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懺悔)는 어떻게 하는가?
우리 불교인은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절을 한다.
왼쪽과 오른쪽의 팔꿈치, 왼쪽과 오른쪽 무릎,
그리고 이마의 다섯 군데를 바닥에 대고 절을 함으로 오체투지라고 한다.
이렇게 오체투지를 하는 까닭은, ‘존경하는 당신께서 밟고 다니는 땅에 몸을 던짐으로써
저 자신을 최대한 낮추옵니다.’ 하는 뜻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오체투지의 자세에서 두 손바닥을 뒤집어 귀 옆에까지 들어 올리는데,
이는 ‘당신의 두 발을 저의 두 손 위에 얹어 위로 받들어 모시옵니다.’ 하는 뜻이 간직되어 있다.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상대를 받드는 이 오체투지는 참회 정신의 결정체이며,
우리가 기꺼이 오체투지를 할 수 있게 될 때 참회의 대상인 죄업들을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이제 우리는 임오년(2002)을 맞이하였다. 우리는 이 새해를 어떻게 가꾸고자 하는가?
결심도 하고 발원도 하고 공덕도 가꾸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참회로써 시작하는 것이 좋다.
참회로써 마음 통의 묵은 때를 씻어내어 깨끗이 만든 다음 새것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참회(懺悔)란 무엇인가? 참회의 ‘참(懺)’은 지난날의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뜻이요,
‘회(悔)’는 앞으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맹세의 뜻이 깃들어 있다.
따라서 참회하면 자연스럽게 지난날의 허물을 녹임과 동시에 바르고 향상된 삶의 길로 나아 갈 수 있게 된다.
참회의 방법은 크게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으로 나누어진다.
이참은 이치에 맞추어 참회하는 것, 곧 마음으로 잘못을 수긍하고 반성하는 참회이며,
사참은 그 마음을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는 참회법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다른 사람의 발을 밟았을 때 ‘아. 내가 잘못했다’라고 느끼는 마음이 이참(理懺)이요,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면서 고개를 숙이는 행동은 사참(事懺)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참과 사참이 함께 이루어질 때 온전한 참회가 가능해진다.
그럼 무엇을 참회할 것인가?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지은 업을 참회해야 한다.
번뇌 속에 파묻혀 사는 중생은 알게 모르게 내뱉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통하여 죄업을 쌓아간다.
그리고 알든 모르든 지은 업에 대한 과보(果報)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든다.
때가 되면 실로 무섭게 우리를 몰아치는 것이다.
곧. 자신이 지은 업에 의해 우리는 업에 맞는 국토와 사회와 가정에 태어나고,
일생-동안 갖가지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
따라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참회를 통하여 지난 업을 녹이고,
생각과 말과 행동을 바르고 평화로운 쪽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잠깐 조용히 명상에 잠겨라. 인간이 짓는 죄업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그 근원은 아주 복잡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릇된 한 생각에서 비롯된다.
이기적인 한 생각이 모든 죄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제 이기적인 한 생각으로 인해 발생한 슬픈 실화를 살펴본다.
사례 하나
수년 전 여름, 경상남도, 울주군에서 살았던 일흔 살의 노인이 자살하였는데,
그 사연은 참으로 기구한 것이었다.
그의 젊은 시절, 아내는 다섯 살 된 아이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웃의 권유로 재혼을 생각하였지만, 곧 포기를 하였다.
후처로 들어오는 여인이 아들을 괄시하지나 않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홀아비가 되어, 손수 밥을 지어 먹이고 빨래해 입히며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여
자신은 남의 헌 옷을 얻어 입고 거친 밥을 먹으면서도,
아들은 잘 먹이고 잘 입히며 대학을 졸업시켰고 장가까지 보내 주었다.
결혼한 아들은 집안의 재산을 자기 이름으로 등기를 요구하였고,
아들 내외가 금슬 있게 살면서 자신을 잘 봉양하였으므로 기꺼이 등기 해주었다.
