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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의 탄호이저(Tannhäuser)
탄호이저(Tannhäuser)
원제목은
탄호이저와 봐르트부르크의 노래경연대회
Tannhäuser und der Sängerkrieg auf Wartburg
(Tannhäuser and the Singer's Contest at Wartburg Castle)
리하르트 바그너의 중세 탄호이저 전설을
바탕으로 한 3막 오페라
'비너스버그의 탄호이저'
Jacques Wagrez 작. 1896년.
탄호이저가 비너스버그를 떠나고자 하자
비너스가 만류하고 있다.
'탄호이저'는 바그너가 대본을 쓰고 작곡을 한
3막의 오페라이다.
오페라 '탄호이저'는
바그너의 중기 작품에 속한다.
바그너의 중기 작품은
1843년의 '방랑하는 네덜란드인',
1845년의 '탄호이저',
1848년의 '로엔그린'의
세편을 말한다.
각각 3년의 인터발을 두고
완성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오페라 '탄호이저'는
독일의 전래 전설인
탄호이저에 대한 이야기와
봐르트부르크의 노래경연대회에 대한
이야기에 바탕을 둔 것이다.
스토리는 성스러운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 간의 갈등,
그리고 사랑을 통한
구원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테마는 바그너의 중기와
후기 작품에도
계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에서 타이틀 롤인 탄호이저는 13세기 독일의 음유시인(Minnesänger)이었던 실존인물이다. 탄호이저가 언제 어디서 태어나서 언제 어디서 세상을 떠났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확실치 않다. 다만 1265년 이후에 세상을 떠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왜냐하면 1245년부터 1265년까지 거의 20년 동안 독일을 중심으로 명성을 떨쳤던 음유시인이라는 것이 기록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가문의 사람이냐는 것도 확실치 않지만 학자들의 추측에 따르면 독일 남부 엘봥겐(Ellwangen)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20km에 있는 탄하우젠(Tannhausen)성에 거주했던 탄하우젠 영주의 후손이 아니겠느냐는 것이 지금까지의 설명이다. 오늘날 탄하우젠 성읍은 바바리아의 북부 프랑코니아와의 경계선에 있다. 뷔르템버그에서 가까우며 노이마르크트 인 데어 오버활츠(Neumarkt in der Oberpfalz)에서도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시이다. 한편, 탄하우젠이라는 말은 전나무(탄) 집(하우젠)이라는 뜻이다. 전나무 목재로 지은 집을 말한다. 탄호이저는 그런 집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탄호이젠 영주의 후손인 탄호이저는 오스트리아 프레데릭 2세(재위: 1230-1246)의 궁신(조신)이었다고 한다. 한편, 1340년에 나온 코덱스 마네세(Codex Manesse)라는 서적에 들어 있는 탄호이저의 모습을 보면 독일 기사단(Teutonic Order)의 복장을 입고 있다. 그런 것을 보면 탄호이저는 아마도 제5차 십자군(1213-1221) 전쟁에 참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문학적으로 보면 탄호이저는 서정적인 스타일의 시를 즐겨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참회의 시'(Busslied)는 예외적이다. 에로티시즘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도이치 오퍼의 무대
탄호이저에 대한 전설은 바로 '참회의 시'(부쓰리트)에 기본을 두고 만들어진 것이다. 그 시의 주인공의 이름을 탄호이저라고 붙인 것을 보면 아마도 탄호이저가 자기 자신의 경험담을 풍자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추측이다. 탄호이저에 대한 전설이 처음 기록으로 남은 것은 음유시인인 탄호이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한참 후인 1430년이다. 그러다가1450년에 발라드 풍의 시로 엮어져서 널리 보급되자 탄호이저라는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전설의 주인공인 탄호이저는 기사이며 시인으로서 사랑과 미의 신인 비너스가 지상에서 살고 있는 비너스버그(Venusberg)를 발견하여 그곳에서 비너스 여신을 경배하며 1년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비너스 여신을 경배했다는 표현은 듣기 좋으라고 한 것이고 실은 밤낮으로 육체적인 쾌락을 위해 지냈다고 하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렇게 지내던 탄호이저는 '내가 이게 무슨 짓인가?'라는 후회와 함께 비너스버그를 떠나 그동안 지은 죄에 대하여 사함을 받기 위해 로마의 교황 우르반 4세(1195-1264)에게 갔으나 교황은 탄호이저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은 교황이 들고 있는 지팡이에 꽃이 피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고 탄호이저를 돌려 보낸다. 그런데 탄호이저가 떠난지 사흘 후에 놀랍게도 교황의 지팡이에서 꽃이 핀다(어떤 버전에는 새 잎이 돋아난다고 되어 있다). 교황은 급히 사자를 보내서 탄호이저를 불러 오라고 하였으나 탄호이저는 이미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 있는 비너스버그로 돌아간 후였다. 그후 탄호이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이것이 중세로부터의 탄호이저에 대한 전설이다.
