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염화실
 
 
 
카페 게시글
*** 좋은글(스크랩)모음 스크랩 네팔 룸비니 `대성석가사` 법신 스님
문수사리 추천 0 조회 62 12.07.10 17:22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에 한국 절 완공… '대성석가사' 법신 스님
14년 반 동안 공사 네팔에 황룡사 복원, 배낭객에 숙소도 제공
다투는 삶이 싫어서 高2 겨울 때 출가 경전·大入 공부 병행
"저녁은 不食입니다 벌써 말 너무 많이 해… 궁금한 게 뭐그리 많나요"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 안에 있는 한국 절(寺) '대성석가사'에 닿았을 때는 거의 녹초가 되어 있었다. 절 입구에서 영어로 "치프 몽크(chief monk)는 어디 계시오?" 물으니, 네팔 현지인이 "저기 주지스님" 하며 가리켰다.

법신(法信·56) 스님은 절 마당을 걷고 있었다. 단구에 헐렁한 잿빛 반팔 셔츠를 입었다. 그와 마주치자, '나이가 들면 그가 살아온 이력(履歷)이 얼굴에 모두 기록되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첫눈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지만, 막상 질문은 이랬다.

올 초 대성석가사 법당 위에서의 법신스님. 인터뷰를 한 다음 날 그는 절을 떠나 기자 가 떠날 때까지 일부러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사진을 찍지 못했다./연합뉴스

―언제부터 여기 계셨습니까?

"1995년 4월에 왔으니 햇수로 14년 반이 됐어요. 그때는 갈대밭 늪지였어요. 지금도 코브라와 개구리들이 많이 삽니다. 처음엔 내가 머물 창고부터 지었어요. 저쪽에 보이는 벽돌집입니다. 그런 뒤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가 이 절을 짓기 시작한 것이죠. 돈을 갖고 와서 공사를 한 게 아니고, 돈이 들어오는 대로 공사했지요. 바로 얼마 전 절 공사를 다 마쳤습니다."

―처음 어쩌다가 여기로 오게 된 것입니까?

"유네스코(UNESCO)가 여기 부처님 탄생지 안에 '국제사원구역'을 지정했습니다. 나라마다 고유의 절을 짓도록 이곳 부지를 99년간 빌려줍니다. 우리나라 스님 두 분이 여기서 절을 지으려다가 그만둔 적이 있어요. 그러자 이곳 개발위원장이 제 은사인 도문(道文) 스님께 '한국은 왜 시작만 하고 연락이 없나'고 했어요. 당시 은사스님은 대각사 주지로 계셨고 제가 총무 소임을 맡고 있었어요. 스님께서 고민하시는 걸 보고 제가 자원했지요."

―유럽의 히피나 배낭여행객처럼 네팔이라는 나라에 이끌렸나요?

"네팔도 괜찮지만 저는 공사(工事)가 좋았어요. 선천적으로 도형과 계산 쪽에 밝았어요. 그래서 절 공사를 한다니까 자원한 겁니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큰 건축물을 짓고 싶어도 건설회사에서 다 맡아서 하니 기회가 없었어요. '아 이거다'며 자천했어요. 저는 도목수에 맞습니다."

―공사가 좋다니요?

"절에 들어와서도 조그만 공사만 있으면 제가 뛰어들었어요. 1980년 내장사에서 재무 소임을 맡아보니 돈 지출이 많아요. 그래서 절집의 방 수리, 보일러 수리를 할 때면 경비를 아끼기 위해 직접 내가 했어요. 지붕에 비가 새 대웅전이 썩어갔는데, 내가 경사진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뜯어내고 공사를 했어요. 서울 대각사에서는 고장 난 지하실 보일러 공사를 직접 다 했어요. 그렇게 짓고 고치고 같이 일하는 게 재미있어요. 신도들 집에 가도 막힌 변기부터 완전히 수리를 다 해줍니다. 제가 건물을 한번 보고서 즉시 도판(圖版)을 그리면 건축업자들도 깜짝 놀라요."

―스님이라면 경전 공부나 수행(修行)에 전념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경전 공부에는 완전히 벽을 쌓았어요. 저 자신이 그걸 알고 있어요. 학교는 너무 재미없었고, 겨우 다녔어요. 출가해서 한쪽으로 터지는 게 있는지 절로 건축·골조 공사, 벽돌 쌓기, 공간 구성, 선(線), 수치 계산으로 머리가 터져버린 거예요. 어디서 따로 배운 적도 없었어요."

―그런 분이 왜 스님이 됐지요?

"그건 인연이 돼서 스님이 된 거고, 그런데 공부에는 별 취미가 없었어요. 확실히 내가 느껴요."

