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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놈 그 남자 아픈년 그 여자]
# 1
“수면제. 소화제. 제산제. 진통 소염제. 안정제. 항우울제.”
“종합 비타민. 포도당. 안정제.”
“알았어. 내가 양보 한다. 수면 유도제. 알마겔 에프. 타이레놀.”
“어쭈우, 니가 의사냐?”
“어린놈. 전문의나 좀 따고 의사 타령해라.”
나보다 자그마치 열 살이나 어린 녀석의 입에서 나오는 어린놈 소리는 들어도 들어도 생소하다.
나와는 단 일 년도 ‘같은 이십대’ 이거나 ‘같은 삼십대’ 일 수 없는 녀석은
참 자연스럽게도 그 말을 나에게 뱉어낸다. 어린놈.
임다소.
그 녀석은 참 예쁜 병실에 세 들어 살고 있어서.
(겉보기엔 그렇게 아픈 것 같지 않아 입원 보다는 세 들어 산다, 는 말이 더 어울리는 녀석이다.)
이렇게 아침 회진을 돌며 녀석과 티격태격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상이다.
침대와 의자, 그리고 작은 테이블. 아무 것도 없는 하얀 벽도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비춰지면 생기가 돈다.
매일 아침 샤워를 하는, 녀석의 젖은 머리칼 샴푸향도.
“수면제 없이도 잠 잘 자고, 진통제 없이도 머리 안 아프고, 소화제 없이도 밥 잘 먹는 거. 연습 해야지.”
“됐거든.”
잔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버린다.
나보고 어린놈 이라고 부르는, 나보다 열 살 어린 환자 녀석은.
아.
또. 또다, 이 녀석.
“자꾸 링거 바늘 뺄래. 혈관 여러 번 찔리면 숨는단 말이야.”
슥슥, 미리 챙겨 온 알콜 솜으로 녀석의 손등을 문지르니 획, 뿌리친다.
“의사는 이런 거 직접 안 해도 되니까 나가 보시죠, 어린놈.”
“너처럼 밥 안 먹는 환자한텐 링거가 엄청 중요한 거란 말이다.”
갑자기 발딱, 일어나더니. 뚫어지게 나를 쳐다본다.
그 눈빛. 내 목숨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너나 잘 하라는 그런 눈빛.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녀석에게 내가 꼼짝 못 하는 이유이다.
나보다 이십 년은 더 산 듯한 그 두 눈.
“알았어, 알마겔이랑 타이레놀 갖다 주면 되잖아. 수면 유도제는 있다가 봐서.”
오늘도 내가 졌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괜히 머쓱해 진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그럼 쉬어, 하고 뒤를 도는 내 뒷모습에 녀석의 목소리가 꽂혔다.
“담배 좀 작작 피워.”
주머니에 담배갑이 들었는걸 보진 못했을텐데.
내가 자기 때문에 작작 속이 탄다는 걸, 알고 있는 목소리.
괜히 맘이 편안해지는 그런 목소리를 가졌다, 녀석은.
# 2
“걔 월경은 하냐?”
“글쎄. 따로 들은 건 없는데, 아직은.”
산부인과 근무하는 동료와 맞담배를 태우며, 병원 앞 벤치에서 이따위 얘기를 하니
지나가던 미니스커트가 변태새끼들. 이라고 표정으로 소리치며 지나갔지만,
우리는 그 여자 다리를 감상하시느냐 표정을 읽진 못했다.
(읽었다 하더라도 내가 알게 뭐야.)
“회복이 늦는 편이다. 아직 젊은데.”
“마음도 불편하고 먹는 거, 자는 것도 시원찮으니까.......”
나는 말끝을 흐렸다.
환자에 대한 소견을 나누고 있는 것뿐이지만.
녀석이 없는 자리에서 녀석 얘기를 하자니 웬지 깨림칙했다.
맑은 가을 햇살을 나 혼자 쬐고 있단 죄책감일까?
이 따위 쓸모 없는 생각을 하다가 담뱃불에 입술을 데었다.
그래, 내가 가을 햇살 때문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사이란 게 정답.