환락의 비너스버그
이같은 탄호이저의 전설은 나중에 각지로 퍼져서 전래의 민화와 같은 형태로 발전하였다. 탄호이저에 대한 얘기는 일반 사람들을 기독교화하는 목적으로도 이용되었다. 인간이 요정들의 유혹을 받아 그들의 세계로 가서 환락의 생활을 즐긴다. 그러나 얼마후에는 세상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요정들에게 제발 돌려 보내달라고 간청하여 겨우 승락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지만 도무지 행복하지 않아서 다시 요정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민화이다. 다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허무한 열락에 빠지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진리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교훈으로 결말을 짓는 것이 일반적인 전설의 내용이다. 이 교훈적인 전설은 근세에 들어와서 여러 예술작품으로 재생산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그너가 1845년에 완성한 오페라 '탄호이저'이다. 바그너가 아니었다면 탄호이저라는 이름은 그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일각에서 그런 전설이 있나보다라는 정도로 남아 있을 뿐이었을 것이다. 영국의 화가이며 작가인 오브리 버즐리(Aubrey Beardsley: 1872-1898)는 탄호이저의 전설을 바탕으로 에로틱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나 병에 걸리는 바람에 첫 파트만 완성하고 나머지는 완성하지 못했다. 오브리 버즐리의 첫 파트는 런던에서 발간되는 The Savory(사보이)라는 잡지에 게재되어 알려지게 되었고 이어 런던의 출판인인 레오나드 스미더스(Leonard Smithers: 1861-1907)는 그것을 Under the Hill(언던 아래에서)이라는 단편 형태로 출판하여 관심을 끌었다. 그후 1907년에 오브리 버즐리의 오리지널 원고를 The Story of Venus and Tannhäuser(비너스와 탄호이저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바그너 이후의 일이다.
취리히 오페라의 현대적 연출 무대
[오리지널 버전]
바그너가 오래전부터탄호이저에 대한 독일 전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고 하겠다. 독일에서는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가 탄호이저의 전설을 풍자시인 Elementargeister(기본정령: 4대정령)을 1837년에 Der Salon(살롱)지에 발표한 것이 있다. 비너스 동굴에서의 유혹에 대한 내용이다. 바그너는 하이네의 이 시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바그너는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의 대본도 하이네로부터 영감을 얻어 완성했다. 바그너는 또한 E.T.A. 호프만(Ernst Theodor Amadeus Hoffmann: 1776-1822)이 쓴 Der Kampf der Sänger(The Singer's Contest: 노래경연대회: 1818)와 독일의 시인인 루드비히 티크(Ludwig Tieck: 1773-1853)의 1799년 소설인 Faithful Eckart and Tannhäuser(충실한 에카르트와 탄호이저)를 참고로 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바그너가 참고로 했을 소스는 15세기 민속 발라드인 Das Lied von dem Danheüser(단호이저의 노래)와 루드비히 폰 베흐슈타인(Ludwig von Bechstein)의 투링겐지방 전설집인 Der Sagenschatz und die Sagenkereise des Thüringerlandes(전설의 보고와 투링겐지방의 노래경연대회)도 있다.
'탄호이저'의 대본은 독일 오페라의 신화적인 요소와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중세 역사적 요소를 복합한 것이다. 바그너는 이 두가지를 14세기에 유행했던 민네징거(음유시인)들의 이야기와 비너스와 비너스버그에 대한 신화를 복합하여 하나의 스토리로 구축하였다. 따지고보면 탄호이저라는 인물의 설정도 사실적인 것과 신화적인 것의 복합이라고 할수 있다. 탄호이저는 역사적으로 실존 인물이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대신에 그에 대한 신화적인, 또는 전설적인 이야기만 무성하게 나왔을 뿐이었다. 바그너는 오페라의 세팅에서도 절반은 사실적인 장소로 설정하였고 절반은 신화적인 장소로 설정하였다. 그러므로 '탄호이저'는 역사적 사실과 신화적 전설이 융합된 작품이라고 할수 있다. 바그너는 '탄호이저'의 산문대본의 초고를 1842년 6월부터 7월까지 썼고 대본은 1843년 4월에 완성했다. 작곡은 현재 체코공화국에 속하여 있는 온천장인 테플리츠(Teplitz: Teplice)에 체류하면서 1843년 여름에 시작하여 1845년 4월 13일에 끝냈다. 바그너는 '탄호이저'의 3막을 모두 완성한 후에 서곡을 마지막으로 완성했다. 서곡은 콘서트의 레퍼토리로서 자주 등장하는 유명한 곡이다. 악기의 배치는 프랑스 오페라 스타일을 많이 참고한 것으로 얘기되고 있다. 예를 들면 하프를 적절하게 이용한 것이다. 하프는 프랑스 오페라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악기이다. 스코어에는 브라스 밴드가 별도로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무대 위의 브라스 밴드는 프랑스의 금관악기들 보다는 독일의 금관악기들을 사용토록했다. 예를 들면 독일의 봘트호른(Waldhorn)을 12개나 사용토록 한 것이다.
