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실한 크리스천 백범 김구의 신앙
1. 김 구 선생 (金九/1876.7.11~1949.6.26)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선생은 사실 진실한 신앙인으로서의 그 모습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본관 안동. 호 백범(白凡). 아명 창암(昌岩). 본명 창수(昌洙). 개명하여 구(龜,九). 법명 원종(圓宗). 초호 연하(蓮下).
황해도 해주 출생.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고, 1911년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형으로 11년 출옥하였다.
이후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3․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이로부터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櫻田門]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33년 난징[南京]에서 장제스[蔣介石]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對)일본전투방책을 협의하고 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으며, 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고 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는 한편,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실시하다가 8․15광복으로 귀국하였는데,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金奎植)과 함께 이끌었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독립운동가로서 김구는 너무 유명하지만 그가 모범적인 신앙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 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있다.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 백범 김구의 신앙
그의 소원은 첫째도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이요 둘째도 자주독립이요 셋째도 자주독립 이라고 했던 선생의 숨겨진 신앙의 모습은 이렇다.
백범 김구 선생은 27살에 기독교에 귀의했으며,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의 여동생인 안신호 여사와 함께 교회학교 교사를 했다. 세월이 흘러 백범 김구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의 주석이 됐을 때도 꾸준히 교회와 주일학교를 운영했다고 한다. 당시 주일학교 교사 중에는 장준하 선생도 있었다. 백범 김구 선생은 1945년 광복으로 귀국한 뒤, 매일 새벽 6시면 자신의 사저인 경교장으로 찾아온 김치선 목사(남대문교회)와 함께 새벽예배를 드렸다. 김 목사는 오전 5시 남대문교회 새벽예배를 마치고 나서 일부러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 주일에는 백범이 남대문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백범 김구 선생은 주일 성수를 소중히 여겼던 크리스천이었기에, 1948년 김일성과의 통일 논의를 위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도 주일이면 어김없이 공산당 치하(평양)에서 예배를 드렸다. 백범 김구 선생은 “평양에서 편안한 여생을 보장하겠다”는 김일성 위원장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조만식 장로를 석방하여 함께 남한으로 가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다.
김구선생님과 어머니 그리고 며느리 최준례의 무덤비석
백범 김구 선생과 가까운 인물들도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의 어머니와 아내(최준례)는 물론이고, 벗인 오주경 선생(전 이화여고 교목)도 신앙의 동지였다는 것.또 백범은 여수 애양원을 직접 방문하는 등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와도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1949년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백범은 손양원 목사의 온정과 자비심에 탄복하고 경의를 표했다. 백범은 당시 기고를 통해 “공산당을 진정으로 이긴 사람은 손양원 목사”라고 존경을 표했다. 이 부분에서 백범 김구 선생은 분명히 공산주의를 반대했다고 강조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