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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3일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루카 17,1-6
용서에 믿음이 끼어드는 방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라고 하십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가장 큰 일은 무엇일까요? 미운 감정이 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에 미운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라고 하십니다.
그렇더라도 이 지상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용서를 배우는 일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를 청하는 사람이 있다면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믿음’의 역할이 강조됩니다.
사도들은 용서 이야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믿음은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용서를 하려고 해도 잘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해도 잘 안되는 예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믿음의 역할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삼례 나라슈퍼 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주목할 만한 잘못된 처벌의 사례 중 하나로 꼽힙니다.
1999년 9월 28일,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의 나라슈퍼에서 할머니 한 분이 살해되었습니다.
조카 부부와 어린아이도 있었는데 그들에겐 눈을 가리고 위협만 하고 상해를 입히지는 않았습니다.
경찰은 가까운 곳에서 찾아낸 세 명의 용의자를 범인으로 몰아갔고 심한 고문과 가혹행위를 이기지 못한 청년들은 자기들이 범인이라고 허위 자백을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양심의 가책으로 진범 세 명이 자수하였지만, 경찰과 검찰, 그리고 판사는 그들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진행된 것을 번복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다 복역을 마치고 공소시효도 지난 시점에서 한 진범이 악몽에 시달려 자수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용서하지도 않는데 자신이 그러면 뭐 하겠느냐며 다시 그 말을 번복했습니다.
그래서 변호사는 당시 아이 엄마였던 최성자 씨에게 할머니를 살해한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최성자 씨는 망설였습니다.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최성자 씨는 스무 살이 된 아들에게 할머니가 그때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말을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강도가 들어올 때 아들은 다행히 잠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 아들을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서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했어야지!”, 곧 재심을 도와주었어야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최성자 씨는 여기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그동안 아이에게 피해가 갈 줄 알고 용서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 용서가 아이에게 오히려 인정받는 행위임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해자를 만나서 용서해주었고 가해자는 그것에 힘입어 증언하여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세 명의 누명을 풀어주었고 나라로부터도 보상받게 했습니다.
용서는 사실 나의 죽음입니다.
그러면 부활의 보상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용서의 십자가를 지면 부활의 기쁨을 준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다면 못 할 게 없다는
것입니다.
고통은 쓰지만 그 열매는 반드시 달다는 것만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 이뤄내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최성자 씨는 아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그 부활의 기쁨이었습니다.
에바 모제스 코어(Eva Mozes Kor)는 악명 높은 나치 전범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에 의해 자행된 실험의 생존자였습니다.
멩겔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쌍둥이에 대한 잔인한 의학 실험을 실시했고, 코어와 그녀의 쌍둥이 자매 미리암은 그의 실험 대상이었습니다.
에바 코어는 수십 년 동안 요제프 멩겔레에 대한 깊은 증오와 분노를 품고 살았습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멩겔레의 실험으로 인한 고통과 트라우마로 얼룩졌고, 그 기억은 그녀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그녀의 쌍둥이 자매 미리암도 실험으로 인한 건강 문제로 고통받았고, 이로 인해 코어의 분노는 더욱 굳어졌습니다.
코어가 용서하기로 한 것은 1995년, 아우슈비츠 해방 50주년 기념식이 있기 전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과 자매가 겪은 고통에 대한 멩겔레의 인정과 사과를 원했지만, 그는 이미 사망한
후였습니다.
그러나 코어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내면의 평화를 찾기 위해 용서라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용서하기로 한 코어는 용서의 선언문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이 선언문을 통해 멩겔레에게 자신이 느낀 모든 고통과 분노를 용서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행위는 그녀에게 적극적인 선택이었으며, 그녀는 용서를 자신의 힘을 되찾는 행위로 보았습니다.
그녀는 용서를 통해 멩겔레가 그녀의 삶에 더 이상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녀 자신을 그녀의 과거로부터 해방하기를 원했습니다.
용서의 선언은 에바 코어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녀는 이 용서를 통해 해방감을 느꼈고, 증오와 분노의 감정에서 벗어나 내면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선택이 자유를 의미한다고 느꼈으며, 더 이상 희생자로 정의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코어는 이러한 용서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녀는 나머지 생애를 교육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바쳤습니다.
만약 용서를 통한 평화를 믿었다면 50년 동안 미움과 증오로 살며 고통을 겪지 않았어도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십자가에는 부활이 있음을 믿고 십자가를 져 봐야 합니다.
손해를 볼 게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뒤에 오는 부활의 기쁨을 자주 체험하다 보면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13일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루카 17장 1-6절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허허’의 멋과 여유>
언젠가 한 그룹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영성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여러분들 내면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작업 가운데 가장 힘든 것이 뭐냐?”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는데, 다들 하나같이 ‘용서’라고 대답하시더군요.
용서의 당위성, 중요성, 필요성에 대해서는 하도 많이 들으셔서 다들 잘 알고 계셨지만, 정적 내게 지독한 아픔을 던져준 ‘그 인간’과 다시 대면할 때, 그 숱한 다짐들, 그 굳은 결심들은 즉시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가 내게 안겨준 깊은 상처들만이 하나하나 되살아나 분개하게 되고 내적인 평화를 잃곤 한답니다.
용서를 제대로 하기 위한 비결이 없을까요?
한 훌륭한 영적 스승은 용서와 관련해서 참 의미 있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상처니, 아픔이니, 용서니 하는 말이 더 이상 우리 안에 문제되지 않게 원천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하길 바랍니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잘 갈고 닦아 미움이나 분노, 실망과 좌절 같은 감정들에 더 이상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무장하길 바랍니다.