[드레스덴 초연]
초연은 1845년 10월 19일 드레스덴 왕립극장에서였다. 바그너의 친구인 작곡가 페르디난트 힐러(Ferdinand Hiller: 1811-1885)가 드레스덴의 초연을 위해 음악적 준비를 적극 도와주었다. 타이틀 롤인 탄호이저는 보헤미아 출신의 테너인 요제프 티히체크(Josef Tichtschek: 1807-1886)가 맡았다. 헬덴 테너이면서도 리릭 테너의 소양을 갖고 있는 뛰어난 테너였다. 여주인공인 엘리자베트는 바그너의 조카인 요한나 바그너(Johanna Wagner: 1826-1894)가 맡았다. 바그너는 원래 '탄호이저'를 요한나의 19번째 생일인 10월 13일에 초연할 생각이었으나 요한나가 아픈 바람에 6일이나 늦게 초연을 가질수 있었다. 비너스의 이미지는 독일의 유명한 소프라노인 빌헬미네 슈뢰더 드브리앙(Wilhemine Schroeder-Devrient: 1804-1860)이 창조했다. 초연의 지휘는 바그너 자신이 했다. '탄호이저'는 '리엔치'만큼 성공적이지 못했다. 바그너는 즉각적으로 피날레 부분의 음악을 수정해야 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말처럼 그렇게 쉽게 되지는 않았다. 이듬해인 1846년에도 이곳 저곳을 수선하듯 고쳤고 1847년에도 수정을 거듭했다. 그렇게 수정된 스코어로서 1852년에는 슈베린, 브레슬라우, 프라이부르크, 비스바덴에서 공연하였다. 1853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리가(라트비아), 라이프치히, 포츠난(폴란드), 다름슈타트, 함부르크, 쾨니히스버그, 쾰른에서 공연되었으며 1854년에는 그라츠(오스트리아), 프라하(현재의 체코공화국)에서 공연되었다. 이 버전은 보통 '드레스덴 버전'이라고 부른다. 드레스덴 버전은 바그너가 출판을 위해 1860년에 피날레 부분을 포함하여 몇 부분을 최종적으로 손질한 것이다.
비너스의 이미지를 창조한
당대의 소프라노 빌헬미네 슈뢰더 드브리앙
[파리 버전]
바그너는 1861년 파리 오페라에서의 공연을 위해 상당부분을 다시 수정하고 보완했다. 파리 공연에 대한 우여곡절은 본 블로그의 '오페라 이야기'중 '오페라의 풍운아 바그너'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므로 혹시 참고하실 분은 참고하시기 바란다. 파리 공연은 파리주재 오스트리아 대사의 부인인 파울리네 폰 메트르니히(Pauline von Metternich)의 주선으로 나폴레옹 3세의 지시에 의해 추진된 것이다. 바그너는 파리 오페라극장의 관례에 따라 '탄호이저'의 중간에 발레를 넣어야 했다. 바그너로서는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하면서 반대를 했지만 얼마후에는 어쩔수 없이 파리 오페라의 관례를 따를수 밖에 없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어찌되었든 파리에서 '탄호이저'가 성공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공을 거두어야 독일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추방당한 비참한 상황을 만회할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바그너는 발레를 통상적으로 2막이 끝나고가 아니고 서곡이 끝나고 1막이 시작되는 장면에 넣었다. 바그너는 발레를 1막이 시작할 때에 넣어야 비너스버그에서의 관능적이고 육감적인 분위기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보여줄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탄호이저'에서는 발레가 마치 소란한 술잔치처럼 마련되었다. 파리 오페라를 위해 수정한 버전을 '파리 버전'이라고 부른다.
파리 버전에서는 발레가 추가된 것을 차치하고라도 여러 부분에서 드레스덴 버전과 차이가 나는 점이 있다.
- 대본은 독일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그것은 대단한 차이였다. 독일어와 프랑스어의 뉘앙스의 차이가 컸기 때문이었다.
- 비너스는 드레스덴 버전에서는 소프라노가 맡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파리 버전에서는 메조소프라노가 맡는 것으로 했다.
- 비너스의 아리아 Geliebter, komm!(사랑하는 이요 이곳으로 오라)는 메조소프라노가 맡기 때문에 반음을 낮추었다. 그리고 ...wonnige Glut durch schwelle dein Herz 라는 가사로부터 완전히 새로 수정하였다. 비너스의 아리아를 선두로하여 그 다음에 나오는 아리아들도 상당히 수정됨으로서 파리 버전과 드레스덴 버전이 명확히 구별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 파리 버전에서는 2막에 나오는 발터의 솔로를 삭제하였다.
- 탄호이저의 '사랑의 찬가'(Hymn to Love)에 비너스의 가사 몇줄이 추가되었다.
- 3막의 오케스트라 도입부는 단축되었다.
