는 그 치욕적인 날 선조는 조선의 국왕답게 당당하게 관왕묘를 가지 않았다!
내가 바로 조선의 왕이다!
그랬다. 선조 자존심이 있었던.것이
아니었다.
그날 그러니까 5월13일 날 비가 왔었던 것이다.
우천시에는 행사 취소한다 해.
그 다음날 행사한다 해!
또다시 운명의 날인 5월14일이 돌아왔다.
선조는 이번에도 하늘에서 비가 오길 기대했으나.관우의 혼령이 비구름을 날려 버렸는지, 이날은 비가 오지 않았다.
오! 조선 왕 왔다 해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다 해.
먼 길은 무슨 광화문 에서 남대문 오는 건데, 4호선 타고 오면 금방이지 뭐.
아, 그런가 그래도 지하철 갈아타고 하면 번거로울 텐데,
어쨌든 관왕묘에 배향하기 위해서 와준 거 정말 고맙다 해
그런데 있잖아 ~ 요.
너,말이 좀 짧은 거 같지 않으세요
그래도 제가 명색이 왕인데 ~ 요.
에이, 울리 사이에 격식 따지면 너무 정 없다 해.
너네 나라 구해준 게 누군지 벌써 까먹었다 해.
왜 그래, 동생 내가 농담 한번 한 거 가지고 그런데 뭐라고?
관우한테 술 따라 주라고.잘 안다 해. 빨리 해라 해.
응 알았어.명나라 장수 진유격의 권유 아닌 권유에 밀려 선조는 관왕묘
앞으로 나아가 직접 분향한 다음 무릎을 꿇고 삼작 술 석잔을 올리는데,
동생이 그렇게 좋아하는 관왕이라면, 나도 좋아하는 거지 뭐.
동생 이제 됐지.내가 좀 바쁜 일이 있어서.집값도 잡아야 하고,연정도 해야 하고.과거사도 청산해야 하거든.
그럼 나중에 또 보자고.
형, 뭐 빼 먹은 거 없어 빼 먹은 거 아차차,내가 또 동생 주려고 떡값을 챙겨 왔는데 그걸 깜박 했네.
어이 도승지.
형네 나라는 사람 만나면 무조건 떡값인가 해
어디 떡 못 먹고 죽은 귀신 있다 해.
아니 뭐. 오고 가는 떡값 속에 싹트는 장학생이라고.일 없다 해!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면 안 된다 해! 잔만 올리고 왜 절은 안 하는가 해
울리 사람 대충대충 넘어가는 거
싫어한다 해!
절도 해야 한다 해! 안 하면 관왕이 삐져서 울리 군대 안 도와준다 해!
빨랑 절 하라 해!
동생, 내가 요즘 허리 디스크가 너무 심해서.내가 나중에 허리 다 나으면.
그런게 어디 있나 해! 허리가 끊어져도 절은 해야 한다 해!
아니, 그래도 왕 가오가 있지, 관우가 언제부터 왕이었냐.
그리고 내가 지금 허리가 안 좋아서 절할 상황이 아니라니까. 다음에 내가 따블로 할테니까 한번만 봐주라.
그러면 우리 군대 뺀다 생각해 보니까.
또 사람이 몸 아프다고 몸을 안쓰면 몸이 더 안 좋아지지.
허리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돌아간다니까. 4번 하랬지.이리하여 선조는 관왕묘에 사배례 를 하게 된다.
이런 걸 두고 치욕스럽다고 해야 할까.훗날 인조가 삼전도의 비극을 겪는 것과 거의 같은급의 치욕이 아니었을까.
요대목에서 삼전도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알아볼끼 억수로 많네 아이고 힘들어
오늘 흑표는 찿을끼 너무많아 에고~~)
삼전도(三田渡)는 조선 시대 한강의 주요 나루터 중 하나로, 현재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석촌호수 인근에 위치했던 곳입니다.
역사적으로는 1637년 인조가 병자호란에서 패한 뒤, 청나라 태종(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올렸던 삼전도의 굴욕의 현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한양에서 광주(廣州)나 남한산성, 충청도, 경상도로 가기 위해 건너야 했던 핵심 나루터였습니다.
남한산성과 가장 가까운 나루였기 때문에,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피난길에 올랐을 때도 이 삼전도 인근을 거쳐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삼전도의 굴욕 (1637년 1월 30일)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45일간 버티던 인조는 결국 청나라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식량 부족을 이기지 못하고 항복을 결정합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에 마련된 청나라 태종의 수항단(受降壇, 항복을 받는 제단)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청나라의 신하가 고하는 의례에 따라,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치욕적인 항복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정축년에 성에서 내려왔다고 하여 '정축하성'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로써 조선은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청나라를 섬기는 군신(君臣)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훗날 효종)을 비롯한 수많은 백성이 인질로 끌려가는 비극을 맞이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청나라는 자신들의 승리와 태종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라고 조선 조정에 강요했습니다.
이에 따라 삼전도에 세워진 비석이 바로 삼전도비(三田渡碑)입니다.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입니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어, 오른쪽에는 만주어(여진어)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한문이 새겨져 있어 3개 국어가 동시에 기록된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 언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입니다.
청나라 체제가 무너진 이후, 이 비석은 치욕의 상징이라 하여 백성들에 의해 땅에 묻히거나 강물에 버려지는 등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습니다.
현재는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 동호 안쪽에 고증을 거쳐 보존되어 있습니다.
삼전도는 조선 역사상 가장 가슴 아픈 외교적 패배와 시련의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문제는 선조의 치욕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형, 여기까지 왔는데 좀 놀다 가라해. 관왕묘에 절도 해주고.내 체면도 살려줬으니 내가 한번 쏘겠다 해!
아니, 거시기 난 집값도 잡아야 하고, 연정도 해야 한다.
언제부터 집값 잡았다고 그러나 해 잡지도 못할 집값 잡겠다고 구라치지 말라 해.
나랑 여기서 놀자 해!
아니, 그럼 연정이라도 하게.
씰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해.
아니, 그럼 민생이라도 챙길 수 있게.
지나가던 소가 웃을 소리다 해.
툭 까놓고, 언제 민생 생각한 적 있다 해.
아니,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생각해 보려고.
형은 생각 안 하고, 말 안하는 게 백성 돕는 거다 해.
잔소리 말고 나랑 놀자해.
이렇게 붙잡힌 선조는 진유격과 함께 광대들이 접시 돌리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한 나라의 임금이 강압에 의해 파병군의 장군과 함께 접시 돌리는 것이나 같이 보는 상황.
말 그대로 쌩뚱맞은 상황이었다.
이날 이후 명나라 장군들은 조선의 천지 사방에 관왕묘를 만들어 달라 요구하게
되었고, 곧 조선은 관왕묘로 넘쳐 나게 된다
상황이 이쯤해서 끝나면 좋았겠지만, 명군의 관왕묘 신봉풍습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무속인 들에게 새로운 충격으로 받아들여졌고,
예나 지금이나 수입품을 좋아했던 이들에 의해 메이드 인 차이나제 신령을 모시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국내 무속계는 관운장과 함께 세트메뉴로 장비도 수입하기에 이른다.
힘없는 약소국의 비애로 남아 있는 전국 각지의 관왕묘 중국의 영웅이 한국땅에 왜 들어왔는지 모르는 이들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건물이겠지만,
그 속을 파고들어 가면 약소국의 설움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생생한 치욕의 역사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