문제는 그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들이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재산을 처분하여 울산시의 아파트로 이주한 다음,
아버지를 골방으로 밀어 넣고 용돈도 주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도시로 옮겨와 골방 신세가 된 아버지는 화병을 얻게 되었고, 나날이 쇠약해졌다.
어느 날 병든 몸으로 골방에 누워 있던 아버지는 안방에서 나누는 아들과 며느리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옛날에는 ‘고려장’이라는 것이 있어 칠십 살이 되면 산에다 버려 죽게 하였다는데,
우리 아버지는 왜 빨리 죽지 않고 병까지 들어 돈만 자꾸 축낼까?”
“글쎄 말이요. 원, 영감도.”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찢어 질듯하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리고는 한 생각이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내 목숨을 끊으리라.’
결심을 굳힌 아버지는 삽을 들고 부모님의 묘소로 올라가 엉엉 소리 내어 실컷 울었다.
그리고는 삽으로 한 몸을 눕힐 만한 크기의 구덩이를 판 다음,
소나무 가지를 꺾어 바닥에 덮고 그 위에 비닐을 깔고 다시 흙을 덮었다.
마침내 스스로가 판 무덤으로 들어간 아버지는 농약을 마시고 반듯하게 누워 죽었다.
그때의 아버지 나이는 일흔이었다.
아들과 며느리는 아버지가 집을 나간 지 5일이 되어서도 찾지를 않았으며,
아버지의 형님 되시는 분이 성묘하러 갔다가 구덩이 속에 반듯이 누워 죽어 있는 동생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은 교통사고로 불구가 되었고,
며느리는 불구의 남편과 아이들을 돌보고 먹여 살리느라 지금껏 갖은 고생을 하고 있다.
사례 둘
비슷한 시기에 경남 양산에서 남편 몰래 바람을 피웠던 한 여인이 일으킨 사건이다.
정부(情夫)와의 관계가 불꽃과 같이 타오른 그녀는 남편이 눈엣가시처럼 거슬렸다.
정부와 마음껏 놀고 싶은 마음만큼 남편이 두려웠다. 하지만 애욕의 불은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켰고,
정부와 함께 살기 위해 급기야는 남편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산으로 유인하여 독을 탄 술을 먹이고 흉기까지 사용하여 머리를 내리친 다음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남편을 버려두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남편은 죽지를 않았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어떻게 하든 살아나야 한다며 정신을 차렸고,
엉금엉금 기어 마을까지 내려간 다음 길 가던 사람의 도움으로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하였고, 경찰이 부인에게 거짓 사망 소식을 알리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왔다.
거짓 곡성에 거짓 눈물까지 담고서……. 현재 그녀는 감옥에 있다.
이처럼, 그릇된 한 생각에 집착이 붙고 이기심으로 불타오르게 되면 죄를 짓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닌 쪽으로 흘러가고, 그릇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릇된 쪽으로 나아간다.
물론 죄업에는 반드시 나쁜 과보(果報)가 따른다.
내가 짓고 내가 받는 인과응보의 삶!
행복의 씨를 심어 가꾼 이는 행복을 누리고, 불행의 씨를 심어 가꾼 이는 불행에 빠져 살기 마련이다.
불행이 닥친 다음에는 가슴을 치고 탄식한들 어찌할 수가 없다. 인과응보는 누구의 탓도 아니다.
부모의 탓도 조상의 탓도 아니며, 염라대왕의 탓도 아니다. 어떠한 사마악귀(邪魔惡鬼)의 탓도 아니다.
아무리 포악한 사마악귀라도 재앙을 줄 수 있는 인연이 없으면 해치지를 못한다.
‘나’에게 다가오는 행(幸)과 불행(不幸)은 오로지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이다.
그럼 이미 지은 죄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인가?
죄를 지었으면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인가?
아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참회이다. 물론 참회에도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인과응보를 믿는 것이다.
‘내가 지었기에 내가 받는다.’라는 이 간단한 법칙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나’의 죄업은 치유되기 시작한다.