- 피날레에서는 비너스가 무대에 등장하는 것으로 완전히 새롭게 작업을 해야 했다. 드레스덴 버전에서는 비너스를 무대 뒤에 보이지 않게 하였고 비너스의 모티프만 들을수 있도록 했다. 바그너는 관중들이 혼돈을 가질 것 같아서 아예 비너스를 무대에 등장시키도록 수정했다.
현대적 연출의 '탄호이저'. 바이로이트
[파리 초연]
'탄호이저'의 파리 초연은 1861년 3월 13일 파리 오페라의 살 르 플르티에(Salle le Peletier)에서 있었다. 바그너는 초연을 위해 무척이나 준비를 했다. 리허설을 164회나 가졌던 것을 보면 알수 있다. 그러나 첫날의 공연은 부유층과 귀족들로 구성된 이른바 자키 클럽(Jockey Club)의 계획적인 비난과 야유를 받아 실패로 끝났다. 자키 클럽의 사람들은 오페라에 오긴 오되 보통 2막이 끝나고 발레가 시작될 때 쯤해서 나타나는 것이 관례였다. 느긋하게 저녁식사를 즐기고 오기 때문에 2막이 끝날 때 쯤해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다가 대부분이 발레만 보고서 그냥 가가는 경우가 많다. 발레는 그들이 오페라에 오는 최대 목적이었다. 그런데 바그너는 발레를 1막의 첫 부분에 추가하였던 것이다. 자키 클럽의 사람들이 발레를 보려면 1막부터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다. 더구나 자키 클럽의 사람들은 '탄호이저'의 파리 공연을 주선한 파울리네 폰 메테르니히 공주와 공주의 고국인 오스트리아를 싫어하였다. 자키 클럽의 사람들은 그들이 고용한 박수부대와 함께 첫날에 이어 두번째 공연에도 호르라기를 불고 고양이 소리를 내어 공연을 훼방하였다. 3월 24일의 세번째 공연에서는 이들의 훼방이 너무나 심해서 공연을 도중에 자주 중단해야 했다. 심할 때에는 15분이 넘게 중단한 일도 있었다. 도저히 참을수 없었던 바그너는 세번째 공연을 마치고 더 이상 공연을 할수 없다고 선언하고 취소하였다. 그리하여 파리에서 오페라로서 성공하겠다는 바그너의 희망은 수포가 되었다. 당시 파리는 유럽 오페라계의 중심이었다.
파리 오페라의 살르 르 플르티에. 1854년부터는 그랑 살르라고 불렀으나 1860년 부터는 살르 르 플르티에라고 불렀다.
바그너는 파리 버전을 가지고 파리에서의 초연이 있은지 10여년이 지난 1875년에 모처럼 비엔나에서 공연을 가지게 되었다. 바그너는 비엔나 공연을 위해 파리 버전의 몇 부분을 수정하기도 했다. 과거에는 서곡이 끝나고 나서 1막과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런 부분도 손을 보았다. 또한 2막에서 발터의 솔로를 부활해 놓았다. 바그너는 그런 점들을 수정하였다. 비엔나 공연 준비는 순전히 바그너의 감독으로 진행되었다. 비엔나 궁정극장(현재의 슈타츠오퍼)에서의 공연은 그런대로 성공이었다. 역시 독일어 권역이기 때문에 파리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스코어는 비엔나 공연을 위해 수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파리 버전이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탄호이저'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했다. 바그너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탄호이저'의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신경을 썼다. 바그너는 1883년 2월 13일에 베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바그너의 부인인 코지마가 그해 1월 23일에 쓴 일기를 보면 '그(바그너)는 아직도 탄호이저에 대하여 무언가 빚을 진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바그너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탄호이저'를 생각하고 있었다.
오리지널 '탄호이저'인 드레스덴 버전은 드레스덴에서의 초연 이후 몇 군데에서 공연되었다. 주목할 만한 공연은 1853년 1월의 라트비아 리가에서의 공연(첫 외국 공연), 1854년 11월 프라하 에스테이트 극장에서의 공연, 1859년 4월 미국 뉴욕의 슈타트 테아터에서의 공연(첫 미국 공연)이다. 드레스덴 버전은 파리 버전이 나온 이후에도 여러 군데에서 공연되었다. 대표적인 것은 1866년 티미쇼아라(Timisoara: 루마니아), 1872년의 볼로냐(이탈리아에서의 첫 공연), 1876년 5월의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공연(영국 첫 공연), 1901년 1월의 호주 왕립극장에서의 공연(호주 첫 공연)이다. 파리 버전이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처음 공연된 것은 1889년 1월이었고 런던에서 처음 공연된 것은 1895년 7월이었다.