불교적으로 말하면 그를 만난 것은 어떤 '인연(因緣)'에 의한 걸까. 당초 여성산악인 오은선씨의 안나푸르나봉 등반 취재를 마치고 산 아래 마을로 내려와 있었다. 그때 룸비니가 떠올랐다. 또다시 피곤한 여정(旅程)을 놓고 망설였지만.

등에는 배낭, 왼손에는 노트북 가방, 오른손에는 무거운 등반장비 카고백을 들고 올라탄 시외버스는 7시간이나 산길을 위태롭게 달렸다. 종점에서 다시 갈아탄 동네버스는 시속 20㎞ 이하로 달렸다 쉬었다를 1시간 반 반복했다. 이어 절까지는 릭샤(자전거)를 탔던 것이다.

샤워하고 나오니, 그는 나무탁자에 사과·바나나·비스킷 등을 담은 비닐봉지를 쭉 늘어놓고 현지인들에게 하나씩 건네주고 있었다. 봉지는 70개였다.

"국내에서 부탁받은 천도제(薦度祭)를 지내고 난 뒤 그 제물을 나눠주는 겁니다. 우리 돈으로는 얼마 안 되지만, 이분들에게는 이런 것도 정말 귀하지요. 소 먹이는 아이들에게도 '오늘 제사 지내니 오라'고 했는데…."

검게 그을린 그에게서 좀 더 '멋진' 말을 듣기를 난 원했다.

―몇 살에 출가했나요?

"고2 겨울 때, 당시 은사님이 경주 분황사의 주지스님이었어요. 경주고 불교학생서클을 지도했어요. '출가자 있으면 신청하라' 할 때 손을 번쩍 들었어요."

―서클 활동하다가 출가한 겁니까?

"그렇지요. 은사스님을 만났기 때문이지요. 사람의 영향이란 그런 것이지요."

―본인 스스로 결정했습니까?

"누구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스스로 하는 것이지요. 이상하게 스님들이 모여 생활하는 모습이 좋게 느껴졌어요. 물론 부모님은 '유교 집안에서 스님이 뭐냐'고 반대가 심했지만, 본인이 결정해나가면 방법이 없지요. 뭐, 인생살이가…."

―고2 때면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려고 하는 게 정상이지, 돌아보면 그때의 생각이란 얼마나 미숙한 것입니까?

"경쟁하면서 무엇을 하는 것에 취미가 없다는 걸 느꼈어요. 내 이익과 편의를 위해 사람들과 경쟁해야 하는 게 힘들고 괴로웠어요. 당시에는 만원버스를 타려면 매달려서 밀어내 들어가야 했잖아요. 난 그게 싫어서 아예 안 탔어요. 선착순이라고 하면 스스로 달리지 않았어요. 다투지 않는 삶, 경쟁 않고 사는 삶을 원했지요. 왜 그런지 저도 모르겠어요. 고2 때 출가해 경전 공부도 하고 대학 시험 공부도 했지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참 힘든 일을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했지요."

―그때는 이성에 눈뜰 나이인데 독신(獨身)의 삶을 택했나요?

"스님들이 사는 공동체 생활 모습을 보고, 이 길로 가도 괜찮겠구나 하는 확실한 자신이 섰어요. 사람이 느낌이 있잖아요. 이성과 함께 사는 것도 행복하지만, 혼자서도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룸비니에는 중국·일본·미얀마·태국·독일·미국 등 20여개 나라가 각각 자기 고유의 절을 지었다. 하지만 해가 질 무렵 외국의 배낭여행자와 순례객들이 찾아오는 곳은 여기 '대성석가사'다. 나그네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요사채 두 동(棟)은 최대 500명까지 수용한다. 숙박요금은 없고 '헌금통'만 놓여 있다. 이날 스리랑카 스님과 순례객들 150명이 단체로 '잠자리'를 찾아 여기로 들어왔다.

"여기에 처음 왔을 때 게스트하우스가 두 개밖에 없었어요. 사람들이 몰려오는데 잘 데가 없어요. 그래서 법당보다 먼저 요사채부터 지었지요. 부처님도 잘 모셔야지만, 절은 대중(大衆)이나 지친 나그네들이 쉬고 가는 곳이기도 하거든요."

막 공사가 끝난 법당은 기단(80m×80m)을 빼고도 3층인 웅장한 규모다. 이곳 각 나라의 절 중에서 최고의 높이(42m)라고 한다. 불타 흔적만 남아 있는 경주의 최대 사찰 황룡사(皇龍寺)를 복원했다고 한다.