인과에 대한 믿음은 ‘나’의 마음속에 굳게 닫혀 있는 참회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그리고 참회를 이루는 가장 긴요한 비결은 아상(我相)을 끊는 것이다.
아상(我相)의 산(山)! 남을 업신여기고 깔아뭉개면서 끝없이 높아만 가는 아상(我相)의 산,
자꾸자꾸 높아져 결국에는 무성한 숲을 이루고야 마는 아상(我相)의 산,
이 아상(我相)의 산을 깎아내리는 작업이 참회를 성취 시키는 단 하나의 실천강령(實踐綱領)이다.
아상(我相)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나는 똑똑하다. 나는 잘났다. 나는 많이 안다. 나는 부자이다. 나는 높은 지위에 있다.
나는 너보다 낫다’라고 하는 일상의 생각들이 바로 아상(我相)이다.
곧, 너에 대한 나의 상대적인 우월감이 아상(我相)이다.
따라서 아상(我相)의 산을 무너뜨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나의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저는 부족한 존재이다. 제가 잘못했으니 용서해주십시오.”
이렇게 하면 이상은 스르르 무너지고 참회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삼척동자도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말을 ‘나’의 입으로 하기는 쉽지 않다.
용서를 구할 만큼 크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고, 고개를 숙이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업을 녹일 만한 진정한 참회를 하지 않으면
그 시기의 늦고 빠름은 있을지언정 반드시 과보(果報)를 받게 된다.
☞ 아무리 깊은 죄업일지라도 참회하고 수행을 잘하면 업보가 쉽게 침범할 수 없다.
☞ 계행(戒行)이 해이해지고 수행이 느슨해지면
선신(善神)이 떠나 원혼은 복수의 기회를 얻고 나쁜 과보(果報)는 발동하기 시작한다.
☞ 남을 구제하고 은혜를 베푼 공덕은 나쁜 업의 매듭을 푸는 원동력이 된다.
이토록 참회는 좋은 것. 그릇된 업, 잘못된 업을 녹이는 데는 참회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좋은 참회를 생활화해야 한다.
그럼 일상생활 속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참회를 하는 것이 좋은가?
먼저 매일 108배를 올리며 참회한다.
108배가 힘들면 일곱 번을 절하는 ‘오분향(五分香) 예불’을 올리며 참회하는 것도 좋고,
그것도 안 되면 3배만이라도 꼭 올리며 참회하라.
잠깐이라도 참회하는 삶과 참회 없이 살아가는 삶은 결과적으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나타내게 된다.
마치 수도 파이프와 같이 매일 사용하면서 닦아주고 손질하면 아주 오래가지만,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썩고 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죄업도 굳고 찌들기 전에 그때그때 씻어내고 닦아주어야 한다.
그 방법은 결-코 어렵지 않다. 1배, 1배 절을 올릴 때마다 속으로 말하라.
“잘못했습니다. 알게 모르게 지은 죄업 모두 참회합니다.”
이것이면 족하다. 이렇게 참회하면 막힌 파이프가 뚫리듯 속이 시원해지고, 일이 잘 해결된다.
그리고 부부나 부모․자식 등 가족끼리 다투어 마음이 좋지 않을 때도
공연히 속을 썩이거나 술[酒] 등의 다른 것으로 속을 풀려고 하지 말고, 참회로써 바로 풀도록 해야 한다.
절을 하고 참회 함에 있어 우리가 기준을 삼을 것이 있다. 그 기준은 ‘인격 변화’이다.
내가 절을 하고 참회를 함으로써 사람이 달라졌는가. 그대로인가를 때때로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절이나 참회라면 방법이 잘못되지 않았나를 점검받아 보아야 하고,
정성이 부족하였다면 정성을 더 기울여야 한다.
업보에 매여 사는 인생살이,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사는 우리네 인생살이에 ‘참회의 약’이 없다면,
이 애끓는 상처에서 벗어날 자 그 누구이겠는가?
부디 참회의 묘약(妙藥)을 통하여 평화롭고 사랑이 넘치는 삶을 영위하시기를 축원(祝願)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 혜인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