[등장 인물]
줄거리를 소개하기 전에 등장인물부터 정리해 보자. 타이틀 롤인 탄호이저는 독일 튜링기아 지방 출신의 음유시인 겸 기사이다. 드레스덴 초연에서는 보헤미아 출신의 테너 요제프 티하체크가 하인리히 탄호이저(T)의 이미지를 창조하였으며 파리 초연에서는 독일의 알베르트 니만(Albert Niemann: 1831-1917)이 탄호이저의 역할을 맡았다. 엘리자베트(S)는 튜링기아 영주인 헤르만(Hermann: -1217: B)의 조카딸이다. 탄호이저를 사랑하고 있다. 엘리자베트의 역할은 드레스덴 초연에서는 바그너의 조카인 요한나 바그너가 맡았고 파리 초연에서는 벨기에의 소프라노인 마리 사스(Marie Sasse: 1834-1907)가 맡았다. 미와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S 또는 MS)의 이미지는 드레스덴에서는 독일의 유명한 소프라노인 빌헬미네 슈뢰더 드르비랑이 창조하였고 파리에서는 포루트나타 테데스코(Fortunata Tedesco)가 창조하였다. 음유시인으로서는 실존 인물들인 볼프람 폰 에센바흐(Wolfram von Eschenbach: c 1170-1220: Bar), 발터 폰 데어 포겔봐이데(Walther von der Vogelweide: c 1170-1230: T), 하인리히 데어 슈라이버(Heinrich der Schreiber: T), 비테롤프(Biterolf: B), 라인마르 폰 츠베터(Reinmar von Zweter: B) 등이 등장한다. 이밖에 젊은 양치기(S), 네 명의 귀족 시종(S, A), 귀족들, 기사들, 귀부인들, 순례자들, 사이렌(바다의 요정)들, 나이아드(물의 요정)들, 님프(아름다운 여자 요정)들, 주신 바카스의 여사제들이 등장하며 파리 버전에서는 특별히 세명의 분노의 여신(Three Graces)들, 젊은이들, 큐피드들, 반인반수의 새타이어들, 목신들도 나온다.
바그너의 조카로서 '탄호이저'의 드레스덴 초연에서 엘리자베트의 이미지를 창조한 요한나 바그너. 그림은 로엔그린에서 오르트루트 역할을 맡은 요한나 바그너의 모습이다.
대본에는 탄호이저라는 이름이 나오고 스코어에도 탄호이저가 부르는 노래를 표시하기 위해서 탄호이저라는 이름을 써 놓았지만 정작 가사에는 단 한군데도 탄호이저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 다른 사람들이 탄호이저를 부를 때에는 하인리히라는 그의 이름을 부르도록 했다. 음유시인 중에 하인리히 데어 슈라이버는 다른 사람들의 노래로부터 부분들을 따와서 짜집기 노래를 부르는 특이한 배려를 하였다. 다만, 간혹 가사는 달리해서 부르도록 했다. 그렇다고해서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명시하지는 않는다. 그저 기사(Ritter)라고 부른다. 음유시인들은 기사라는 호칭도 가지고 있으므로 문제 될 것이 없다. 오페라 '탄호이저'의 장소는 아이제나하(Eisenach) 부근이라고 되어 있고 시기는 13세기 초라고 명시되어 있다.
[시놉시스]
1막. 비너스버그가 무대이다. 비너스버그는 상상 속의 장소이지만 전설적으로는 독일 중부의 아이제나하 인근에 있는 산이라고 되어 있다. 비너스버그는 튜링기아 지방의 전설에 나오는 프라우 홀다(Frau Holda)가 살고 있는 회르젤버그(Hörselberg)와 같은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탄호이저는 비너스버그에 포로처럼 잡혀 있다. 잡혀 있다기 보다는 스스로 빠져 나가지 않고 눌러 붙어 지내고 있다. 비너스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명한 발레 장면이 나온다. 주신 바커스의 사제들이 벌이는 광란의 연회이다. 광란의 발레 장면이 끝나자 탄호이저는 지금까지의 환락에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유와 봄과 교회의 종소리를 갈망한다. 고향에 가고 싶은 것이다. 탄호이저는 하프를 집어 들고 다시 한번 비너스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그렇지만 노래의 마지막은 제발 떠나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이다. 비너스가 다시 한번 탄호이저를 유혹하여 떠나지 못하게 하려 하자 탄호이저는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비너스버그에서의 비너스와 탄호이저. 리에즈 오페라
그러자 이 말과 함께 성스럽지 못한 마법이 깨트려지며 비너스를 비롯한 모든 수종자들이 한 순간에 사라진다. 그리고 탄호이저는 비너스버그의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봐르트부르크의 아랫 쪽에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봄날이다. 젊은 양치기가 바위 위에 앉아 피리를 불어 봄을 찬양한다. 한 무리의 순례자들이 지나간다. 탄호이저는 얼어 붙은 듯이 서서 순례자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러더니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환락의 세계를 떠나오게 된데 대하여 하나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린다. 잠시후 튜링기아의 영주 헤르만과 음유시인 겸 기사들인 볼프람, 발터, 비터롤프, 라인마르, 하인리히 등이 지나가다가 엎드려 있는 탄호이저를 발견한다. 이들은 탄호이저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고향에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 탄호이저는 오레전 봐르트부르크의 노래경연대회에서 부정으로 우승을 하여 부끄러운 나머지 어디론가 사라졌었다. 동료 음유시인들을 만난 탄호이저는 처음에는 수치심으로 함께 가기를 거절하지만 볼프람이 그때 탄호이저의 노래가 엘리자베트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로부터 탄호이저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자 지난 일을 후회하고서 영주와 음유시인들을 따라 봐르트부르크로 간다.