“어린 나이에 참 그러기가 드문데. 모성애가 강한 애야.
모르는 남자한테 사고 당해서 그런 거라. 오히려 집에선 차라리 잘 됐다, 싶은 것 같던데.”
나보다 열 살 어린 그 녀석의 아가는.
숨이 끊기도고 녀석에게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수술을 해야 했다. 서로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했던 그 둘은, 쇠붙이 매스에 의해 헤어졌다.
그 후로 두 번인가 더 병원에 왔는데,
한 번은 락스를 마시고 실려와 위세척을 했고 다른 한 번은 벨트로 목을 맸다가 숨이 끊기기 전 발견 돼 실려왔다.
자기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을 해할 위험이 있는 정신 질환 환자는
격리수용. 즉 입원시킨다.
두 번이나 자살 시도를 한 임다소 그 녀석도.
# 3
여느 날과 같이 녀석의 병실 문을 열었다.
.......
전 날 저녁과 오늘 아침 식사는 그대로 쌓여 있었다.
링거 병은 산산 조각이 나서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었다.
녀석의 오른 손엔 유리조각이 들려 있었고, 왼쪽 손목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미쳤어?”
기운도 없고 요령도 없어 동맥을 깊이 끊지 못했음에도 녀석에게 화가 났다.
본능처럼 응급처치를 하면서도 녀석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다.
미쳤냐니.
확실히 정신과 환자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더구나 자살 위험 때문에 입원한 환자가 자살 시도를 했다고 담당 의사에게 들을 말은 더더욱.
난 왜. 화가 났을까.
“생리가 나와. 수면제 없이도 밤에 잠이 오기 시작하고, 소화제 없이도 밥을 먹을 수 있게 돼. 배 고픈 것도 느껴져.
내 몸이 내 아기를 잊어가고 내 마음이 편해져 가고 있어.
내 아기는 캄캄한 곳에서 그렇게 혼자 죽었는데. 갈기갈기 찢겨져 버려서 이젠 찾을 수도 없는데.
그 고통과 공포의 백만 분의 일도 느끼지 못 한 내가 괜찮아지고 있잖아.”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다.
무서우리만큼 스산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무 공허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용서할 수 없어, 라고.
정말이지 지독한 사랑이었다. 모성애.
아침부터 비가 내렸었는데 거짓말처럼 다시 해가 났다.
녀석의 손목에 감은 붕대 위에 테잎을 잘라 붙이며 얘기 했다.
“아기는. 다시 돌아와. 전문의 말 아니라고 무시하지 말고 믿어. 꼭 와. 그 대신 두 번째는 좀 까다롭게 굴어.
정말 좋은 아빠랑 정말 좋은 엄마가 될 사람들이 딱 준비가 됐을 적에. 그 때만 와.”
“그치만 난 이제 남자가 무서워. 우리 아기가 가을을 보지 못하고 간 게 참 미안해서.”
말이 되지 않는 말이었는데, 난 이해가 됐다.
창가 쪽으로, 녀석은 완전히 돌아앉았다.
창백한 목과 어깨의 피부가 햇빛을 받아 빛이 났다.
“무서운 건 치료할 수 있어.”
“비타민이나 포도당. 이 딴 처방전이라면 집어 쳐. 항우울증 어쩌고. 그 약도 이젠 멀미나고.”
“그런 것 보다 훨씬 좋은 거.”
“어린놈. 난 그렇게 경제 사정이 좋지 못 해.”
“내가 공짜로 해 줄게. 그니깐 일단 뭔지 물어나 봐.”
“뭔데?”
“연애질.”
실수.
실수였다. 녀석에게 이런 얘기를 한 건.
아이를 잃은 녀석에게 할 얘기도 아니고.
의사가 환자에게 할 얘기도 아니고.
“그, 그러니깐. 내 말은. 니가 그럴 정도로 괜찮아 져야....... 그만큼 안정이 되고, 또.
음........ 그래야 나중에 다시 아기가.......”
무슨 말을 해도 수습이 안 되는 상황도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럴 땐, 그냥 되는 데로 막 가는 게 상책이다.
