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항암 주사를 맞으면서 병원에서 김연아 소식을 들었다. 쇼트에서 그렇게 멋지게 연기해 세계 신기록을 세웠던 피겨의 왕 김연아 선수가 프리 스케이팅에서 세 번이나 넘어졌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하루 전의 쇼트 스케이팅에서 그렇게 멋지고 황홀한 연기를 완벽하게 끝낸 그녀가 그런 실수를 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장면을 눈으로 보지 않고 전해 들었지만 혹 자신과의 싸움에서 진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양궁 선수였던 김진호 선수가 떠올랐다. 오랫동안 아무도 따라올 수 없었던 세계의 양궁 여왕 자리에 있었던 그녀는 1984년 23회 LA올림픽에서 그녀 자신은 물론 모든 언론이며 사람들이 금메달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고향에선 금메달 기념 축제 잔치를 위한 준비를 모두 마치고 LA에서 금메달 소식이 날아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은 빗나가 첫 출전 여고생인 서향순이 금메달을 차지했고, 은메달도 한국 선수 차지였다. 그 때까지 누구의 추종도 불허하고 정상 자리에 있었던 그녀는 3위인 동메달에 그쳐 자신은 물론 기대했던 모두에게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만일 서향순이 금메달을 따지 못했더라면 요란한 잔치 준비는 자칫 망신스러울 수도 있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녀는 훗날 고백했다. "나는 나 자신과의 싸움에 실패했다"고. 그 한 마디에 그녀의 온갖 회한이 담겨 있었다.
오로지 양궁 한 길만을 걸어온 그녀에게 그것은 얼마나 뼈 아픈 후회였을까. 일반 국민이야 한 순간의 실망으로 끝났지만 그녀의 가슴에 깊게 남은 아쉬움은 아마도 그녀의 평생을 지배할 것이다. 은반 위의 여왕인 김연아 선수에게선 제발 그런 회한의 말이 나오지 않기를 소망한다.
라이벌이 없는 김연아 독주 시대에 나올 수 있는 최악의 결과를 우려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김연아 선수는 공식 훈련 과정에서 이전에는 아무 문제점이 없었던 점프에서 실수를 범하는 등 필요 이상의 긴장감을 드러내 그것을 풀어 주기 위해 오서 코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선수에게 관람객들이 주는 심리적 부담감이 얼마나 큰 것인지 보여 주는 사건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다.
김연아 선수는 작년 12월 대한민국 고양에서 열린 그랑프리 파이널전에서 홈 팬들의 지나친 응원에 심한 부담감을 느낀 나머지 일본의 아사다 마오 선수에게 우승을 빼앗겨 그랑프리 파이널 3연패에 실패하고 준우승에 머물러 국내 팬들에게 아쉬움을 남겨 주었다.
그러나 그 아픔을 딛고 지난 3월 세계 선수권에서는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며 당당히 우승해 우리를 다시 한 번 행복하게 해주었다.
김연아 선수는 이번 대회에서 200점대 점수 유지를 이번 대회 목표로 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언론에서 또 다시 세계 신기록의 기대감을 드러냈고, 실제로 쇼트 프로그램에서 세계 기록을 경신하며 그런 기대감이 더욱 증폭되는 분위기 속에서 김연아 선수의 긴장감 역시 높아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 결과 실수를 연발했을 것이다.
자신을 이겨 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더구나 어린 선수에게 그것은 더욱 힘든 일일 것이다.
모든 선수에겐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골프의 황제 타이거 우즈 역시 굴곡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운동이든, 삶이든 가장 큰 적은 항상 외부에 있지 않고 자신의 내부에 있다. 그것을 이겨 내는 것이 승리하는 길이다.
흔히들 운동 중에서 마라톤이 가장 외로운 운동이라고 한다. 42.195km를 달리는 동안 구경꾼도 없이 혼자서 자신과의 긴 싸움을 해야 하는 고독한 질주 마라톤. 그래서 올림픽의 꽃을 마라톤이라 했는지도 모른다.
실수는 만회할 기회를 주는 좋은 것이다. 이번 대회의 실수가 그녀에게는 다시없는 도약의 기회가 되어 주리라 믿는다. 그녀 역시 인터뷰에서 이번 대회에서 많이 배웠다고 했지 않은가.
실수하고도 우승할 수 있을 만큼 라이벌이 없을 정도로 그녀는 이미 내공이 갖추어져 있는 훌륭한 선수다. 관람객이나 심사 위원 등 어느 누구도 그녀의 뛰어난 실력을 의심치 않는다.
대회의 결과를 떠나서 독특한 카리스마 넘치는 실력으로 세계의 빙상을 한 마리 나비처럼 누비는 아름다운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동시대인으로서 이미 충분히 행복하다.
오마이뉴스 김현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