독일 중부 아이제나하의 인근에 있는 봐르트부르크 성. 예로부터 노래경연대회가 열려왔던 곳이다.
[2막] 봐르트부르크성의 대접견실이다. 엘리자베트는 탄호이저가 사라진 이후부터 혼자서 은둔생활을 해 왔다. 그러다가 탄호이저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자 기쁨에 넘쳐서 마침 준비 중인 노래경연에 참석키로 한다. 엘리자베트가 대접견실에 들어서면서 부르는 아리아가 Dich, treue Halle(그대 진실한 전당)이다. 마침내 볼프람이 탄호이저를 엘리자베트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여 온다. 탄호이저는 엘리자베트를 사랑하지만 그동안 그가 저지를 죄악에 대하여는 감히 얘기하지 못한다. 이윽고 영주와 엘리자베트는 경연대회를 위해 온 빈객들과 이웃 지방에서 온 귀족들을 맞이한다. 모두들 화려하고 멋있는 복장들이다. 이들이 입장할 때의 음악이 행진곡과 합창이다. 영주는 오늘의 노래경연대회의 주제는 '사랑의 자각(Love's awakening)이라고 발표한다. 엘리자베트는 오늘의 우승자가 요구하는 소원 한가지를 무조건 들어주도록 되어 있다.
봐르트부르크성 대접견실에서의 노래경연대회. 2008년 산호세 오페라.
볼프람이 제일 먼저 노래를 부른다. 그는 사랑이란 맑은 시냇물과 같아서 아무런 걱정 없이 흘러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탄호이저가 나서서 지고의 사랑이란 감각의 즐거움으로만 얻을수 있다고 격정적으로 대답한다. 대접견실에 있던 다른 음유시인들은 모두 볼프람의 주장을 지지한다. 탄호이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일일히 자기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설명을 해준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자기도 모르게 감정이 고조되어서 볼프람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비너스 여신에게 바치는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이어 그는 만일 여기 모인 기사들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면 비너스버그를 찾아가야 할 것이라고 외친다. 그 자리에 있던 여인들은 엘리자베트만 제외하고 모두 두려움에 자리를 떠난다. 기사들을 칼을 뽑아 들고 탄호이저를 공격하려 한다. 엘리자베트가 앞에 나서서 탄호이저를 보호한다. 그러한 소동이 있은 후에 탄호이저는 정신이 돌아왔는지 자기의 격했던 감정에 대하여 참회를 한다. 이 모든 모습을 지켜본 헤르만 영주는 탄호이저에게 로마로 가는 순례자들의 무리에 합류하도록 허락한다. 로마에 가면 교황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을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탄호이저가 비너스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자 참석했던 기사들이 칼을 빼어들고 탄호이저를 공격하려고 한다. 엘리자베트가 나서서 그들을 저지한다. 헤르만 영주는 탄호이저에게 로마로 가는 순례자들의 무리에 합류할 것을 권고한다.
[3막] 오케스트라가 탄호이저를 포함한 순례자들의 순례의 길을 표현하는 음악을 연주한다. 엘리자베트는 볼프람과 함께 순례자들을 보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다. 엘리자베트는 순례자들에게 탄호이저에 대한 소식을 묻는다.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한다. 엘리자베트는 다시 한번 정성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린 후에 봐르트부르크 성으로 발길을 돌린다. 엘리자베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볼프람은 어쩐지 엘리자베트로부터 죽음에 대한 예감을 갖는다. 볼프람의 아리아가 유명한 '저녁 별의 노래'(O Du, Mein holder Abendstern: 오 그대 나의 성스러운 저녁별이여)이다. 볼프람은 저 쪽에서 걸인과 같은 옷을 입고 비틀거리면서 걸어오는 어떤 순례자의 모습을 보고 이상하여서 다가간다. 탄호이저이다. 탄호이저는 볼프람에게 로마에 가서 교황을 알현하였으나 죄사함을 받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교황이 탄호이저에게 탄호이저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교황의 지팡이에 새 잎이 돋아나는 것보다 더 여려운 일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때문에 절망에 빠진 탄호이저는 이제 비너스버그로 돌아가는 것만이 안식과 행복을 찾는 길이라고 믿는다. 탄호이저가 비너스의 이름을 부르자 비너스가 나타나서 탄호이저를 환영하고 그의 동굴로 인도하여 간다. 이때 검은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언덕 아래로 내려간다. 볼프람은 사람들이 엘리자베트의 시신을 담은 관을 메고 가는 것을 보고 놀란다. 탄호이저가 갑자기 나타나서 엘리자베트의 시신을 부여 잡고 쓰러지면서 '성스러온 엘리자베트여, 나를 위해 기도해 주어요'라고 절규한다. 잠시후 어떤 젊은 순례자가 들어와서 교황의 지팡이에 새 잎이 돋아났다는 소식을 전한다. 탄호이저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는 징조이다.