“니가 이래도 아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아. 이제 그만 보내줘. 그리고 니 자신이 괜찮아져야 돼. 그래야. 그래야.......
잊지 않을 수 있어. 예쁜 기억이....... 될 수 있게.”
# 4
외과에 좀 다녀올게.
하고 녀석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뚜벅 뚜벅, 새 하얀 복도를 조용히 지나간다.
숨소리도 한 개 남기지 않고서.
목숨을 끊을 듯 우울해 하다가도 얼음장같이 차갑게 냉정해 지기도 하는 녀석이다.
제 나이 또래 답지 않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제 나이 또래 환자답지 않다.
조울증도 아니고서야 저러는 게 흔친 않은 일이다.
녀석이 ‘엄마’ 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엄마란 존재는, 그렇다.
“내가....... 처치한 거, 영 못미더워? 전문의 아니라서?”
“그래서 어린놈 인거야.”
“응?”
“흥분했을 땐 환자 보는 거 아니야.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환자 볼 땐 흥분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어린놈이야, 넌.
맞는. 말인 것도 같다.
“오늘은 한가해?”
아. 원래 좀 한가 했었지.
그런 표정을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나, 기다렸어?
이런 질문을 기대 했었던 것도 같다.
“가,갈증 난다. 음료수 사 마시러 가자.”
“어리긴.”
엘리베이터 쪽으로 잡아끌었다.
흠칫, 내가 잡은 녀석의 손목에는 붕대가 감겨있었다. 천 느낌이 났다.
아팠을텐데 미동도 하지 않았다, 녀석은.
가끔씩.
이 녀석은 유산 된 아기를 처리할 때 했던 마취가 아직도 풀리지 않은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들게 하는 행동을 하곤 한다.
신체적 고통 따위는 더 이상 녀석을 방해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괴롭혀 왔던 것이다.
자지 않고, 먹지 않고, 소화시키지 않고.......
자신이 멀쩡해지면 아기의 흔적이 없어질 거란 두려움이.
나보다 열 살 어린 이 녀석을 이렇게 만들었다.
“레모네이드, 싫어하지 않아?”
진열장을 한번 슥 둘러보더니 스스럼없이 노란색 작은 병을 집어드는 녀석에게 물었다.
평소에도 무척 싫은 티를 냈었는데.
“난 좋아하는데. 아기가 싫어했었어.”
휘적휘적, 계산대로 걸어가 씩씩하게 노란 병을 내민다.
“계산해.”
완전히 뒤를 돌아 나를 쳐다보며 엑센트 없이 녀석은 저 세 글자를 내뱉었다.
# 5
녀석은 가을빛이 궁금했었나보다.
털썩, 잔디밭에 아무렇게나 주저앉는다.
“야, 좀 신경 좀 써서 앉아.”
“퇴원해.”
내 말에 곱게 대답 하는 법이 없다.
영양가 있는 문장이라고 생각하기 전 까진.
녀석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늘 간단명료한데,
그 간단한 단어들을 듣고도 헛갈리는 때가 있다.
바로 이런 경우.
너무 맑은 해와 하늘은, 나보고 엿먹으라는 듯이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니 담당의 인데? 나한테 얘기도 안 하고?”
“어린놈보다 더 위에 있는 사람 결제 떨어졌어.”
담당 교수님을 뜻하는 것 같다.
녀석은, 이제 퇴원을 한다.
아기를 잃고 본인도 잃었던 녀석이. 이젠 자기 자신을 되찾은 걸까?
“당신 말이 맞았어. 내 몸이 영원히 회복되지 않는 다고 해서 내 아기의 흔적을 영원히 가질 수는 없는 거지.
나를 괴롭히는 이유는. 아기 때문이 아니라. 녀석을 지키지 못한 내 자신을 위한 변명이었을 거야.”
꿀꺽 꿀꺽,
레모네이드 한 병을 다 비운 녀석이.
노란 그 병을 쓰레기통을 향해 휙 날린다.
“당신이 여자가 고프다거나. 나를 어떻게 해 보고 싶어서 그런 소리 한 게 아니란 거. 알아.
