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기일구(當機一句)
〔상당(上堂)하시어 주장자(拄杖子)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고,〕
不動如如萬事休<부동여여만사휴>요
澄潭徹底未曾流<징담철저미증류>로다.
個中正念常相續<개중정념상상속>이면
月皎天心雲霧收<월교천심운무수>로다.
움직임이 없는 여여함은 만사를 쉼이요,
맑은 못에 철저히 밑까지 사무치니 일찍이 흐르지 아니함이로다.
이 가운데 바른 생각 항상 이을 것 같으면
달은 하늘에서 빛나고 운무는 걷힘이로다.
기틀에 다다라 척척 나오는 일구(一句)!
이것이 가장 소중하도다. 당기일구(當機一句)가 석화전광(石火電光)으로 나오지 못한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음이로다.
당대(當代)의 선지식들인 조주(趙州)·운문(雲門)·임제(臨濟)·덕산(德山) 선사 같은 분들을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봉(機鋒)을 갖추었기 때문이로다.
글[文章], 송(頌), 염(拈), 평(評) 등은 시간을 두고 사량(思量)하여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면전(面前)에서 즉시에 하는 문답은 사량이나 조작(造作)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이라. 그러기에 당기일구의 기틀을 갖추지 못했다면 접인(接人)할 능력도 없을뿐더러, 알았다고 하는 것도 모두 망령된 사견(邪見)에 지나지 않음이로다. 고인들의 전지(田地)에는 꿈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로다.
요즈음의 선지식들이 당기(當機)에 다다라 주저하게 되는 것은 견처(見處)나 살림살이도 다 고인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로다.
이 무변대도(無邊大道)의 불법의 진리를 바로 알려면 고인들의 법문 하나하나를 다 바로 볼 수 있어야 함이로다. 고인들의 살림살이가 따로 있고 현재 우리가 공부한 살림살이가 따로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로다. 예나 지금이나 견성법(見性法)이란 항상 동일한 것인데, 만일 서로 다름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어느 한 쪽에 허물이 있음이로다.
그간 무수한 도인들이 각자가 깨달은 경지(境地)를 기량(機量)대로 써왔음이니, 제 아무리 약삭빠른 이라도 엿볼 수 없고 사량, 분별을 붙일 수 없게끔 무진삼매(無盡三昧)의 공안을 베풀어 놓았도다. 이러한 수많은 공안에 대하여 확연명백하지 못할 것 같으면 크게 쉬는 땅을 얻었다고 할 수가 없고, 고인들과 같은 경지를 수용할 수도 없음이로다.
그러니 모든 참학인(參學人)들은 고인의 경지에 근간(根幹)을 두어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베풀어져 있는 공안(公案)의 그물을 다 뚫어 지나가야 함이로다.
석일(昔日)에 조주(趙州) 선사께서 노파에게 물으셨다.
“어디를 가는가?”
“조주의 죽순(竹筍)을 훔치러 갑니다.”
이에 조주 선사께서 다시 물으셨다.
“갑자기 조주를 만나면 어찌하려는고?”
이에 노파가 얼른 한 대를 때리거늘, 조주 선사께서 그만 두셨다.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조주 선사와 노파를 알겠느냐?
노파는,
氣勢萬丈이나 得便宜時失便宜<기세만장 득편의시실편의>요
기세가 만 길이나 높음이나 편의를 얻은 때에 편의를 잃음이요,
조주 선사는,
無言而立이나 魏魏當當如高山<무언이립 위위당당여고산>이로다.
말없이 서 있음이나 위위당당해서 높은 산과 같음이로다.
〔주장자(拄杖子)로 법상(法床)을 한 번 치시고 하좌(下座)하시다.〕
갑신년 동안거 동화사 금당선원 결제법어(2548.2004)
첫댓글 나모 땃서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붇닷서! 존귀하신분, 공양받아 마땅하신분,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께 귀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