탄호이저가 비로소 참회를 하고 있는 장면. 현대적 연출
[주요음악]
- 서곡
- 1막. Naht euch dem Strande(해안으로 가까이 오라) - 비너스버그의 음악
- 1막. 비너스의 아리아: Geliebte, komm! Sieh dort die Grotte(오라, 사랑하는 이여, 저 넘어 동굴을 보라)
- 2막. Als du in kühnem Sange uns bestrittest(즐거운 노래로 우리를 이끌 때에)
- 2막. 엘리자베트의 아리아: Dich, teuere Halle, gruss ich wieder(그대 사랑스런 전당이여, 다시 만났도다)
- 2막. 노래경연대회의 입장 장면의 합창: Freudig begrüssen wir die edle Halle(기쁨으로 고귀한 전당을 찬양하노라)
- 3막. 순례자의 합창: Beglückt darf nun dich, o Heimat, ich schauen(기뻐하라, 고향이로다, 이제 그대를 바라보노라)
- 3막. 엘리자베트의 아리아: Allmächti'ge Jungfrau, hör mein Flehen!(전능하신 성모시여, 나의 간구를 들으소서)
- 3막. 비너스의 아리아: Willkommen, ungetreuer Mann(어서 오라, 성실치 않은 남자여)
- 3막. 소년 순례자들의 합창: Heil! Heil! Der Gnade Wunder Heil!(은혜의 기적을 찬양하라)
- 3막. 볼프람의 아리아: O Du, Mein holder Abendstern(오 그대, 성스러운 저녁별이여)
[명음반] 탄호이저, 엘리자베트, 비너스, 볼프람, 헤르만, 발터 - 지휘자, 오케스트라
- 1955: Wolfgang Windgassen, Gre Brouwenstijn, Herta Wilfert, Dietrich Fischer-Dieskau, Josef Greindl, Jesef Traxel - Andre Cluytens, Bayreuth Festival Orchestra and Chorus
- 1960: Hans Hopf, Elisabeth Grümmer, Marianne Schech, Dietrich Fischer-Diekau, Gottllob Frick, Fritz Wunderlich - Franz Konwitschny, Berlin State Opera Chorus and Orchestra
- 1962: Wolfgang Windgasse, Anja Silja, Grace Bumbry, Eberhard Wächter, Josef Greidl, Gerhard Stolze - Wolfgang Sawallisch, Bayreuth Festival Orchestra and Chorus
- 1968: Wolfgang Windgasse, Birgit Nilsson, Birgit Nilsson, Dietrich Fischer-Dieskau, Theo Adam, Horst Laubenthal - Otto Gerdes, Deutsche Oper Berlin Chorus and Orchestra
- 1970: Rene Kollo, Helga Dernesch, Christa Ludwig, Victor Braun, Hans Sotin, Werner Hollweg - Georg Solti, Vienna Philhamonic Orchestra, Vienna State Opera Chorus
- 1978: Spas Wenkoff, Dame Gwyneth Jones, Dame Gwyneth Jones, Bernd Weikl, Hans Sotin, Robert Schunk - Colin Davis, Bayreuth Festival Orchestra and Chorus
- 1988: Placido Domingo, Cheryl Studer, Agnes Baltsa, Andreas Schmidt, Matti Salminen, William Pell - Giuseppe Sinopoli, ROH Covent Garden Chorus, Philharmonia Orchestra
- 2001: Peter Seiffert, Jane Eaglen, Waltraud Meier, Thomas Hampson, Rene Pape, Gunnar Gudbjörnsson - Daniel Barenboim, Berlin Staatskapelle Orchestra, Berlin State Opera Chorus
[비너스버그](Venusberg) - Venus Mountain - Hörselberg(회르젤버그)
탄호이저에 나오는 비너스버그는 실제로 있었던 곳인가, 아닌가? 대답은 '모른다'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신화 또는 전설에나 등장하는 지역으로 낙착되어 있다. 그런데도 실제로 있는 지역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보다도 실제로 있는 지역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리라. 그렇게 믿고 싶은 이유 중의 하나는 그곳 비너스버그에 가면 거의 반라에 가까운 요정처럼 예쁜 미인들이 수두룩하고 매일같이 에로틱한 파티가 벌어진다고 하므로 죽기 전에 언젠가는 한번 가보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전설이 되었건 신화가 되었건 비너스버그라는 지역은 독일 중부 고타(Gotha)라는 마을과 아이제나하(Eisenach)라는 마을 사이에 있는 산속에 있는 동굴이라고 한다. 고타와 아이제나하는 물론 실제 지역이다. 대체로 8세기 이후에 형성된 마을들이라고 한다.