진심이었을 거야. 내가 남자랑 연애도 하고, 그럴 만큼 괜찮아 지길 바라던 마음.”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여자를 어떻게 해 보려고 그런 얘기를 한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괜히 뭔가 비틀어 보고 싶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어린놈이잖아, 당신. 순수하니까.”
여전히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그 녀는 나를 ‘어린놈’ 이라고 부른다.
녀석은 하늘을 향해 눈을 들었다.
창백했던 피부가, 오늘은 유난히 투명하다.
“그러니까, 당신도 이제 돌아가.”
“.......응?”
“모성이 그리우면 엄마한테 돌아가라구.”
“.......”
“만약에.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멀리 계신다면.”
“.......”
“당신도 보내드려. 그래야 기억이 남는 거야. 그러지 못하면. 미련과 후회밖엔 없어.”
알지,
하고 되묻는 듯. 고개가 살짝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 녀석의 속눈썹이, 햇살을 받고 반짝였다.
엄마를 잃은 어린놈의 오랜 속울음을 들을 수 있었던, 나보다 열 살 어린 그 여자의 속눈썹이.
“다음에 볼 땐. 그 남자 그 여자 하자. 어린 놈 아픈 년 하지 말고.”
외래 때 봅시다, 하고 씩씩하게 말하듯
그녀는 손을 번쩍 들어 안녕, 하고 사라졌다.
다른 데 간 것도 아니고,
내 직장이자 내 의식주 먹고 자고 싸고 모든 걸 해결하는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 간 건데도. 따라 갈 수가 없다.
# Epilog
“야, 너 걔랑 사귀냐? 애인이야, 애인?”
“애인 아니야.”
“야, 너 지금 우리 나이가 몇 갠 줄 아냐? 애인 아니면 모르는 여자가 인생 여자관계의 전부일 때가 지났거든?”
“친구야.”
“지랄 븅딱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환자를 꼬실 거면 제대로 꼬시던가, 친구는 또 뭐야?”
“밥 친구.”
“밥....... 친구?”
“응.”
“야, 이 새끼 미쳤나보다. 정신과를 가게 내비 두는 게 아니었어. 내가 죄인이지. 뭐해, 얘 약 좀 줘.”
가끔 만나서 순대도 사 먹고.
아무 장식도 없는 하얀 벽에, 하얀 털 말티즈가 쫄랑쫄랑 걸어 다니는 녀석의 방에 초대 돼
편의점에서 파는 포장 김치에 스팸 넣은 볶음밥도 얻어먹고 하는. 그런 사이.
“아 무슨 니보다 열 살 어린 애랑 친구를 먹어? 미쳤냐?”
아직은. 친구가 맞아.
천천히.
느릿느릿 다가가는 중.
어린 놈 아픈 년을 벗어나서.
그 남자와 그 여자가 되고 있는 중.
주로 유머나라에서만 놀-_-;던 하루 입니다.
음..꽃잎게시판에 써야될까, 했었는데 말머리에 '단편' 없더라구요. 대신 단편 게시판이 있고...
이게 딱히 한편 짜리 얘기는 아니고 5편+ 에필까지 있기는 한데
공지사항 읽어보니까 10편 까지는 단편이라고 분류가 되어있어서 이 곳에 올립니다.
그냥 저냥 심심한 얘기이지만, 편한 마음으로 가볍게 읽어주시면 감사할게요. ^^
첫댓글 아아...웬지 감동스럽네요...
히히 감사합니다>_<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대가 읽는다니 내가 창피하다..ㅡ.,ㅡ;;;;;;;;
선리플 후감상 갑니다! 어어 기네~
우와 저 읽기전에리플먼저달아주시는분 처음이에요 ㅋㅋ 감사합니다 ^o^
그 남자 그 여자가 된 후가 굉장히 궁금해져요. 그 남자 그 여자 이야기 써주실래요?
이히 노력해볼께요 ^^
잘 읽고 갑니다. 멋진 글이에요.
감사합니다. 히히 ^0^ 뭔가를 쓰면서 멋지단 말은 처음들어봐요. >_<
와 뭔가 멋있어요
멋있다고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_<
이 다음 이야기 안쓰셨나요?
저도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