―이 거대한 절을 지으려면 경비가 많이 들었을 텐데요.

"은사스님께서 도와주셨고, 국내의 많은 사찰과 신도들도 후원해주셨지요. 저는 '얼마가 들어와도 상관이 없다, 들어오는 만큼 짓겠다'는 마음이었어요. 돈이 들어오면 그만큼 벽돌과 철근을 샀고, 자재 양만큼 건물이 올라갔지요. 이 절을 짓는 데 약 5억원이 들었습니다. 환율(換率) 차이가 없었다면 이렇게 크게 짓기가 어렵지요. 우리 국력으로 지은 셈이지요.

돈은 우리가 댔지만, 실제 짓는 일은 네팔 사람들 손으로 한 거죠. 이 절을 지으면서 농사만 짓던 사람들이 철근·미장·목수 기술을 배웠어요. 한 기술을 익히면 로테이션을 시켜 다른 기술을 배우게 했어요. 기술이 이 사람들을 먹여 살릴 테니까요."

―그런데 절 설계를 누가 했지요? 고려시대 때 불타 터만 남은 황룡사를 어떻게 복원할 수 있었나요?

"설계는 누구에게 맡겼어요. 설계하는 사람이라면 황룡사의 불탄 자리를 보면 '황룡사 전체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지요. 어떤 건물을 짓고자 하면 딱 5분 만에 가설계가 나와야 그쪽 분야에 머리가 터진 분이지요."

네팔 룸비니의 대성석가사.

―스님은 왜 깨달음에 대해 말씀하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깨쳤다는 분의 말씀을 얻어 듣기 위해 줄을 서고 있습니다.

"저는 경전 공부에 막히고 글도 못 씁니다. 사람 중에는 말 잘하는 이도 있고, 계산에 밝은 이, 의술에 밝은 이, 예술에 밝은 이가 있어요. 다 따로 있더라고요…."

저녁 공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정확하게 오후 6시. 순간 그가 말을 끊고 일어났다. 내게 "어서 공양하러 가십시오" 권했다. 당연히 함께 갈 줄 알았다. 그와 가는 방향이 달랐다.

"저녁은 불식(不食)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제 처소로 들어갑니다." "말씀이 안 끝났는데요." "저녁에는 말을 삼갑니다. 자꾸 허튼 말을 하게 될지 모릅니다. 벌써 너무 많은 말을 했고요." "그러면?" "무엇이 그리 궁금한 게 많나요. 내일 뵙지요."

다음 날 새벽 3시 반에 눈을 떴다. 바깥을 나오니 한 치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안개가 자욱했다. 아침 공양을 하고 그의 처소로 가니 문이 잠겨 있었다. 그는 어디론가 외출했다. 더 이상의 인터뷰를 피하기 위해 그가 일부러 나갔고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오후까지 멍하니 절 마당을 바라보고 있자, 여기 절 살림을 맡아온 보살 배영심(62)씨가 대신 미안해했다.

"스님이 여기에 들어왔을 때 동네에는 기근이 들어 먹을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일하러 오라고 했습니다. 서로 일거리를 다퉜어요. '우린 일거리가 많고 조금 있다가 가는 사람도 아니다. 임금은 우리가 다 준다'고 했어요. 인부들이 밥을 먹는데, 밥 먹고 죽을까 싶어 걱정했어요. 얼마나 굶었으면 밥이 목 아래까지 차도록 먹었어요.'밥은 늘 충분히 있다. 걱정하지 마라' 달랬어요. 동네에 나가면 도로를 보수하고 도랑을 파고 우물을 만들어 줬어요. 일일이 방문해 집안을 고쳐주고 같이 음식을 나눴어요. 사람들이 스님을 '다니바바(존경하는 어른)'로 불러요."

비행기 일정에 쫓긴 내가 마지막으로 웅장한 법당을 쳐다보며, "설계를 누가 했습니까?" 물었다.

"스님이 다 설계한 거죠. 건축회사가 들어와서 할 일을 혼자 하신 거예요. 인부들은 스님이 시키는 대로 일했어요. 누구에게도 당신이 했다는 걸 안 밝혔어요."

 
다음검색
댓글
  • 12.07.10 20:03

    첫댓글 나무관세음보살_()()()_

  • 12.07.15 15:07

    관세음보살()

  • 작성자 12.07.15 18:45

    罪無自性從心起 죄는 본래 마음에서 일어나나니
    心若滅是罪亦忘 마음이 사라지면 죄도 그렇네
    罪忘心滅兩俱空 죄와 마음 모두 다 공해진다면
    是卽名爲眞懺悔 비로소 참된 참회 이름하리라....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