비너스버그의 동굴에는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의 궁전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산속의 은밀한 곳에 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도무지 찾을수가 없다고 한다. 요행히 비너스버그를 찾아서 그곳에 들어간다는 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것과 같은 영원한 파멸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전설적인 기사 탄호이저는 비너스버그에서 1년을 지내다가 문득 더 이상 그곳에서 지내는 것은 죄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비너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깥 세상으로 나와 로마에 있는 교황 우르반 4세를 찾아가서 지금까지 그가 지은 죄악에 대하여 용서받으려고 했으나 교황이 용서를 하지 않는 바람에 실망하여 다시 비너스버그를 찾아가고 그 이후로 탄호이저를 보았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전설의 기둥줄거리이다. 이런 이야기는 16세기에 나온 Lied von dem Danheüser(단호이저의 노래)에 나와 있는데 이 노래는 1845년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의 주요 소스가 된것이다. 곁들여 말한다면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의 첫 장면에 나오는 비너스궁전에서의 광란의 연회장면은 대단히 노골적이어서 아이들도 볼수 있는데 아무리 오페라이지만 그러면 되느냐는 논란을 낳았다.
하인리히 하이네의 간결명료한 시인 Tannhäuser, A Legend 에서는 주인공인 탄호이저가 빈스버그에서 7년을 보내다가 로마로 떠났다고 되어 있다. 말이 7년이지 그건 아마 그저 오랜 기간이라는 의미로 썼을 것이다. 영국의 시인인 알저논 챨스 스윈번(Algeron Charles Swinburne: 1837-1909)는 그의 시이 Laus Veneris에서 역시 비너스버그에 대한 설명을 잊지 않았다. 그는 이 시에서 1인층 대명사를 사용하여 마치 자기 자신이 비너스버그를 경험한 것처럼 그렸다. 독일의 시인인 루드비히 티크(Ludwig Tieck: 1773-1953)도 비너스버그를 주제로 한 시를 썼다. 영국의 소설가인 안소니 파웰(Anthony Powell: 1905-2000)도 Venusberg 라는 그의 초기 소설에서 비너스버그에 대한 내용을 비교적 상세히 적었다. 비너스버그에 대하여 설명한 또 한 사람이 있다. 13세기 스코틀랜드의 시인인 토마스 더 라이머(Thomas the Rhymer: 약 1220-1297)이다. 비너스버그의 광란의 연회를 그렸다. '탄호이저 게이트'(Tannhauser Gate)라는 영화는 기사들이 에로틱한 모험을 위해 마침내 발견한 곳과 일반 세상과의 경계에 있다고 하는 문을 뜻했다. 독일의 본에는 베누스버그(Venusberg)라는 지점이 있다.
[교황 우르반 4세] Urban IV(영어) - Urbanus PP. IV(라틴어) - Urbano IV(이탈리아어)
교황 우르반 4세(약 1195-1264)는 독일의 유명한 음유시인(민네쟁거)인 탄호이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교황이다. 우르반 4세는 1264년에 세상을 떠났고 탄호이저는 1265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두어 세기가 지난 때에 우르반 4세는 탄호이저에 대한 전설, 또는 민화에 어쩔수 없이 등장하는 인물이 되었다. 탄호이저가 비너스버그에서 환락의 한 해를 보낸 후에 죄악을 인정하고 용서받기 위해 찾아갔던 사람이 우르반 4세였기 때문이다. 우르반 4세는 261년부터 세상을 떠난 1264년까지 교황이었다. 교황은 대체로 추기경 중에서 선출하지만 그는 추기경이 아니었다. 우르반 5세, 우르반 6세도 추기경이 아니었다. 전설에 따르면 비너스버그를 발견한 탄호이저는 1년 동안 그곳에서 비너스 여신을 섬기며 환락의 생활을 한다. 탄호이저는 참회의 마음으로 로마로 가서 교황 우르반 4세를 만나 그가 지은 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고자 한다. 그러나 교황 우르반 4세는 탄호이저를 용서하는 것이 지팡이에 꽃이 피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말한다. 실망한 탄호이저가 떠난지 3일후 교황의 지팡이에서 꽃이 핀다. 급히 사람을 보내어 탄호이저를 불러 오도록 한다. 그러나 탄호이저는 이미 비너스버그로 들어간 후였다. 그후 어느 누구도 탄호이저를 다시 보지 못해다고 한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전설일 뿐이다.
교황 우르반 4세
[교황 우르반 4세의 말: 탄호이저를 용서하는 것이 지팡이에 꽃이 피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이말은 구약성경 에스겔 7장 10절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한 것이라는 얘기다. 기록된바, "불지어다 그 날이로다 볼지어다 임박하도다 재앙이 이르렀으니 몽둥이가 꽃이 피며 교만이 싹이 났도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몽둥이, 즉 지팡이라는 것을 유대를 징계하기 위한 바벨론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 몽둥이에 꽃이 핀다는 것은 바벨론이 강해져서 전세계를 지배하는 최강의 제국으로 번영하는 것이 마치 몽둥이에 꽃이 파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교만이 싹이 난다는 것은 바벨론이 강성해져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한 후에 교만스럽게 행동할 것이라는 예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