우리 내면이 튼튼하면 튼튼할수록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이나 모욕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게 됩니다.
쉽게 넘길 수 있습니다.
당당하게 맞설 수 있습니다.
쉽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내면에 하느님께서 든든하게 자리하시면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상처나 아픔 앞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이 잘 잡혀있는 사람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가하는 어떤 충격에도 동요되지 않습니다.
분노하지 않습니다.
미워하지 않습니다.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쉽게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저 ‘허허’하고 웃어넘길 수 있는 멋과 여유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내면의 상태에 도달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엄청난 자기 수행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노력하다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조금씩 ‘용서 잘하는 비결’을 체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수행자가 대스승 포이멘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부님, 제가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바라보지 말고 누구도 판단하지 말며 누구도 비방하지 말게. 그러면 주님께서 평안을 주시게 된다네.”
사막의 교부들 가운데 모세란 큰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출신으로 수행의 길을 걷기 전에 도둑이었으며, 검은 색 피부 때문에 수도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도 수도자들 사이에서 종종 놀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공이 워낙 탄탄했기에,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상처나 공격에도 평온할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어떤 수행자들의 모임에 갔었는데, 몇몇 스승들이 그를 시험해보려고 그의 면전에서 모욕적인 언사를 던졌답니다.
“도대체 이 에티오피아 사람은 뭣 하러 여기 우리 가운데 와 있는가?”
모세 아빠스는 그저 묵묵히 그 말을 듣고만 있었습니다.
모임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제자들이 “스승님,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화가 나지 않습니까?”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화가 났지요.
하지만 나는 그 말을 ‘건방지게 말하지 말라’ ‘주제 파악을 잘 하라’는 말로 알아들었다오.
그 말은 ‘나를 더욱 낮추어 겸손한 사람으로 처신하라’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사실 모세 아빠스 역시 인간이었기에 사람들이 던진 모욕적인 말 때문에 우선 상처를 받고 흥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내면 안에 일어나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일단 의식적으로 침묵했습니다.
침묵으로 자신의 내면을 다독거렸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상처를 꿀꺽 삼켜 자기 안에 저장하지 않고 상처를 침묵으로 치유하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정신 요법이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상처를 말로 표현하는 것은 확실히 한 좋은 수단입니다.
그러나 침묵을 통한 치료법도 있습니다.
침묵으로 소용돌이치는 먼지를 가라앉게 하여 내면의 흥분을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가만히 둠으로써 앙금을 가라앉혀 맑아지는 탁한 술처럼 내면을 깨끗하게 합니다
(‘하늘은 네 안에서부터’, 안셀름 그륀, 분도출판사 참조).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강론>
(2023. 11. 13. 월)(루카 17,1-6)
<세 가지 가르침>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루카 17,1ㄴ-3ㄱ).”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은 유혹, 박해와 압박, 잘못 인도하는 일 등을 모두 가리킵니다.
죄를 지으라고 부추기는 유혹은 아담과 하와 때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이 일은 죄가 아니다. 해도 된다.” 라고 속이는 유혹도 있고, “죄가 되긴 하지만, 벌은 받지 않을 것이다. 벌을 받더라도 엄한 벌은 아니다.” 라고 속이는 유혹도 있고,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산다.” 라고 속이는 유혹도 있습니다.
남을 유혹해서 죄짓게 만드는 자는, 유혹에 넘어가서 죄짓는 사람보다 훨씬 더 엄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유혹을 받는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유혹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기도의 힘’으로 그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혹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또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주는 ‘선한 권고’ 라고만 생각한다면,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되나?
유혹인 줄 몰라서 그 유혹에 넘어가고, 그래서 죄를 짓게 되었다면, 무죄인가? 유죄인가?
몰랐다고 해도 죄가 죄 아닌 것으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런 문제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루카 12,47-48ㄱ).”
이 말씀에서 “적게 맞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정상참작이 되긴 하겠지만 무죄가 되지는 않고,
죄에 대한 처벌을 피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경우도 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3ㄴ-4).”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 18장에 있는,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여기서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라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오복음 18장에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6ㄱ.17).”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죄지은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그를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그를 회개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가 구원받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꾸짖고 타이르는 일도 사랑이고, 용서도 사랑입니다.
앞에서 말한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우리는 용서에 관한 말씀을, 용서하는 입장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용서를 청하는’ 입장에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용서할 일보다 용서를 청할 일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용서를 청하는’ 입장에서 생각할 때, 하루에도 일곱 번씩이나 죄를 짓고, 일곱 번씩이나 회개한다고 말한다면, 그 회개가 정말 회개일까?
그것은 진정성 없이 습관적으로, 또 형식적으로,
또 말로만 하는 회개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5-6)”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사도들의 요청은, 믿음도 은총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음을 나타내는데, 인간 쪽에서도 ‘믿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믿음의 은총’을 주시고 우리가 믿으려고 노력할 때 믿음이 완성됩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믿음이 있으면’이라는 단순한 뜻입니다.
믿음이란, 크거나 작은 것이, 또는 많거나 적은 것이 중요하지 않고,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합니다.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믿음만 있으면 누구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우리가 할 일은 그 주님을 믿는 일입니다.
<기적은 내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내가 바라는 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나의 믿음이 너무 부족한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 일이 정말 주님 뜻에 합당한가?”부터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힘’이라는 말은, “내가 내 믿음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나에게 해 주신 일을 알아보는 힘”을 뜻하는 말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